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초반부터 60년대 말까지 이 나라는 전쟁과 혁명, 쿠데타를 겪으면서 그야말로 굴곡 많은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돌았다. 자유당, 민주당, 군사정권을 거쳐 공화당이 집권했고, 이 기간 ‘사상계’는 민주주의와 민권 수호에 찬연한 발자취를 남겼다. 장준하와 ‘사상계’, ‘사상계’와 장준하는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장준하가 있었기에 ‘사상계’가 세상의 빛을 보았다. ‘사상계’로 인해 장준하는 자유민주주의를 견인해냈으며, ‘사상계’는 1970년대의 장준하를 민족운동으로 밀어올리는 전륜구동 노릇을 했다.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대항했다. 지성의 무기를 가지고 권력의 아성에 육박했다. ‘사상계’에는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고, 비판의 언어가 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의 절규가 있었고 관권에 대결하는 민권의 필봉이 있었다.”(안병욱, ‘칼의 힘과 펜의 힘’, ‘사상계’ 1969년 12월호)
‘사상계’의 추억은
그러나 어느덧 2008년, 지금의 50대조차 ‘사상계’ 세대는 아니다. ‘사상계’ 이후 세대다. 이 말은 50대까지는 정기구독이나 서점 구입을 통해 ‘사상계’를 바로 구해 읽고 ‘사상계’와 실시간대로 함께 산 세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50대 이후 세대의 경우 지금은 사라져버린 청계천 고서점이나 대학도서관의 장서 보관용 서가에서 갱지로 만들어 바삭바삭 마른 옛 ‘사상계’를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읽어본 경험이 전부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 연배는 어린 시절 ‘사상계’라든지 ‘씨의 소리’ 같은 비판 저널리즘이 불온한 빨갱이 잡지인 줄 알고 자랐을지 모르겠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통과된 유신헌법에 의거해 처음 발표된 ‘긴급조치 1호’로 제일 먼저 구속되어 형을 받은 분이 전(前) ‘사상계’ 발행인인 장준하 선생님이었다.…나로서는 경제건설에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무장공비와 싸우는 데 여념이 없는 훌륭한 대통령에게 이유도 없이 비방(?)을 일삼는 잡지나 그 발행인을 왜 그냥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그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그러나 이들 세대는 대학에 들어가 우리 사회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세계의 진실에 대해 조금씩 눈떴을 것이다. 진리로 가득 차도 모자랄 그들의 소중한 영혼이 체계적 야만성으로 오도된 독재자의 이데올로기적 권력장치를 통해 철저하게 세뇌되고 오염됐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장준하와 ‘사상계’에 대해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1970년대 들어 5년의 간격을 두고 ‘사상계’와 장준하의 부음이 잇따랐다. ‘사상계’와 장준하의 죽음은 우리의 현대사, 나아가 시민의식의 민주적 성장과 민족통일의 발전과정에 있어 중대한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 국가 운영을 통해 그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나가고 분단체제를 돌파해야 할 사상적 기축이며 동력이 될 두 진지가 붕괴됨으로써 그 후의 세월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천박한 폐쇄사회로 줄달음쳤는가. 장준하와 ‘사상계’를 오늘 역사 속에서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실용만능의 기회주의적 정신풍토에 대한 성찰과 모색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
장준하는 1918년 8월27일 평북 정주에서 목사이던 장석인의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삭주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들어가 이듬해인 1932년 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평양에 있던 숭실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천 신성중학교로 전학해 졸업한 후 1938년 정주에 있던 신안소학교 교사로 3년 동안 지냈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간 장준하는 동양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1년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장준하가 입학할 무렵 전택부, 문익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같은 학교에 있었다.
1944년 1월 장준하는 ‘일본말 성경과 독일어사전, 희랍어 성경과 사전 등 네 권을 들고 학생모 차림’(박봉랑, ‘신학생 장준하형’‘아! 장준하’에 수록)으로 일본군 학병에 끌려가 중국에 있던 관동군에 배치됐다. 그해 7월 일본군에서 탈출, 김준엽을 만나 함께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臨川分校)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갔다. 이때 필사본으로 ‘등불’을 발행했다.
1945년 1월 말 장준하 일행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 다다랐다. 1944년 7월 아내 김희숙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는 암호문을 보내 탈출 성공을 알린 지 6개월 만이었다. 그가 탈출한 장쑤성 쉬저우(徐州)에서 충칭까지의 험로에는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巴蜀嶺)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나 장준하가 꿈에 그리던 당시 임시정부의 속사정은 한마디로 만신창이였다. 셋집을 얻어 정부 청사로 쓰고 있는 형편에 수많은 정파로 분열되어 지리멸렬을 보여주었다. 오죽했으면 장준하가 어느 자리에서 이런 폭탄선언을 했을까.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본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장준하, ‘돌베개’, 세계사, 1992)
장준하는 1945년 4월29일 시안(西安)에 있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3개월간 미군 전략첩보대(OSS) 대원이 되어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했다. 국내공작은 생명을 바치는 것으로, 그 대가는 조국을 위해서 ‘결재’될 것이라고 장준하는 생각했다. 당시 장준하는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 발행인은 장준하, 결재인은 조국”이라고 그의 ‘돌베개’에 기록하고 있다.
국내 잠입 최종명령을 기다리던 이 무렵, 장준하는 일본군 탈출시점이던 1944년 7월7일부터 8월3일경까지 써온 일기장 7권과 ‘등불’ 5권, 그리고 광복군 제2지대에서 OSS 대원으로 훈련을 받을 때까지 ‘등불’의 후신으로 펴낸 ‘제단’(등사판) 1,2호를 소포로 싸고, 거기에 유서 네 마디를 넣어 고국으로 보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전후의 황량한 풍토 이끈 멘토
장준하 등의 국내 정진(挺進)공작은 그러나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선언을 했고, 중국대륙에서의 모든 군사작전은 일시에 백지화됐다. 앞서 8월14일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은 서울로 향하는 미군기에 편승해 서해 상공을 날았으나 미군의 한국진입 중지명령을 받고 회항했다. 나흘 뒤인 8월18일 재진입 결정에 따라 여의도에 착륙했지만 이번에는 일본군의 제지로 회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준하 일행은 분루(憤淚)를 삼키면서 시안으로 되돌아갔다가, 그해 11월23일이 되어서야 김구 주석 등 임정요인들과 ‘개인 자격’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이범석 장군을 수행했던 광복군 당시 장준하(오른쪽).
피란수도 부산에서 장준하의 인생은 새롭게 펼쳐졌다. 1952년 9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펴내는 ‘사상’의 창간에 간여하게 된 것이다. 장준하는 편집후기에서 “이 겨레의 활로를 개척함에는 선인들의 경험과 아울러 새삼스럽고 또 넓고 깊은 세계적인 사고가 요청된다”고 썼다. ‘사상’이 이념적인 부분에 치중할 것임을 내비친 문장이었다. 민족주의 이념의 확립과 함께 민주주의 사상의 고양을 목표로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러나 ‘사상’은 단명으로 끝났다. 경영상의 어려움과 이승만 정권의 견제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오기석이 쓴 ‘사상(思想)’이란 한자 제호에 ‘계(界)’자를 한 자 더 넣어 ‘사상계’를 발행했다. 1953년 6월호로 창간호가 나왔다. 이 무렵 장준하는 부인 김희숙을 보수 없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쓰면서 원고의 청탁 교정 제작을 혼자서 도맡았다. 등짐꾼처럼 배본까지 그의 몫이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아서일까. 창간호 3000부는 서점에 깔리면서 불티나게 팔렸다. 전후의 황폐하고 절망적이던 정신풍토 속에서 ‘사상계’는 세계의 사상들을 소개하면서 주체적인 자아를 찾는 멘토가 되어갔다. ‘사상계’는 이 시절 정신에 영양을 공급하던 지적 저수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함석헌과의 조우
1952년 8월 정부의 서울 환도에 발맞추어 ‘사상계’도 그해 11월 서울 종로 네거리 종각 쪽의 한청빌딩 4층으로 둥지를 옮겼다. 1955년 1월부터는 편집진도 장준하 1인체제에서 벗어나 소설가 김성한이 주간으로 취임했고, 사회과학·교양·문학예술 등의 분야로 나누어 김준엽·안병욱·김성한이 상임 편집위원을 맡았다. 1953년 창간호부터 1967년 12월호까지 참여한 ‘사상계’의 편집위원은 한마디로 쟁쟁했다.
김재준 오영진 홍이섭 정병욱 신상초 강봉식 안병욱 김성한 김준엽 김상협 김하태 성창환 이상구 장경학 한우근 현승종 황산덕 한태연 이정환 여석기 이만갑 엄민영 김승한 이창렬 최문환 김영록 신일철 이극찬 조지훈 정명환 최석채 부완혁 민석홍 양호민 등.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사상계’는 차츰 지식시장에서 고급상품이 되어갔다.
그러던 중 1956년 장준하는 그의 생애에서 다시 만나볼 수 없는 ‘귀인(貴人)’을 만났다. 함석헌과의 조우였다. 함석헌이 ‘사상계’ 1월호에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기고하고 난 뒤였다. 함석헌의 이 첫 기고는 윤형중 신부의 반박을 불러왔고, 이들 사이의 지상논쟁은 상당기간 이어져 당시 우리 사회 지식계층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상계’는 이 유명한 논쟁으로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면서 발행부수를 3만부대로 늘렸다.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했다. ‘6·25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란 부제가 붙은 이 글에서 함석헉은 6·25전쟁에 대해 당시로서는 폭탄과 같은 선언을 했다.
“6·25싸움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 둘째 번 세계전쟁을 마치려 하면서 로키산의 독수리와 북빙양의 곰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리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의 허리 동강이인 38선이다.”
함석헌은 우리가 해방되었다고 하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셋”이라면서,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고 거침없이 전쟁을 꼬집었다.
5·16을 향해 첫 포문 열다
경찰은 함석헌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고 장준하는 연행됐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20일간의 참선(구속)’ 끝에 석방됐다. 1970년대에 김지하가 담시(譚詩) ‘오적(五賊)’으로 당한 필화사건과 함께 ‘사상계’가 겪은 유명한 필화사건의 하나였다. ‘사상계’는 이 필화사건 후 부수가 급격하게 신장됐다.
1958년 10월26일 ‘보안법 파동’이 일어나자 장준하는 1959년 ‘사상계’ 2월호에서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의 백지 권두언을 실었다.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었다. 그 무렵의 이승만은 ‘국부(國父)’였고 그의 가르침은 ‘계시’였지만, ‘사상계’와 장준하는 불굴의 의지로 그에 맞섰다. 당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비판지 ‘경향신문’이 1959년 4월30일자로 단칼에 폐간되고 나자 다음 과녁이 ‘사상계’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발행부수는 부쩍 뛰어올라 4만부 선을 돌파했으니 이는 잡지시장으로 보자면 경이적인 성장이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규탄해 떨쳐나선 마산의거를 보고 ‘사상계’는 권두언의 제목을 ‘민권전선의 용사들이여, 편히 쉬시라’라고 비장하게 내걸었다. 장준하의 ‘사상계’는 이 무렵 머지않아 이승만 정권의 철권이 그들의 뒤통수를 내려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후 “4·19혁명이 없었다면 ‘사상계’는 그때 사라졌을 것이 뻔하다”고 장준하는 ‘사상계지 수난사’에서 회고했다.(‘씨의 소리’, 1972년 1~6호에 수록)
4·19혁명 당시 한청빌딩에 내걸린 ‘사상계’의 깃발은 데모대의 성난 물결 속에서 힘차게 펄럭였다. 4·26 교수단 데모에 참가한 상당수 교수가 ‘사상계’ 동인이었다. ‘사상계’는 이 시절 서울에 있는 각 대학 교수와 지식인들의 살롱이었다. 4·19 때 ‘사상계’가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그 부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부수가 8만부 선을 유지했음에 비해 월간지 ‘사상계’는 9만7000부에 달했다. ‘사상계’와 ‘타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은 그때 지식인의 애교 어린 패션이기도 했다.
장면 정권이 들어선 뒤 장준하는 잠깐 외도를 했다.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이 발생해 건설본부는 군사혁명위원회에 접수되었고, 불량배들을 건설현장에 투입해 강제노역을 시키는 것으로 임무가 변질됐다.
5·16에 대한 포문 역시 1961년 7월호 ‘사상계’가 처음 열었다. 장준하는 권두언을 통해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메가톤급 폭탄은 함석헌에게서 나왔다. 그는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의 글에서 5·16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4·19는 대낮에 했고 5·16은 밤중에 몰래 했다, 혁명은 민중이 하는 것이지 군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 5·16은 잘못된 불장난으로 군은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함석헌은 꾸짖었다. 그 시절 누구도 엄두 낼 수 없는 아슬아슬한 발언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 공방
장준하는 ‘사상계’ 7월호 기사 때문에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났으나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군사정권에 대한 장준하와 ‘사상계’의 이 같은 태도는 그들을 가파른 벼랑길로 몰아넣었다. 장준하는 그의 생애에서 그때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정치활동’ 때문에 정치정화법에 묶였고 ‘부패 언론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도마에 오른 물고기’, 그게 그때 장준하와 ‘사상계’의 처지였다.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깨고 나온다” “민권을 찾고 싶거든 감옥으로 가라!”는 군정 반대의 목소리는 장준하와 ‘사상계’를 회복하기 어려운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군사정권은 ‘반품공세’로 ‘사상계’의 목덜미를 쥐고 ‘반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미 도마에 오른 물고기임을 각오했던 장준하는 공세적 자세로 군정에 맞섰다. 민족주의에 대한 김종필과의 강연 대결이 벌어졌다. ‘대한일보’ 1963년 11월6일자 ‘장준하씨, 김종필씨의 민족주의 대결’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자.
“고려대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이날 학술강연회에서 장씨는…‘요즘 민족주의를 팔아 자기옹호나 자기변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씨는 또한 김종필씨가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귀한 외화를 써가면서 사치한 외국호텔 창가에서 향수에 젖어 흐르는 눈물 같은 것’이라고 비꼬고, 자신은 중국 광야에서 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면서 ‘춥고 배고프고 발톱이 빠지도록 조국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뼛속으로 체험한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장준하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김종필은 일제 식민사관을 변형시킨 ‘민족적 민주주의’ 논리를 내세웠다. 1972년 유신체제에서 내세웠던 ‘한국적 민주주의’는 5·16군사정변을 일으킬 때부터, 아니 이전에 이미 일본 정신에 침윤되었던 박정희나 그의 참모 김종필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고 장준하는 보았다.
1964년 3월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자 장준하와 ‘사상계’는 그 선봉에 섰다. 장준하는 한일회담을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침략자이며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판단해, 1964년 4월호를 긴급 임시증간호로 내놓았다. ‘한일회담의 제문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이 나라 지식층의 의사를 비판적으로 담아낸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텍스트가 됐다. 이어서 1965년 7월에 ‘신(新)을사조약의 해부’를 또다시 긴급 증간호로 발행해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이론적 교두보가 됐다.
1969년 9월 신민당 소속 의원들(앞에서 세 번째가 장준하)이 시청 앞에서 벌인 3선개헌 반대 시위.
박정희 정권은 일개 잡지에 공작적 탄압을 가해 ‘사상계’의 숨통을 조였다. 매진됐다고 여겨지던 ‘사상계’를 ‘반품작전’으로 되돌리는가 하면, 1965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물샐 틈 없는 세무사찰을 자행해 ‘사상계’를 고사상태로 몰아갔다.
장준하는 신촌에 있던 집을 헐값으로 팔고 서대문 평동에 조그마한 셋방을 얻었다. 가족들은 그날그날의 생계를 위협받기에 이르렀고, 장준하는 급성간염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사상계’와 장준하 죽이기는 마침내 종말을 내다보기에 이르렀다. 그때의 사정을 1972년 ‘씨의 소리’에 연재된 ‘사상계지 수난사’에서 장준하는 이렇게 밝혔다.
“그러나 ‘사상계’도 나도 그 생명이 끈질겨서 나는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병원 침상에서 사경을 헤매며 투병의 나날을 보내나, ‘사상계’만은 외관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양 버젓이 매달 그 위용을 나타냈다.”
결국 ‘사상계’도 장준하도 지칠 대로 지쳐 ‘사상계’는 그 후 점점 숨결이 거칠어 가고 장준하도 투쟁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이 무렵 ‘사상계’는 결간하는 일이 잦아졌고, 영양부족에 걸린 50쪽짜리 납본용 ‘사상계’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나마 1967년 중반부터는 시판마저 중단해야 했다. 장준하는 견디다 못해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1966년 10월26일 세칭 ‘한비(韓肥) 사카린 밀수사건’ 규탄과 관련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사카린 밀수사건은 삼성재벌 계열사에서 한국비료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일본 미쓰이로부터 건설용 장비를 도입하는 대가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입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집권층과 삼성재벌 사이에 유착이 있었다는 정보가 새나왔다.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장준하는 1966년 10월 민중당이 주최한 규탄대회에서 재벌총수와 ‘고위층’ 사이에 오간 내용을 폭로하면서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월남파병 동의안과 관련해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한국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라고 신랄하게 공격했다. 이 일로 장준하는 즉각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1967년 장준하는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막후에서 윤보선, 백낙준, 이범석, 유진오 4자회담을 주선해 통합야당 신민당을 태동시켜 동참했다. 4자회담 당시 장준하를 대통령후보로 하자는 말이 나와 훗날 장준하에게 ‘재야 대통령’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 후 신민당 윤보선 대통령후보의 선거캠프에 뛰어든 장준하는 유세의 제일선에서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을 대담하고 직설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개 이런 것이다.
동대문에서 옥중 출마로 당선
“박정희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박정희씨는 과거 남로당 군사조직책으로 남한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한 사람으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직원을 팔아 희생시켰다.”
대통령선거 직후 장준하는 다시 구속됐다. 그가 감옥에 구속되어 있던 그해 6월8일 악명 높은 부정선거가 치러졌다. 장준하는 구속 상태로 동대문 을구에 출마했다. 상대는 당시 공화당 서울시 당위원장을 지낸 강상욱이었다. 옥중출마와 거물의 대결,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머리와 수염은 물론 한복과 두루마기까지 하얗게 차려입은 함석헌이 유일한 선거운동원이었다. 함석헌은 두루마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외쳤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십시오.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준하 이 사람 감옥에서 죽습니다. 자살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 아카넷, 2006)
함석헌은 생전에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장준하를 믿었다. 그가 ‘돌베개와 브니엘’이라는 제목으로 장준하에 대해서 쓴 글에는 장준하가 이렇게 평가되어 있다.
“장준하의 사람됨을 보면 구약의 야곱 같은 데가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무외(無畏)의 덕을 그는 풍부히 가지고 있습니다. 겁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세계, 1992)
마침내 기적은 일어나고 말았다. 장준하는 막강후보 강상욱을 2만여 표 차로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장준하는 국회의원 겸직금지규정에 따라 자신의 생명과 다름없던 ‘사상계’의 운영을 ‘조선일보’ 출신의 부완혁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나 1969년 12월호로 지령 200호를 넘긴 ‘사상계’는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실림으로 종합잡지 사상 17년이라는 발행실적을 남긴 채 이 땅에서 영영 자취를 감췄다. 당시 ‘사상계’의 지령은 205호였다.
김준엽은 1915년 베이징대학의 천두슈(陳獨秀)가 펴냈던 ‘신청년’이란 중국 잡지를 예로 들면서 ‘사상계’가 그에 못지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사상계’는 자유·민권운동, 통일 문제, 경제발전 문제, 새로운 문화의 창조,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줄기차게 추구했고, ‘사상계’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모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으로 대법원의 형이 확정돼 수감 중이던 장준하가 1974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모습.
돌이켜보면 ‘사상계’는 1962년 이후 ‘민족해방의 세기’ ‘민족주의의 반성’이란 특집을 냈고, 나세르, 수카르노, 엔크루마 등 제3세계 반미(反美) 기수들에 관한 글을 다뤘다. 일찍이 1956년에 ‘동인문학상’ 제1회를 발표한 이래 선우휘, 오상원, 손창섭, 이범선, 서기원, 남정현, 전광용, 이호철, 송병수, 김승옥, 최인호, 이청준을 등장시켰다. ‘사상문고’ 100권을 간행한 것은 우리나라 문고 시리즈 발행의 신기원을 연 것이며,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통해 이청준, 황석영 같은 문인들이 배출된 사실은 우리 문학사에서도 높이 평가될 일이다. 언론학자 정진석은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잡지를 대표한 것은 ‘사상계’였으며, 장준하는 잡지 언론인으로는 제1인자로 이 나라 언론과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돌베개’의 간행
‘사상계’ 사후 장준하는 ‘사상계’의 몫마저 살아야 했다. 1969년 그는 박정희의 삼선개헌을 통한 영구집권 반대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1970년에는 백기완을 비롯해 김도현, 유광언 등 6·3학생운동 세대들과 함께 ‘민족학교’를 세워 ‘지성의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때 장준하가 생각한 민주주의와 민족문제 해결의 주체는 서민, 노동자, 농민, 학생대중 등이었다. 이들이 민중적 민족주의의 전위대였다.
1971년 장준하는 자신의 학병 탈출과 광복군 참여시절을 회고하면서 ‘돌베개’를 내놓았다. ‘돌베개’는 ‘현대사의 증언’임을 밝히면서 “광복군 출신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일부 인사들이 광복군 모자 하나를 얻어 쓰고 기실 과연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도 역사 앞에 밝히고자 함”이라고 저술의 동기를 밝혔다. 장준하는 이 글을 통해 박정희 등 일본군 소속 한국인들을 빗대면서 공격의 활시위를 늦추지 않았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광복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월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많은 주검들이 서러워질 뿐, 여기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서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돌베개’, ‘장준하 전집1’, 세계사, 1992)
1972년 7월4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예고도 없이 특별생방송에 모습을 나타내 ‘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의 천적’ 장준하는 뜻밖에도 ‘7·4공동성명’을 적극 지지했다. 종래까지의 자유민주주의적 세계관에서 진보적 민족주의의 세계관으로 스스로의 인식을 갱신하던 장준하, 그는 이 무렵에 이르러 김구와 여운형이 걸었던 통일운동의 길로 성큼 들어섰다.
그해 9월호 ‘씨의 소리’에 실린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장준하는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노력,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지 진실은 아니다.”
그러나 7·4공동성명은 영구집권 야욕을 민족의 최대 과제로 포장한 음험한 시나리오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체제의 길로 들어선다. 장준하는 일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으로 차츰 다가갔다. 1973년 6월23일 박정희는 ‘평화통일 외교전략’을 발표했다. 남과 북이 유엔 동시가입을 해도 좋다는 것이었지만, 속셈은 통일의 문제를 “바야흐로 국제 정치시장에 아무런 거래표시도 없이 상장(上場)하려는 것”이라고 장준하는 보았다(‘민족외교의 길’, ‘씨의 소리’, 1973년 11월호).
1973년 말에 쓴 미발표 유고 ‘민족통일전략의 현단계’(초안)에서 장준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재해석을 내렸다. 그는 이 글에서 “나를 민족의 역사라는 비판적 도마 위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치는 심정”으로 해방공간 3년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장준하는 한반도 분단 상황을 되돌아보고, 해방공간의 역사를 일제 잔재 청산, 민족세력 결합, 건국준비위원회와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와 교훈 등으로 나누어 성찰했다. 이 시기의 평가를 통해 장준하는 어떤 전문연구가도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인식을 내놓았다. 그는 여운형과 김규식의 합작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김구의 통일운동을 순결하고 애국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긴급조치 1호로 15년형
자유민주주의자 장준하가 민족통일주의자로 발걸음을 내디딘 데 대해서는 장준하 본인의 진술이 없어 그 사상적 궤적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불가능하다. 다만 그는 젊어서부터 자신을 민족의 제단에 던졌고, 시대변화에 완고하게 갇혀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7·4공동성명이 함석헌의 표현대로 “엉겅퀴에서 무화과가 피는 것”을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대 민중이 가장 절실하게 바라던 바였고, 장준하는 민중이 바라는 바로 그 방향으로 자신을 쇄신해나갔다. 민중 주체의 민족주의로 역사와 세계인식을 확장시켜나간 것이다.
1973년 장준하는 주로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의 연대와 연합을 위해 헌신했다. 이 시기에 장준하는 김재준, 김수환, 함석헌, 지학순, 법정, 이태영, 계훈제, 백기완, 홍남순 등을 주로 만났다. 그리고 그 해 12월24일 YMCA회관에서 전격적으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른바 10월 유신 이후 최초로 나타난 조직적이고 평화적인 저항운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장준하는 백기완과 함께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74년 연말 신병 악화로 형집행정지처분을 받고 나온 장준하는 이듬해 1월8일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씨의 소리’ 1975년 1·2월호)을 전격 발표했다. 당면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파괴된 민주질서를 조속히 평화적으로 회복하는 데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장준하는 이 무렵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민족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뚫고 나가기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기로 결단했다. 함석헌이 장준하 추도식에서 자신은 그때 하루도 장준하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했을 만큼, 장준하는 매일이 자기 생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순교자의 나날을 살았다.
운명의 그날 1975년 8월17일, 해방된 지 30년 이틀째 되는 이날,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으로 향했다. 그 길이 이승에서 장준하의 마지막 길이 되었다. 장준하는 약사봉 계곡 암벽 바로 아래 떨어져 숨졌다. 향년 57세. 최초의 목격자 김용환은 당시 의문의 실족사를 이렇게 전했다.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시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장준하의 유해는 이튿날에야 가족에게 인도되어 상봉동 셋집으로 돌아왔다. 작고 좁은 골목길에 포장을 치고 문상객을 받았다. 이태영이 달려와 미망인 김희숙을 붙잡고 통곡하면서 앞으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 거냐고 하자, 김희숙은 몽유병자처럼 “그 양반이 언제 생활비 가져온 적이 있나요” 하고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날 장준하의 상봉동 집 뒤주에는 쌀 한 됫박이 일용할 양식의 전부였다.
광복 직후 중국 시안(西安) 비행장에서 귀국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찍은 사진. 왼쪽 다섯 번째부터 장준하, 노능서, 김준엽, 다시 세 사람 건너 이범석 장군.
장준하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장준하의 죽음에 대해 함석헌은 가슴이 끊어지는 아픔을 안고 울고 또 울었다.
“장준하가 죽었다! 죽었다! 이 한마디가 이 8월의 노염(老炎)의 무더운 공기마냥 부쳐도 부쳐도 또 오고 또 와서 가슴을 누릅니다…아, 장준하야! 네가 나를 생각케 하는구나. 내가 생각을 파고 파 빈 무덤을 발견하는 날, 우리가 다 같이 누리는 영원한 나라의 영광의 자리에 앉히리라.”(‘아 장준하!’, ‘함석헌 전집’ 8권)
장준하의 방 벽에는 나무꾼을 그린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 낭떠러지에 걸린 한 그루 소나무에 관한 시구가 있다. 그 그림처럼 장준하는 역사의 절벽에 서 있던 소나무를 잡다가 떨어져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으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은 광복 30주년에 주는 ‘역사의 말씀’이었을까. 그 봉인된 역사의 두루마리에 적힌 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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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에서 치른 영결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추모했다. 영결식을 마친 장준하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의 천주교 나사렛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장준하가 학병에서 탈출한 쉬저우에서 충칭까지 6000리길을 현장 체험하는 ‘장정’행사를 벌이고 있다.
장준하가 걸었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그 길을 그의 사후 동갑내기 친구인 문익환이 걸었다. 그 문익환도 이제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