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이응로 화백과 작곡가 윤이상. ‘동베를린 간첩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두 사람에 대해 예술적 평가보다는 지나치게 정치화하고 더러는 신화화하는 경향까지 있다. 두 예술가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최정호 동아일보 객원 대기자가 ‘동베를린 간첩 사건’에 휘말리기 이전인 1960년대 이응로와 윤이상의 순전(純全)한 모습을 회고했다.
문화적으로는 1950년대에 음악적 신동들이 세계 연주 무대에 데뷔한 데 이어, 60년대에는 한국 출신의 창작예술가들도 비로소 세계에 그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문학에서는 리처드 김(김은국)의 영문 소설 ‘순교자’가 미국과 유럽의 독서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다른 한편에선 그에 훨씬 앞서 미술과 음악세계를 크로스오버하는 아방가르드 백남준의 도발적인 행위예술이 미국과 유럽, 대서양 양안을 오가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응로(李應魯·1904~1989)와 윤이상(尹伊桑·1917~1995)은 이러한 1960년대에 저마다 안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국의 예술가로 유럽에서 대성한 선구자들이다. 불행히도 이들이 유럽에서 한 활동은 1960년대 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사건’으로 갑자기 중단되고 만다. 물론 두 사람은 그 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풀려나 다시 프랑스와 독일로 돌아가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어떤 면에서 이 ‘사건’은 예술의 문밖에 있는 일반인에게까지 두 예술가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두 예술가의 존재를 지나치게 ‘정치화’하고, 더러는 ‘신화화’하는 경향까지 낳은 듯도 싶다. 나는 두 예술가가 정치적 사건에 말려들기 이전에 순전(純全)한 예술가로서 만났고, 그들의 존재와 유럽에서의 활약상을 1960년대 초부터 신문보도를 통해 여러 차례 국내에 알려왔던 사람이다.
나는 두 사람 모두 좋은 정치가가 아니라 좋은 예술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거나 관여했다면 그것은 매우 서툰 풋내기의 그것이었다고 본다. 아래 글은 1960년대 그 ‘사건’이 터지기 이전에 정치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두 예술가의 일상적인 모습을 내 사사로운 추억을 더듬어 증언해보고자 한 것이다.
▼ ‘서예 화가’ 이응로
1961년 가을 고암(顧菴) 이응로 화백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당시 나는 서독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다. 그 무렵 적어둔 내 글에는 고암과 해후한 배경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군무도
과연 파리에 내가 갑자기 내던져진 첫날은 축제일의 미아(迷兒)처럼 고독과 초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묘망(渺茫)한 대도시 파리는 도대체 ‘일별(一瞥)의 대상’은 아니다. 파리는 그를 보려는 사람을 집어삼키고 만다. 이 끝없는 파리의 하늘밑에서 뜻밖에 이응로 화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요행이었다.”(한국일보, 1961년 11월5일자)
나는 그때 지하철을 타기 위해 막 계단을 내려가려 하던 참이었다. 그때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중늙은이가 계단을 올라오면서 나를 보더니 “혹시 한국 분이 아니셔?” 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예” 하는 대답에 무척이나 안심이 된 듯 중늙은이는 “아이 반갑구려, 나 이응로란 사람이오” 하고 자기소개부터 해왔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이응로 선생님을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
“어허, 나를 아세요?”
“그럼요, 저 서울에서 선생님의 도독전(渡獨展)도 구경한 걸요.”
1958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주한서독공사관의 헤르츠 공사는 미술애호가로 소문나 있었다. 그 헤르츠 박사의 주선으로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초청 개인전을 하기 위해 이 화백이 출국하기 전 서울 미도파백화점 5층 화랑에선 ‘고암 도독 기념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이 전시회는 우리들 일부 젊은이에겐 두 가지 화제를 뿌리고 있어 인기였다. 첫째는 ‘동양화의 경계를 벗어난 동양화’란 점에서. 둘째는 쩨쩨하게 그림을 팔진 않겠다는 ‘작품 비매(非賣)전시회’란 점에서였다.
그처럼 한국에선 유명 인사인 고암도 고국을 떠난 뒤 유럽에서는 무명 인사로서 외로운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58년 독일에서 약속된 전시회가 모두 끝난 뒤 고암은 모처럼 유럽에 어렵게 건너왔으니 그래도 귀국 전에 ‘미술의 서울’ 파리만은 들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파리를 찾아온 고암은 수많은 화랑에 들러 세계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고 또한 수많은 화상에게 자기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건 헛수고였다. 그러다 한 화상이 고암의 작품을 보고 “당신은 유럽에서 성공할 사람이오”라고 말해주더라는 것이다.
간판쟁이
고암은 그 한마디에 주박(呪縛)된 듯 귀국을 포기하고 그냥 무작정 파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무런 호구지책도 없이, 아무 기댈 사람이라곤 없이.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유럽에서 성공할’ 날만을 기대하며.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하는 무명화가의 세월이 있었다. 따라서 그 무렵엔 그의 이름을 알아주는 누구를 만나도 반갑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암은 행선지를 포기하고 금방 나와 말벗이 되었다.
“그럼 고향은 어디지?”
“전주예요.”
“아, 그려, 나도 전주에서 산 일이 있어 전주를 잘 알지. 댁은?”
“풍남동이에요.”
그리고 두어 마디 주고받자 이번에는 고암이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었다.
“알지, 알지, 내가 자네 집에도 가끔 들렀어. 자네 집 사랑채에서 한묵회(翰墨會)가 열릴 때 나는 아직 한참 젊은 나이였지만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가끔 불러주셨지.”
“전주에서 뭘 하셨는데요?”
“돈 벌었지. 일제시대에 전북 도립극장의 영화 간판 그렸어.”
이것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국 화단의 중진이 젊은 시절에 내 고향에서 영화관의 광고간판을 그린 ‘페인트장이’였다니.
“암, 내 20대엔 뼁끼쟁이(페인트장이)를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서른이 넘어 비로소 일본에 가서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 桂月) 선생을 사사(師事)했어.”
말년의 이응로 화백.
20세 전후해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게서 동양화를 배운 고암은 3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혼고(本鄕)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배웠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이미 20대의 거의 전 기간에 수묵화 붓만이 아니라 페인트 붓을 들고 간판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력은 장차 이응로의 미술이 동서양화의 경계를 크로스오버하며 모든 미술기법과 수단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기초체험이 되지 않았나 나는 생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간판쟁이’로서 지방 영화관에서 수년 동안 일했다는 고암의 전력은 직인(職人·아티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예인(藝人·아티스트)인 척 허세를 부리는 (유럽은 그만두고 중국, 일본의 화단에 견줘도 기초가 부실한 채 지나치게 설익은 예인들이 판을 치는) 한국 미술계의 현실을 볼 때도 그 사실을 무시하거나 숨길 일이 아니라 오히려 크게 밝혀서 널리 알려야 할 고암의 전기 데이터라 나는 믿고 있다.
고향 집 사랑방의 ‘한묵회’ 얘기와 고향 영화관의 간판쟁이 얘기는 고암과 나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초면의 두 사람인데도 금방 친숙한 사이로 만들어버렸다.
“뒤 엉 카페 실부 프레”
“알고 보니 남이 아니구먼. 우리 어디 가서 한잔하세.”
이렇게 해서 둘이 찾아간 곳이 상 제르망 데 프레 교회 앞의 ‘카페 드 플뢰르’였다. 1920년대에 고학생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단골로 드나들면서 외상 술값을 떼어먹고 도망간 뒤 30년 후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로 제네바회담에 참석한 기회에 빚을 갚았다는 카페. 1940년대 말에는 장 폴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 작가들이 둔(屯)을 치고 있어 ‘라이프’와 잡지 ‘신천지(新天地)’를 통해서 한국에도 소개된 유명한 카페였다. 고암은 나를 그리로 안내하면서 차를 주문했다. 그것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고암의 전무후무한 프랑스 말이었다.
“갸르송, 뒤 엉 카페 실부 프레!”
우리말로 옮기자면 ‘여보, 두 개의 커피 한잔을 주오!’라고나 해야 할까. 아마도 고암은 파리 시내를 거닐다 지쳐서 혼자 카페에 들러 차를 주문할 때를 대비해서 부인한테 ‘엉 카페 실부 프레!’란 말을 배워둔 모양이었다. 거기에 셈을 하는 숫자 엉, 뒤, 트롸 (하나, 둘, 셋)도 익혀놓았기에 ‘두 개의 커피 한잔을 주오!’라는 절묘한 응용작문을 즉석에서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어떻든 충청도 악센트의 고암식 프랑스 말을 ‘갸르송’은 금방 알아들었으니 대견한 일일 수밖에. 나는 혼자서 속으로 웃었다.
카페에서 고암은 그동안 유럽에서 고생한 얘기를 해주었다. 일정한 수입도, 수입원도, 수입의 전망도 없이 아무 기댈 곳조차 없는 낯선 유럽 땅에서 무명화가로 떠돌고 있으니 삼시 세끼 끼니 갈망도 못하는 형편에 그림 그릴 물감을 살 돈은 더욱 없었다. 그러나 그림은 계속해야겠고 물감은 있어야 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주저앉아버릴, 앞이 꽉 막혀버린 그런 상황에서도 고암은 주저앉지 않았다. 메트로폴리스 파리에는 지금도 우리나라 시골의 오일장처럼 일주일에 한두 번 시내 광장 이곳저곳에 농민들이 야채나 과일, 치즈 등을 직접 차에 싣고 나와서 직판하는 오전 장이 선다.
점심때가 지나 파장이 되면 여기저기 물건을 싸주고 난 신문 잡지 부스러기들이 땅바닥에 지저분하게 깔려 사람들이 그걸 밟고 지나간다. 그림 그릴 물감을 살 형편도 못됐던 고암은 그 종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파리마치’와 같이 컬러로 인쇄된 잡지의 종이 부스러기들을 색깔 별로 모아 그걸 풀에 이겨 나무 판에 붙여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갔다.
궁하면 통한다는 이치 그대로다. 무명화가 고암의 이 콜라주(collage) 작품이 파리의 이탈리아 출신 큰 화상 화케티의 눈에 든 것이다. 화케티 화랑은 이미 1950년대 초에 앵포르멜(비구상) 미술운동을 선구한 파리 굴지의 전위 미술화랑이었다. 화케티씨는 곧바로 이응로 화백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파리에서 고암의 고생은 이제 끝난 것이다.
서독의 웬만한 중소 도시 전체 인구수와 맞먹는 10만 이상을 헤아린다는 파리의 무명 화가들이 화상을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로 알려져 있다. 화상과 계약이 됨으로써 화가는 비로소 파리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때부터 화랑은 화가의 생활비를 대주고 그림의 판로도 개척해주며 팔린 그림은 그 금액의 일부를 화가에게 돌려준다. 화가는 이제 좋은 그림만 그리면 되고 장사는 온통 화랑에서 대행한다. 그림 그린 사람이 그림을 사는 돈 많은 사람 앞에 굽실거리며 ‘언짢은 양심’을 욕보일 필요는 없게 된 것이다.
무슈 리
내가 파리의 어느 지하철 입구에서 우연히 고암을 만난 1961년 가을은 고암이 이처럼 하늘의 별따기 같은 화상과 계약을 맺고 파리에서 무명시대의 고생을 마치고 막 상승기류를 타기 시작했을 때였다. 고암도 이 계약 얘기를 해주면서 스스로 여간 대견해 하지 않은 눈치였다. 카페 뒤 플뢰르에서 일어선 우리는 고암의 제안에 따라 화케티 화랑에 들렀다. 화케티씨는 반가이 맞으며 에네르깃슈한(정력이 넘치는) 고암의 콜라주 작품 몇 점을 자기가 사랑하는 작품이라면서 내게 보여주었다.
기분이 무척 좋아진 고암은 그날 밤 나를 그르넬르가 70번지에 있는 그의 사저로 초대해 역시 ‘정력이 넘치는’ 고기요리의 만찬을 대접해주었다. 그러면서 화가끼리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는 화실에도 안내해주면서 완성 미완성의 수많은 작품도 보여주었다. 60을 눈앞에 둔 노(老)동양화가가 파리에 와서 새로이 추상적인 콜라주 작품을 시작한 상춘(常春)의 정열과 끊임없는 모험정신에 나는 그냥 탄복하고 말았다고 수기에 적어 놓고 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 1966년 봄이었다. 파리 개선문에서 탄 지하철을 퐁 드 세브르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센 강가에는 개나리가 철이고 군데군데 하얀 목련화가 파란 하늘에 늘어선 샹들리에처럼 화사했다. 파리 시내에서 장보기를 하고 돌아오는 주말의 만원버스는 뮈동 고개를 넘기에 숨이 가빴다.
뮈동은 조각예술의 거장 로댕이 일하던 아틀리에가 있는 곳이다. 세브르 동리 어귀에서 버스를 내려 길을 물으러 찬가게에 들렀더니 묻기도 전에 “아, 무슈 리를 찾으시는군” 하며 길을 대준다. 이 화백을 모르는 동리사람이 없다는 소문대로다.
‘동양미술학원’을 겸하고 있는 세브르의 햇볕 다양한 저택은 파리 시내 제7구의 옛 셋집에 비하면 ‘빌라’라서 좋다. 학원은 문을 연 지 1년 만에 문하생이 65명이나 되었다. 전 유럽의 유명대학에 있는 한국어학과는 학과 개설 10년에 아직도 청강생 10여 명을 넘는 곳이 별로 없다.
이 화백의 문하생 중에는 디종 시에서 파리까지 비행기로 날아와 문을 두드리는 부호도 있다고 한다. 학원은 현재 소르본 대학에서 멀지 않은 시내 생 제르망에 분원까지 두고 있다고 한다. 내가 세브르에 찾아간 토요일엔 마침 파리 주재 브라질대사관에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수상한 이 화백 앞으로 상품이 내도했다는 편지가 와 있었다.
이응로 화백은 묵화에 관한 한 피카소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자신했다. 사진은 피카소의 투우 묵화 연작.
이러한 세속적인 성공, 명성, 포상에 아랑곳없이 이 화백의 외면적인 변화의 안에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변하지 않은 모습이 있다. 무명시대, 유명시대를 뚫고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그의 상수(常數)는 그러나 성공의 변수(變數)이상으로 일화적(逸話的)이다.
첫째, 도불(渡佛) 10년을 맞은 이 화백은 그가 살고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발표하고 그림을 가르치는 유럽 땅의 언어에 예나 지금이나 전혀 벙어리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화백 작품에 대한 유럽 화단의 인정과 평가는 준엄하리만큼 순수한 ‘미술의 언어’, 오직 ‘작품 그 자체’만으로써 이룩되었을 뿐 그 외 어떤 보조수단에도 힘입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그는 일상의 언어, 시정(市井)의 언어, 흥정의 언어, 교제의 언어, 심지어는 해석과 설명의 언어까지 일절 배제한 채 다만 ‘조형의 언어’만으로 유럽의 화단과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지름길로 교통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일상생활에선 불평과 오해의 희비극을 가져오곤 했다.
화단과 평단의 사람들이 이 화백의 작품 앞으로 보내온 뭇 ‘사랑의 고백’에 대해서도 이 화백은 귀머거리다. 그러나 그림은 국어의 국경을 초월하는 ‘세계의 언어’다. 그래서 이 화백은 해외의 언어, 외국어의 벙어리인 채로 누구보다 앞서 한국의 제1급 ‘세계인’이 되고 있다.
불변의 상수
두 번째 ‘불변’의 상수는 나이에 아랑곳없는 그의 부지런함과 일에 대한 정열이다. 이 화백이 젊었을 때 10년 넘어 페인트장이로 일하다 30이 다 되어서야 미술학교에 입학한 일화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주위 사람들, 특히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간판쟁이의 과거가 창피한 것처럼 쉬쉬하고 있으나 이 화백 자신은 ‘장이(匠人)’로서의 과거를 언제나 자랑하고 있다. 바로 뮈동의 거장(巨匠) 로댕과 마찬가지로 이 화백 또한 예술가(아티스트)가 되기 앞서 부지런한 한 직인(아티잔)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진갑을 넘은 나이에도 코르덴 바지 차림의 이 화백을 따라 아틀리에로 쓰고 있는 지하실 창고에 들어가봤다. 문자 그대로 그 ‘작업장’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미술’이기 이전에 ‘노동’이라는 실감을 더욱 굳게 해준다. 흔히 동양화의 고객들이 생각하듯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풍류, 또는 영감의 신선놀이가 아니다. 이른 봄의 땅 밑 냉기가 젊은 몸에도 으쓱한 지하의 공방에서 겨울추위를 어떻게 배겨내시느냐 물으니 “추울 시간 여유가 어디 있어”하는 한마디 대답이었다.
공방에는 미완성의 목판화 무더기, 완성을 목전에 두고 익은 된장처럼 부글부글 닳고 있는 콜라주 작품들, 혹은 조형의 끝이 닫는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나무둥치, 나무뿌리들, 그 모두가 창조 이전의 혼돈 속에서 작가의 손을 부르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 화백은 근래에는 회화, 판화 외에 조각, 도자기 제작에도 열중하고 있다. 작품사진도 스스로 촬영, 현상, 인화하고 있다.
특히 도기(陶器) 제작은 현재 이 화백이 가장 큰 정열을 쏟고 있는 분야인 듯싶다. 고려청자, 이조백자의 걸작을 이마에 땀방울로 구워내던 무명의 장인들 이야기를 할 때 이 화백의 두 볼은 더욱 붉게 타올랐다.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자랑만으로 그친단 말이오. 선대의 유산만을 팔아먹고 사는 탕아(蕩兒)로 그친단 말이오. 우리 스스로 유산을 창작해야지. 고려자기 이조자기의 걸작이 어찌 그 겉모양의 모조만으로써 재생된다는 말이오. 눈에 안 보이는 그 장인들의 정신을 배워야지. 나의 전 작품은 묵화나 콜라주나, 지금 하고 있는 판화나 조각이나 이조백자를 그의 정신에서 배워 파리에, 세계에, 현대에 들춰 보여주려는 노력이오.’
이 화백의 말은 공장(工匠)의 손처럼 거칠다. 그러나 이 거친 손으로 주무르고 매만진 그의 첫 도기작품들의 살결은 이조백자의 그것처럼 부드럽고 기름이 흐르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머지않아 한국의 고귀한 얼굴을 세계에 알림에 있어 고국에서 멀리 떠난 이 한 한국인에게 많은 것을 빚지게 될 것이다.
피카소의 묵화
그 뒤에도 몇 차례 고암을 만나러 세브르에 찾아갔다. 한번은 베를린에서 서독으로 나가 쾰른의 한 미술관에서 백지에 묵필(墨筆)로 크로키(croquis· 速寫)한 피카소의 투우도(鬪牛圖) 연작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를 고암에게 했다가 야단을 맞은 일이 있다.
“아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백지 위에 그리는 묵화는 내가 피카소보다 단연 낫지! 피카소의 재주인들 어찌 1000여 년 동안 붓을 놀린 우리 동양의 수묵화 전통을 따라온단 말인가. 묵필화는 피카소도 절대 나만 못하네!”
나는 고암의 하도 결연한 말투에 눌려 더 이상 말대꾸도 못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반 년이 지났을까. 1966년 말이었다. 베를린의 도이치 오페라 서울 초청 공연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는 도중에 파리에 들러 다시 세브르의 이응로 화백을 재회했다. 당시 파리에 기착한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한 세기에 한번쯤 얻어 걸릴까말까 하는 큰 전시회를 구경하겠다는 목적이 그것이다. 피카소 대전시회. 한 사람의 생존 화가를 위한 전시회로서는 모든 규모에서 세계미술사상 전무후무한 보기가 되리라 하던 그 전시회의 공식명칭은 ‘파블로 피카소 송(頌)’(Hommage a Pablo Picasso).
문자추상화. 1973년작, 66×126㎝
이미 구경을 했다는 이 화백은 나를 위해 다시 파리 시내에 나와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의 두 전시장을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때처럼 겸손해진 이응로 화백을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는 것을 뒤미처 깨달았다. 이 화백은 새 전시실에 들어갈 때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작품을, 이렇게 전혀 다른 작품을” 하고 내리 감탄과 탄식을 연발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화백은 나랑 같이 간 그때가 처음이 아니요, 이미 몇 차례 전시회를 구경했다는 것이다.
“묵화는 피카소가 절대 나만 못하네” 하던 이 화백은 오간데 없었다. 나는 이처럼 갑자기 겸손해진 이 화백을 보는 것이 또 좋았다. 그러나 그렇게 겸손한 사람으로만 머물 이 화백은 물론 아니다. 그것을 결국 그는 보여주었고 머지않아 우리도 그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 화백의 삶에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1967년의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사건’이다. 나로서 매우 난감했던 것은 내가 그동안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예술가로 우리나라의 위신을 높이는 데 기여한 인물로 여러 차례 신문에 크게 보도했던 파리의 이응로 화백과 베를린의 윤이상 작곡가가 다 이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검거됐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건의 배경 배후를 내 나름대로 알고는 있으나 여기엔 그를 밝힐 자리가 아니기에 덮어둔다.
‘서예 화가’
한 가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이응로 화백은 그 사건의 이전이나 이후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철두철미 비정치적인 장이(匠人)의 삶을 일관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점에서 그는 엉뚱하게 정치적인 조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곧잘 정치적 참여도 한 피카소와는 달리) 밑바닥에서부터의 장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작품의 고객이 누구고 자기 그림의 시장이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비정치적인 고암은 스스로 그를 의식했든 안 했든 어디까지나 서방세계의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서방세계의 예술이요, 그의 작품시장도 오직 서방세계에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베를린 사건으로 강제 귀국된 연루자들이 모두 다 풀려나자 많은 고초를 겪은 이응로 화백도 프랑스로 돌아갔다.
1972년 말 중앙일보사의 논설위원으로 일하던 나는 새해부터 잡지의 판형을 바꿀 ‘월간중앙’ 주간을 잠시 겸직하게 됐다. 나는 이때 파리에 연락해서 고암에게 1년 동안 잡지의 표지화를 그려주시라고 부탁드렸다. 그때 한참 고암이 열중하던 문자 추상 그림이 이렇게 해서 잡지 표지화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 뒤에도 고암은 변신을 거듭하고 새로운 작풍을 개척해나가는 정력적인 작업을 그치지 않았다. 도처에서 전시회도 개최되고 그때마다 많은 화제를 뿌렸다. 그러한 전시회의 압권이라 할 것은 아무래도 1989년 1월1일부터 2월26일까지 두 달에 걸쳐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된 대전시회다.
1960년 파리생활 초기의 콜라주 작품부터 1980년대 말의 수묵화에 이르기까지 30년에 걸친 작품들이 전시된 이 호암갤러리전은 전시작품 수에 있어 최대의 전시회였을 뿐만 아니라 고암의 모든 회화 장르와 작풍을 알아보는 데에도 더할 나위 없이 포괄적인 전시회였다. 게다가 전람회가 열린 후 불과 열흘 만에 파리에서 날아든 고암 부음은 뜻하지 않게 이 전시회를 고암 예술의 첫 회고전 성격까지 갖도록 했다.
나 개인적으로 이 전시회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은 것은 1984년경부터 쏟아져 나온 고암 말년의 인물군상 및 군무도. 하얀 한지에 수백 수천의 인물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춤을 추고 하는 이 엄청난 군상의 수묵화는 ‘서예(書藝)화가’ 이응로 예술의 정점이 아닌가 여겨졌다. 되물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운필(運筆)의 운명적 일회성, 빛도 빛깔도 없는 수묵의 음영(陰影) 속에서 빚어지는 자유분방한 붓놀림의 역동성과 율동, 그것이 백지에 번지며 피어오르는 형상의 기운생동(氣韻生動). 그렇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1000여 년 동안 종이에 붓을 놀려본 우리의 전통 속에서 그 서예의 기법으로 전통적인 산수화가 아니라 현대적인 회화세계에 과감하게 뛰어든 고암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백지 위에 그리는 묵화는 내가 피카소보다 단연 낫지” 하던 고암. 그가 1960년대에 하던 장담을 나는 그가 타계한 1989년에 열린 호암갤러리전의 군무도 앞에서 비로소 온전히 설득당하고 혼자서 추인(追認)하게 됐다.
▼ ‘상처 입은 용’ 윤이상
한국에서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에서도 몇 년 근무한 뒤 유학길에 오른 내가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베를린으로 이주했을 때엔 이미 30이 가까운 나이였다. 에누리 없는 만학도(晩學徒)였다. 그에 비해 고교를 마치고 곧 대학에 들어온 독일 대학생들은 대부분 20대의 젊은이. 그네들과 사귀면서 가까운 친구가 되면 서로 그네들 식으로 ‘너(Du)’라 부르며 허교(許交)를 한다.
거의 10년쯤 연하인 그러한 독일 친구로부터 어느날 “너 이상 아니?” 하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처음엔 자못 놀라면서 “알고말고. 이상이란 작가를 모르는 한국 대학생이 어디 있어! 아니 그보다도 네가 그 한국 작가를 어떻게 알지?” 하고 되물었다. 그런 질문이 한참 오고 간 뒤에야 비로소 나는 문제의 인물이 작고한 한국의 시인 ‘이상(李箱)’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국의 음악가 ‘이상(伊桑) 윤’임을 알아차렸다.
지금은 두 ‘이상’ 중 어느 쪽이 더 유명한지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시인 이상에 비해 작곡가 이상은 거의 무명성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그러한 윤이상(1917~1995)을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만큼 유명인사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물론 세칭 ‘동베를린 간첩사건’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미 음악이나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멀리, 그리고 오래 밖에 나가 있던 윤이상을 널리 알리는 데엔 나 자신도 작지 않은 기여를 했다. 1960년대 중반쯤부터 무명의 작곡가 윤이상이 유럽의 음악계에 점차 이름을 얻게 되는 매우 생산적인 ‘이륙(離陸) 비상(飛翔)의 시기’를 나는 그와 같이 베를린에서 살며 가까이 지켜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서너 차례 국내의 일간신문에 그 활동상을 보도하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윤이상 상(像)은 지나치게 정치화하고 때로는 신비화하기도 하는 왜곡을 보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얘기는 곧잘 ‘신화’가 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경험한다. 그건 그것대로 나쁠 것이 없다. 신화는 국가공동체의 유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공동체, 아니 무릇 인간공동체의 유지에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언제나 단순한 인간 ‘현실’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말이다.
나는 아래 글에서 우리 시대의 유명한 작곡가 윤이상에 대해서 내가 그를 가까이 할 수 있었던 1960년대의 베를린 시절을 중심으로 오직 내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한 증언해두고자 한다. 지나친 훼예(毁譽)는 삼가고 탈(脫)정치화, 탈신비화한 음악가 윤이상의, 되도록이면 인간적인 일상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그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늦깎이 유학
내가 윤이상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 서울 명동의 시공관에서 개최된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발표회 때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발표회가 끝난 뒤 연세대의 오화섭, 최석규 교수와 함께 명동 어느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두 분의 즉석 작품비평을 엿들은 기억이 난다. 화제의 주인공은 단연 김동진(‘가고파’의 작곡가). 다만 윤이상은 그때부터 왠지 아름다운 이름이라 느껴져 내 뇌리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프랑스로 건너간 최석규 교수로부터 파리의 윤이상씨에 관한 소식을 편지로 얻어들은 기억이 있다. 베를린의 젊은 독일 대학생이 “너 이상 아니?”하는 질문을 받고 두세 마디 오고 간 뒤에 ‘이상’이 ‘윤이상’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젊은 독일 학생들 가운데 한국에서 이미 대학 강단에도 섰던 중년의 음악가를 ‘이상’이란 이름으로 부른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내가 윤이상을 평가할 때 그의 첫 번째 비범한 장점으로 치부하는 이력 사항이다. 그 비범한 장점이란 다른 게 아니다. 미래를 위하여 과거를 묻어버리고 언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다.
윤이상은 유럽으로 건너온 뒤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파고드는 데 과거 한국의 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경력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교수 경력을 가졌던 과거를 묻어버리고 베를린 음악대학에 다시 학생으로 입학해 보리스 블라하 (Boris Blacher· 1903~1975) 등의 교수 밑에서 작곡 공부를 새로 시작한 것이다.
1957년 베를린 음대에 입학하기 전 윤이상은 1956년 유럽에 건너온 첫 기항지 파리에서 1년을 유학했으나 그곳 학풍이 너무 보수적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독일로 건너왔다는 얘기를 나는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일이 있다. 유럽으로 건너올 때 그는 한국 나이로 40이었으나 가족을 떼어놓고 혈혈단신이었다.
2005년 열린 윤이상 10주기 추모 음악제 광경.
1965년 자신의 첫 오페라 작품 ‘류퉁의 꿈’ 초연 때 단원들과 이야기하는 윤이상.
베를린으로 다시 이사 온 후 윤이상은 당시 열 명 남짓의 교포사회에선 단연 가장 나이 많은 연장자여서 우리는 그를 ‘윤 선생’이라고 불렀다(이 글에서도 앞으로는 그렇게 부른다). 부인과 함께 서베를린 시 남쪽의 고급 주택가 달렘의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 반지하층에 전세 든 윤 선생 댁엔 나도 베를린의 당시 많지 않던 교포 유학생과 함께 자주 초대받곤 했다.
깻잎장아찌
다만 윤 선생 댁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나와선 나(와 동행한 친구)는 언제나 조금은 불만이었다. 왜냐 하니 당시 30대 초반의 우리는 단연 육식파였는데 경남 바닷가 출신인 윤 선생 내외(윤이상은 통영, 부인은 부산)의 식성은 해물 위주라서 손님을 초대한 밥상도 항상 생선이 메인 요리였다. 당시 독일은 30대 초반의 나와 마찬가지로 아직 해산물을 먹을 줄 모르던 ‘식도락 미개(未開)시대’ 때라 가게의 생선 값은 무척이나 쌌다. 그래서 달렘의 만찬에 초대받고 돌아오면 우리는 ‘싸구려 저녁 대접’을 받았다고 웃곤 했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식탁의 기억으로는 이따금 우리를 초대한 자리에 아마도 통영에서 부친 물건인 듯싶은 시커멓고 퀴퀴한 무슨 이파리를 꺼내 든 주인이 “미안하지만 이건 나 혼자 먹어야겠네” 하고 정말 독식하는 것이었다. 그건 그때만 해도 나는 먹으라고 주어도 사양했을 성싶은 깻잎장아찌였다. 20대에 유학을 온 사람과 40이 다 돼 유럽에 건너온 사람의 식성 차이일까. 나는 윤 선생의 깻잎장아찌에 대한 애착이 당시엔 무척 기묘하게만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면 음악에 관해서, 특히 생소한 ‘현대음악’에 관해서 많은 얘기를 듣고 또 묻곤 하였다. 내 눈을 열어주는, 아니 내 귀를 열어주는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건 또한 윤 선생이 아무 거리낌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음악적, 예술적 그리고 인간적 기호와 호오(好惡)를 듣는 자리이기도 했다.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베베른 등 신음악의 세계를 개척한 비엔나 학파 이외에 그들로부터 비켜서 있던 스트라빈스키를 당시 윤 선생은 특히 추앙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댁에서 들은 음반으론 윤 선생이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라 우겨 절대 양보하지 않던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 외엔 무엇보다도 스트라빈스키의 화려한 음색의 오케스트라 작품 ‘야앵(夜鶯)의 노래’를 가장 자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조수 로버트 크라프트가 쓴 ‘스트라빈스키와의 대화’를 읽어본 것도 윤 선생이 책을 빌려주어서였다.
작곡계의 동시대인 중에서는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를 다소 시샘하는 듯한 말을 듣곤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 heinz Stockhausen)과 함께 전후 서독 음악을 대표하는 헨체는 내가 베를린에 체재하는 동안에만도 도이치 오페라가 두개의 대형 오페라(‘젊은 애인을 위한 애가’ ‘젊은 귀하신 몸’)의 작곡을 위촉해 무대에 올렸고 베를린 필하모니에선 이틀에 걸쳐 헨체의 교향곡 다섯 편 전곡을 연주하기도 했으니 시샘할 만도 했다. 윤 선생은 전후의 작곡가 중에 누구를 특히 평가하느냐는 내 질문에는 스트라빈스키가 폴란드의 펜데레츠키(Krzyszt of Penderecki)를 가장 주목하고 있다는 말로 비켜갔다.
‘거지발싸개’
우리와 얘기를 할 때, 또는 같이 음반을 들을 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상하좌우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윤 선생의 눈동자 움직임이었다. 천재성의 반짝임이었을까. 나는 그 이전이나 이후나 그처럼 탐색적인 눈동자의 빠른 움직임을 본 일이 없다. 60이 넘도록 안경을 쓰지 않은 건강한 시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저런 눈동자의 운동이 좋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속된 나는 엉뚱한 교훈을 혼자서 끄집어내기도 했다.
현대음악의 연주회에는 윤 선생이 늘 나를 초대했지만 베를린 필하모니의 클래식 공연에는 필하모니와 연줄이 좋은 내가 윤 선생을 초대하곤 했다. 한번은 카라얀이 지휘하는 필하모니 공연에 윤 선생을 모시고 갔더니 카라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를 확실하게 손아귀에 넣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 선생은 인간적으로도 좋고 싫은 기호가 뚜렷했고 그걸 가차없이 우리에게 드러내곤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그때 처음 배운 우리말이 있다. ‘거지발싸개 같은 녀석!’이란 말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거지발쌔기’로 들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다가 하도 자주 들은 다음 무슨 말인지 물어보아 그 뜻을 알게 됐다.
그는 마치 카를 슈미트가 말하는 정치가의 본성처럼 ‘내편’과 ‘내편 아닌 편’을 준엄하게 판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편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겐 다시 없이 상냥하고 사람 좋은 인상을 뿌리고 다니는 그였지만 내편이 아니라 생각되면 그 사람은 거지발싸개였다. 그러한 거지발싸개의 한 사람에 베를린 예술제의 총감독으로 브란트 시장이 미국에서 초빙해온 세계적인 예술의 MC(사회자) 니콜라스 나보코프도 끼었다.
엉덩이가 가벼워 부지런한데다 인간적인 친화력이 뛰어난 윤 선생은 어디에나 금방 친구를 만드는 마당발이라 여겨졌다. 서베를린의 문화예술계 도처에 윤 선생은 친구가 많았다. 음악대학, 예술원(아카데미 데어 쿤스트), 서베를린방송(RIAS) 오케스트라, 도이치 오페라 등. 그래서 그는 그들 기관에서 작곡 위촉도 받고, 작품 발표의 기회도 얻었다. 다만 나보코프의 베를린 예술제는 윤 선생에게 어떤 손짓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거지발쌔기’ 같으니라고. 그러다 어느 해인가 베를린 예술제에서 윤 선생의 작품이 공연되면서 나보코프는 완전히 윤 선생 편이 돼서 거지발싸개를 벗어나게 됐다.
내가 윤 선생 도움을 받은 것은 아마도 1965년 초라 생각된다.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를 서울에 한번 초대해보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를 주고 오페라의 부(副)지배인 제훼르너 교수(뒤에 비엔나 국립 오페라극장 총감독)에게 나를 소개해준 일이다. 그에 힘입어 나는 1년 반에 걸친 집요한 협상 끝에 외화는 단 1달러도 쓰지 않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발레단과 솔리스트 및 스태프 등 거의 200명 가까운 인원을 서울에 불러들여 1966년 가을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한국의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류퉁의 꿈’
1960년대의 윤 선생은 여러 면에서 매우 의욕에 넘친,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시기를 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1961년 오케스트라 곡 ‘콜로이드 소노르’를 시작으로 1962년에는 실내악 ‘로양(Loyang-洛陽)’, 1963년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 및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을 발표했다. 1964년에는 소프라노와 바리톤을 위한 합창교향곡 ‘옴 마니 파드메 훔(오, 연꽃 속의 진주여!)’의 초연이 하노버에서 있었다. 같은 해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는 오케스트라 작품 ‘파동(Fluktuationen)’이 소개됐다. 그러고 1965년에는 마침내 윤 선생의 첫 오페라 작품 ‘류퉁의 꿈’이 도이치 오페라의 무대에 오르게 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요즘 같으면 한국의 챔피언이 무슨 국제대회에서 메달이나 딴 것처럼 신이 나고 기뻐서 기사를 적어 국내의 팬들에게 알렸다. ‘류퉁의 꿈’과 관련해서 한 가지 사사로운 추억은 그 오페라의 리브레토(대본) 쓰는 걸 무슨 심산에서인지 윤 선생이 내게 권유했던 일이다. 물론 나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런 경험도 전무해서 사양했다. 결국 대본은 윤 선생 악보 출판사인 보테 운트 보크(Bote & Bock)사의 편집장 하랄트 쿤츠씨가 맡았다.
털어놓고 얘기한다면 한국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의 본고장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도 현대 작곡가의 작품 발표회에는 많은 청중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현대음악은 귀에 설고 난삽하기 때문이다. 현대음악 공연은 그래서 관련자들만의 끼리끼리 음악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는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의 빈보다 진취적인 독일의 베를린이 현대음악의 전위적인 실험이나 시도에 비교적 호의적이요 개방적인 곳으로 보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필자 최정호 교수, 소프라노 채리숙, 김여수 박사, 바그너의 손녀 프리드린드 바그너, 박선희(김 박사 부인), 윤이상.
현대음악에 관해서 윤 선생한테 자주 듣던 말로 두고두고 생각나는 대목은 모든 지역의 음악이 현대음악에 대해선 직접성(Unmittelbarkeit)을 갖는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은 명언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윤 선생의 작품을 통해 한국적인 음악의 세계가 유럽인에게 이해되고 소통되는 통로를 열 수 있었음을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의 세계를 나 같은 문외한도 어림짐작으로나마 가까이 해볼 수 있게 한 말이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현대음악이 어떤 음악이며 그 음악의 청중이 어디 있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 음악의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윤 선생 스스로 누구보다도 정확히 자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잊을 수 없는 얘기를 윤 선생한테 직접 들은 일이 있다.
1960년대에 모스크바의 어느 음악회에서 공연을 하고 돌아온 서독 친구한테서 들었다는 것이다. 음악회가 막 인터미션에 들어갈 때 한 러시아 청중이 무대 밑으로 다가오더니 종이 쪽지를 내밀고 금방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종이쪽지를 펼쳐보았더니 ‘제발 무조(無調, atonal)음악 좀 들려달라’는 하소연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소련의 ‘계몽군주’ 흐루시초프 시대에 드디어 모스크바에서 추상회화를 해금해보려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람회가 열리자 개막 테이프를 끊고 들어선 흐루시초프가 전시된 그림을 보고 이게 코끼리가 꼬리로 그린 그림이냐고 대경실색하며 전시회를 그만두게 한 것이 1960년대의 소련이었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당에서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의 타락한 예술이라 낙인찍은 서방의 무조음악, 12음계음악, 제리엘 음악에 대해 철의 장막에 갇혀 산 모스크바의 청중이 얼마나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시사해주는 에피소드다. 그 얘기는 스스로의 존재이유에 대해 회의하던 서방의 현대음악 작곡가를 적지 않게 위로하고 고무하는 효험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봤다.
년간의 이산가족 생활
돌이켜 보면 윤 선생은 가정적으로 언제나 행복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유난하게 가정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는 작곡가로서 현대음악의 메카에 가서 다시 공부하기 위해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처자식을 버리고 단신 유럽으로 떠난 윤 선생의 매정한 결심을 평가한다.
그러한 모진 마음이 있어 유럽세계에 한국 출신의 작곡가 ‘이상 윤’은 탄생할 수 있었다고 본다. 대신 윤 선생의 가족에게는 만만치 않은 고생과 시련을 안겨준 한 예술가의 매우 이기적인 결단이었다. 그걸 너무나 잘 의식하고 있는 윤 선생이기에 독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자기를 위해 헌신한 가족에 대해 이번에는 윤 선생이 헌신적으로 봉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윤 선생이 혼자 유럽으로 떠나온 뒤 5년 만에 독일에서 재결합하게 된 부인 이수자씨에 대해서 윤 선생은 주위에서도 그 온도를 감지할 수 있으리만큼 따뜻한 애정으로 늘 감싸주었다. 부인은 부인대로 부군의 활동을 신뢰에 찬 눈으로 지켜보며 어느 곳에나 동반하면서도 어느 자리에서나 눈에 띄게 나서는 일 없이 겸양하는 한국적 부덕을 체현하고 있었다. 두 분은 참으로 주위사람들이 부러울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
5년 만에 부부는 재결합했으나 고향엔 이제는 아빠만이 아니라 엄마마저 잃어버린 아이들이 있었다. 이 헤어진 네 식구의 이산가족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다시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64년 7월, 마침내 윤 선생 일가는 두 자녀를 베를린으로 불러와 네 식구가 8년 만에 한 지붕 밑에서 상봉하게 된다.
그때 다섯 살 때 아빠와 헤어진 딸 정은 열세 살, 두 살 때 헤어진 아들 우경은 열 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낯선 독일 땅에 건너온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문화충격을 받았을 터이다. 그런 판에 이젠 거의 기억에서도 사라진 어느 어른을 갑자기 만나 금방 아빠라 부르며 부녀와 부자의 정을 나누기엔 서로가 너무 서먹서먹했을 것이다.
동베를린 간첩사건으로 법정에 선 윤이상.
8년 만에 이산가족이 재결합함으로써 누린 가정의 행복과 단란도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1967년 봄 이른바 동베를린간첩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윤 선생 내외분이 어느 날 갑자기 납치돼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면서 베를린의 남매는 아빠를 만난 지 3년도 못 돼서 다시 객지에 고아처럼 외톨이로 남는 기막힌 신세가 됐다.
동베를린 간첩사건
나는 이 자리에서 이 사건에 관해 깊이 언급할 생각은 없다. 이 사건엔 당시 중앙정보부 책임자가 자랑 삼아 떠벌이던 것처럼 혐의자의 일망타진에 정보기관이 큰 공을 세운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은 일부 진영에서 주장하듯 정보기관이 허무맹랑하게 꾸며낸 단순한 날조극도 아니다.
사건은 바로 그 주모자가 자수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정보기관은 손쓸 겨를도 없이 되레 그들의 무능만 드러난 싱거운 전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관련자의 혐의사실은 과장된 면도 없지 않으나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 접촉에서부터 평양 방문에 이르기까지 (그 법적 형사적 책임의 평가는 어떻든 간에) 자수한 주모자가 털어놓은 혐의사실 그 자체는 날조 아닌 사실로 확인되었다.
물론 문제의 이 사건 자체와 그 용의자를 한국의 정보기관원이 유럽에서 서울로 납치해 온 또 하나의 사건은 구별해서 봐야 될 것이다.
요컨대 윤 선생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의 주선으로 북한을 방문한 것은 날조 아닌 사실이다. 1960년대에 한국 국민이 북한 기관원과 접촉하고 평양을 방문한다는 것은 국가보안법을 포함한 당시 실정법으로는 분명한 범법행위다. 그러나 그런 한국의 실정법을 어긴 범법행위가 있다손치더라도 독일에 체류 중인 용의자를 그처럼 강제적으로 서울로 끌고오는 것이 적절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결국 문제는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서 봐야 될 것 같다. 첫째는 북한 기관원(동베를린 대사관원)과의 접촉과 방북이라는 객관적 사실 차원의 문제가 있다. 여기에는 윤 선생이 사실을 시인하고 있는 이상 의문시될 것이 없다.
둘째는 방북 목적에 관한 주관적 동기의 차원이 있다. 정보기관에서 발표한 대로 윤 선생이 간첩활동을 하기 위해 방북했느냐, 아니면 단순히 친지 방문과 창작의 영감을 얻으려 고구려 고분답사를 위해 방북했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선 나는 윤 선생이 주장한 대로 후자의 목적을 위해 방북했다는 동기를 믿으려 한다. 설혹 그러한 동기로 평양에 밀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시의 실정법에 저촉된다는 사실은 조금도 완화되거나 하물며 부인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셋째는 정보당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관련 용의자들이 피의사실을 서울에 와서 본인이 직접 해명하기 위해 자의 또는 동의에 의해 귀국했느냐 아니면 납치돼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어 온 것이냐 하는 외교적 국제법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경우가 있었으리라 추측해볼 수밖에 없으나 강제 송환의 경우가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윤이상 구명운동
동베를린 간첩사건과 독일에 거주하던 그 용의자들의 돌연한 잠적이 현지 신문 방송에 연일 크게 보도되면서 독일의 여론은 들끓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윤 선생의 악보를 출판한 보테 운트 보크 사의 하랄트 쿤츠 박사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윤이상의 구명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정서한을 썼으며 앞으로 유럽 음악계의 저명인사들한테서 서명을 받을 생각이라고 털어놓았다.
진정서에 뭐라고 적었느냐 물었더니 코리아의 예술가가 같은 코리아의 북쪽을 방문한 것이 어찌 간첩죄와 같은 중죄가 되느냐고 항의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어 진정서를 쓰는 사람이나 거기에 서명하는 사람의 울분을 풀려면 그렇게 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윤이상의 구명에는 도움이 안 되고 별 호소력도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적었으면 좋겠느냐고 쿤츠씨가 되묻기에 나는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도대체 이 진정서를 쓰는 당신이나 앞으로 거기에 서명할 사람들이 누구냐. 그들은 법률가가 아니라 음악가들이 아니냐. 그런데도 당신들이 한국의 국법도 국제법도 모르면서 윤모가 연루된 사건의 유죄 무죄 여부를 따진다는 말이냐. 그 말을 누가 귀담아 듣겠느냐. 음악가로서 당신들이, 오직 당신들만이 확실하게 그리고 권위 있게 할 수 있는 말은 따로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귀담아 들어줄 것이다. 그런 말을 진정서에 적어야지 알지도 못하는 법률논쟁을 하려고 덤벼든다는 말이냐.”
“그게 무슨 말인데.”
“당신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음악인들이 그동안 발표된 작품들을 통해 판단할 때 윤이상의 음악은 한 점 의심할 나위도 없이 서방세계의 음악이며 오직 서방세계에서만 연주될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증언하라는 얘기다. 정치에 어두운 예술가가 정치적으로 과오를 범하고 실수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윤모라고 하는 예술가와 그 작품의 본성은 공산세계에선 용납될 수 없는, 본질적으로 서방적이라는 사실을 당신들은 증언해야 하고 또 증언할 수가 있지 않느냐?”
1965년경 베를린 반제호숫가 숲에서 필자와 윤이상 부부 등이 피크닉을 즐기고 있다. 위 사진 왼쪽부터 윤이상 부인 이수자 여사, 윤이상, 필자 최정호 교수.
한국 법정에서 윤이상에게 유죄 판결을 하고 실형을 선고했으나 독일에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 서독 정계에선 전후 처음으로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연립정부가 성립돼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입각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밑에서 외무부 차관으로 활약하던 브란트의 측근 클라우스 슈츠(Klaus Schutz)가 얼마 후 본의 연방정부를 떠나 베를린 시장으로 부임한 직후 어느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윤이상 등 서독에서 서울로 강제 송환된 한국인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다.
“곧 돌아옵니다. 그건 내가 외무부에서 이미 처리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명하고 단호했다. 물론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윤 선생은 독일로 돌아와 독일 국적을 얻어 귀화했고 1972년 뮌헨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에는 바이에른 국립극장이 위촉한 가극 ‘심청’을 무대에 올리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뒤의 윤 선생의 삶과 음악에 대해선 널리 세상에 알려져 있음으로 1960년대 베를린 시절의 그를 회상하는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적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다.
다만 한 가지 얘기만은 그래도 해두고 넘어가야겠다. 정치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 사이에는, 통일운동가와 음악작곡가 사이에는 쉽게 건너뛰기 어려운 경계가 있다는 얘기다. 훌륭한 예술가가 반드시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은 훌륭한 정치가가 반드시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도 없고 또 될 필요도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윤이상과 두 여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훌륭한 음악가이기 때문에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나치스에 협력한 그의 정치적 행적도 훌륭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슈트라우스의 정치적 행보에 잘못이 있다고 해서 그의 음악적 업적도 전면적으로 부인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먼 훗날에 되돌아본다면 본인에게도 영예로울 것이 못 되는 1970년대 이후 윤선생의 정치적 행보는, 현실적으로 냉엄하게 평가한다면 남북한의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윤이상 개인의 반(反)남한 친(親)북한적인 정치적 성향과 윤이상 음악의 본질적으로 서방적인 성향의 모순이 빚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플라톤의 먼 옛날부터 새로운 음악의 도입이 기존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모든 통치자는, 특히 북한을 비롯한 전체주의 국가의 통치자는 경계하고 있다. 그리스 말의 ‘가락’을 뜻하는 ‘노모스’는 동시에 ‘관습’과 ‘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가락(노모스)이 들어와 기존의 ‘가락의 어김(paranomia)’이 일어나는 것은 곧 현존하는 관습과 법을 어기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을 우려해 통치자는 원치 않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한 주체사상의 이데올로그(ideologue=공식이론가) 황장엽씨가 김일성이 “윤이상은 간첩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을 들었다는 보도는 북한 체제에 낯선 새로운 음악이 도입되는 것에 당혹스러워한 폐쇄체제의 실상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 선생의 1970년대 이후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독일 사람들이 곧잘 얘기하는 ‘예술가의 바보스러움(Kuenstlernarrheit)’이라 보고 그냥 입을 다물고자 한다.
그 대신 마지막으로 윤 선생과 관련한 두 여성에 대해서 몇 자 적음으로써 이 글을 끝내겠다.
나는 루이제 린저를 만난 일도 없고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문학사상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간 일이 있고 국내에도 꽤 많은 독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가로서 그녀는 나름대로 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독일의 공론권은 상당히 부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히틀러를 예찬한 송시를 쓴 젊은 시절부터 녹색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는 등 말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
루이제 린저는 한국을 방문한 뒤 평양정권의 초청으로 북한에도 다녀왔다. 그녀는 20대의 젊은 날에 ‘독일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를 숭앙했던 것처럼 60대의 늘그막에 이번에는 ‘조선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를 평양에서 만나 숭앙한 것일까.
검은 꽃송이
그건 어떻든 루이제 린저는 한국과 한국인에 관해서 세 권의 저서를 냈다. 한 권은 매우 부정적인 남한에 관한 저서였고, 또 한 권은 매우 긍정적인 북한에 관한 저서였다. 두 책의 공통된 점은 어느 책이나 실소를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 확인조차 안 한, 주관적 혹은 자의적(恣意的) 편견이 넘친 서술이라는 점이다. 시간을 내서 읽을 만한 책으로 추천하기가 좀 민망한 책이다.
다만 그녀가 세 번째로 내놓은 한국관련 저서는 읽을 만한 책으로 나도 여러 사람에게 일독을 권해왔다. 루이제 린저와 윤이상의 공저 형식으로 나온 ‘상처 입은 용-작곡가의 인생과 작품에 관한 대담’이 그것이다.
이 책에는 동베를린 간첩사건 혐의로 옥에 갇힌 윤 선생이 그곳에서 1967년 9월17일, 만 50세의 생일을 맞은 얘기가 나온다. 윤 선생의 변호인은 중앙정보부와 교도소에 청원해서 생일날 하루만이라도 따로따로 수감된 윤 선생 내외가 자리를 같이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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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일날 아침 찾아온 변호인은 일이 잘 안됐다고 미안해하면서 그 대신 부인의 선물을 가져왔다고 전하더라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 무슨 선물을? 그것은 머리카락으로 만든 검은 꽃송이! 기막힌 선물이었다. 바로 이날을 위해 다른 감방에 갇힌 부인 이수자씨가 남편의 50회 생일 선물로 스스로의 머리다발을 잘라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엮어낸 검은 꽃송이였다.
이수자 여사는 그런 분이요 그럴 수 있는 분이었다. 그것이 한국의 전통적인 아내의 상(像)이요, 여인상이다. 나는 대담집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만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한참 동안이나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