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손으로 개발한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의 아랍에미리트 수출 추진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국방’의 상징과도 같았다. 모두가 장밋빛 전망에 부풀었던 이 사업은 왜 고배를 마셨는가.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러나 아직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실패 원인을 명확히 짚어 치유하고 2라운드에서 역전승을 노려야 한다.
경남 사천시 사남면 한국항공우주산업의 T-50 조립라인.
전완기 롤스로이스사 한국지사장은 지난해까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상무로 T-50 수출을 진두지휘하다 퇴사한 사람이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T-50이 이탈리아의 M-346에 고배를 마셨다는 소식이 날아온 2월25일 밤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너무 억울해서’였다.
이탈리아의 M-346 고등훈련기는 아직 시제기도 나오지 못했다. 초음속 비행도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반면 T-50은 지금까지 34대가 생산돼 한국 공군이 ‘쌩쌩’하게 날리고 있다. 마하 1.5까지의 초음속 비행이 가능하다. 지금은 무장을 탑재해 경(輕)공격기로 만드는 개량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UAE는 아직 얼굴도 볼 수 없는, 태어난다고 해도 T-50보다는 성능이 떨어질 게 분명한 M-346을 선택했으니 야속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항공기 절반, 산업협력 절반
왜 우리의 ‘옥동자’는 고배를 마셔야 했는가.
기종 선정 발표로부터 한 달여 전인 1월21일, 김형오 국회의장은 UAE 순방길에 고등훈련기 도입사업의 책임자인 아부다비의 모하메드 빈자이드 알 나흐얀 왕세자를 만났다. UAE의 마음이 이탈리아로 기울었음을 확인한 김 의장과 대표단은 이명박 대통령 앞으로 서한을 작성했다. ‘신동아’가 입수한 이 서한은 T-50이 고배를 마시게 된 일련의 과정과 원인이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본문 뒤 상자기사 참조).
서한에 등장하듯 모하메드 왕세자는 성능 측면에서는 T-50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는 지난 수년간 진행되어온 수출 추진과정에서 여러 차례 확인된 사실이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UAE에서 2년마다 개최하는 국제국방전시회(IDEX) T-50 부스를 찾아 장시간을 보내거나 2006년 6월에는 경남 사천의 KAI 공장을 직접 방문해 시뮬레이션에 탑승하는 등 도입사업 결정권자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T-50에 노골적인 애정을 과시해왔다.
UAE의 요구조건과 T-50의 성능 및 개발계획을 살펴보면 UAE가 애초부터 T-50을 염두에 두고 고등훈련기 사업계획을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UAE 공군이 T-50을 선호했다는 점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T-50의 UAE 수출에 대해 장밋빛 기대감을 갖게 만든 이유였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UAE는 기종선정 과정에서 항공기의 가격이나 성능에 대한 평가비중을 50%로 두고, 산업협력 프로젝트에 관한 평가비중에 나머지 50%를 두었다. 각 부문은 평가의 주체도 달랐다. 항공기 부분은 UAE 공군이 평가를 담당했지만, 산업협력 부분은 모하메드 왕세자가 소유한 투자 전문회사 무바달라 사가 맡았다.
T-50이 채점에서 밀려난 것은 KAI가 제시할 수 있었던 산업협력 규모가 M-346을 만드는 알레니아 아에르마키(Alenia Aermacchi)보다 매우 작았기 때문이다. KAI는 2억달러 규모의 산업협력을 제의했으나, 아에르마키는 무려 20억달러 규모를 내놓았다. 아에르마키가 이렇게 큰 당근을 던져줄 수 있었던 것은 이 회사가 속한 ‘그룹의 힘’ 덕분이다.
이탈리아 2위 재벌이 받쳐줘
아에르마키가 속해 있는 그룹은 ‘핀메카니카(Finmeccanica)’이다. 1948년 설립된 이 그룹은 방위산업과 항공우주산업, 보안산업, 자동화 산업, 수송분야, 에너지 산업을 주로 펼쳐온 이탈리아 2위의 재벌이다.
핀메카니카 그룹의 자회사 가운데 하나가 ‘알레니아 아에로노티카(Alenia Aeronautica)’인데, 이 회사는 유럽 4개국(영국·독일·스페인·이탈리아)이 공동으로 개발·제작하는 유러파이터 타이푼 사업에 21%를 투자했다. 핀메카니카가 지분을 100% 갖고 있는 아구스타웨스트랜드는 헬기 분야에서 국제적인 기술력과 명성을 갖고 있다. 첨단 레이더 제작 기술을 갖춘 세렉스 사도 핀메카니카 그룹 소속이다.
이렇게 ‘빵빵한’ 자회사들이 있으니 핀메카니카 그룹은 20억달러 규모의 산업협력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핀메카니카 그룹이 제시한 ‘파이’ 중에서 UAE 지도자들의 환심을 산 것은 항공기용 복합재 제조공장을 합작으로 지어주겠다고 한 대목이다. 결국 T-50의 불행은 T-50을 제작하는 KAI가 빵빵한 그룹을 갖고 있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KAI는 산업은행이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반(半)국영회사다. 이 회사는 과거 삼성항공과 대우중공업의 항공부문, 현대우주항공이 합쳐서 설립된 것이라 지금도 삼성항공의 뒤를 이은 삼성테크윈과 대우중공업을 이은 두산인프라코어가 일부 지분을 갖고 있다. 모그룹이 없으니 KAI는 내놓을 것이 적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부터 청와대는 박선원 안보전략비서관이 팀장을 맡는 태스크 포스를 구성해 T-50 수출을 지원하기 위한 산업협력과제 마련에 나섰다. KAI나 국방부가 주축이 되는 항공협력과 산업자원부가 주도해 민간기업을 조율해 만드는 일반협력 과제가 그것이었다. 그 결과 KAI의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들을 주축으로 30여 개의 협력 프로젝트가 마련돼 지난해 중반 UAE 측에 전달됐지만, UAE 측 반응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알맹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UAE는 만성적으로 물 부족을 겪는 나라다. 두산중공업은 바닷물을 담수로 만드는 플랜트 제작기술을 갖고 있다. UAE는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데 한국의 원자력발전 실력은 세계 3강이다. UAE의 인구는 430만명에 불과하기에 UAE가 도입하는 원자로 크기는 한국이 개발한 중소형 원자로인 스마트(SMART)가 적격이다. 한국은 해수 담수화플랜트와 원전협력 등을 일반협력 분야 과제로 제의했으나 UAE는 이를 고등훈련기 사업을 위한 산업협력으로 쳐주지 않았다.
대신 UAE 측은 항공산업에 초점을 맞춰줄 것을 요구해왔다. 이는 UAE가 항공산업을 자국의 성장동력사업으로 중점 육성할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모하메드 왕세자가 개인적으로 항공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항공분야에서 KAI는 내놓을 것이 많지 않았다. 한국 공군이 F-15K를 도입해준 덕분에 보잉사로부터 받은 일감을 UAE에 제공하겠다고 제의하는 등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서 내놓은 것이 2억달러 규모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의는 이탈리아 측이 내놓은 것과 큰 격차가 났다.
또 다른 항공분야 협력과제로 UAE 측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중고도 무인정찰기(UAV)의 공동개발 문제였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2016년 완성을 목표로 개발 중인 이 사업에 모하메드 왕세자 측이 기술협력과 공동개발 의사를 타진했지만, 보안상의 이유와 원천기술 유출 문제에 관한 이견으로 국방부가 난색을 표해 성사되지 못했다.
왕세자의 분노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UAE 측의 부정적인 의사와 추가제의 요구가 한국 측에 전달됐지만, 이후 한국은 이렇다 할 추가사업을 제시하지 못했다. 김형오 의장의 서한에 인용된 모하메드 왕세자의 말은 그간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지금까지 9개월을 기다렸으나 한국 측에서 기술이전에 관해 아무런 제안이 없었다. ” 수출추진 업무에 관여했던 한 전직 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결국 방법은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에 UAE와의 일반분야 협력 프로젝트를 유도해 이를 묶어내는 것뿐이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기업에 이를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조율과 통합을 통해 더 큰 이익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무슨 필요가 있나. 기업들이 단기적인 이익만을 따지며 주춤한다면 정부는 당근을 제시하며 협조를 이끌어냈어야 옳다. 무기수출은 특히 초기 개척과정에서는 2억을 써서 1억을 번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협력사업에 들어갈 돈이 수출로 얻는 이익보다 큰지 작은지만 따질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게 바로 ‘시장개척’ 아닌가.”
UAE와 오래 협상해온 사람들에 따르면 UAE의 실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끈 한국의 산업화 발전 모델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60여 년 전 처절한 전쟁을 치른 자원빈국이 G-10 수준의 국가로 올라서고 세계 최고의 고등훈련기를 만든 비결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UAE가 산업협력 문제에 엄청난 가중치를 부여하고, 거듭 구체적인 추가 프로젝트를 요구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UAE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관심은 T-50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UAE는 한국과 이탈리아 양국에 아부다비로 가는 직항로 개설을 요구했고 이탈리아는 이를 바로 들어줬지만, 한국은 국내 항공사의 부정적인 입장에 따라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한국 기업들은 UAE라는 시장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TF도, 챙기는 사람도 없었다”
구조적인 한계에 덧붙여, 이 무렵에 겹친 정부와 KAI 내부사정도 발빠른 조율과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우선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T-50 수출 문제에 관한 정부 차원의 노력은 탄력을 받지 못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당선자 시절에는 이 대통령이 왕세자에게 친서를 보내는 등 가시적인 행보가 있었지만, 정부 출범 이후 어수선한 시기에는 청와대 내부에서 이를 꼼꼼히 챙기는 분위기가 없었다는 것. 이 무렵 한 청와대 관계자는 “T-50 문제를 별도로 챙기는 TF는 없었고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수석·비서관급 인사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국방’이라는 구호와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다.
더욱 눈여겨볼 것은, 지난해 이후 UAE 측의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리 정부 내에서 제대로 공유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대목이 김형오 의장의 서한에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서한 초반 ‘그동안 대통령님께 보고된 바와는 달리 현재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실제로 국회의장실 측은 “UAE 방문 전에 관계부처로부터 전달받은 현황보고는 우리가 상당한 열세에 처해 있다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물건은 우리가 낫고 산업협력은 저쪽이 나으니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가보니 그간 파악하고 있던 상황과 완전히 달라 김 국회의장을 비롯한 대표단 구성원들이 깜짝 놀랐고, 그 때문에 예정에 없던 무바달라 사 방문까지 급히 진행해 대통령에게 서한을 쓰게 됐다는 설명이다. 쉽게 말해 일은 오래전에 어그러지고 있었지만 한국의 최상층부는 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셈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실은 KAI 사장 교체다. 지난해 7월 2004년부터 T-50 수출 문제를 진두지휘했던 정해주 사장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러나고 한나라당 선대위 중기위원장과 인수위 경제2분과 상임자문위원을 지낸 김홍경 전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이 사장에 취임했다. 형식상으로는 KAI 이사회의 결정이었지만 사실상 정부의 낙점이었다. 낙하산 논란이 불거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 KAI는 반국영회사인데다 대기업들이 지분을 나눠갖고 있다. 특정회사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경계해온 주주들은 사실상 정부의 사장 선임결정에 따르는 것이 그간의 관례였다.
뒤늦은 부산, 결정적인 정보 착오
관계자들은 전임 정해주 사장 역시 이러한 한계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부는 사운(社運)이 걸린 T-50 수출 성사 여부가 임박한 상황에서 수년간 UAE 측과 접촉하며 노하우를 쌓은 사장을 교체했다. 아랍권에서는 협상에서 최고결정권자 간의 친분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신임 사장이 새로 ‘안면을 익히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전임 KAI 수뇌부가 고등훈련기 도입사업을 지휘하고 있는 모하메드 왕세자와 수차례 미팅을 해왔지만, 협상 중간에 취임한 김홍경 사장은 왕세자를 접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일반 분야 산업협력의 주무부처가 산업자원부에서 지식경제부로 재편되는 과정도 문제였다. 담당 실무자는 바뀌지 않았지만 부처 전체가 새로운 편제에 적응하는 데 에너지를 쏟느라 T-50 관련업무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 이 무렵 KAI 측 관계자들은 “정부 출범과 그에 따른 부처 개편, 신임 장차관 임명 등이 맞물리면서 T-50에 신경 쓸 여력이 줄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토로하곤 했다. 특히 산업협력 과제를 설정하는 작업이 힘을 받지 못하자 실무선에서는 상당한 무력감이 일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김형오 의장의 서한을 계기로 문제의 심각성이 청와대 내에서 공유되면서 정부는 뒤늦게 분주해졌다. 당장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비상대책반 구성을 지시했고, 국방부와 지식경제부가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KAI는 고성능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는 약점을 극복하고자 마지막 가격 입찰이 시작된 올해 초 T-50의 가격을 대폭 깎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리 없었는데다 정보착오도 발생했다. KAI는 UAE로부터 2월 말에 열리는 IDEX에서 고등훈련기 우선협상대상 기종 선정 결과를 발표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왕세자를 면담한 김형오 국회의장이 4월에 발표한다고 하더라고 전한 것. 더욱이 정부는 2월 말 발표가 있을 것으로 알고 급히 그에 맞춰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의 방문을 추진해왔으나 UAE측은 왕세자의 일정이 비지 않아 3월 8일 만날 수 있다고 통보해 왔다. 김형오 의장 보고대로 4월에 선정 결과를 발표한다면 시간이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3월초로 이 장관의 방문을 연기했지만, UAE는 KAI에 공식 통보한 대로 2월25일 IDEX에서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우선협상대상자’의 의미
조율의 실패와 정보의 혼선, 정부의 안이한 태도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T-50은 UAE의 우선협상대상국 지정에서 탈락했다. 그렇다면 이제 완전히 끝인가. 결론부터 밝히고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자. 지금 T-50은 눈물을 흘릴 수 없다.
3라운드 정도로 이어갈 시합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 울린 것은 제1라운드를 마치는 종이다. 제1라운드 채점 결과 T-50은 M-346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을 뿐이다. 2, 3라운드가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T-50의 실패를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시합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동아일보 기사의 첫 문장이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동아일보 기사는 “T-50이 고배를 마셨습니다. 아랍에미리트가 이탈리아 알레니아 아에르마키사의 M-346을 우선협상대상 기종에…”로 시작한다. 우선협상대상 기종 선정과 계약기종 선정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는 3월9일자에 다시 쓴 기사에서 UAE가 M-346을 우선협상대상 기종으로 선정했다고 밝힘으로써, UAE가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았음을 명확히 했다. 오해를 없애기 위해 UAE가 발표한 문장을 살펴보자. 중동 국가의 특성상 문법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은 기자가 의역했음을 밝혀둔다.
‘지난 3년 동안 UAE 군은 최종 후보 기종을 놓고 광범위한 연구와 평가를 수행한 결과 이탈리아 알레니아 아에르마키 사의 M-346 고등훈련기 프로그램을 완전 통합하거나 종합하도록 보충할 경우 더 낫다는 결과를 얻었다.…(중략)…마지막 계약 협상은 조만간 결론이 날 (아에르마키 사의) 조건과 기술지원을 명확히 한 후 시작할 것이다.’
문장의 의미는 간단하다. UAE는 M-346을 최종 계약기종으로 선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UAE는 이 내용을 가장 늦게 발표했다는 점이다. UAE는 고등훈련기 부문은 발표하지 않으려다 갑자기 이 내용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많다. 앞서 말했듯 지난해부터 한국은 이 나라가 요구한 산업협력 조건을 채우지 못해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UAE는 이러한 한국을 돌려세우기 위해 1년을 기다렸으나 아무 반응이 없자 2월25일 황급히 위 내용을 발표문에 집어넣은 것으로 전해진다.
뒤집어진 무기 도입 역사
이러한 UAE의 결정은 뒤집힐 수 있다. 국내외에서 벌어졌던 무기 도입의 역사는 우선협상대상 기종이 최종 계약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도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다.
1992년 한국이 진행한 KFP(Korea Fighter Program) 사업에서 한국은 미국 맥도널더글러스(지금은 보잉에 합병)의 FA-18을 우선협상대종 기종으로 선정했다가 훗날 이를 취소하고 제너럴다이내믹스 (지금은 록히드마틴에 합병)의 F-16 120대를 도입하는 것으로 최종결정을 내린 바 있다. 당초 맥도널더글러스측이 제시한 가격이, 최종도입가가 아니라 협상 시점의 가격이었던 까닭에 실제 전투기 도입가격이 크게 상승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우선협상대상 선정은 계약이 아니기에 파기하더라도 위약금을 물거나 계약금을 떼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UAE는 우선협상대상을 변경한 ‘전력’이 한국보다 더 많다는 점이다. 1988년 UAE는 주변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F-15 도입을 추진하자 이에 대응해 차기전투기 사업을 추진했다. 사업 초기 UAE는 FA-18을 우선협상대상 기종으로 선정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F-15 도입이 확실해지자 이를 취소하고 다시 F-15E와 F-16 최신형을 경쟁시키다가 2000년 결국 F-16 최신형으로 최종계약을 했다.
수년 후에는 이렇게 도입한 F-16 최신형기의 정비용역 회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우선협상대상자를 번복했다. 2007년 UAE는 다인코(Dyn Corp)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가 F-16 제작사인 록히드마틴이 관련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하자 다시 입찰에 부쳐 록히드마틴과 최종 정비계약을 맺은 일이 있다. 몇 년 전에는 수송기 도입사업을 벌이면서 인도네시아 회사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가 록히드마틴의 C-130J와 보잉의 C-17 수송기를 도입하는 것으로 번복하기도 했다.
T-50 사업 파트너이자 UAE에서의 사업 경험이 많은 록히드마틴은 KAI에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 있다.
프랑스 전문매체의 ‘회의론’
이러한 상황은 이탈리아 측 사정을 살펴봐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번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알레니아 아에로마키 사는 모(母)그룹의 엄청난 지원약속에 힘입어 1라운드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외 전문가들은 “아에르마키 사가 과연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지적한다.
2라운드가 시작된 지금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핀메카니카 그룹을 등에 업은 아에르마키 사가 과연 20억달러 규모의 산업협력을 실행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국제 무기거래에서 유럽의 방산업체들은‘부도수표’를 남발해왔다. 말로는 ‘다 해준다’고 하고 실제 단계에 들어갔을 때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빠져나간 전력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나라의 대표로 이탈리아가 꼽힌다.
핀메카니카 그룹이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그룹이라고 하더라도 20억달러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더구나 유럽 경제는 미국발 경제위기에 이어 동유럽발 경제위기로 위축될 대로 위축돼 있다. 핀메카니카가 UAE에 항공기용 복합재 제조공장을 지으려면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하는데, 과연 유럽 경제가 가라앉은 지금 많은 돈을 빌려 투자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은 ‘제3자’들도 제기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매주 발행되는 항공 방산 관련 매체인 ‘블레튼(Bullettin)’은 2009년 3월6일자 기사에서 ‘아에르마키 사가 자축하기에는 아직 이르며 이제부터 여러 변수를 담고 있는 협상을 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UAE는 고등훈련기는 물론 경공격기로도 쓸 수 있는 기종을 개발해달라고 했는데 M-346은 아직 최종 형상도 나오지 못했으므로 아에르마키가 UAE가 요구하는 2012년까지 경공격기를 개발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2012년 경공격기 생산을 시작하므로 UAE의 요구는 T-50 사업일정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 매체는 UAE와 아에르마키가 계약하지 못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평했다.
1라운드에서 패한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UAE와 아에르마키 간의 계약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냉철히 살펴보는 것뿐이다. 이 협상은 6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6개월 혹은 1년 후 아에르마키가 애초 약속한 것들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하면 UAE는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을 취소하고 재입찰에 들어갈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한국이 준비해야 할 것은 그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는 일이다.
UAE는 아랍 경제권의 중심에 해당하는 나라다. 중립국 스위스가 출처를 묻지 않는 ‘비밀계좌’를 운영해 세계의 돈을 끌어 모았듯 무슬림 세계에서 스위스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나라가 UAE다. UAE 소속 토후국의 하나인 두바이가 세계 자금을 끌어 모아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던 비밀도 여기에 있다.
앞으로 한국의 방위산업이 진출해야 할 시장은 중동과 아프리카다. 그리고 중동에 진출하려면 UAE부터 치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게 아랍 진영을 오래 상대해온 전문가들의 평가다. UAE 시장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T-50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훈련기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모든 공군기가 사라진 이라크는 지금 T-50을 수입해 공군을 재건하려는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대통령의 첫 반응
소식통에 따르면 T-50이 UAE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보인 첫 반응은 “이런 사업은 민간기업이 해야지, 반(半)국영기업인 KAI가 할 수 있겠어요?”였다고 한다. 큰 기업을 경영했던 이 대통령은 반국영기업과 민간기업의 차이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KAI의 대주주인 산업은행이 민간기업에 주식을 매각해 이 회사를 민영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KAI보다 훨씬 더 조건이 좋은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려는 그룹이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당분간 KAI의 민영화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계기로 KAI가 마케팅 파트를 강화하고 아에르마키의 추락을 기다린다면 의외의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UAE 시장을 포기하지 말라”
앞서 설명했듯 이윤호 지경부 장관의 UAE 방문 등 막판 협상과정에서 준비되던 한국 측의 움직임은 우선협상대상자가 발표되자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에 대해 UAE와 오래 협상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UAE가 원하는 것에는 산업협력뿐만이 아니라 한국이 산업화 시기 이룩한 고속성장의 노하우도 포함된다. 그들은 T-50의 성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T-50 수출이 어려워졌다고 우리가 관심의 끈을 놓으면 그들은 M-346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고배를 마신 지금 더 적극적으로 UAE를 찾아가야 한다.”
공교롭게도 T-50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결판 날 것으로 보이는 싱가포르의 고등훈련기 사업에서도 M-346과 맞붙고 있다. 유럽에 몰아친 경제위기와 촉급한 개발일정 때문에 아에르마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역전의 기회는 찾아온다. 지난 1년동안 우리가 하지 못했던 과제들을 다시 추슬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새로운 시장 개척을 목표로 한국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UAE에 진출한다면 한국은 UAE와 싱가포르 양쪽에서 승전보를 올릴 수도 있다. 아직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