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은 2월부터 평양 현대화 공사 등에 투입한 인민군 병력 일부를 부대에 복귀시키고 해외 파견 인력을 귀국시키는 등 긴장 조성을 강화했다. 주민들을 상대로 한 전쟁 대비 훈련도 늘렸다. 북한이 거세게 대남 공세에 나선 내부 사정은?
클린턴 장관의 발언 속내를 알 길은 없지만 그의 발언은 상당히 중요한 이론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바로 북한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주는 내부요인에 관한 문제다. 제임스 로즈노의 ‘연계이론’ 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 나라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주는 많은 요소 가운데 ‘내부 요인’은 언제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북한이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주변국과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는 클린턴 장관의 논리는 지난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남 및 대외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킨 북한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對인민 군기 잡기
북한이 대남 공세를 펼칠 때마다 외부의 연구자들은 그것이 세 가지 용도라고 설명해왔다. 대남(對南), 대미(對美), 대내(對內)용이 그것이다. 우선 남한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 비난 공세와 무력시위를 벌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를 통해 미국과의 핵 협상 및 관계 개선 노력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고스톱에서 말하는 ‘1타 3피’ 격으로 외부적 긴장 조성을 통해 주민 동원과 엘리트 집결 등 내부 ‘군기 잡기’의 효과를 노린다는 설명이다. 언론과 분석자들은 이런 설명의 틀을 지난해 3월 말 이후 북한이 대남 공세를 강화할 때마다 애용해왔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세 번째 대내용이라는 관점이다. 굳이 ‘분단체제론’을 논하지 않더라도 분단 정권 수립 60년 동안 남북한 지배세력은 상대방의 존재를 자신의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해왔다. 과거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정권도 ‘반공’을 국시(國是)로 북한의 도발 위협을 내세우며 국내 반대세력을 제압했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선군’이라는 국가전략에서 보는 것처럼 북한은 동서 냉전이 끝나고 남한이 민주화된 2009년 현재까지 미국과 일본, 남한 등의 침략 위협을 내세우며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독재에 신음하는 주민들의 불만을 억누르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이후 남한과의 관계를 지속적이고 단계적으로 차단해왔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에도 북한은 종종 남한과 거리 두기를 시도했지만 이내 다시 복원됐다. 그러나 2008년 이후 북한은 일관되게 남한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이후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통한 육로 통행을 엄격하게 제한, 차단하는 이른바 ‘12·1’ 조치를 단행했다. 북한은 올초 무력 도발 가능성을 내비쳤다. 1월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을 조선중앙TV에 출연시켜 “(남한에 대한) 전면 대결태세”를 강조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1월30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서의 대남 무력 도발을 시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동해에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예고했고(2월24일)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전쟁연습’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징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대남용과 대미용이라는 해설이 가능하다. 새로 집권한 한국의 이명박,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길들이고 기선을 제압하고자 실력행사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이 글의 관점인 ‘대내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북한 내부에는 지속적으로 남한과 관계를 단절하고 끝내 한국과 미국을 향한 무력 도발이라는 적극적 공세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이를 사회과학적 용어인 ‘분석의 차원’으로 다시 나눠보면 김정일을 둘러싼 최고지도자의 차원, 지배엘리트의 차원, 마지막으로 인민대중의 차원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최고지도자 차원에서는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공식 제기되고 후계자 문제가 공론화됐다. 지배엘리트 차원에서는 먼저 지도부의 대폭적인 물갈이가 이뤄졌다. 남한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10년 동안 대북 ‘햇볕정책’을 진행하면서 그의 상대방 역할을 했던 노동당 통일전선부 중심의 대남 엘리트들이 물러나고 군부를 중심으로 한 대남 강경 성향의 엘리트들이 득세하면서 이들 사이의 이해관계 조정이 진행됐다. 인민대중 사이에서는 한국을 통한 자본주의 사조의 유포가 최고조에 달했다. 지난해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올림픽을 계기로 개혁과 개방에 대한 인민들의 욕구도 거세졌다.
대북 삐라에 놀라다
북한이 ‘수령 절대주의 체제’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북한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줄어드는 실질적 손실보다 북한을 자극하는 것은 그것이 수령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에 따르면 북한은 김정일 최고지도자 1인에게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수령 절대주의 독재체제’다. 이 체제에서 최고지도자는 ‘체제 그 자체’이며 ‘체제 유지’라는 국가의 목적은 곧 최고지도자의 안위라고 할 수 있다. 황 비서에 따르면 이 체제에서 국가의 모든 정책은 수령의 권위를 높이고 수령의 지배권을 확대하는 데 집중된다.
북한은 1990년대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라는 대외적 위기에 직면해 체제 유지를 위해 대남정책에서 ‘민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는 1990년대 ‘민족대단결론’에 대한 강조를 시작으로 2000년대에는 ‘우리민족끼리’라는 담론으로 정착됐으며 이 연장선에서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의 6·15공동선언과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의 10·4정상선언이 나왔다.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남한 내 지배적 여론이 북한의 민족담론에 등을 돌린 것은 북한 지도부의 관점에서는 최고지도자가 내세운 대남전략과 정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수령의 권위가 감히 실추된 상황에 해당한다.
이런 가운데 김 위원장이 지난해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진 사실이 9월 한국 등 세계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특히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 소식을 담은 남한 민간단체들의 대북 전단(삐라)이 북한 전역에 살포됐다. 납북자가족모임(회장 최성용)이 만든 전단에는 “우리와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김정일은 자유세계의 언론에 의하면 막내아들 김정운(25세)의 치명적인 사고와 병으로 충격을 받고 풍을 만나 움직이기 힘든 반신불수 상태라고 합니다. 당신들의 ‘위대한’ 독재자의 말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독재자가 병들어 쓰러져 있습니다”라고 적시했다. 이를 통해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인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지도부는 민감하게 대응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중순 조선노동당 내 비서국(우리의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이 임명한 고위간부들의 동향을 24시간 파악해 보고하도록 체제 유지 담당 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에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트 내부에서 후계 문제가 은밀하게 논의되는 등 절대 충성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외국 정보기관들이 대북 정보활동을 벌이는 중국지역에서 내부 비밀 누설자 색출활동을 벌이고 내국인의 해외출장을 제한하고 외국인의 방북을 선별적으로 허용하는 등 외부 정보의 유입과 유언비어 확산 방지에 부심했다. 이 와중에 남측의 전단이 살포되면서 전방의 군인들마저 동요하고 있다고 판단되자 이를 빌미로 대남 공세를 강화한 것이다.
대남 공세의 3단계 심화
실제로 지난해 북한의 대남 공세를 추적해보면 김정일 건강 이상 이후 대남 공세가 질적, 양적으로 강화됐음을 알 수 있다. 2008년 이후 북한의 대남 공세는 세 시기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먼저 지난해 3월24일 북한이 개성공단 내에 있는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경협사무소)에 상주하던 한국 당국자 11명을 사실상 추방한 이후부터 7월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시기다.
두 번째는 지난해 10월2일 북한 군사실무회담 북측 대표단이 남측 군 당국에 군사분계선을 통한 육로 통행의 제한 차단을 뜻하는 이른바 ‘12·1조치’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그해 12월1일자로 실행에 옮긴 이후부터 같은 달 17일 현장을 확인하는 시기다.
세 번째는 올해 1월 북한이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우리의 총대는 원쑤들의 그 어떤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징벌할 것”을 주장한 이후부터 대남 무력도발을 시사하다가 2월24일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를 예고한 뒤 한미 합동군사훈련 반대를 명분으로 한국은 물론, 미국과의 무력 대결 긴장을 조성하는 시기다. 세 시기의 특징은 표와 같다.
먼저 Ⅰ시기와 Ⅱ시기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시기 북한은 남한 당국과의 관계를 단절한 뒤 민간관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의제를 병렬적으로 내놓는다. 이때는 행동보다는 말이 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Ⅱ시기에 들어서서는 민간관계도 제한적으로 차단했으며 말뿐이 아닌 ‘12·1’조치라는 적극적인 행동화를 단행했다. 모든 시기에 군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Ⅱ시기 이후에는 군이 직접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Ⅱ시기의 경우 군은 모두 네 차례 실제 모습을 나타냈다.
당국 간 회담을 끊은 뒤 처음으로 10월2일 군사실무회담과 같은 달 군사실무책임자 접촉에 나타났고 국방위원회 간부들이 11월6일과 12월17일 두 차례에 걸쳐 개성공단에 직접 나타나 현장을 시찰하고 남측 당국자들을 위협했다. Ⅲ시기의 경우 올해 1월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TV에 나타난 것이 사례다.
북한은 7월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이 터진 이후 김정일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8월 중순까지 사건 관련 대응 조치 3건만을 내놓으며 이렇다 할 대남 공세를 하지 않았다. 또 8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도 여간첩 원정화 사건에 대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 1건과 9월5일자 김정일 담화, 9월8일자 공화국 창건 60돌 경축 중앙보고대회 문건 등 3건의 대남 메시지를 제외하고는 일절 대남 공세를 하지 않았다. 이들이 10월 초를 계기로 대남 공세의 질적 전환을 꾀한 것은 당연히 김정일 건강 이상이 영향을 주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남한 민간단체들의 대북 전단(삐라) 발송이 한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군이 직접 얼굴을 드러내고 ‘돈이 되는’ 개성공단까지 차단하려 한 것은 최고지도자의 건강 이상에 따른 엘리트들의 긴장 고조와 충성 경쟁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우선 ‘유일사상 10대 원칙’ 등에 따라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훈련받은 북한 엘리트들이 김정일의 건강과 사생활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한 대북 전단 문제를 그냥 앉아서 말로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민간단체들은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전단을 살포했고 북한은 이에 대해 말로 대응해왔던 점도 그 증거다.
평양은 準전시상태
다음으로 Ⅱ시기와 Ⅲ시기의 차이에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이 대내외적으로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는 기간은 공교롭게도 3월8일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대회를 앞둔 기간이었다. 이번 선거는 김정일 건강 이상설 이후 치러진 것으로 당연히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대의원으로서 공식 정치활동을 시작하는지가 국내외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또 북한 내부에까지 3남 김정운 후계자 지명설이 퍼지는 등 후계자 문제를 두고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후계자 문제가 대외적인 긴장을 조성할 수 있다는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발언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 시기 북한의 무력도발 시위는 두 가지 점에서 이전 시기와 다르다. 우선 남측을 향한 메시지가 과격하고 즉흥적이다. 북한은 2월2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이상희 국방부 장관의 ‘대응타격’에 대해 즉각 “도발자의 아성까지 초토화하겠다”고 대응했고, 3월2일에도 전날 이명박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발언을 즉각 비난하는 등 초조한 속내를 드러냈다. 두 번째 변화는 2월24일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예고를 계기로 ‘키 리졸브’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짐으로써 공세의 상대방을 한국에서 미국으로, 나아가 한미 동맹으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내부 전쟁 분위기도 고조시켰다. 2009년 2월의 평양은 준(準)전쟁 상태였다.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2월부터 평양 현대화 공사 등에 투입됐던 인민군 병력 일부를 부대에 복귀시키고 해외 파견 인력을 불러들이는 등 긴장 조성을 강화했다. 주민들을 상대로 한 전쟁 대비 훈련도 강화했다. 한 소식통은 1월 “북한이 최근 관청과 공장, 기업소 등 각 사업장마다 주민대피소(주로 건물 중앙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곳에 위치)를 새로 설치하거나 기존 대피소를 새롭게 단장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대남 무력도발을 지지하는 언론 보도와 대중 집회도 잇따랐다. 노동신문은 2월3일 ‘북남관계 개선을 반대하는 것은 최대의 민족반역 행위’라는 제목의 개인 논평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북과 남 사이의 정치·군사적 대결을 더욱 격화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민족적 재난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민주조선도 3월1일 ‘선언 존중의 외피마저 벗어던진 반통일 집단’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삶의 보금자리인 우리 조국 강토가 참혹한 전쟁터가 될 수 있다”라고 위협했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북한 조선노동당의 외곽 조직인 청년단체)과 각급 공장 기업소 등은 당국의 대남 공세를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잇달아 열었다.
386 운동권 출신으로 ‘강철서신’의 저자인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2009년 북한의 대외공세를 북한 후계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지어 분석했다. 그는 “김정일 처지에서는 대외적으로 긴장이 있어야 내부의 불만의 목소리가 약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서 “군 내부에서 김정일이 지명한 후계자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움직임이 싹틀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남한風을 막아랏!
지난해 1월1일 이후 올해 3월11일까지 북한의 주요 대남 공세 메시지 52건을 분석한 결과 군이 나선 경우가 27건(51.9%)을 차지한다. 당이 20건(38.4%), 내각이 5건(9.6%)으로 뒤를 이었다. 대남 공세에 군이 나선 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통일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발간한 ‘김정일 정권 등장 이후 북한의 체제유지 정책 고찰과 변화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6·25전쟁 이후 북한의 대남 정책은 군이 주도했다. 대남 공작과 침투, 도발 등의 기획 및 집행을 결정한 핵심 기관은 인민무력부였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권력 장악을 마친 1970년대에 들어서야 대남 정책 기능을 당으로 복속시켰다. 이후 당내에 대외조사부(35호실), 작전부, 통일전선사업부 등을 만들었다는 것.
대남 공세에 등장한 군부 내 권력기관은 매우 다양하다. 각종 군사회담 대표단이 11차례로 가장 많지만 군 최고위 기관인 국방위원회가 두 차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네 차례, 최고사령부가 한 차례 각각 등장했다. 1998년 개정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방위원회는 북한에서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이다. 헌법 102조에 따르면 ‘사실상의 국가수반’인 국방위원장의 헌법상 직무는 “일체의 무력을 지휘통솔하며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최고사령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사령관인 군 최고 지휘조직이다. 총참모부는 실질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 지휘조직이다.
군부의 등장은 과거 대남정책을 총괄하던 통일전선부 내 젊은 실세들의 몰락과 극명하게 대변된다. 김양건 통전부장은 여전히 공개석상에 당 부장이라는 직함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통전부의 외부 활동은 2008년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 내남 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했던 최승철 전 부부장과 권호웅 내각 참사 등은 남한의 정권교체 이후 대남 정책 수립에서의 판단 잘못과 내부 비리 등에 휘말려 혁명화 교육에 처해지거나 철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08년 12월 낸 ‘장성택 노선과 2009년의 북한’이라는 보고서에서 2005년 이후 장성택 당 중앙위 행정부장의 재등장과 보수적인 지배엘리트들의 등장이 북한의 정치·경제적 보수화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북한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 7·1경제관리개선조치와 종합시장 도입 등 제한적인 경제 개혁 정책을 펴고 전향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등 상대적으로 개혁 개방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2005년 가을 배급제 회복 움직임을 시작으로 확대되고 있던 시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등 이전의 개혁 개방 정책을 뒤로 돌리고 있다. 북한의 개성공단 통행 제한과 대남 전쟁 협박 등은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2008년 들어 대남 공세를 심화하는 동시에 시장을 강하게 단속하는 것은 양자가 무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시장은 북한 지도부의 관점에서는 최고지도자의 차원과 지배엘리트의 차원에 제기되는 남한의 위협이 잉태되고 배양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위협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개성공단에 대한 민간 통행 제한 및 차단 조치도 바로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 자본주의 서식지”
우선 남한에서 대북 전단을 통해 유입된 김정일 건강이상설은 시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확산됐음이 분명하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제한된 개혁과 개방의 틈을 타고 북한의 시장에는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 등을 담은 CD와 책이 유포됐다. 이른바 ‘남한풍(風)’의 유포로 많은 인민대중이 남한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2005년 하반기 이후 등장한 북한 보수 지배엘리트들은 반(反)시장, 반남한, 반개혁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친(親)시장, 친남한, 친개혁 성향의 과거 지배엘리트들이 형성해놓은 이권을 회수하는 과정에 남한과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북한은 2008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체제성과 민족성을 고수하고 혁명적 원칙, 계급적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사회주의의 본태를 살려나가야 한다”며 ‘본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김 위원장은 6월 “시장은 자본주의 요소의 서식지”라고 강하게 비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장과 기업소 근로자는 물론 교원과 의사들까지 제 살길을 찾기 위해 직장을 내팽개치고 장사에 몰두하자 북한 지도부는 시장이 외부 정보의 유입과 유언비어 유포의 온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북한은 ‘남한 풍’을 지우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다. 북한 당국은 “최근 악화된 식량 사정은 남측의 대북 강경정책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미제(美帝)도 쌀을 50만t이나 주는데 같은 민족이 겨우 옥수수 5만t을 준다고 해서 거절했다”고 주민들을 상대로 사상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당과 국가안전보위부 등은 ‘특별검열단’을 구성해 한국 TV 드라마 등 동영상을 보거나 유포하는 주민에 대한 색출작업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과 ‘거래’를 한 대남담당 부서(통전부나 민경련 등), 각급 기관의 외화벌이 일꾼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관점에서 개성공단은 위의 모든 요소를 포함한 공간이다. 시장과 다름없는 자본주의 원리로 운영되고 있으며 인민대중에게 정보가 유통되고 남한풍이 유입되는 장소다. 이에 대해 조봉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달 11월 “조선노동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2007년 대남사업 전반에 대해 사정작업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개성공단 운영에 따른 외부 현실과 사상 유포 문제가 드러난 것으로 알고 있다. 당 내부 강경파들은 이때부터 개성공단 중단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전했다.
이상의 논의는 북한 무력 공세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일부 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이 대북정책을 바꾼다고, 미국이 전향적인 대화에 나선다고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이 대외적인 무력 공세를 통해 얻으려는 최대 목표는 바로 체제 유지다. 여기서 체제는 ‘김정일 최고지도자와 일부 지배세력’이나 다름없다. 이 목적을 위해 인민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언제라도 한국과 미국 등 주변국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 북한이 보통의 상식적인 ‘정상국가’가 되고 ‘열린사회’로 나오기 전까지 주변국들은 북한의 무력 도발 협박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