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위로받기 위하여

  • 입력2009-04-09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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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 참사로 아들을 잃은 고(故) 김남훈 경사의 아버지 김권찬(55)씨는 무엇이 진정한 소통이고, 위로인지를 보여준 분이다.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가슴에 묻고 사는 어미 아비 마음이, 세월이 간다고 잊히겠니….” 아들의 영정 앞에서 조시(弔詩)를 읽던 김씨는 끝내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아내는 온종일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아들 사진을 붙잡고 울고, 개인택시를 몰던 그는 아들 생각에 정신을 놓쳐 그새 두 번이나 접촉사고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택시도 팔려고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천향대병원에 차려진 철거민분향소에 찾아가 아무 이름도 쓰지 않은 흰 봉투에 10만원을 넣어 조의(弔意)를 표했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유족 분들이 풀이 죽어 앉아 계시는 걸 보니 내 일처럼 가슴이 찢어집디다. 우리 남훈이는 그래도 49재도 지냈는데… 너무 가여웠어요.” “장례식 비용도 없다는데 참 큰일입니다. 지금 나가도 보금자리가 없는 분도 있을 것 아닙니까. 정부도 입장이 있겠지만, 그래도 정부가 아니면 이 사태를 누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용산 시위대 일부가 경찰을 폭행한 데 대해서도 “사태가 이렇게 해결되지 않으니 화가 안 풀린 분이 많겠죠. 그렇지만 경찰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질서 유지를 담당하고 있으니 그렇게 나가는 것뿐인데…. 경찰을 왜 이렇게들 미워하느냐, 우리 남훈이도 가슴 아파할 것”이라며 고개를 떨궜다고 한다.(중앙일보 2009년 3월10일자)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어쩌면 가해자일 수 있는(검찰 발표대로라면) 철거민의 유족들이 풀죽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고 했다. 가여웠다고 했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에 중음(中陰)을 떠돌던 아들의 영혼도 안식(安息)할 수 있을 터이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에 철거민 유족들도 위로받을 것이다. 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고 진정한 위로가 아니겠는가. ‘엄정한 법치’만으로 증오와 적대, 분노와 원한을 풀 수는 없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야말로 얼음장 같은 갈등의 벽을 녹일 수 있다. 김권찬 씨는 그것을 조용하게 일러준 셈이다.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조차 없이, 비통함에 잠긴 유족들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는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워준 셈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얼마 전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라고 말했다. 이 말이 들춰보기 거북한 ‘불편한 진실’인지, 작가의 함축된 자의식의 표출인지, 그것을 따져보는 것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다. 다만 이 땅에 지금 ‘도둑이나 바보(행복하다고 믿는 사람)’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만은 분명하다.



    지금 행복하다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 경제위기로 고통 받고 강퍅한 세상에 진저리난 그들은 위로받고 싶어한다. 하기에 많은 이가 ‘워낭소리’를 보고,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다.

    여든 살이 다 된 늙은 농부와 마흔 살인 늙은 소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는 2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저예산 독립영화다. 수백~수천억원을 쏟아 붓는 할리우드 산(産) 블록버스터에 비한다면 볼거리가 빈약하다. 스케일이라고 할 것도 없고,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고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관객은 그저 서로 닮은 늙은 농부와 늙은 소의 걸음걸이처럼 느릿느릿 화면을 좇아가야 한다. 농부의 아내인 할머니의 가벼운 지청구가 지루함을 달래줄 뿐이다. 그러나 관객은 느림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만난다. 거기서 돈으로만 셈할 수 없는 노동의 가치, 경제로만 계산할 수 없는 관계의 가치를 떠올린다. 늙은 농부와 늙은 소의 동행과 이별에서 성장 신화(神話)와 경쟁에 쫓기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된다. 소가 죽기 전 농부는 평생의 굴레였던 코뚜레와 워낭을 풀어준다. 이별은 슬프지만 슬픔은 보는 이를 정화(淨化)한다. 그리고 맑아짐은 마음을 위로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위로받기 위해 ‘워낭소리’를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작은 영화에 200만의 관객이 몰려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줘, 라는 호소가 배어 있다. 혼만 내지 말고 머리를 쓰다듬어줘, 옳고 그름을 떠나 내편이 되어줘, 라는. 그럼에도 장성해 엄마의 곁을 떠난 딸은 엄마에게 늘 화를 내듯 말했다. 엄마가 뭘 아느냐고 대들 듯이 말했다. 엄마가 돼서 왜 그래? 책임지라는 듯이 말했다. 엄마가 알아서 뭐할 건데? 무시하듯 말했다. 그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가족은 소중한 엄마를 생각한다. 제가 하는 일은 엄마의 삶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엄마를. 엄마는 부엌이고 부엌은 엄마여서 엄마와 부엌을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엄마를. 앞으로 10년 동안 해야 할 계획에서 빠져 있던 엄마를.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가난 때문에) 하지 못하게 한 게 당신이라고 생각해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엄마를. 평생 말을 안 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겠거니 하며 살아온 아내를.(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서 부분 인용)

    모성(母性)은 돌봄이고 희생이다. 누구는 이를 두고 구시대적 어머니상(像)으로의 회귀(回歸)라고 비판하지만 사람들은 그 ‘엄마’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못된 아들, 못난 딸들이 신경숙의 소설을 읽으며 때로 가슴 아파하고 때로 눈물짓지만 가슴 아픔과 눈물은 오히려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엄마를 부탁해’가 50만부 이상 팔리는 이유를 찾기 어렵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위로받기 원한다. 위안을 얻기 바란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추위를 무릅쓰고 모여든 40만의 추모 인파는 그 같은 갈망의 표현이 아니던가. 그것이 한 편의 영화나 소설로 채워질 수는 없다. 대통령이, 정치가 채워줘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1년 동안 국민은 위로받지 못했다. 위안을 얻지 못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악화된 한국사회통합지수는 2003~2007년 나아지는 추세를 보였지만 이후 다시 나빠지고 있다. 사회통합지수란 한 사회의 통합 및 갈등 정도를 지수로 나타낸 것으로 0을 기준으로 플러스는 통합사회, 마이너스는 갈등사회를 나타낸다(1998년=-0.6580, 2003년=-0.4776, 2007년=-0.143, 2009년 추정=-0.45~-0.5).

    한마디로 대통령이 약속했던 사회통합은커녕 국민 간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그 첫째 원인은 물론 경제위기다. 성장을 통한 통합에서 성장이 안 되니 통합도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나쁜 것은 세계 경제위기 탓이고, 국민통합이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라면 정치, 그중에서도 대통령의 리더십은 있으나마나라는 얘기가 된다. 진정한 리더십은 위기에서 빛나는 법이다.

    대통령은 올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겠다고 했다. 권력기관에 내 사람들을 심어 확실하게 국정을 틀어쥐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다. 다수 국민의 선택을 받은 보수정권이 보수적 가치를 기반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다수의 지배가 절대적 선(善)이란 보장도 없다. 일찍이 프랑스의 정치학자 알렉시스 토크빌(1805~1859)은 그의 명저(名著)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횡포를 우려했다. 수로 밀어붙이는 것은 절차의 민주주의는 몰라도 내용의 민주주의를 채울 수 없다. 한나라당은 과거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일 때 다수의 횡포를 주장했다. 지금은 거꾸로다. 그러니 입장이 바뀌었다고 야당이 반대하면 국회의장에게 쟁점법안을 직권 상정하라 하고 다수결로 하면 된다, 그게 민주주의 아니냐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도 힘들겠지만 이 점을 가볍게 봐선 안 된다. 행여 비효율적인 정치와 의회는 밀어둔 채 좌고우면하지 않고 속도전을 감행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위험하다. 그것은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지금은 37년 전이 아니다.

    집권 측은 ‘좌파 타령’을 그만해야 한다. 지금 힘들고 지친 사람들은 ‘좌파’고 뭐고, 관심조차 없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반체제 친북좌파라면 집권 측이 뭐라 하지 않아도 국민이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파의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좌파까지 색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이다. 오늘의 사회갈등 심화에 정권의 이념적 편협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전(前) 정권이 저지른 우(愚)를 반동적으로 되풀이해서야 되겠는가. 보수정권이 잘하면 된다. 좌파를 탓하기 전에 우파가 반듯하면 된다. 그러면 누가 뭐래도 국민이 지지한다. 과연 그러한가. 내 탓부터 할 일이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위기가 아니라면 노사민정(勞使民政) 대타협은 이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임금을 깎고 일자리를 늘리자는 ‘잡 셰어링’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신입사원의 임금만 깎는 편법으로는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형식적인 인턴 고용으로 실업률 수치나 떨어뜨리는 임기응변으로는 1년을 버티기 어렵다. 자칫 소리만 요란한 이벤트성에 그친다면 정부에 대한 신뢰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추락할 것이다. 그것은 정권의 실패이자 나라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위로받기 위하여
    전진우

    1949년 서울 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한성대 초빙교수

    저서: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이제 정말 대통령이 1년 2개월 전 취임사에서 언명한 대로 이념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상식의 실용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다수 국민은 정부를 믿고 따르고 싶어 할 것이다. 대통령에게서, 정부에게서, 집권여당에게서 위로받고 위안을 얻고 싶을 것이다. 당장 경제를 살려내라는 게 아니다. 위로받고 위안을 얻게 해달라는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김권찬 씨 같은 마음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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