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배순훈 신임 국립현대미술관장

“탱크주의로 세계적인 미술관 만들겠다”

  • 구가인│동아일보 신동아팀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09-04-07 17: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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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관장직은 미래세대에 대한 봉사”
    • 기무사 터, 관람객 500만 이상 세계적 규모 미술관으로
    • 대우 그리고 김우중 회장
    • 위기는 기회, 한(恨)의 문화를 신명의 문화로 바꿔야
    배순훈 신임 국립현대미술관장
    유인촌 :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배순훈 : 반갑습니다. 요즘은 유인촌 씨 덕분에 대우전자가 잘나갑니다.

    유인촌 : 아 제품이 이렇게 좋으니까 그렇죠. 그런데 금년에 탱크주의를 발표하셨던데 아주 강한 느낌이 들던데요.

    배순훈 : 네 탱크주의는 2000년까지 쓸 수 있는 튼튼하고 편리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죠.(중략) ‘1992년 대우전자 CF 탱크주의 ‘배순훈’ 편’

    6·25 이후 반세기가 흘렀건만 튼튼함의 상징으로 ‘탱크’가 먼저 떠오르는 건 옛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CF 효과도 적지 않다. 1990년대 초 가위 ‘탱크’ 신드롬을 일으킨 대우전자 광고는 전자업계 만년 3위였던 대우전자를 1위로 끌어올린 발판이자 대중에게 ‘배순훈’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MIT 박사 출신, 사근사근한 말투에 인상도 좋은 전문경영인은 당시 여느 CF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 후 많은 기업체의 ‘사장님’들이 광고에 출연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그만한 효과를 거둔 이는 없다.



    스타 CEO, 장관에서 미술관장으로

    외환위기 직후 탱크사장은 탱크장관으로 변신한다. 그는 김대중 정부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초고속통신망 확산과 우체국 혁신 등에 기여했지만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대우와 삼성의 ‘빅딜’ 비판 발언이 화근이 돼 취임 10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 또 노무현 정부 시절엔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장,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총장을 지냈다.

    2월23일 취임한 배순훈(66) 국립현대미술관장(이하 미술관장). 배 관장의 취임이 세간의 화제가 된 데에는 그의 화려한 이력이 한몫했다. 장관 출신이 중앙부처 실장급(2급) 별정직에 응모한 것도 낯선 ‘사건’이려니와 비(非)미술계 출신 기업경영인이 미술관장에 임명된 것도 처음이다.

    그는 예술가 가족을 둔(부인 신수희씨는 화가이며 차남 배정완씨는 설치미술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예술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해보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며 나라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하고 싶다”고 미술관장 지원 이유를 밝힌 배순훈 관장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봄볕이 좋은 3월9일, 1969년 지어져 올해로 40년이 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자그마한 체구에 학자풍 외모의 배순훈 관장의 첫인상은 ‘탱크’라는 별명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검정색 상하의에 남색 빛이 감도는 짧은 헤어스타일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멋스럽다.

    “미술관장은 미래세대를 위한 봉사”

    ▼ 장관 출신이 실장급 미술관장에 지원했다는 사실부터 화제입니다.

    “글쎄요, 과거에는 관료체제가 위계적이었지만 민주화되면서 능력별 인사로 바뀌었습니다. 장관은 높고 하위직급인 산하단체장은 낮은 게 아니라 맡은 업무가 다른 거죠. 예컨대 장관은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넓게 담당하고, 미술관장은 나름의 역할이 있죠.”

    ▼ 미술관장에 지원하신 이유는 뭔가요?

    “저는 우리나라가 2030년이면 1인당 국민소득이 6만달러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때 사회구성원들이 문화적 안목 없이 배만 부른 상태라면 그건 재앙이에요. 그럴 거면 발전 안하는 게 나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문화를 발전시키는 게 굉장히 급한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마침 현대미술관 관장 공모가 있어서 지원했지만 만약 음악분야에 자리가 있었다면 거기에도 응모했을지 몰라요(웃음). 업무를 잘 몰랐을 땐 막연히 좋은 그림과 함께 지내면서 미술관을 운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림 잡(dream job)이라고 해요, 제 친구들은. 그런데 관장이 되고 보니까 국립현대미술관이 참 중요한 국가기관이고 그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할 일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즘 압박을 많이 받아요. 정신적으로.”

    ▼ 미술계 시각은 기대 반, 우려 반인 것 같습니다. 전문경영인 출신 관장이 침체된 미술관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바람도 있지만 비전문가라는 점을 우려하던데요.

    “제가 정보통신부 장관을 했잖아요? 그때 광대역망이 확산되기 시작해서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등이에요. 그런데 저는 기계기술자지 통신기술자가 아니에요. 정보통신 전문가가 아닌데도 장관을 맡아 국가 경영의 개념에서 (맡은 분야의) 목표를 기대 이상으로 달성했습니다. 미술관 운영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미술관을 경영 측면에서 보면 미술 작품을 담아낼 그릇을 만드는 것과 전시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관장의 임무인데, 냉정히 보면 이런 일은 작가나 평론가 출신의 미술전문가보다는 경영자 출신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이유로 저를 임명하셨을 거고요.”

    그는 비미술계 출신 경영인에게 보내는 미심쩍은 시선이 서운한 듯했다. 1992년 탱크주의 CF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유지해왔다는 유인촌 장관과의 친분이 화제가 되고 ‘코드인사’라는 평이 오간 것에 대해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도 관직에 있었다”면서 “그럼 민주당이랑 코드가 맞는 거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코드인사는 아닙니다. 누구랑 친해서 된 것도 아니고요. 자꾸 코드인사 얘기가 나오는 건 그동안 중요한 자리에 널리 믿음을 주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자화자찬 같지만 그런 점에서 저는 최소한 많은 분이 아는 사람 아닌가요? 믿고 성원해주셨으면 합니다.”

    배순훈 신임 국립현대미술관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에 CEO 출신 인사가 임명된 것은 배순훈 관장이 최초다.

    서울관, 500만 관람객 목표

    올해 초 정부는 2012년 준공을 목표로 서울 삼청동 주변 옛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기무사 터에 미술관을 세우는 것은 미술계의 오랜 숙원 사업이다. 고 조병화 시인, 김홍남 전 중앙박물관장, 이두식 홍익대 교수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기무사 터 서울관 조성과 관련해 처음 청원을 낸 것이 1996년이니 20여 년 만에 바람이 이뤄진 셈이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서울관 건립사업은 향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추진할 예정이다.

    ▼ 서울관 건립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직까진 정식으로 업무를 인계받은 게 아니라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어느 정도 생각한 것은 있습니다. 세계 최대 미술관인 루브르 박물관 관람객이 1년에 1300만명 정도인데, 우리도 세계적인 미술관을 세운다고 하면 관람객이 한 500만명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요. 최근 세계적인 미술관 중에는 새로 건축한 게 많아요. 뉴욕의 현대미술관이 그렇고, 도쿄의 신국립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그보다 좀 더 앞서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이 있습니다. 또 현재 잘츠부르크의 철광소를 미술관으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서 다섯 개의 미술관과 구별할 수 있는 우리만의 미술관으로 지었으면 좋겠어요. 또 그렇게 지은 미술관 안에 풍부한 콘텐츠를 담을 수 있도록 전문적인 큐레이터 양성도 필요합니다. 훌륭한 큐레이터를 양성하는 것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도적으로 하고 싶은 사업입니다.”

    지난해 과천 현대미술관의 관람객수는 57만명인데 500만 관광객은 조금 넘치는 듯싶었다. “연간 관람객 목표가 500만명이냐”고 되묻자, 그는 “그래야 세계적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스페인 빌바오는 낙후된 지역이었고, 테이트모던을 지은 곳도 옛날 화력발전소 길로 좋은 장소가 아닌데 가능했잖아요. 우리는 도심지역인데다 위치도 좋으니까 가능하리라 봅니다. 단, 교통문제는 해결해야죠. 서울시와 협의해서 광대역 플랜을 짜야 합니다. 되도록이면 녹색 접근을 해서, 녹색성장의 중요한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자동차 말고 자전거 타자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문화생활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자는 모토는 참 좋잖아요?”

    그는 “미술관을 세계화하는 데 연간 500억~600억원이 필요하다”면서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미술문화 교육 사업을 벌여 후원금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외자유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외자유치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립미술관이기 때문에 차관은 가능해도 투자를 받는 건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고 답했다.

    전문 큐레이터 대거 양성 계획

    ▼ 여러 가지 대형 전시를 열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올해 전시는 지난해 다 결정했습니다. 저희는 지금부터 연구를 잘해서 2010년에 많은 분이 현대미술관이 달라졌다고 느낄 만한 전시를 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광주비엔날레에서 5·18민주화운동을 테마로 한 적이 있죠. 국내외에서 상당히 칭찬을 받았어요. 우리의 아픈 역사를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키는지를 보여준 예죠. 사실 한국엔 세계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한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관심을 못 받았는데 앞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우리만의 내재된 역사와 문화를 예술로 승화하는 전시를 열 생각입니다. 그런 건 외국인 큐레이터가 할 수 없는 거니까요.”

    ▼ 앞서 큐레이터 양성 계획을 말씀하셨는데 따로 양성기관을 만들겠다는 말씀인가요.

    “기관을 만드는 게 좋은지는 연구해봐야겠어요. 전문적인 큐레이터를 양성하려면 학교 교육뿐 아니라 세계적인 네트워크도 갖춰야 합니다. 학교 교육은 몇몇 대학이 잘하고 있으니 그 대학을 활용하고 세계적인 네트워킹은 유명 미술관과 연결해서 작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큐레이터들은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이 깊고, 특히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야 하는데 인문학의 학구적인 활동에 참여하면서 시각을 넓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미술계만 끼리끼리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얘기지만 물리학이 그래요. 상대성이론이 나온 후 이론물리학 실험물리학 등으로 갈라진 후 물리학 내부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됐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시 통섭이라고 해서 물리, 경제, 인문학 등이 다 모여서 같이 연구합니다. 미술 역시 인상주의 입체파 등 각 장르 미술이 분산되다가 설치미술에서 볼 수 있듯 다시 뭉치고 있습니다. 음악, 비디오, 퍼포밍 아트까지 함께 들어가 예술의 통합이 이뤄지는 거죠. 모든 게 변화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미술관, 큐레이터의 역할도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봅니다.”

    인터뷰 내내 ‘세상의 변화에 따른 미술관의 변화’를 여러 번 강조한 배순훈 관장은 개인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공학자, 기업 CEO, 장관, 경영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 몸담았던 그이지만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은 대우그룹이다. 그에게 대우는 어떤 의미일까.

    “20년을 몸담았으니 제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곳이죠. 기업을 했지만 당시 기업은 권위주의 정권이랑 연결돼서 개인의 이익보단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었어요. 김우중 회장과도 서로 믿음을 갖고 정말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어요. 정통부 장관 때도 대통령 아래에서 일을 했지만 그러한 관계와 김우중 회장과 제 관계는 굉장히 달라요. 김우중 회장과 저는 호텔에 한 방에 들고…. 대우조선에서 중공업, 자동차 등에서 김우중 회장의 분신으로서 일했던 시기였어요.”

    김우중 회장과 대우

    ▼ 김우중 회장과는 요새도 자주 만나시나요.

    “아유, 이제 자주 못 만나죠. 이젠 옛날 얘기니까. 가끔, 한두 번 만났죠.”

    지난해 말 출간한 그의 책 ‘우리에겐 위기극복의 유전자가 있습니다’에는 김우중 회장에 대한 일화도 상당부분 담겨 있다. “대우를 나온 뒤 10여 년간 냉정하게 과거를 돌아봤다”고 말하는 배 관장은 김우중 회장에 대해 “직관력과 통찰력이 무척 뛰어난 대신 분석 능력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냉정하게 평가했다고 말하지만 글 군데군데 20년을 동고동락한 상사에 대한 감정이 뭍어나는 게 사실이다.

    내가 서울공대와 MIT에서 과학기술의 기초적인 지식을 배운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세계적인 역량의 기술자적인 소양은 오랜 기간 현장에서 김우중 회장에게 배웠다. 그는 아직도 내가 그에게서 배운 이 역량을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데 발휘하리라고 믿고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겐 위기극복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중’

    ▼ 정통부 장관 때 빅딜 반대 파문 때문에 일찍 관직을 떠나셨을 땐 아쉬움이 컸을 것 같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처했다는 평가도 있던데요.

    “아쉬운 점이 없진 않죠. 당시에 ‘재벌기업이 부채를 줄여야지 부채를 놔두고 바꿔치기를 하면 IMF 관리체제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는데 그게 빅딜 반대로 해석됐어요.

    지나고 보면 별일도 아닌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거 같아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나중엔 얼굴도 못 본 장관을 어떻게 그만두라고 하냐고 하셨대요. 그런데 저는 당시 동아일보에서 논설로 왜 이런 사람을 교체하느냐고 비판이 나오고 하니까, (대통령이) 걱정이 돼서… 바로 관두고 여행을 떠났죠. 모로코에서 사하라 사막까지 갔는데 참 좋았어요. 세상을 생각할 기회도 생겼고요.”

    ▼ 정치권에서 제의도 많이 받으셨죠?

    “정치는 관심 없어요.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하면서도 (정치 제의를) 많이 받았고, 그보다 더 전에 이회창 캠프에서 ‘광고에 나오면 50만표 차이가 난다’면서 부탁도 받았는데 ‘50만표는 당락에 영향을 줄 텐데 나는 반드시 이 대표가 당선돼야만 한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안 하겠다’고 했어요. 민주당에서 조순 시장 러닝메이트로 부시장 제의도 받았는데 조순 시장님도 모르는 분이고 저 자신도 모르는 게 많아서 서울시정에 나서는 걸 떳떳하지 못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사실 선거에서 표를 얻으려면 제 철학에 안 맞는 일이 생기거든요. 과장되거나 생각과 다르게 이야기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아서… 그런 게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정치야, 뭐… 다른 분들이 많이 하시잖아요.”

    恨의 문화에서 신명의 문화로

    정보통신부 장관을 그만둔 이후 배 관장은 KAIST 경영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론과 현장 경험을 두루 겸비한 그에게 현재의 경제위기 극복 방안을 묻자 “우리 민족의 유전자에 한과 신명이 공존한다”면서 “외부 억압과 자극에 의해 눌리면 한이 발생하고, 풀리고 열리면 신명이 일어나는데 현재의 세계경제는 우리에게 위기와 함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말했다.

    “일자리 나누기도 한 방법이죠. 예컨대 7이 할 것을 10이 하니까 3의 능력이 남는 거잖아요. 정부는 그 3을 제대로 교육해서 경기가 좋아지면 생산성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야죠. 다시 말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극복 후가 문제라는 겁니다. 다시 경기가 좋아지고 소비가 늘어나면 세계적으로 생산력이 부족한 시대가 오게 되고, 지금 돈을 많이 풀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때를 대비해 인재를 길러내야 해요. 이게 기회예요. 눈 똑바로 뜨고 경쟁력 강화에 힘써야 한다 이거죠.”

    ▼ KAIST 경영대학원에서는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업 경영을 하셨지만 경영학은 새로운 분야였을 텐데요.

    “IMF 경험 때문에 리스크 매니지먼트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리스크 매니지먼트에서 최근 중요하게 다루는 것 중 하나가 옵션 프라이싱 모델인데 세상의 돈이 움직이는 방향을 결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세요? 물하고 똑같아요. 돈은 물처럼 흐릅니다. 유체의 이동 방법을 예측하는 미분방정식이 같은 미분방정식이에요. 제가 사실 그런 걸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어요. 경영학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가르치냐고 하지만 제가 기본인 수학에 대해서는 이해가 더 깊거든요.(웃음)”

    그는 기자에게 위치에너지, 운동에너지, 마찰을 뜻하는 포텐셜- 모멘텀- 프릭션이라는 개념을 통해 돈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돈은 많이 모인 곳으로 몰리지만(포텐셜) 주식시장 루머로 인해 주식 값이 오르내리듯 모멘텀의 영향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개입과 같은 프릭션이 있을 경우 모멘텀이 억제된다’는 설명을 들으니,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싶다. 공학자, 기업CEO, 장관, 경영학자 등 각기 다른 분야에 몸담았지만 매번 그가 ‘탱크’처럼 돌진할 수 있었던 건 그러한 ‘기본’을 확실히 습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터뷰 마지막엔 매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그는 자신만의 ‘기본공식’을 통해 답을 내놓았다.

    “장기적으론 실력, 포텐셜이 있어야 할 테지만 단기적으론 모멘텀을 만들어야 합니다. 3위인 대우전자가 광고를 통해 모멘텀을 만든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 모멘텀이 올라가면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려 노력해야죠. 가급적 인터뷰 많이 하고 많은 분을 만나려 합니다. 국민적인 컨센서스가 일어나 모멘텀이 되면 서울관을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세계에서 건물을 가장 빨리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저 아닐까 생각을 하는데요. 물론, 우리 대통령은 더 빨리 하실 거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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