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관협은 양물의 폭력과 오·남용으로부터 여인의 값진 구석을 보호하고 암수 교환(交歡) 행위의 창조적 동력화를 위해 범세계적 운동을 전개하는 순수 민간단체다. 양관협은 매년 6월9일을 세계 양물(陽物)의 날로 제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통해 성의 가치관과 책임감 고취에 주력하고 있다. 성 행위 참여자의 모든 고충을 접수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할 뿐 아니라 기죽은 양물을 격려하고 포악한 양물을 수거해 폐기 처분하기도 한다. 양물 주둥이에 돋아난 예리한 송곳니를 발견하면 미리 뽑아내 잠재 폭력성을 제거하고 음흉한 구멍에 깔린 어둠을 걷어내는 일에 앞장선다. 달린 사람, 뚫린 사람 모두에게 교접지례(交接之禮)의 전형을 제시하고 계몽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배려, 봉사, 희생, 책임, 보살핌 등 이타(利他; selflessness)를 통해 이기를 추구함으로써 지상의 모든 사람이 살맛 나는 인생을 향유케 하여 세계 평화의 초석을 다지는 비정부기구(NGO)로 발족했다.
양관협의 기능적 스펙트럼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한눈팔지 않고 오직 한 구멍에만 모든 역량을 투척한 양물을 선정, 그 절제와 헌신의 업적을 수록한 위물전(偉物傳)을 편찬해 후세 사람들의 귀감을 삼도록 하며 똥구멍 쑤시기, 구멍 훔치기, 바꿔 들이밀기, 새싹 꺾기, 강제 들락거리기, 몰래 비디오 찍기 등 패악한 양물을 수색, 응징하기도 한다. 또한 금전 수수, 잿밥 지향, 단번에 10계단 뛰어오르기 등 위계(僞計)로 벌려주는 사특한 구멍을 징벌하는 것도 양관협 사업이다. 천박한 자본주의적 인식 또는 금전적 우월감에 근거한 일체의 매매 행위, 위력에 의한 폭력, 향락 증대 목적의 여하한 용도 변경을 배격하고 오직 순정(純情)의 사랑을 공유해 신뢰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 만들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녹색 성물(性物) 운동(Green genitalia movement)도 양관협 역점 사업 중 한 가지다. 멀쩡한 성물을 인위적으로 가공해 몸집을 부풀리거나 구멍을 줄이는 일체의 행위를 자연 환경을 훼손하는 행위로 분류한다. 몸체에 파라핀(paraffin), 글리세린(glycerin), 구슬, 기름덩이를 삽입하거나 머리털을 음모로 옮겨 심는 짓을 금지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양관협은 천태만상의 교환 의식을 통합, 표준화된 행동 지침과 윤리 강령을 제정, 강론, 교육한다. ‘여인에게 환희를, 사내에게 쾌거를, 인류에게 번성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양물과 구멍을 현실과 괴리되지 않은 질서 안에서 사랑의 구현수단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양물과 구멍의 관계는 특유의 속도와 구체성으로 욕구를 재창출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대면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욕망의 위치로 올라서고 순간적 합일을 갈망한다. 육체적 교감을 갈구하는 것이다. 달콤한 입맞춤의 당도(糖度)가 숨가쁜 탐욕으로 솟구치고 금세 자웅맞춤으로 연결되는 속효성 때문에 이성이 쉽게 해체되는 것이다. 형식과 질서에 반하는 도취적, 충동적인 특성이 자웅지교(雌雄之交)의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다. 암수 맞춤의 본질은 비이성적이며 디오니소스적이다. 그 어떠한 사유(思惟)도 문턱을 넘어선 도발적 육감의 흐름을 막아낼 수 없다. 구멍과 막대기의 교유(交遊)만큼 자의식과 정체성을 분해해 인간을 마비시키는 행위는 없다.
“내가 이 정도로 무너지다니….”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둘로 분리시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독특한 성향도 있다. 인간의 성행위가 바로 그렇다. 궁색한 성행위에서 떳떳한 명분을 찾아 자신을 변명한다.
‘나는 섹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탐닉하다가 성행위가 종료되어 정신을 차리고 나면 즉시 아폴론적 사유로 되돌아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질서와 일탈이 처절하게 융합되는 자웅 간 육교(肉橋). 하지만 밀착과 분해가 반복되면서 사랑나무를 키울 수만 있다면 그 저급한 본능이 운명적인 사랑의 열매를 수확하는 창조적 행위로 승화된다. 충동과 무질서의 짓거리 안에서 형식과 질서를 찾는 것이다.
하룻밤에 2억5000만명의 세상사람이 마냥 탐닉하며 무려 40만명의 새끼를 치는 일상의 교환(交歡) 풍속은 시대, 국가, 민족, 지역, 종교에 따라 편차를 보인다. 한쪽의 순풍미속(順風美俗)이 다른 곳에선 폐습이나 금기가 된다. 문화와 전통의 차이 때문이다. 제왕의 절대 사유지를 보호하기 위해 멀쩡한 양물을 잘라 내거나 위력으로 다공(多孔)을 독차지한 역사적 폐습(弊習)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양관협은 성 풍습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순정한 사랑이 매개한 교환(交換)으로 교환(交歡)함으로써 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인본주의적 사회정의에 접목하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