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호

‘광폭 행보’ 박근혜의 대권 계산법

  • 송국건 영남일보 정치부 기자 song@yeongnam.com

    입력2008-11-05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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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요즘 조용하다. 조용한 가운데 스스로를 ‘리모델링’하고 있다는 평이다. ‘이미지 정치’ ‘영남’ ‘당내 소수계파’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변신을 차분히 준비 중이다.
    ‘광폭 행보’ 박근혜의 대권 계산법

    9월29일 국회에서 박근혜 전 대표(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한나라당 보건복지가족위 위원들이 먹을거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동생 박근령씨가 10월13일 서울 여의도 KT 컨벤션 웨딩홀에서 신동욱 백석문화대 교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자리에 박 전 대표와 남동생 박지만씨는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 자체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오전부터 서울 송파구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장에 나와 있었다. 점심을 국감장에서 해결한 그는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박근령씨 결혼식이 시작된 시각인 오후 4시를 조금 넘어 일어섰다. 박 전 대표는 이후 한 행사(결혼식과 관련 없는)에 참석한 뒤 지인들과 저녁을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결혼식이 있던 이날도 박 전 대표는 평상시 일정을 소화했다. 박 전 대표의 일상은 조용하고 평범하다. 낮에는 정기국회가 소집돼 있는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국정감사 피감기관에서 의정 활동에 열중한다. 공식적인 일과가 끝나면 이런저런 모임에 적극 참석한다. 국회의원의 통상적인 활동 같지만 박 전 대표가 그렇게 하면 의미가 달라진다. 정가에서는 “박근혜가 달라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8·20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패배 이후 1년여 만에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꼬박꼬박 정책 질의에 몰두”

    대선후보 경선 이후 대선 본선과 4·9 총선을 거치는 ‘정치의 계절’에도 박 전 대표는 밖으로 드러나는 활동은 최소화했다. 대선 때는 매우 제한적인 이명박 후보지원유세를 했고, 4·9 총선이 한창일 당시에는 당 안의 ‘친박’과 당 밖의 ‘친박’을 아우르기 위해 스스로를 자제했다. 총선이 끝난 뒤에는 당 밖의 친박 의원들을 일괄 복당시키느라 몇 가지 승부수를 띄워 성공시킴으로써 당내에 ‘박근혜계’를 안착시켰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도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거나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는 형식으로 ‘메시지 정치’를 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되면서 각종 공·사 모임에 적극 참석하고 있다.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에 꾸준히 나가는 것은 기본이다. 박 전 대표는 이전부터 철저한 의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일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당 대표와 대선 경선후보를 지낸 4선 의원이면서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으로서 초·재선 의원처럼 행동한다. 다른 중진 의원들은 국감장에 잠시 머물다 슬그머니 사라져야 ‘체면’을 지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는 되도록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보건복지가족위 박근혜 전 대표는 꼬박꼬박 국감장을 찾아 ‘정책질의’에 몰두하고 있다.”(‘연합뉴스’ 10월 12일 보도)

    피감기관은 박 전 대표의 핵심을 찌르는 질의에 애를 먹는다. 10월13일 국민연금관리공단 국정감사에선 “국민 67%가 공적연금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이 노후 소득을 보장하기에 턱없이 모자란다(2050년 연금수급자들의 평균 급여액은 최저생계비의 20%에도 미치지 못함)”고 밝혔다. 그는 “재정예상 결과, 노후보장 실태, 향후 전망을 공개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삶의 문제 찾기 위해…”

    일부 언론에서는 그를 ‘국감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언론이 선정하는 ‘국감 인물’은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초·재선의 소장파지, 박 전 대표와 같은 거물급은 드물다.

    “…오늘의 국감인물은 어떤 분인가요. … 보건복지가족위원으로 첫 국감에 나선 박근혜 의원입니다. 박 의원은 ‘중국산 식품의 멜라민 파동과 관련해….”(‘극동방송’ 10월 6일 보도)

    “국감인물 박근혜 : 나직하면서도 강직한 목소리로 송곳 같은 질의를 쏟아냈다. 흡사 초선 시절로 되돌아간 듯 보였다. 바른 국감의 귀감을 보여줬다.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앞으로 활용하겠다’는 답변을 이끌어냈다.”(‘서울신문’ 10월 9일 보도)

    박 전 대표의 측근은 “박 전 대표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중요한 문제를 찾아보겠다는 마음으로 보건복지가족위를 택했다. 국감 준비에 열성을 보였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달라진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식적 의정활동과는 별개의 모임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대구 껴안기’ 행보가 눈에 띈다.

    박 전 대표는 지난 9월24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2008 대구국제육상경기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한 뒤 경기를 관람했다. 이어 25일에는 대구지역 공무원들과 점심을 겸한 2시간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자리는 박 전 대표가 대구지역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들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해 이뤄졌다. 앞서 23일에는 서울에서 김범일 대구시장과 한나라당 대구 출신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정책간담회가 열렸다. 국회의 내년도 예산심사 과정에서 대구 지역 현안 사업에 필요한 국고지원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기 위한 대책회의 성격이었다. ‘전국구’ 정치인인 박 전 대표는 그동안 대구지역 당정회의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은 4시간 30분 동안 자리를 지켰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지원 문제 등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친MB’에서 ‘친박(朴)’으로

    이날 낮엔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당내 초선 여성 의원들과 오찬을 함께하며 접촉 폭을 넓혔다. 무거운 주제 대신 가벼운 농담이 오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박 전 대표는 이외에도 당 안팎 인사들과의 개별 접촉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계보인 ‘친박(親朴)’뿐 아니라 ‘친이(親李)’ 계열 의원들과 당 안팎의 원로들을 폭넓게 만난다. ‘대중을 상대로 한 이미지 정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던 과거의 박 전 대표가 아니었다.

    대선후보 경선 캠프와 외곽조직에서 일했던 옛 참모들과는 이미 그룹별로 한 차례 이상 격려 식사 자리를 가졌다. 최근에는 그 대상자를 친이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에게로 확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선 “친이 계열 OOO 의원이 친박 진영으로 넘어갔다더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그중 한 의원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주역 중 한 명이다.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박근혜 사람’으로 꼽혔지만 결정적인 순간 예상을 깨고 ‘MB 캠프’에 가담한 뒤 경선 선대위와 대선 선대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대선 승리 후 대통령직인수위를 거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총선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이 의원은 언론에선 이명박 대통령의 직계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절대 내색은 하지 않지만 친이 진영에서 ‘월박(越朴)’을 결행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친박 의원들과 더 자주 어울리고 박 전 대표가 참석하는 모임에도 꾸준히 나간다. 이런 사례는 현역 의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재기를 노리는 전직 의원이나 청와대 입성의 포부를 가진 젊은 국회 보좌진 중 상당수는 ‘차기’를 겨냥해 박 전 대표 측에 줄을 대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 ‘박근혜 쏠림’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측근 의원은 이런 현상에 대해 “이명박 정부 이후에도 정치를 계속해야 하므로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초반부터 워낙 실망감을 안겨주니 시기가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여권 인사가 벌써 ‘다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친박계 김선동 의원도 한 라디오 방송에서 “박 전 대표를 따르거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하는 의원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런 추세에 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나 같은 경우에도 (박 전 대표의) 비서실 부실장을 한 경력 때문에 밥이나 한번 먹도록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고 덧붙였다. ‘친이’ 계열인 나경원 의원도 “요즘 당내에서 박근혜 의원 쪽으로 옮기는 분이 많다는 얘기가 들린다”고 밝힌 바 있다.

    ‘새롭게 시작되고 있구나’

    이는 박 전 대표의 소리 없는 변신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박 전 대표가 그동안 ‘계파정치’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냈지만 최근 들어 친박 세력의 조직화를 묵인하는 듯한 자세를 보인다는 분석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지난해의 실패가 조직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란 생각을 했을 수 있다.

    친박계 유정복 의원과 유기준 의원은 각각 ‘선진사회연구포럼’과 ‘여의포럼’이란 당내 모임을 이끌고 있다. 이 두 조직은 ‘공부 모임’을 지향하면서 정치적 해석을 경계하고 있지만 결속력이 상당해 언제든 박 전 대표를 위한 전위부대로 바뀔 수 있다는 평가다. 선진사회연구포럼은 현재 38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당내 친박과 복당한 친박이 섞여 있다. 이재오 계열 조직으로 간주되는 ‘함께 내일로’의 대척점에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 모임은 매월 한두 차례 조찬 강연과 토론회를 연다. 유정복 위원은 지난해 서울 여의도 엔빅스 빌딩의 ‘박근혜 캠프’에서 상근했던 실무진 30명가량을 최근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다. 1년여 만에 ‘엔빅스 팀’이 처음 모인 자리였다. 한 참석자는 “구체적인 말이 오간 것은 아니지만 ‘새롭게 시작되고 있구나’라는 분위기를 느꼈다”고 전했다.

    여의포럼은 4·9 총선에서 당선된 친박 무소속 의원 12명이 5월에 만든 연구단체였지만 이들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멤버가 23명으로 늘었다. 대표는 유기준 의원이지만 김무성 의원이 좌장 격이다. 박 전 대표는 이 두 모임에 두어 차례씩 참석했다. 박 전 대표는 의원 모임뿐 아니라 최근 자신의 인터넷 팬클럽인 ‘근혜사랑’ 모임에도 들러 회포를 푼 것으로 전해진다. 경선 캠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K씨는 이렇게 분석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형태를 갖추자’는 생각인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사람만으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굳이 나서서 ‘모임을 하지 말라’고는 안 한다. 경선을 전후했을 때처럼 강력하게 막기보다는 좀 느슨하다.”

    그러나 박 전 대표 측 이정현 의원은 “박 전 대표가 변했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상황에 따라 이렇게저렇게 변했다는 것은 우리로선 거북한 말”이라고 했다. 이 의원은 “당 대표로서 활동할 때와 경선후보일 때, 그리고 아무런 직책을 갖고 있지 않을 때는 당연히 언행을 달리 해야 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변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K씨가 참여하는 모임은 물론, 선진사회연구포럼과 여의포럼조차 박 전 대표의 외곽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의원은 “일부 언론에서 나를 선진사회연구포럼 멤버로 분류했으나 한 번도 나간 적 없다”고 일축했다.

    ▼ 두 포럼은 박 전 대표의 ‘차기’ 도전을 위한 계보모임이란 시각이 있는데요.

    “조직 관리와는 관계 없는 모임입니다. 다음 대통령선거까지 4년 반이나 남았고,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벌써부터 차기 대권 얘기가 나오는 게 바람직합니까? 있을 수 없는 행동이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어요. 단순한 공부모임이죠. 그것이 우리의 공식적인 생각입니다.”

    ▼ 박 전 대표가 그렇게 간주한다는 건가요?

    “그렇죠. 대표와 대화를 나눠봐도 ‘그것은 전혀 아니고 단순한 모임이다, 계파나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세요.”

    국회와 당에서 친박 의원들의 조직적 움직임은 늘었다. 지난번 추가경정예산안 처리 불발 사태로 홍준표 원내대표가 궁지에 몰렸을 때 이재오·정두언계는 홍 원내대표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했다.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맞섰던 홍 원내대표가 국회사령탑으로 있는 것이 마땅치 않은 까닭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친박 의원들은 적극적으로 홍 원내대표를 옹호했고, 그가 재신임을 받는 데 기여했다.

    이정현 의원은 박 전 대표의 조용한 행보를 이렇게 설명했다. “현직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갈 때는 화합을 하는 방법도 있고, 자기 사람들을 중심으로 밀고 나가는 방법도 있다. 지금은 이 대통령이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하는데, 그것도 성공하면 괜찮은 방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 대표도, 총리도 아닌 평의원 입장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새 정권 초반부터 다음 선거운동을 하는 것으로 비칠 뿐이다. 박 전 대표가 현안에 대해 사사건건 의견을 말하면 갈등이 생기고 분열된다. 결국 여권이 깨질 수도 있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수준에서 하면 된다.”

    “조용히 지켜보는 게 도리”

    그는 “지금은 조용히 지켜보는 게 도리”라며 “그것이 이 대통령을 돕는 최상이자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이 같은 박 전 대표의 조용한 변화에 여권이 술렁이고 있다. 친박계는 친박계대로, 친이계도 그들대로 박 전 대표의 진행 방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누가 뭐래도 현재로선 박 전 대표는 ‘차기’에 가장 근접해 있는 인물이기에 박 전 대표가 정가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때를 맞춰 ‘이재오 연내 귀국설’이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 연수 중인 이 전 최고위원이 조기 귀국해 흐트러질 조짐을 보이는 범(汎) 친이계를 다잡고 이 대통령이 지원하는 인물로 정권을 이어가기 위한 초기 작업에 돌입할 것이란 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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