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현실에 물어뜯긴 청춘을 위로하며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9-04-03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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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음은 꽃보다 아름답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우울하다. 도서관에 콕 박혀 학점을 관리하고 아까운 돈 들여 ‘스펙’을 쌓았음에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들이 맞닥뜨리는 건 ‘경제위기’ ‘채용규모 감소’ ‘임금삭감’ 등의 어두운 현실이다. 그러나 ‘88만원 세대’는 10여 년 전 비운의 ‘IMF 세대’와 닮았고, 비교적 여유로웠다는 그들의 선배들조차 ‘청춘’ 하면, 혼돈과 방황, 그리고 아픔을 떠올린다. 청춘을 다룬 영화가 때때로 위안이 되는 이유다.
    현실에 물어뜯긴         청춘을 위로하며

    F.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

    ‘X세대’라 불리며 대학에 입학했던 1990년대 중반 학번들이 1990년대 말 졸업을 앞두고 이상한 사태와 맞닥뜨린다. 이름도 생소한 ‘IMF 경제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다. 사실 1990년대 초반 학번들은 자유롭고 풍요로운 세대라며 부러움을 샀다. 1980년대 학번들처럼 정치적 부채감이 없어도 되었기에 거리보다 학교, 학교보다 교양이나 문화와 같은 개념과 가까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X세대’ 호칭은 이러한 자유로움에 대한 호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나 레닌 대신에 하루키와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고, 5월18일 광주의 동영상이 아닌 타르코프스키의 유려한 영상 서정시를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보던 세대, 민중가요보다 빌리 할리데이를 알아야 하고, 레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을 보며 이미지의 낭만에 빠져들던 세대. 그들이 바로 1990년대 초반 학번들이다.

    사실 ‘X세대’의 문화적 풍요로움은 경제적 풍요로움과, 선배들을 통해 확인된 대학생에게 보장된 미래 덕분이 컸다. 1990년대 학번은 최초로 재학 중 배낭여행과 단체관광 형태로 유럽을 비롯해 해외를 자유롭게 드나든 세대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로 한 학기 등록금 정도를 모아 해외로 나갔다. 그게 당연했다. 4학년이 돼서야 바짝 취업준비를 하면 그들을 받아줄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믿었다. 선배 대부분이 그렇게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 멋지게 한턱 쏘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IMF’는 일순간 많은 기대를 꺾어버렸다.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채용 규모를 줄였고 아버지들은 갓 쉰 살을 넘겨서 퇴직을 종용당했다. 졸업이 다가올수록 공포는 커졌다. 막상 졸업한다 해도 받아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93, 94학번 복학생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왔으나 군대에 다녀온 사이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제 힘으로 밥 먹고 살 상황’이 보장되지 않는 세상이 됐다.

    신입생들은 입학하는 순간부터 ‘스펙’을 높일 만한 공인 영어시험과 각종 자격증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족’도 부쩍 늘었다. 입학하는 순간부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교생들처럼, 대학 신입생들 역시 학점과 ‘스펙’에 매달렸다. 이제 대학에서 낭만을 찾기 어렵다. 최근 불어닥친 경제 한파는 이런 분위기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비감 어린 호칭으로 불리는 지금의 20대. 달라지고 싶지만 그 가능성이 너무도 먼 곳에 있는 그들. 현실이 나를 갑자기 물어버릴 때, 그들을 위한 영화들을 살펴본다.

    불투명한 미래, 서툴기만 한 20대



    영화 ‘리얼리티 바이츠’는 코믹 배우로 잘 알려진 벤 스틸러가 감독한 작품이다.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현실이 나를 물다’ 정도가 될 이 영화는 ‘청춘스케치’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개봉한 지 15년 가까이 됐음에도 간간이 회자되는 이 영화는 무엇보다 음악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베이비 아이 러브 유어 웨이’ ‘마이 쉐로나’ 같은 주옥같은 선율이 영화 전편을 수놓는다. 이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감히 명반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단지 노래가 듣기 좋아서가 아니라, 이 음악이 ‘현실에 물렸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는 네 명의 주인공, 그들에게 현실은 학교 울타리 안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비키, 트로이, 새미, 릴레이나 이 네 사람은 곧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간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릴레이나의 꿈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하지만 꿈을 이루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한편 평생을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트로이는 이미 직장에서 열두 번이나 잘린 청년이다. 어느 날 릴레이나는 잘나가는 직장에서 쫓겨나 자신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때 그녀의 곁을 맴돌던 마이클이라는 사람이 부와 재능으로 릴레이나에게 접근한다. 미디어 업체 임원인 마이클은 릴레이나에게 꿈을 이뤄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실제 그녀의 작품이 전파를 타도록 돕는다.

    문제는 방송된 영화가 당초 릴레이나가 만든 것보다 훨씬 상업적으로 편집됐다는 것. 마이클은 릴레이나의 작품을 순수 아마추어의 열정 표현 정도로 보고, 이를테면 프로페셔널하게 상업적 영상물로 재편집한 것이다. 릴레이나는 마이클에게 크게 실망하고, 자기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는다.

    현실에 물어뜯긴         청춘을 위로하며

    ‘청춘스케치’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각자의 꿈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네 젊은이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좌절을 경험한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이에게도, 낭만적 미래를 설계하던 이에게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분명했던 이에게도 졸업 이후의 상황은 편치 않다. 취업도 잘 안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획은 허무맹랑한 꿈 정도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망이나 미래는 철없는 공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꿈에 부풀어 있던 네 젊은이는 각기 다른 상처를 안고 모인다. 그러던 중 트로이와 릴레이나는 우정보다 더 긴밀한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 도피적인 트로이는 릴레이나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꼬이자 또 도망친다. “사랑하는 여자와 섹스를 해본 것은 처음이야”라고 말하면서.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장점을 보여주듯 미완성 상태에 놓인 네 인물의 삶을 트로이와 릴레이나의 재회로 마무리한다. 적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서만큼은 최초로 책임감 있는 연애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트로이를 통해 이들의 불투명한 미래에 잠깐의 신기루를 제공하는 것이다.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실상 영화 ‘청춘스케치’의 결말은 정지 화면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제목처럼 그들이 아직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끝날지, 트로이와 릴레이나의 연애가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은 젊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서 헤매는 지금의 젊은이들과 꼭 같은 상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리얼리티 바이츠’는 방황과 혼돈이야말로 일종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 방황과 혼돈이 어떤 식으로 구체화하느냐에 따라서 30대 이후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사랑도 직업도 내 자신에 대한 전망조차 불투명한 시절, 20대는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피츠제럴드의 자화상,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는 묘한 작품이다. 묘하다는 수식어는 일단 원작자인 스콧 피츠제럴드의 일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잘생긴 외모에 멋스러운 옷차림, 눈썹까지 세심하게 솔질하고 다녔던 멋쟁이 피츠제럴드는 댄디한 남자였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그의 소설에 늘 아름다운, 하지만 차갑고 도도한 부잣집 아가씨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실연의 상처에 찢긴 심장을 가진 남자들의 긴 행렬을 끌고 다니는’ 바람둥이다. 타고난 미모와 주어진 재력 가운데서 빛나는 여자들은 구애자들을 마음껏 유린한다. 천진하고 대담하게 구애자들의 단점과 가난을 비꼬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이러한 여성 캐릭터를 가리켜 “비난할 수 없는 일관되고 순수한 이기주의”라고 표현한다. 피츠제럴드 그 자신이 이런 캐릭터의 여성에 늘 매료돼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1896년 9월24일, 멋쟁이 신사인 아버지 에드워드와 식료품 도매업으로 성공한 아일랜드 이민자 집안 출신의 어머니 몰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워드는 젊은 시절 부를 찾아 서부행을 택했지만,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고 결국 처가에 얹혀살았다. 외모나 기질 모두 아버지를 닮은 피츠제럴드는 대영제국에서 건너온 가문의 후예라는 점에서 아버지에게 자긍심을 느끼는 한편, 처가살이로 주저앉은 무능하고 가난한 아버지에게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부끄러움만을 회고한다고 했다. 미적 감수성이나 댄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촌스러운 아일랜드계 핏줄을 거부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의 부모는 아들을 상류 계층에 입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최고급 주택가 근처로 이사하고, 상류층 자제들과 함께 무용교습을 받게 하는가 하면 명문 세인트 폴 아카데미에 진학시켰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아들을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처럼 키우고 싶었던 셈이다. 그러한 노력이 성공했다고 해야 할까? 피츠제럴드는 미국 최상위 계층이라고 할 만한 시카고 은행가의 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그저 여러 장난감 중 하나에 불과했다. 가난과 한미한 집안을 이유로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른 유력 집안의 아들과 결혼한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 전편에 깔려 있는 주인공의 부와 성공에 대한 열망, 신분 높은 미녀에 대한 열망은 사실상 피츠제럴드의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로버트 레드퍼드의 작품으로 기억된다. 로버트 레드퍼드의 미모가 돋보였던 이 작품은, 무능했던 한 남자가 꿈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개츠비의 꿈은 허영으로 가득 차 있고 또 세속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꿈과 욕망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는 젊은 시절 미끈한 외모 외에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대개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젊음과 혈기가 있을 때 돈은 잘 따라주지 않는다. 부모나 주변의 도움이 없는 한 20대의 젊은이가 엄청난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속물보다 무능이 나쁘다

    개츠비는 자신의 무능을 확인시켜준 여자를 증오하거나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상류 계층으로 자신이 성장하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이 반한 세속적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리라고 결심한다. 개츠비가 생각한 복수는 바로 그녀가 자신을 사랑할 만큼 충분히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속물성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이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개츠비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돈을 버는 데 성공한다. 원하는 만큼이란 이웃집에 사는 데이지를 유혹하고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할 만큼이다.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살고 있던 데이지는 속물답게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부유한 미남자를 거부하지 않는다. 가진 것 없던 젊은 시절의 정체성을 지운 개츠비는 유능한 중년 남자가 되어 그녀를 얻는다. 아니 얻는 듯싶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남자 개츠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그를 야망에 불타게 했던 데이지도, 그가 마련한 파티에 불나방처럼 모여들던 수많은 하객도 그의 죽음에 신경 쓰지 않는다. 어디선가 떠돌다 온 한 이방인이 우연히 그곳에서 죽었다, 정도로 신문 가십란을 장식할 뿐이다.

    현실에 물어뜯긴         청춘을 위로하며

    무기력한 20대를 그린 영화 ‘여기보다 어딘가에’.

    어떤 점에서 성공에 대한 열망은 아주 세속적인 욕망과 허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 정의를 구현한다거나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 혹은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성공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남이 우러러보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미래를 설계한다. 넓은 집, 좋은 차, 질투 나도록 아름다운 배우자, 고액 연봉 같은 꿈 말이다. 우리는 이 세속적 욕망과 허영을 ‘꿈’이라 부르며 살아간다. 20대 백수들이 꿈꾸는 삶의 한가운데 개츠비가 느꼈던 좌절과 허기가 놓여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나의 20대는 어땠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니 좀 다르다. 실은 난 그 시절 일기장에 하루빨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싶다고 썼다. 20대에 놓인 무한한 가능성이 버거웠고 지루하게 남아 있는 미결정의 시간이 무거웠다. 미래는 현재를 견인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뭔가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론이 고교시절을 버티게 하고, 대학만 졸업하면 멋진 사회인이 되어 자급자족하는 경제인이 되겠지 하는 생각이 대학 졸업을 낭만적으로 미화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전문직 종사자나 대기업 사원들이 그렇듯 폼 나게 연애하고 즐기며 살아가겠지,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떠올리는 4년 후 미래란 그렇다.

    지독한 현실로 밀려나온 ‘조산아’

    하지만 캠퍼스 드라마가 캠퍼스의 실상과 거리가 있듯 대학 신입생 때 꿈꾸는 졸업 이후의 삶은 현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대학만 졸업하면 일자리가 보장되던 시절은 이미 20년 전에 지나갔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점수에 목을 매고, 인턴사원 모집 정보를 선점하기 위해 친구를 배신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게 현실이라고.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비루한 욕망과 작은 꿈을 먼저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아직 이 지독한 현실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조산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이라는 제법 폼 나는 아이덴티티를 반납해야 하지만, 아직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지 못한 그들이 정착할 곳은 어디인가?

    대학 졸업반, 졸업 작품으로 만든 이승영 감독의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이 질문을 따갑게 내뱉는다. ‘여기보다 어딘가에’가 기존 청춘영화와 결별하는 지점도 여기다. 우선 이승영 감독 자신이 젊음을 되돌아볼 만한 객관적 거리도 여유도 없다. 그가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인물 수연과 동호는 이승영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수연이 멋진 반항아라기보다 ‘찌질이’와 닮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연은 말 그대로 ‘찌질하다’. 그녀의 ‘소망’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납득된다.

    수연은 영국으로 음악 유학을 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막연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음악이 무엇인지, 어떤 아티스트의 영혼에 자극을 받았는지, 어떤 음악을 자신과 동일시하는지 전혀 단서가 없다. 수연이 유학에 대해 갖고 있는 바람은 ‘난 커서 우주여행을 해볼 거야’ 하는 수준의 망상적 소망과 다를 바 없다. 그녀는 단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고 싶어 할 뿐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

    찌질한 20대의 표상인 수연의 행동은 그녀가 결국 밴드 생활조차 성공적으로 영위하지 못하는 데서 정점을 이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20대란, 자신의 꿈을 위해 무조건 돌진하는 젊음이다. 사회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비웃음을 받더라도 젊음은 열정과 의지로 자신의 꿈을 관통해나간다. 그게 바로 우리가 기대하는 젊음의 이미지다. 그런데 수연은 그토록 절실히 원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막상 기회가 주어져도 도망갈 궁리만 한다. 밴드 생활 역시 자신의 마음속 무언가를 걸고 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결국 수연은 자신에게 책임감을 요구하는 어른들의 바람을 거부하고 싶었을 뿐 음악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2007년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상영됐을 당시 많은 20대 관객이 감독과 주연배우들에게 호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얼마나 많은 20대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데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냐’라는 논지가 대부분이었다. ‘저렇게 찌질한 인간을 영화적으로 다뤄야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비판도 있었다.

    생뚱맞지만 엔트로피 이론에 따르면 에너지가 높을수록 불확정성도 높아진다. 혼돈은 에너지의 결과물이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싶은 거지?’ 하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휘발된다. 해야 할 일들만 남아 있는 세상, 그게 바로 어른의 세계다. 그리고 어쩌면 2000년대 한국 대학생들은 방황할 겨를도 없이 너무도 빨리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 ‘Nowhere to turn’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돌아갈 곳이 없다. 결국 수연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만약 그녀가 영국으로 갈 수 있었다 해도 그곳은 그녀가 가야 할 곳은 아니다. 수연은 그곳에서도 다른 어떤 곳을 꿈꾸고 도피하고 싶어 할 것이다. 답답하고 찌질하지만, 수연처럼 도망치고 싶어 하는 젊음도 있다. 그리고 그 도망치고픈 비루한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마음속 깊이 꾹꾹 눌러 담은 자화상이 아니던가? 별 의미 없이 순결을 버리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짐을 싸는 것,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사실화일 것이다. 이승영 감독의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그런 점에서 현재를 기록할 만한 청춘의 단면임에 분명하다.

    힘들어 하는 그대, 그래도 젊지 않은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문제는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고민이나 반성 없이 그저 사회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는 순간 그것을 사회화라고 믿는 현실에 있다. 최근 대학생들은 대부분 입학과 동시에 성적을 관리하고 졸업 이후를 걱정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는 졸업과 동시에 백수 호칭을 부여받아야 했던 ‘포스트 IMF 세대’의 뼈아픈 교훈이 자리 잡고 있다. X세대라 불리며 낭만적으로 재즈와 영화, 음악을 찾아다니던 선배들은 졸업에 즈음해 ‘IMF 경제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무너졌다.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 다녀와야 했던 어학연수는 미완의 외화 낭비가 되었고, 낭만적으로 보냈던 시간들이 덜미를 붙잡았다. 영화나 음악 그리고 철학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실에 물어뜯긴         청춘을 위로하며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지금의 20대를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비극에는 전 세대들이 겪었던 것 이상의 좌절이 자리 잡고 있다. 1970년대 대학생이 고래를 찾아 동해로 갔다면 지금의 20대, 졸업을 미루고 학생 신분을 연장하는 많은 수연이는, 열심히 미래를 준비했음에도 경제 불황이라는 선고를 받는다. 동해로 가기는커녕 도서관과 인터넷 강의에서 미래를 찾았지만 어째 결론은 더 혹독해 보인다. 88만원 세대는 열심히 노력할수록, 스펙을 쌓아갈수록 점점 더 좁은 문 앞에 선다.

    하지만 젊음이라는 것 자체가 이 혼돈을 합리화한다. 그 합리화가 성 앞에 선 작은 개인을 구원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위안은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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