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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

  • 조성일│출판평론가 pundit59@hanmail.net│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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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제는 한국 근대 100년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여성’ 문제다. 신분의 예속에 얽매여 현모양처로 살아가기를 강제당했던 여성들의 질곡은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여전하다.

박노자는 이 같은 여성의 예속을 성매매 여성과 신여성을 통해 고발한다. ‘~공화국’ 식의 이름 짓기는 ‘매매춘’ 앞에도 붙일 수 있다며 박노자는 2004년 성노예방지법 제정으로 우리 사회의 마지막 ‘현대형 노비’들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성화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여성 예속은 성리학과 메이지 일본과 기독교가 모든 여성을 ‘정숙한 숙녀’와 ‘음탕한 요부’라는 두 범주로 나누고 심판하는 남성중심주의적·중산층 위주의 이분법을 강요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근대 여성의 표상으로 칭송받는 신여성조차 이 같은 강고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허동현은 성매매 여성은 단순한 ‘성노예’나 자본주의 체제와 남성 중심 사회의 구조적 산물이 아니라고 본다. 오늘 우리 사회의 성매매 여성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성노동자이자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길 꿈꾸는 데서 알 수 있듯 한 세기 전 이 땅의 성매매 여성들도 민족과 국가의 동등한 일원이길 꿈꾸었다는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희생물로 보는 시각은 여권의 신화화를 통해 여권운동가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성매매 여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나누는 잘못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열린 관점을 가진 두 학자

요즘 ‘한류’로 통하는 대중문화 문제는 어떠할까? 박노자는 서구, 특히 노르웨이를 위시한 유럽의 한국 영화와 태권도 열풍에 슬며시 딴죽을 건다. 그들이 소비하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는 것. 한국영화나 태권도가 식탁에 오를 때 메뉴판에 적혀 있는 것은 ‘한국 문화’가 아니라 ‘아시아 문화’라는 것. 그래서 비판적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진정한 작가들의 민중 서사시보다 자본들이 노련한 솜씨로 다듬어 만든 포장 좋은 폭력물과 신비물이 외국에 훨씬 더 많이 진출해 ‘코리아’ 이미지 형성에 좀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이 아쉽다는 것이다.



허동현은 영화는 ‘자본주의적 악몽에서 세상을 깨우는’ 도구여야 한다는 박노자의 생각과 달리 욕망을 파는 문화상품이기에 다양한 영화가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살찌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영화인들이 치열한 역사의식과 작가정신, 그리고 비판정신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자본주의적 상품화에 따른 타락의 유혹과 할리우드 영화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민화나 헤게모니 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소지를 적게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번에는 종교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자. 박노자는 기독교와 무속신앙, 그리고 불교에 눈을 돌려 한국 종교의 명과 암을 살피는데 특히 무속신앙에 비중에 둔다. 개화기에 조선을 찾아온 외국인들은 무속신앙을 한국 민중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로 인식하면서 이것을 조선인의 ‘열등성’과 ‘의타성’으로 보았다. 하지만 무속신앙은 공동체의 안정과 합심, 갈등의 완화와 개인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완화제 역할도 수행했다는 것. 그럼에도 한국 근대는, 특히 기독교는 무속을 배척했다. 미신 타파의 광기 속에 무속은 긍정적 기능을 거세당한 채 배척과 억압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종교 중 하나인 불교는 어떤가? 박노자에게 한국 불교의 역사는 ‘부끄러움의 역사’다. 권력에 아부하고 사리사욕에 치우쳐 불교가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인 ‘무소유’의 실천에서 눈을 돌렸다고 비판했다.

허동현은 이 같은 박노자의 주장에 대해 무속과 기독교, 불교의 명과 암을 함께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속 역시 종교적 ‘마취제 장사’에 목매는 등 나눔과 더불어 삶이라는 종교의 정신을 망각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불교가 단순히 일제의 권력에 빌붙어 비자주적 종속 발전만을 꿈꾸지 않았다는 것은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에 온몸을 바쳤던 한용운이 잘 보여준다고 했다.

이렇듯 두 사람이 바라보는 한국 근대 100년은 서로 공감하는 부분보다는 달리 생각하는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그래서 합일점을 만들어가기가 쉬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다른 시각을 인정하고 그 견해를 반영하는 열린 자세다.

절대적 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열린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두 학자의 논쟁은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자 ‘내일의 어딘가’를 위한 진심 어린 조언으로 읽힌다.

신동아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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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일│출판평론가 pundit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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