2008년 11월호

전환의 모색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 김동윤 건국대 교수·불문학 aixprce@naver.com

    입력2008-10-29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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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환의 모색

    ‘전환의 모색’ : 장회익·최장집·도정일·김우창, 생각의 나무, 328쪽, 1만5000원.

    2008년 9월 월가(街)의 금융위기로 미국 행정부가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월가를 ‘접수’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리먼 브러더스, AIG 등 세계 최대의 금융회사들이 이미 파산했거나 파산 상태에 놓였다. 하나의 금융위기가 또 다른 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악순환 고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선진 금융공학기법이니 첨단 금융공학이니 하는 것이 모두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입각한 것이고, 이것이 결국 오늘날의 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어놓았다. 이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금융공학기술은 폐기 처분될 처지이고, 공적 임무를 망각한 미국 월가의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은 전면 재검토 대상이 됐다. 작금의 상황에서 문명의 정치학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사유와 성찰의 작업

    세계 금융위기에서 촉발된 불확실성과 위기감은 우리 삶의 양식을 전면적으로 되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문명을 기획하도록 강요한다. 전환의 모색은 바로 사유와 성찰의 작업이다.

    21세기 전환시대의 지적·성찰적 모색은 정치·경제·과학·인문과학을 관통하는 통합적 철학과 전 지구적 감수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의 발언은 추상적인 거대 담론에 머무르지 않으며 생태환경, 여성, 노동, 에너지, 식량, 금융위기의 문제와 결합하여 함께 실천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가고자 하는 진정한 삶과 미래사회의 기획이다.



    새로운 문명의 기획이 복합적이고 통합적인 성찰을 전제로 한다면, 오늘날 학문과 지식의 조건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문과 지식의 조건은 미세한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자본에 철저히 복무하는 수행적 지식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학문과 지식의 생산구조는 거대 관료기구와 신자유주의식 기업 모델을 닮아가고 있다. 오늘날 지식 생산양식의 모델화, 즉 전문화-프로젝트-수익모델화는 기존 학문의 인식론적 바탕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삶과 존재와 같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정교하게 조직된 사회 시스템 속에 작동하는 유일한 원칙은 실용의 수익모델이다. 저마다 경주마처럼 시야가 가려진 채 단기 이익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상황이다. 맹목성을 향한 동력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거의 종교적인 믿음이다. 현재의 삶이 어떻든 간에 이익과 수익이 보장되면 모든 것이 ‘선(善)’이며, 위악적인 것이 정말 악이 될 수 있다는 징표일 것이다. 시장은 신(神)이자 선이며, 지상의 척도다.

    도정일 교수의 글에서 우리는 시장경제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폭력적인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시장주의는 동원체제이고 억압적 기제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추상적 합리성이 구체적인 삶을 대체하고 있다. 시장경제가 만들고 추동하는 경쟁과 경쟁력의 서사는 시대정신의 스토리텔링이다.

    창조성, 수월성, 행복 담론 등 시대의 키워드도 바로 경쟁력 담론의 종속변수일 뿐이다. 무한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확연히 구별하는 척도이며 희생제의적이고 폭력적이다. 누군가 탈락하고 희생돼야 하므로 폭력의 서사성을 지닌다.

    신자유주의 시장 이데올로기는 삶 자체를 억압하고 무시하며 공포의 서사를 낳는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구도는 바로 모방과 선망의 서사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20대 80의 사회’의 승자를 모방하라, 이것이 시대의 모럴이자 명령이다. 개인은 경쟁의 가파른 사닥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고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의 논리를 깊숙이 내면화한다. 치열한 사유나 논의는 실종되고 선망의 욕망이 넘실거린다. 열정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자유주의 이윤추구적 파토스나 다름 없다.

    따라서 행복의 조건인 ‘지금 여기의 삶’은 저당 잡히고 미래로 자꾸만 던져진다. ‘프로젝트’(pro-ject 미래로 던지다)가 이 시대의 중요한 키워드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카르페 디엠’이 그토록 호소력을 지니는 것도 현실이 그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국에서 불가능하다.

    ‘하루’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음미할 거룩한 시간은 매우 럭셔리하다. 삶의 시간은 둥글고 온전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지극히 파편화되어 있다. 마치 아이젠슈타인의 변증법적 몽타주 기법을 보는 듯하다. 한국에서의 삶은 광고와 매우 닮아 있다. 선정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변증법적으로 판타스틱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판타지 영상물의 범람은 바로 이 시대의 징후적 현상이다.

    ‘민주주의 문화’의 절대빈곤

    삶의 가치, 존재의 의미라는 어휘는 고어(古語)화하고 있다. 시간이 극도로 잘게 쪼개지고 기호화되며 희소한 상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의 삶의 고귀성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 삶의 고귀성과 삶의 질을 지키는 일이 성장과 실용의 논리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사회과학의 어떠한 담론도 미래에 대한 비전은 물론, 우리 삶의 세계에 대한 의미 있는 해석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김우창 교수의 발언은 궁핍한 시대에 삶의 모습과 지향점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일상의 구체적 감각과 감수성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심미적 이성은 구체와 전체의 변증법적 삶의 기획이다. 개인은 타자와의 매개를 통해 완성되므로 심미성 안에 내장된 이성의 논리는 정치적인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최장집 교수는 삶의 정치성을 민주주의 시대의 제도적 정치성과 연결시켜 사유한다. 87체제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제도적 형식성을 획득했으나 이후 집권세력들이 거의 무반성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용함으로써 노동의 질과 조건을 악화시켜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민주주의 이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로서, 삶의 가치 빈곤과 노동조건의 악화를 가장 큰 요인으로 꼽고 있다. 이러한 최 교수의 정치학적 고찰은 도정일 교수의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 비판과 자연스레 연결되며, 도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와 미성숙이 ‘민주주의 문화’의 절대빈곤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핵심 요소들은 인문적 가치와 관계된 것들이다. 즉 민주 공동체 구성의 불가결한 요소들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자기형성과 반성능력, 내면적 성찰성, 그리고 이로부터 형성되는 신뢰성, 호혜성, 환대와 우정, 공생공락의 삶 등으로 한국사회에 결정적으로 궁핍한 가치들이다. 결국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맥락도 민주공동체의 가치를 원천적으로 불모화시키기 때문이다.

    사유의 지평을 지구적 환경의 상황으로 연장시킨다면, 그것은 장구한 세월 동안 형성된 ‘온 생명’에 대한 몰이해와, 더 나아가 ‘온 생명’의 파괴가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하나의 ‘낱 생명’에 불과한 인간이 무수한 ‘낱 생명’과의 조화로운 공생공락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낱 생명’의 오만과 야만성은 이제 지구 ‘온 생명’을 크게 위협하게 되었고, 결국 물리학적 분석은 윤리와 가치의 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윤리적 실천을 절박하게 요구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인문적 사유는 결코 공허한 이야기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즉각 실천해야 할 행동강령이다.

    전환의 모색은 세계 지성사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될 성질의 것이다. 오랫동안 인류의 지혜를 온축해온 인문정신은 한국 지성으로 하여금 상아탑 안주나 분과학문의 협애한 틀 속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 사회와 문명의 위기 앞에서 고민하는 성찰적 지식인이 매우 드문 한국 사회에서 ‘전환의 모색’은 뜻 깊은 사건이며, 이것은 커다란 인문과학적 성취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은 진정한 자기비판적 지성이 아니라 대부분 권력으로 행사되고 명성을 얻는 도구로 전락된다. 지식이 프로젝트-수익모델화된 대학과 지식사회의 상황, ‘지식인의 죽음’에 맞딱뜨린 상황에서 외롭고 고독한 자유 성찰적 지식인은 이미 그 존재 공간을 상실했다.

    그러나 지식인의 비판적 발언과 내면적 성찰성이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제고하고 지적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식인의 자기성찰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불가능한 사회는 생명력을 잃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전환의 모색의 바탕을 이루는 성찰적이고 대안적인 인문정신은 당장 빵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희망마저 꿈꿀 수 없는 시대에 삶은 여전히 살 만하다는 삶의 가치와 경건성을 깨우쳐준다.

    삶과 문명의 인문적 기획은 삶 세계를 거대담론으로 추상화, 관념화, 프로젝트화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 놓이게 한다.

    전환의 모색은 바로 무한성장 신화를 만들어낸 한국 사회의 총체적 문제점과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고 있는 문명에 대한 인문적 성찰이다.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학자들(장회익, 김우창, 도정일, 최장집 교수)의 한국 사회 및 인류 문명에 대한 진단과 발언은, 서구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 그리고 대안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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