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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 속 위기의 사랑’ ⑪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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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장애물과 실패한 사랑의 영원함

‘그 여자네 집’과 비슷한 경우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를 들 수 있다.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비틀스의 노래를 들은 주인공은 초란처럼 연약했던 20대의 첫사랑을 생각해낸다. 말 그대로 초란처럼, 따뜻한 온기를 품었지만 여기저기 혈흔을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 말이다. 그 회고 속에는 죽어버린 친구, 자살한 여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추억은 비극 속에서 강렬해진다.

멜로드라마는 세속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래 비극이란 운명적 결함(hamartia)을 지닌 인물들의 좌절을 그린 그리스 고전 희곡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운명적 결함’이라는 말이다. 운명적 결함은 이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신이 내려준 운명, 숙명 외에는 거의 완벽한 인간임을 전제로 설정되어 있다. 오이디푸스처럼 말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왕족이라는 고귀한 혈통, 스핑크스를 이겨낸 지략가의 면모, 정적을 물리칠 용맹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니까 인간 중에 가장 윗길의 인간인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럼에도’다. 그토록 완벽한 인간임에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 그 실수의 근간에는 ‘운명’이 놓여 있다. 인간적 힘으로는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신의 가혹한 체벌이 ‘운명’이라는 말 속에 녹아 있다.

멜로드라마는 대개 비슷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이 열렬히 사랑했지만 어떤 장애물로 인해 영원할 법한 사랑이 방해받았다는 문법 말이다. 아마도 이 멜로드라마 문법 중에서 가장 고전이 될 만한 것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열렬히 사랑했지만 서로의 이름, 가문이 내려준 ‘성’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연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외부의 방해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전형적 이야기다. 혼사 장애와 순애보의 고전으로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운명적 장애물로 더 빛나는 불온한 혹은 지순한 사랑

‘트리스탄과 이졸데’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 너머의 사랑, 이 공식이야말로 수많은 연애 서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의 아내를 사랑한 신하, 적의 딸을 사랑한 병사처럼 극복할 수 없기에 그 사랑은 더 숭고해 보인다. 케빈 레이놀즈 감독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 역시 그렇다. 12세기 켈트 족 신화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사랑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고전 중 하나다. 운명적 우연과 돌이킬 수 없는 정염의 소용돌이 속에 펼쳐지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격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연애 서사시다.

켈트 족 신화 속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신화의 속성상 운명의 장난에 가깝다. 사랑의 묘약을 잘못 나눠 마신 두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이니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신화 속에서 트리스탄은 슬픔에 빠져 죽고 이졸데도 따라 죽는다.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환상적 성격이 강한 신화를 역사적 배경을 근간으로 한 연애 서사시로 각색했다.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해묵은 갈등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로 전치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적국의 여인을 사랑한 트리스탄과 그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인 이졸데, 이 보편적이면서도 오래된 구성은 지금까지도 자유롭지 못한 두 나라의 갈등 위에서 팽팽히 진행된다.

신에서 인간으로

바그너의 오페라로도 잘 알려진 이 이야기의 힘은 금지된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압축된다. 적국의 여인이기에, 그리고 충성을 다짐한 영주의 아내이기에 열정은 더해간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했던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를 선택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윤리와 법이 금지한 사랑에 빠지는 것은 통속적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전해온 사건임에 틀림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매력 중 하나는 몸과 칼이 부딪치는 원시적 전투의 생명력이다. 특별한 기계적 도움 없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촬영된 전투 장면은 고전적 로맨스의 질감을 강화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가득 찬 스크린에 익숙해진 눈에 투박한 질감으로 완성된 12세기 영국 풍경은 독특한 아우라를 제공한다.

고전적 로맨스의 질감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성적 사랑뿐 아니라 마크 영주와 트리스탄 간에 충성과 신의로 맺어진 남성적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안타까움만큼이나 격정적인 트리스탄의 눈빛은 두 여인을 사이에 둔 갈등보다 더 절절하게 받아들여진다. 품위 있고 격조 있는 영주 노릇을 한 루퍼스 스웰 역시 마찬가지다.

트리스탄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드라마에는 엄밀히 말해 새로운 이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오래 묵은 로맨스는 보는 이의 가슴을 들뜨게 한다. 금지된 사랑과 장애물 너머의 사랑이 인류의 영원한 서사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 그것이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다.

고전적 비극은 신 앞에 작아져야만 하는 인간의 비애를 드러낸다. 아니, 인간의 비애만큼이나 신의 강건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 비해 세속 비극으로서 멜로드라마는 신과 인간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낸다. 말 그대로 비극의 원인이 바로 세속적 인간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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