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교육받은 아이들이 성장 가능성 더 커
- 성적 좋고 인성 좋은 아이들 가려낼 터
- 최고의 대학 되려면 최고의 연구실적 내야
- ‘배터리 자동차’보다 온라인 전기자동차가 실용적
그러곤 앉아 의자 등받이를 45도 정도 뒤로 젖히고 두 손을 깍지 끼더니, 치밀한 공학도처럼 묻는다. “인터뷰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메일로 보낸 질문지와 인터뷰 의뢰할 때 말한 내용이 서로 다르다며, 다시 정리해 알려달라고 했다. A와 B와 C에 대해 궁금하다고 답하자, 정말이지 1시간 반 동안 A와 B와 C, 그리고 이것들의 관계에 대해서만 충실히 답하곤 인터뷰를 끝냈다. 중간에 다른 것이 궁금해 질문지를 총장 앞으로 밀어놓으며 운을 떼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목적을 세우고 그에 맞춰 행동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서남표 카이스트(KAIST) 총장은 자신의 열정을 높낮이 없는 톤으로 쉼 없이 쏟아냈다.
‘목적이 뭐냐’
▼ 총장께서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최적의 설계이론(‘공리(公理)를 이용한 생산설계 이론’)을 이용해 미국 국립과학재단 조직 개편을 성공적으로 이끄셨다고 들었습니다.
“공학이론이긴 하지만 내용은 사실 간단합니다. 기계도 목적을 세운 다음에 설계하는 것처럼, 기관도 목적을 세운 다음에 그걸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일의 성과가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을 개편할 때도 이걸 적용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재정적 지원을 더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지만, 저는 그 재단이 만들어진 목적부터 되짚어봐야 한다고 봤습니다. 정부가 이 기관을 만들 때(1950년) 통과시킨 법을 찾아보니 기관의 목적을 과학기술 지속발달, 사람들의 행복감 증진, 국방임무라고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생각해보고, 그에 맞는 조직체를 구성해 일을 추진했습니다.”
▼ 그럼 카이스트 개혁도 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우리는 목표를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 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려면 여러 가지 하부 방법이 있겠지요. 우선 좋은 학생을 선발해야 할 것이고, 그 학생들을 잘 교육시켜야 할 겁니다. 좋은 교수도 데려와야 하고, 기발한 연구 성과도 내야 할 겁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처음에 묻는 것이 ‘목적이 뭐냐’는 겁니다. 목적이 분명치 않으면 방법도 제대로 만들 수 없고, 성과를 내기도 어려워집니다.”
3월 초 일간지에는 카이스트의 파격적인 입시제도가 소개됐다. 기사 헤드라인만 봐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KAIST, 내년부터 무시험으로 150명 선발’(전자신문),‘사(私)교육은 사(死)교육, 서남표, 칼을 뽑다’(조선일보),‘KAIST- 과학영재학교 공교육 살리기 입시개혁안’(동아일보)…. 주어 목적어 술어를 흐트러짐 없이 말하는 그에게 물었다.
▼ 2010년 입시부터 신입생의 20%인 150명을 일반고 학교장 추천을 거쳐 심층면접으로만 선발한다는 것이 요지인데, 이 전형의 대상을 일반고 학생으로 제한한 이유는 뭡니까. 그리고 제도의 추진 동기는 무엇입니까.
“KAIST의 경우, 일반고 출신의 졸업 성적이 과학고 출신의 것보다 좋기 때문이에요. 결과적으로 보면 과학만 배우는 애들보다 다양한 교육을 받은 애들이 더 성장합니다. 집안 환경이 어려워 사교육 못 받은 아이들 중에도 얼마든지 우수한 학생이 있을 텐데 어떻게 뽑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런 방안을 내놓게 됐습니다. 그래서 농어촌 학생과 저소득층 학생을 대상으로 각각 10%씩 우선적으로 할당하기로 했지요. 그동안 사교육으로 시험 잘 치르는 기술을 습득한 애들을 뽑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머리 좋아 보이는 애들이 아닌, 진짜 머리 좋은 학생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서남표 총장은 KAIST 개혁을 진두지휘한다.
▼ 평준화 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환경 때문에 기회가 달리 주어지면 안 됩니다. 저는 미국에서도 다른 학생과 같은 기회를 얻었어요. 어쩌면 더 좋은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같은 기회를 줬는데도 성과가 다르면 차별을 둘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지만 뒤떨어진 사람은 그 나름대로 기회를 줘야 하고, 뛰어난 사람에게는 더 나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사회 발전이 있고, 기회 잡은 사람이 환경 문제, 에너지 문제 같은 사회문제를 풀어가겠죠.”
▼ 한국사회 사교육에 대해 비판적이시더군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교육 그 자체가 아닌 입시를 위해 사교육을 받습니다. 그건 교육이 아닙니다. 이 전형에서는 올림피아드 같은 경시대회 성적을 반영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것이 입시의 수단이 됐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그것도 모르고 (경시대회) 상장 주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런 배경이 있더군요. 우리는 이런 교육 현실을 바꿔보고 싶습니다. 카이스트는 조그만 학교입니다. 우리가 이런 제도를 운영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다른 대학보고 이렇게 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경우에는 이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 전국 일반고 학교장에게 1000여 명을 추천받고, 입학사정관이 학교에 가서 추천받은 학생, 담임교사, 학교장을 인터뷰해 300명을 추린 뒤 다시 심층면접을 통해 150명을 선발한다고 했지만, 학교장이 잘못 추천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학교당 1명을 추천하는 데도 우수하지 않은 학생을 추천한다면, 이듬해에 그 학교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학교 측에선 심사숙고해야겠지요. 게다가 1시간 정도만 얘기를 나눠도 학생의 진면목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 어떤 학생을 선발하고 싶습니까. 면접은 어떤 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까.
“면접을 하기 직전까지 우리가 어떤 면접을 할지 모릅니다. 계속 연구해 준비해야겠지요. 그렇지만 면접을 시작할 경우에는 학생 눈높이에 맞춰 질문할 겁니다. 인터뷰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는 것부터 물어봐라.’
우리는 성적도 좋고, 인성도 좋은 학생을 뽑을 겁니다. 성적과 창의성은 엇갈리는 것 같지만 둘 다 좋은 학생도 분명 있어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밝은 사람들을 찾아야지요. 세상을 적극적으로 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분명 다릅니다. 옛날에는 성적만 봤지만 인성이 안 좋으면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더군요.”
KAIST는 일반모집에도 면접전형을 강화해 학생 선발에 인성을 반영한다. 자체 조사에 따르면 20% 정도가 인성 때문에 붙고, 인성 때문에 떨어진다.
밖으로 나가 경험을 쌓아라
그는 학부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보내는 일에 열성이다.
“지난 여름방학 때부터 학부생 전체를 무조건 내보내고 있습니다. 코스 워크도 없고, 기숙사에 있을 수도 없어요. 자매결연한 학교들이나 회사들이 대부분 여름에 석 달짜리 코스를 진행하기 때문에 방학기간도 석 달로 늘린 상태예요. 겨울방학 기간은 대신 한 달이 됐고요.”
▼ 왜 꼭 학교 밖으로 나가라고 권하십니까.
“학생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모를 수 있어요. 이런 의무조항이 없으면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만 있는 학생도 있을 거예요. 주입식 교육만 받고 수동적으로 사는 학생도 있고. 그럼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자기가 훌륭한 만큼 세상이 자기한테 잘해줘야 한다고 믿는 학생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배낭여행을 가든 회사에서 일을 하든 경험을 쌓고 오면 원기를 회복할 수도 있고, 시야도 넓어질 거예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는 없지요. 지식만 가르치다 보면 애들을 망칠 수 있어요. 무엇보다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 특별히 권하는 활동이 있습니까.
“그런 건 없지만 대기업이나 국가출연연구소들을 다니면서 학생들을 위한 인턴 자리 600여 개를 만들어놨어요. 그런데 모자랄 줄 알았던 인턴 자리가 도리어 200개나 남더군요.”
그는 KAIST 학생들을 책임감 있는 리더로 키우기 위해서 ‘학비 내기’라는 채찍을 쓰고 있다. 총장은 성적이 일정 수준 이하인 학생에게는 학비를 내게 했다. 세금을 낭비하며 무책임하게 살지는 말자는 의미다.
KAIST 졸업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온라인 전기자동차를 시승하고 있다.
KAIST는 테뉴어제도(교수정년보장제도)를 실시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교수 임기를 무조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교수의 성과에 따라 정년 여부를 결정하는 이 제도는 ‘경쟁력 있는 학교 분위기’를 조성했다.
가장 유명한 학교가 되려면
최고의 대학이 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최고의 연구 업적을 내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최근 특허 출원된 기술을 자랑하며 내내 즐거운 표정이다.
“유명한 대학이 되려면, 세계에서 꼭 필요한 문제를 먼저 풀어줘야 합니다. 중요한 과제 몇 개만 선점하면, 가장 유명한 대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문제에 관여할 수는 없지요. 재정도 인력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선택해야 합니다.”
2월27일, KAIST 학위수여식 때 이명박 대통령은 ‘온라인 전기자동차’를 시승한 바 있다.
“에너지, 환경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어요. 온라인 자동차는 고주파 전선이 깔린 도로를 달리면서 도로에서 전기를 공급받아 움직입니다. 그러니 배터리가 클 필요가 없지요. 전선이 깔리지 않은 곳에서 보조로 사용하는 배터리이기 때문에 용량도 작고, 값도 싸지요.”
▼ 미국은 기름 대신 배터리 힘을 빌리는 자동차 제작을 추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보기엔 그게 솔루션이 아니라는 겁니다. 배터리가 자동차 값의 반이 넘는데다 굉장히 무겁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배터리는 가볍게 하고, 나머지 동력은 땅에서 받자는 건데, 그게 가능하다니 추진하자는 거지요.”
▼ 자동차업계에서는 온라인 전기자동차에 대해 회의적이던데요.
“당연합니다. 기존에 자신들이 투자해온 것과 다른 것을 추진하니까요. 그렇지만 필름 카메라가 아닌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가 됐듯 온라인 자동차도 주류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원자력발전소 두 개만 있으면 우리나라 자동차 절반을 굴릴 수 있다는데 논리상으로도 해볼 만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KAIST가 추진하는 기발한 사업으로 움직이는 항구, 모바일 하버도 빼놓을 수 없다.
▼ 항구가 어떻게 움직입니까.
“생각을 달리해보세요. 배는 목적이 아닙니다. 수단일 뿐입니다. 목적은 짐을 나르는 것이지요. 그럼 항구도 짐을 옮기는 수단이지요. 그렇다면 짐을 나르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항구를 이동시켜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 굳이 항구를 이동시킬 필요가 있나요?
“현재는 경기가 어려워 부족하진 않지만 항구가 모자라 짐 싣고 내리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멀리 떨어진 배가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데 항구로 와야 할 상황도 있고요. 게다가 항구가 부족해 항구를 만들자면 비용이 많이 듭니다. 바다 밑도 파야 하고, 환경 문제도 발생하고, 건축비도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모바일 하버는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운송의 개념이 달라질 겁니다. 물로 나르는 게 가장 저렴한데 항구까지 많아지니까요. 그럼 세상이 바뀌겠지요. 특허는 이미 신청해놓고 STX와 함께 사업하기로 결정한 상태입니다. 이런 일을 추진하려고 조선 관련 학과도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업들이 잘 진행돼서 남이 우리를 따라오면, 우리가 넘버원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것저것 많이 벌인다고 하지만 모두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