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날아든 원로 코미디언 배삼룡씨의 투병생활과 잇따른 진료비 체납 소식은 화려한 연예계의 어두운 뒤안길을 보여주는 듯해 안타까웠다.
- 곳곳에서 그와 가족을 두고 억측과 험담을 만들어냈고, 그의 이름 석 자를 내세워 주머니를 채우는 이들도 생겨났다. 여전히 병원을 못 벗어나고 있는 배씨와 2년 가까이 간병 중인 두 딸을 만나보았다
1970년대 코미디의 대표주자 배삼룡씨는 지금의 중장년 세대에게 ‘비실이’라는 별명으로 친숙하다. 그는 별명에 걸맞게 비실거려서 웃기고, 멀쩡히 걸으면 의외의 효과로 더 많은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인이었다. 전성기 이후에도 ‘바보 연기의 원조’로 통하며 젊은 세대에게까지 이름과 얼굴을 알렸다. 이주일 심형래 이창훈 심현섭으로 이어지는 바보연기의 윗자락에는 배삼룡이라는 이름이 있다.
배씨의 이름이 최근 언론에 다시 오르내리게 된 것은 서울아산병원과의 체납 진료비 재판 때문이다. 서울아산병원은 지난해 8월 1억3000만원 상당의 진료비를 납부하라고 배씨와 가족들에게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올해 2월5일에는 서울 동부지방법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났다. 이 판결에 따르면, 입원비와 소송비용을 포함 2억여 원을 배씨와 가족들이 병원에 지급해야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코미디언이 얽힌 뜻밖의 소식이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본디 나쁜 소문은 좋은 소문보다 훨씬 빠르게 옮겨 다니는 법이다. 게다가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보니, 배씨의 치료를 둘러싸고 갖은 구설이 잇따랐다. 그는 지금 어떤 상태이며, 가족들은 이를 어떻게 해결할 계획인지 궁금했다.
배씨가 입원 중인 서울아산병원 병실을 찾았다. 배삼룡씨 본인이 병상의 자신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가족 역시 언론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서울아산병원 측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재판 결과 외에 더 보탤 말이 없다고 밝혔다.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어렵게 찾은 배씨의 병실은 두 딸 주영, 경주씨가 지키고 있었다. 흡인성 폐렴 판정을 받은 배씨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자 두 딸은 아버지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은 2007년 여름, 배씨는 심장이 정지된 상태로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 그날 이후 병세에 따라 일반 병실과 치료실, 중환자실을 오가며 이제껏 병원에 머물고 있다.
“한밤중에 당장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응급실에 들어온 거라 저희도 이렇게 오래 계실 줄은 몰랐어요. 폐렴에 합병증이 겹쳐 상태가 나빠지면 중환자실로 옮겼다가 다시 일반 병실로 돌아오기를 여러 번 했죠. 이렇게 괜찮으시다가도 균이 침입해 감염되기도 합니다. 불안정한 상태여서 이유 없이 붓기도 하고요.”
둘째딸 주영씨는 20개월 전 상황이 워낙 다급했다고 전했다. 배씨는 그전부터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4년째 투병생활 중이었고, 간간이 입원할 때마다 진료비를 일괄 납부했다고 한다. 이번에 20개월이나 입원하게 될지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병세가 장기화하는 통에 진료비 체납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두 딸이 그간의 상황을 담담하게 전하는 동안 배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그가 코미디언 배삼룡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아진 모습이다. 튜브를 통해 숨을 쉬고 유동식을 공급받고 있었다. 의사소통은 딸들이 옆에서 의중을 물어볼 때 좋고 싫음을 표현하거나 짧게 대답하는 정도라고 했다. 주영씨는 아버지의 얼굴을 닦아주며 아이를 보듯 환하게 웃었다.
“얼른 일어나시면 좋겠어요.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들을 다 해결하고 짧게 한마디하시겠죠. 아버지는 대범한 사람이고, 편찮으시기 전에도 표현을 많이 하는 분이 아니었으니까요.”
배씨는 1946년 악극단 ‘민협’에 입단하면서 연예인의 길에 들어섰다. 자라난 고향인 춘천에 악극단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삼룡이라는 예명을 이때 얻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창순. 어딘가 부족하면서도 친숙한 이름의 배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삼룡이란 이름이 훗날의 그를 만들었고, 나중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악극단에서 배씨는 연구생으로 다른 배우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간혹 단역을 맡으며 갖은 고생을 했다. 점차 희극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인지도를 높였고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면서 활동 무대를 브라운관으로 옮겨 전성기를 맞았다. 1969년 MBC가 개국한 이후 ‘웃으면 복이 와요’, ‘명랑 소극장’(KBS) 등 방송국을 넘나들며 남 웃기는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마음 약해서’ ‘운수대통’ ‘형사 배삼룡’ 등 출연한 영화도 여러 편이다. 코미디 분야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문화체육부장관상, 2003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2001년 MBC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모아놓은 재산 상당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게다리춤’하면 그룹 ‘소녀시대’가 ‘GEE’를 부르며 귀엽게 춤추는 모습을 떠올리겠지만, 손과 발을 요란하게 떠는 ‘원조’ 게다리춤은 1970년대를 주름잡은 배씨의 전매특허였다. 그를 출연시키기 위해 MBC와 TBC 양 방송사가 대낮에 차량 활주극을 벌였다는 전설 같은 얘기는 배씨의 한창 때 인기를 짐작케 한다. 후배 코미디언들로부터도 어린 시절 그를 흉내 내고 존경했다는 얘기를 숱하게 들을 수 있다.
이렇듯 자타공인 코미디계의 거장이었으니 모아놓은 재산이 상당할 것이라고 짐작할 만하다. 실제로 그는 1970년대 한때 2년 연속 연예인 소득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삼룡사와’라는 음료업체를 설립했다가 이내 부도를 맞아 당시 돈으로 1억3000여만원의 빚을 졌다. 그 후 사업에 손을 댄 것에 대해 후회가 많았다. 사업이 망한 1980년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연예활동에도 걸림돌이 생겼다. ‘용모가 단정치 못하고 바보 흉내를 일삼는다’는 이유로 ‘연예 활동 정지’ 처분을 당했다. 후배 코미디언 이기동, 이주일씨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사업 실패와 방송 출연 금지 후 3년 동안 미국에서 일종의 도피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예전만한 인기를 되찾지 못하고 경기도 퇴촌에 전원주택을 짓고 기거해왔다. 가끔씩 텔레비전과 공연무대에 모습을 드러내 영원히 무대의 광대로 살겠노라고 약속했으나 건강이 악화되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결국 세간의 예상과 달리, 큰부를 쌓지는 못했다. 아버지와 같이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딸은 배씨의 정확한 재산 내역을 모른다고 했다.
“워낙 규모가 큰 병원비를 못 내고 있을 뿐이지, 저희 둘의 생활비와 간병에 필요한 물품비용은 스스로 책임지고 있습니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요. 치료비와 입원비는 나중에 재산이 정리되면 낼 수 있을 겁니다. 병원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현재 서울아산병원에서는 재판 승소 이후 이렇다 할 공개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강제 퇴원과 같은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으로 보도된 상태다. 두 딸에 따르면, 담당 의료진의 보살핌 역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호전의 기미가 보일 때마다 2차 의료기관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는 정도다. 두 딸은 이번 재판 결과에 대해 항소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아버지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기만을 바라는 중이다.
“진료비는 저희 자녀들이 갚아야 하는 돈이 맞잖아요. 이렇게 시끄럽게 밖으로 드러난 것이 곤란할 따름입니다. 이전과 변함없이 좋은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후배들의 관심과 정성
배씨의 어려운 사정이 전해지자 후배 코미디언들 사이에서 모금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액수를 떠나 선배 코미디언의 공적에 보답하자는 취지였다.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 노동조합 코미디지부장인 엄용수씨에게 진척 사항을 물었다.
“배삼룡 선배뿐 아니라 구봉서 선배를 비롯한 코미디계 여러 어른이 투병 중이십니다. 선배들의 공적을 기려 코미디 연기자들이 성의를 모아보자는 취지에서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모금단장은 이용식씨가 맡았습니다. 4월말에는 모금을 끝내고 회의를 거쳐 소액이나마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렵기는 현역 코미디언들도 마찬가지다. 회당 수백만원의 출연료를 받는 것은 극소수 얘기고, 대부분은 행사 사회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형편이다. 경제 불황이 닥치면서 각종 행사도 눈에 띄게 줄어 이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나마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저 같은 코미디언도 일감이 절반 이상 줄었습니다. 무명 연기자들은 더 힘들 테고요. 애초에 모금액이 많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4월 말이면 3000만원 정도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는 신인상을 수상한 황제성이 “병상에서 외롭게 싸우고 계신 배삼룡 선생님, 저희 부모님이 당신을 보고 웃었지만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제는 저를 보고 웃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는 소감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배씨의 셋째딸 경주씨는 이들의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코미디언 아버지를 둔 이들로서는 후배 코미디언들의 형편이 어떨지 훤히 알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에 유재석씨와 김용만씨가 바쁜 시간을 쪼개 찾아왔더라고요. 간호사들에게 일일이 사인도 해주고요. 엄용수씨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문병을 오세요. 이대성씨 같은 원로 코미디언들도 가끔씩 오십니다. 그 정성이 고맙지요.”
세 번의 이혼과 갈등
워낙 이름이 알려져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장삿속에 휘말리기도 했다. 환자가 죽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상조회에서 광고 모델로 이름을 빌려달라는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한쪽에서는 모금을 빙자해 사기를 치는 이도 있었다.
“누가 노인들 상대로 약을 팔면서 저희 아버지 병원비에 쓰겠다고 돈을 걷었다는 거예요. 주변에서 고소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럴 만한 경황이 없는데다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한번이라도 만난 사람이겠지 싶어서 아는 사람을 통해 그만두라고 경고만 해두었어요.”
딸 주영씨는 일반인이 선의의 피해를 보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병원비는 가족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배삼룡씨 이름만으로 속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배씨 병간호는 20개월 내내 딸 주영씨와 경주씨가 도맡았다. 다른 누군가가 가족인 양 행세한다면 반드시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한 케이블방송에서 가족과 상의 없이 ‘배삼룡 돕기 후원의 밤’을 연 적이 있다. 사기 목적은 전혀 아니었으나 모금액이 호텔 대관료와 식사대금에도 미치지 못해 방송 자체를 취소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배삼룡이라는 이름 석 자가 거론되고 있어 꽤 많은 돈이 모아졌을 것 같지만, 실제로 배씨와 그의 가족이 받은 도움은 많지 않았다.
배씨는 세 번의 이혼을 겪었다. 악극단 시절 만난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딸과 아들을 두었다. 이 아들딸 역시 시간이 날 때마다 병실을 방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주영씨와 경주씨를 낳았다. 사업 실패 후 가족에게 빚을 전가하지 않으려고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결혼해 한국에 함께 온 세 번째 부인과는 자녀가 없고, 부부 모두 건강이 악화되자 대리인을 통해 이혼 수속을 밟았다.
아들 동진씨는 과거 몇몇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서운함을 내비친 적이 있다. 물론 아들로서 감출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동경도 함께 이야기했다. 딸 주영씨와 경주씨는 아버지에게 누가 될 만한 이야기는 최대한 꺼렸다.
“아버지는 언제 어디에서나 똑똑하게 표현하고 바르게 처신할 수 있도록 저희를 키워주셨어요. 저희도 나이가 이만큼이나 먹었는데, 애증 같은 게 있을 리 있나요. 그저 하루빨리 털고 있어나시면 좋겠습니다.”
입원 초기에는 양아들을 자처한 가수 이정표씨와 친아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이씨가 배씨와 함께 퇴촌에서 살았고, 여러 정황상 극진하게 대우했던 것은 맞다. 다만 병원에 붙어살며 친아들처럼 간호했다는 얘기는 다소 부풀려진 면이 있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도 아버지 배씨를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현재 이씨는 배씨 가족과 여전히 연락하고 지낸다. 배씨의 가족은 아버지의 명예에 흠이 되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기죽을 이유 없다”
주영씨와 경주씨는 자신들의 가족을 두고 세상에 어떤 말들이 떠돌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1인실을 고집하는 것에 대한 험담, 재산이 많은데 병원비를 내지 않는다는 억측, 모금 받은 액수가 상당할 것이라는 소문 등이 병실 안까지 다 들려온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지금 그들의 초점은 아버지 치료에 맞춰져 있다.
“별말씀 없는 아버지를 6인실이나 2차 의료기관으로 옮기지 그러느냐는 말들을 하죠. 표현은 못하시지만 의식이 또렷한 분을 어떻게 옮기겠어요? 목에 낸 구멍을 통해 음식을 공급받는 아버지에게 남들 밥 먹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도 고역이고요. 나이 드시고 쇠약해졌으니 아버지 삶의 질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참견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언제 2차감염이나 합병증이 생길지 모르는 아버지가 다른 병원이나 병실을 전전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두 딸의 확고한 의지였다. 주영씨와 경주씨는 오랜 간병에 지쳤을 법도 한데,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밝혔다. 탈세하고 사기 친 사람들도 잘사는 세상에 남에게 해 끼친 적 없는 자신들이 기죽을 이유가 없다고도 했다.
비극을 희화화 말라
“아버지 덕분에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쳤다는 분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기도 했어요. 병실 청소하시는 분도 아버지를 염려해주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오래전에 대중에게 잊힌 줄로만 알았다가 이번 기회에 아버지를 기억하고 염려해주는 분을 많이 만났어요. 고맙습니다.”
배씨의 한평생에는 한국현대사와 대중문화사가 고스란히 엮여 있다. 광복과 6·25전쟁, 4·19, 5·16, 그리고 산업화를 겪은 그 세대 누구보다 극적으로 살았다. 영광의 시절도,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었다. ‘그땐 그랬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일도 많이 겪었다.
배씨의 투병생활이 알려지면서, 2003년 100세에 작고한 미국 코미디언 보브 호프(Bob Hope)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보브 호프가 폐렴으로 숨을 거두자 미국 35개 주가 이날을 ‘보브 호프의 날’로 정했고, 백악관과 관공서에 조기가 게양됐다고 한다. 영국 런던 출신인 보브 호프는 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아버지의 실직과 음주로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는 세계대전 후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선사해 큰 사랑을 받았다.
배삼룡과 보브 호프를 일대일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둘은 장르가 다른 코미디를 선보였고,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았다. 그래도 먼 나라 얘기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시대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코미디언이 존경을 받기는커녕 한낱 호기심이나 알량한 잇속다툼 속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 때문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남긴 말이다. 한 인간으로서 힘든 삶을 극복하며 살아온 위대한 배우 채플린이 멀리 보고 즐겁게 살라는 뜻으로 한 말일 터. 그러나 엉뚱하게도 가까이 보면 슬픔인 남의 일을, 멀리서 웃음거리로 만들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거름에 빛이 부윰한 시간, 배씨의 병실을 나왔다. 작은 체구에 하얀 머리칼, 한국 코미디계의 거장은 두 딸 사이에서 조용히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 채 20개월을 보낸 터라 낮 시간에는 잠에 빠져들곤 한다는데, 웬일인지 인터뷰하는 내내 깬 상태로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했다. 게다리춤으로 대중을 웃기며 ‘바보 연기는 역시 배삼룡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광대. 진짜 광대를 무대가 아닌 병실에서, 한참이나 노쇠한 지금에야 마주하게 된 것이 무안했다. 말년에나마 그가 웃겼던 세상이 그를 좀 환히 웃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흡인성 폐렴으로 투병 중인 희극스타 배삼룡씨의 최근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