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호

한국경제의 대응

중대 갈림길… 경제체질 개선이 진정한 경기부양책

  • 전영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serijyj@seri.org

    입력2008-11-05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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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의 대응
    세 ‘마녀(魔女)’의 공포가 한국 경제를 엄습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금융 불안, 실물경제 둔화, 국제수지 적자 확대로 인한 대외불균형이 그것이다. 전세계로 빠르게 확산되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부실의 파장은 국내 금융시장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극도의 불안심리가 팽배한 가운데, 우리의 금융시장은 글로벌 금융기관의 부실, 유동성 및 신용위기의 위험성 등 외부요인이 돌출될 때마다 극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10월14일 현재 코스피(KOSPI) 지수는 심리적 저지선이라 여겨졌던 1400선을 밑돌아 1367을 기록했다. 지난 연말대비 27.9% 하락한 셈이다. 특히 지난 9월 이후 금융 불안심리가 확산되면서 금융시장의 변동성은 확대 일로에 있다.

    세 마녀의 협공

    비록 ‘9월 위기설’(채권시장에 몰려있던 외국인 투자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자금난과 더불어 금리급등 등 금융부문에 대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소문)은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됐지만, 정작 문제는 나라 밖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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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니메, 프레디맥 등 미국 공적 주택금융기관의 국유화 조치를 시작으로, 리먼브라더스의 파산, 메릴린치의 피(被)인수, 보험회사인 AIG 부실 처리, 마지막으로 부실채권 매입을 위한 7000억달러 규모의 공적자금 동원 결정에 이르기까지, 금융부실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 정부의 조치는 숨 가쁘게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국내 증시는 널뛰기를 반복했다. 환율 불안 또한 고조되는 실정이다. 올 한해 달러 가치의 하락이 전세계적으로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원화는 달러에 대한 약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금융위기가 고조되고 외화유동성에 대한 압박이 커지면서 한때 달러 당 1400원을 넘어섰던 원/달러 환율은 이후 금융 불안에 대한 국제 공조 강화로 10월14일 현재 1200.8로 내려갔지만 여전히 연초 대비 22% 이상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이후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며 외환보유액이 불과 다섯 달 만에 210억달러나 줄어들었지만 환율 상승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 불안이 실물부문의 위기로 전이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우려’가 아닌 ‘현실’이 됐다. 실물경제 흐름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성장과 물가 모두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5% 중반의 괜찮은 증가세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은 하반기 들어 뚜렷한 하강세를 보이고 있다. 지금 상황대로라면 하반기 성장률은 4%대를 넘기가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수출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며 호조세를 보이고 있지만, 소비와 투자 등 내수부문이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는 것이 경기 둔화를 심화시키는 최대 요인으로 작용했다. 경기가 둔화되고 있는 상황에선 인플레 압력이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금은 경기부진에도 불구하고 물가불안이 진행되는 상태다. 현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한국은행이 물가안정의 목표 범위로 설정한 2.5~3.5%대를 훌쩍 뛰어넘어 5%대 초반에 이르렀다.

    대내적 불안에 더해 경상수지 및 자본수지 적자 등 대외불균형도 심각하다. 그동안 고유가 및 원자재 가격 급등에 따른 수입 급증으로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면서 경상수지 또한 연초부터 적자 행진을 하고 있다. 2008년 8월까지 누적 경상수지 적자액은 100억달러를 훌쩍 넘어선 126억달러에 달한다. 경상수지가 적자라는 말은 벌어들인 돈보다 쓴 돈이 많다는 의미다. 자연히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선 해외에서 돈을 끌어다 써야 한다.

    이처럼 보통의 경우라면 경상수지 적자가 나면 자금의 유·출입을 나타내는 자본수지는 흑자(국내로 자금이 유입되므로)를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을 반영해 외화자금이 국내에서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자본수지 또한 적자를 보이고 있다. 상품이나 서비스 거래에서도 돈이 유출되고, 자본거래에서도 자금이 빠져나가니 환율은 상승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금융 위기의 주연과 조연

    우리의 외환보유고 수준이나 GDP 대비 경상수지 적자비율을 따져 볼 때 과거 외환위기 때와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다른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외불균형이 심화되고 외화유동성 부족현상이 확대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때가 돼도 현 외환보유고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계속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적 시각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높은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낮은 물가수준을 보이는 경제를 ‘골디락스 경제’라고 한다. 고성장, 저물가에다 금상첨화로 경상수지 흑자까지 누리면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표현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세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상황에서 ‘세 마녀’의 망령에 시달린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들 세 마녀가 바다 건너 저편으로부터 날아왔다는 사실이다. 국내 문제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면 그 원인을 캐내 수습책을 마련하면 되지만 우리의 통제 영역 바깥에서 발생한 문제라면 해결책을 찾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국내 금융시장의 불안이 직접적으로 글로벌 금융 불안에 의해 촉발됐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실물경제 불안과 경상수지 적자 역시 글로벌 금융 불안의 연쇄적 상호작용에 기인한 것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글로벌 금융 불안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달러가치가 급락하자 국제 자본은 원유 및 원자재시장으로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크게 뛰었다. 이는 물가불안으로 바로 연결됐으며 물가불안은 다시 소비심리 위축과 구매력 축소를 촉발해 종국에는 실물경기의 냉각을 가져왔다. 글로벌 금융 불안, 유가·원자재 가격 급등은 한편으로 대외불균형을 확대시켰고 환율의 급격한 변동을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파고가 높아가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한국 경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대외 변수들의 향방에서 우선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대외 경제환경이 개선된다면 한국 경제의 회복 가능성도 높아지겠지만, 빠른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그만큼 한국 경제의 회복은 더디게 진행될 것이다.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핵심 요인은 글로벌 금융 부실 문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기의 침체, 환율이나 유가와 같은 가격변수의 급변동 등 온갖 경제 불안의 핵심에는 서브프라임 부실에서 촉발된 금융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선 지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긴장 넘치는 드라마가 각본도 없이 전개되고 있다. 드라마의 주연은 집값이 계속 오르리라는 환상 속에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돈을 빌려 집을 구매한 미국의 주택 수요자와, 자격이 안 되는 이들에게 주택담보대출을 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파생금융상품을 창출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투자은행 등 금융기관들이다. 굳이 이 드라마의 조연을 든다면 주택시장에 거품이 형성될 조짐이 보였음에도 역사상 유례없는 초저금리를 유지하다 뒤늦게 주택 버블 붕괴의 위험성을 깨닫고 금리를 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주택경기 냉각과 서브프라임 담보대출의 부실을 초래한 미국 FRB(연방준비위)가 될 것이다.

    주택경기 호황에 힘입어 급증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저신용자에 대한 장기 주택담보대출)이 금리상승과 주택경기 둔화로 부실화되면서 촉발된 금융 불안은 서브프라임 관련 파생상품의 연쇄 부실과 이에 따른 금융기관의 잇따른 부실화로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세계 5대 투자은행 중 메릴린치, 리먼 브라더스, 베어스턴즈 등 세 군데 은행이 문을 닫거나 다른 곳에 팔려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전 세계 금융기관이 서브프라임 관련 자산의 부실로 입은 손해는 장부상 손실만 따져도 무려 5000억달러에 달한다.

    ‘끝의 시작’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적게는 5000억달러에서 많게는 1조달러 이상 추가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외로 부실 규모가 확대되자 금융시장에는 일종의 패닉 현상이 빚어졌다. 금융기관 사이에 자금거래가 거의 중단되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더 많은 금융기관이 부실화되고 파산의 길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신용위기’ 현상까지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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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이 각본 없는 ‘금융위기’ 드라마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1920년대 말의 대공황처럼 전면적인 금융시스템 마비와 실물경제 위기라는 대파국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1980년대 말의 미 저축대부조합(S&L) 부실처럼 피해가 결코 작지 않지만 시스템의 붕괴까지 가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원 부결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통과된 미국의 ‘긴급 경제안정화법안’(일명 구제금융법)은 일단 금융시스템의 파국을 방지하는 안전판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7000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재정자원을 투입해 정부가 금융시장이 보유한 부실금융자산을 사들인다는 이번 조치는 금융기관의 유동성 부족 및 신용경색 현상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뢰의 상실로 거래가 실종된 모기지 관련 금융상품을 정부가 매입함으로써 시장가격을 형성시키고 자산가치의 급락을 방지해 향후 손실 규모가 확대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부실을 떨어낸 금융기관들은 외부자금 수혈 등 자본 확충을 통해 회생책을 강구할 수도 있으며, 부실이 정리된 상태라면 인수합병 등 금융기관의 구조조정도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 지원 조치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부실규모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원 규모가 충분치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조치는 금융기관의 손실을 직접적으로 보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장기능을 정상화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손실을 그대로 떠안아야 하는 금융기관들이 추가로 파산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이르면 11월부터 정부가 부실자산을 매입하게 되는데, 자산 가격 산정을 둘러싸고 진통이 예상되며 그 효과가 본격화되기까지는 상당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현 상황은 위기의 끝이 아니라 ‘끝의 시작(beginning of end)’이다. 터널 끝 희미한 빛이 보이긴 하지만 아직 어둠 깊은 곳에 머물러 있고 그 끝으로 가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뜻이다. 물론 위기가 완전하게 해소되는 시점을 지금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적어도 1~2년 동안은 불안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현 금융 불안의 첫 출발점이 주택경기 둔화에 따른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임을 상기해본다면, 미국의 주택 경기가 다시 회복돼야 금융 부실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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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 경제 핵심변수 아니다

    미국 주택 경기는 2006년 정점에 도달한 후 큰 폭의 하락세를 보여왔지만 아직도 소득 대비 주택가격 수준 또는 임대료 대비 주택가격(주식시장의 P/E와 비슷한 개념으로 주택 보유에 따른 수익인 임대료를 주당 이익으로 보고 주택가격이 이익의 몇 배인가를 따지는 것)은 적어도 10% 이상 적정선을 상회하고 있다. 하지만 가격 하락기에는 적정선 아래까지 더 떨어진 후 반등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추가 가격 하락 폭이 10%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주택의 가격 조정이 완료되려면 적어도 2009년 상반기는 지나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이후라야 바닥을 치고 반등할 수 있다는 얘기다. 주택 경기가 1년 이후에나 회복 가능하다면 금융부실의 해소는 그보다 뒤늦을 수밖에 없고, 글로벌 금융위기의 탈출도 그 이전에는 기대할 수 없다.

    금융 불안이 최고조로 확산되기 시작한 9월 이전, 경제의 최대 화두는 ‘고유가’였다. 유가 급등으로 물가불안이 심화되고 내수가 더욱 위축됐을 뿐만 아니라 경상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7월 한때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선(WTI 기준)을 넘어서면서 유가 200달러 시대가 도래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확산됐다. 저성장-고물가 기조가 고착화되며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 대한 우려가 증폭됐다.

    그런데 7월 중순을 고비로 국제유가는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며 최근 들어선 하락 폭이 커지고 있다. 7월14일의 정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엔 유가가 40달러 오르는 데 100일가량 걸린 반면 이후엔 유가가 40달러 내리는 데 불과 50여 일밖에 걸리지 않은 것만 봐도 현 유가 하락세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앞으로도 유가 하락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의 유가 상승은 국제자본이 개도국을 중심으로 석유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달러 약세가 계속되자 실물 부문으로 급속하게 이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글로벌 경기침체로 석유수요 둔화 우려설이 나오자 금융적 수요는 급감했고 유가는 10월13일 현재 배럴당 81달러(WTI) 수준까지 떨어졌다. 향후 세계 경기 둔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유가가 다시 상승세로 반전되기는 쉽지 않다. 세계의 경기 둔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석유를 사들일 국제자본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의 하향 안정화로 세계 경제는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는 다르게 해석하면 앞으로 유가가 경제의 핵심 변수가 될 수 없음을 뜻한다. 향후 유가가 오르기보다는 내릴 가능성이 높은데다, 유가가 떨어졌다고 해서 현재의 경제 불안이 해소될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 유가 하락은 원유 수요의 감소, 즉 세계 경기의 둔화 폭이 매우 클 것임을 시사한다. 그만큼 경기에 대한 리스크가 커질 것임을 예고한다.

    물론, 유가 하락으로 물가에 대한 불안이 해소될 여지가 생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고유가의 충격은 유가가 하락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시차를 두고 물가에 반영되기 때문에 물가 상승 압력도 급속히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기 둔화의 리스크는 커진 반면, 적어도 단기간에는 물가 상승 압력이 유지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고유가의 광풍이 휘몰아치다 지나갔지만 그 후유증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2007년 이후 금융 불안이 확산되는 와중에도 세계 경기는 비교적 양호한 성장세를 보였다. 금융부실의 진앙지인 미국 등 선진국의 경기는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자원부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의 경기는 지속적으로 호조세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8년 하반기 들어 개도국마저 경기 둔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어 세계 경기의 하강 리스크가 점차 커지고 있다.

    개도국 경기 리스크 주목!

    개도국 경기가 본격적으로 둔화될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경기 부진 여파가 시차를 두고 본격적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미 미국 경제는 2007년 하반기 이후 뚜렷한 경기 하강세를 보여왔다. 금년 상반기에 대규모 세금환급으로 반짝 회복되는 양상을 나타냈지만 주택 부문 침체가 지속되고 금융위기가 실물부문으로 파급되면서 좀처럼 회복의 기미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주택 경기의 회복이나 금융 불안의 해소가 아무리 일러도 1년 이내에 가시화되기 어려움을 감안할 때 미국 경제는 불황까지는 아니라도 지지부진한 경기부진의 국면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미국 경제의 부진 기간이 길어질수록 개도국들은 경기부진의 무풍지대에 안주하기가 어려워진다.

    지난 수년간 개도국들의 경기 호조가 이어지면서 부실과 과잉이 축적되었다는 점도 향후 개도국 경기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부분의 개도국은 그동안 잠재성장률을 웃도는 성장을 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수요 압력이 점증됐다. 여기에 고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이라는 공급 측 충격이 가세함에 따라 심각한 물가상승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향후 유가 하락으로 물가불안이 해소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그 효과가 가시화되기 까지는 일정 시차가 존재하며, 비록 유가가 하락한다고 해도 그동안의 경기과열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은 아직 남게 된다. 개도국들은 경기 리스크와 인플레이션 리스크의 경중(輕重)을 따지는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입장이며 긴축의 고삐를 죄던가, 적어도 과감하게 경기 부양에 나설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는 개도국의 경기 둔화 폭이 더욱 커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 EU와 일본 등 선진국의 경기부진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개도국들의 경기마저 둔화된다면 한국 경제에는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재 한국 경제는 내수 부진을 개도국 중심의 수출 호조로 만회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만일 개도국 경기가 둔화되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에 대한 수출이 타격을 입게 된다면 경기 안전판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다. 개도국의 경기 리스크에 눈을 돌려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외 경제환경은 결코 우호적이지 못하다. 현재 한국 경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대외 변수들이 호전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유가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더 이상 상황이 악화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는 일정 부분 기여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경제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임은 앞서 설명했다.

    부진의 기간 길다

    불확실성이 고조된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 경제에 대한 전망을 하긴 어렵지만, 대외 여건의 악화와 내부 조건을 고려할 때 빠른 경기회복을 기대하긴 힘들다. 특히 2009년 한국 경제가 직면한 대외 환경은 2001년 이후 최악의 상태라고 볼 수 있으며 대내적으로도 내수를 회복세로 전환시킬 만한 내부 역량이 미흡한 실정이다.

    한국 경제는 2000년대 들어 2001년과 2003년 두 차례 경기침체를 경험했다. 2001년에는 IT 버블 붕괴로 전세계 경제가 침체의 수렁에 빠지면서 수출이 10% 이상 감소하며 성장률이 3.8%로 급락했다. 다만 저금리 등 내수부양책을 추진한 결과 소비가 5% 가깝게 증가해 더 큰 폭의 추락은 막을 수 있었다. 2003년에는 ‘가계버블 붕괴’에 따른 후유증으로 내수가 큰 폭으로 위축되면서 또다시 성장률이 3%대로 떨어졌다. 가계부실 확대에 따른 가계의 구매력 감소, 신용불량자 급증 등으로 소비가 감소하면서 경제성장률이 3.1%로 하락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는 세계경제가 호황국면에 진입하는 초기로 한국은 20%에 가까운 수출 증가율을 보여 내수 부문의 마이너스 성장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었다.

    충격의 강도 면에서 보면 현재의 대내외 경제 여건은 이전 두 차례의 경기침체기에 비해서는 완만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 경제의 둔화가 예상되고 있지만 IT 버블 붕괴로 대부분 경제가 뒷걸음치며 침체에 빠졌던 2001년보다는 경기 둔화의 폭이 좁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금융 불안과 물가 불안으로 소비 증가세가 미진하기는 하나, 신용불량자 양산 등 가계 소비가 위기 수준으로 급감했던 2003년에 비해서는 내수 여건이 나은 편이다.

    따라서 경기 둔화의 폭은 2001년과 2003년에 비해 좁을 수 있다. 과거와 비교할 때 우려되는 점은 이전에는 수출이 어려우면 내수가, 내수가 어려우면 수출이 어느 정도 보완해줬지만 지금은 내수와 수출 모두 어렵기 때문에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또한 대외 여건 면에서도 2001년에는 일시적인 충격이 발생한 후 단기간에 침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으며 2003년에는 세계 경기가 바닥을 치고 회복되며 본격적인 호황국면에 접어들었는데, 지금은 세계 경기가 정점을 지나 하강국면에 진입해 있으며 그동안의 과잉과 부실을 치유하는 조정 국면이 상당 기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기 둔화의 폭이 과거에 비해 크지 않다고 하더라도 부진의 기간이 길어지거나 회복의 강도가 약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처럼 대외 여건의 호조에 기댄 성장을 지속할 여지가 축소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경제의 대응
    대외 여건 악화와 내부적인 내수 여력 부진으로 2009년 한국 경제는 4% 중반으로 예상되는 2008년 성장률에 비해 낮은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2008년부터 시작된 내수 부진 상태가 회복되지 않고 이어지는 가운데 세계 경기 둔화의 여파로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기 때문이다. 2009년 수출은 2003년 이후 6년 동안 지속되던 두 자릿수 증가세가 마감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경제의 대응

    지난 9월20일 경제부처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를 불러 금융상황 점검회의를 하는 이명박 대통령.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의 교훈

    2000년 이후 장기적인 둔화 양상을 보이고 있는 소비 역시 빠르게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용불안 등 미래소득에 대한 불안, 소득불균형 심화, 고용창출력 약화 등 소비 확대를 제약해온 요인들이 쉽게 개선되기 힘든데다 경기부진에 따른 고용 악화와 금융 불안 확대에 의한 소비 심리 위축이 지속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내수의 또 다른 축인 투자의 경우 이명박 정부의 감세, 규제완화 등 적극적인 투자 유인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으나 수출과 내수가 동반 부진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투자를 늘릴 여유가 없기 때문에 큰 폭의 증가세는 나타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부동산 경기의 미래도 그리 밝지 않다. 현재 국내 부동산 부문은 미분양 물량이 늘어나면서 건설투자가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각종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런 정책 효과가 가시화되는 데는 일정 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부동산 경기 회복은 전반적인 경기회복이 선행돼야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건설투자 역시 당분간 약세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환율 등 금융시장의 변동성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금융부실의 파장은 적어도 2009년 말까지는 지속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유동성 경색과 이로 인한 외화자금의 잦은 유출입이 진행되고 외환시장과 주식시장도 급등락을 거듭할 우려가 있다.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발표한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6%(올해는 4.4% 예상). SERI는 10월 15일 발표한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소비자 물가는 유가 하락 때문에 3.6% (올해 4.9%)로 하향 안정되고 수출증가율은 올해 (20.7%)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3%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내년 평균 원/달러 환율은 1040, 경상수지는 환율상승으로 올해 93억 5000달러 적자에서 6억달러 흑자로 바뀔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 경제의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내부적으로도 경기 하강의 위험이 커지는 2009년은 한국 경제가 실력을 시험받는 본격적인 무대가 될 것이다. 후한서 왕패전(王覇傳)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전한 말기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워 황제를 자칭하자 한(漢) 왕실의 일족인 유수(劉秀)가 반란을 일으켜 한(漢) 왕조를 복원하고 갱시제(更始帝)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황제의 심한 견제로 유수는 유랑과 다름없는 원정길에 나서게 된다. 그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자 전에 위세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떠나고 곁에는 오직 왕패(王覇)만이 남았다. 그 때 유수는 눈물을 흘리며 ‘세찬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강한 풀을 알 수 있도다(疾風知勁草, 질풍지경초)’라고 말했다.”

    ‘질풍지경초’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거센 바람 앞에 스러지는 연약한 풀이 될지, 꼿꼿하게 버티는 강한 풀이 될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대외 환경의 변화는 우리의 통제력 바깥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센 외풍에 맞설 수 있는 충분한 자생력과 복원력을 축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어나갈 때 외부 환경 악화로부터 발생하는 충격의 크기를 줄이고 또 이를 활용해 또 다른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경제 제도 개혁은 계속돼야

    향후 정책의 방향이 물론 중요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등 외부적 충격이 국내 부문에 파급되는 경로를 사전에 파악하고 그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예방 조치를 미리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계대출 급증, 부동산 금융의 부실 가능성, 외화유동성의 부족 등 예상되는 위험 요인에 대한 면밀한 사전, 사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경기둔화 리스크와 인플레이션 리스크가 공존하고 있어 정책 운신의 폭이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앞으로는 경기 리스크가 더욱 크게 작용할 전망이므로 경기활성화를 위한 최적의 정책을 조합해 추진해야 할 것이다.

    명심해야 할 점은 신성장 동력의 복원 등 경제의 체질을 바꾸어 놓는 근본 대책이 진정한 경기부양 대책이라는 사실이다. 자칫 단기적 현안에 매몰돼 당장의 경기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향후 성장잠재력 확충에도 기여하는 경제 제도 개혁을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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