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환 추기경 추모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어린 시절, 주교 시절, 추기경 시절, 은퇴 시절을 회고하는 기사들…. 그러나 그의 신학에 관한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뚜렷한 신학관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그분의 신학이 어려운 것인지…. 그래서 수소문해보니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인 손희송 신부를 만나보라고들 했다. 언뜻 가톨릭청년성서모임에서 재미나게 성서를 말씀해주시던 사제의 얼굴이 스쳤다. 다시 만나니 그분이다. 좋아했던 담임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마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은퇴한 1998년부터 10년간 신학교 뒤편에 있는 혜화동 주교관에 머물렀다. 그곳에서는 은퇴한 신부와 특수 사목 담당 신부들이 지낸다. 3분쯤 걸었을까. 대학본부 뒤편으로 한적한 산책로가 보인다. 이름하여‘목자(牧者)의 길’. 선하게 생긴 참나무와 낙엽 덕분인지 마음이 정돈된다.
“제가 감히 그분의 신학적 사상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혹시나 누가 되자는 않을지 염려되기도 하고…. 그래도 그분 말씀과 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신학을 가르치는 후학들이 뭔가를 하긴 해야 할 텐데…. 그분은 전문 신학자라기보다는 실천가, 가톨릭 용어로는 ‘사목자’였습니다. 그분에 관한 전집이 17권 출판되었는데, 그것을 꼼꼼히 읽어봐야 그분의 신학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겠지요.”
산책로를 거닐던 그는 몇 번이나 막막하다고 말했다. 그의 얼굴에 애잔함이 묻어났다.
“여기로 자주 산책 나오고 그러셨어요. 신학생들도 감동스러웠다고 해요. 나이 들어도 저렇게 기도하는 사제가 되어야겠다고…. 저는 그분을 여러 번 뵙긴 했지만 잘 안다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분께 사제서품을 받고, 세배도 드리러 가고, 제 영명(세례명)축일 때마다 축하전화도 받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어요. 늘 말없이 격려해주시는 아버지 같은 분이죠, 그분은.”
그는 자신의 블로그(cyworld.com/ beneson)에 이렇게 적어놨다.
“하느님의 사람인 김수환 추기경은 그 존재만으로 힘이 되고 빛이 되었던 분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고 고맙고 기쁩니다. 그가 떠난 자리가 너무 커서 가슴이 허전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우리 각자가 조금씩이라도 채워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처럼 큰 힘과 빛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작은 힘과 빛이라도 되어야 합니다.”
추기경으로 임명된 이유
‘목자의 길’을 걷다 손 신부의 집무실인 교무처장실로 들어갔다. 저마다 손에는 1층 사무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와 김 추기경 관련 책들이 들려 있었다.
▼ 김 추기경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법정 스님과 같은 타종교 인사들과 절친하게 지내셨다는 건데요, 그분이 유난히 타종교에 관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2000년 5월에 김 추기경님께서 독립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상을 수상한 데 대한 답례로 그날 선생의 묘소에 절을 하신 적이 있어요. 추기경님은 훌륭하게 살다 가신 분에게 존경의 예를 표하는 건 당연하다고 보셨던 거죠. 참배를 유교식으로 하든 불교식으로 하든 중요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타종교에 대한 개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적 사상이기도 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16장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어요.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믿지 않는다고 무조건 지옥에 간다’는 것에 우리는 더 이상 동의하지 않습니다.”
김 추기경은 사제들에게 손수 안부 카드를 보내곤 했다.
“타종교에도 진리의 일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악의 유혹이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 그럼 선교할 대상은 어떻게 찾나요. 악의 유혹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울 텐데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가톨릭도 과거에는 타종교는 다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선교하기가 도리어 쉬웠죠. 내가 아닌 것은 다 악으로 생각하면 됐으니까요.”
▼ 판단하기 어려우면, 순교하는 일도 드물어지겠네요.
“예전에는 종교 자체를 선교하기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대변하는 복음적 가치를 위해서 순교하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산 살바도르에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던 오스카 로메로 주교님(1917~1980)은 군부정부와 싸우다 미사 도중에 암살되었죠. 예수님처럼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하다 순교하신 것이지요. 추기경님께서 1964년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계실 때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한창 진행(1962~1965)되고 있었는데 당시 외신에서 회의내용을 받아 계속 기사로 내보내셨습니다. 주교가 된 다음에는 그것을 실천하려 노력하셨고요.”
▼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특징인 ‘타종교에 대한 포용’을 충실히 실천하신 거네요.
“네. 그렇지만 추기경님은 제2차 공의회의 주된 특징인 ‘교회가 자신만을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데에 더 큰 관심을 두셨다고 봅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70년) 때는 무신론이 팽배해서 그런지 교회가 세상에 문을 닫곤 ‘교회 구원’에만 관심을 뒀습니다. 그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때부터는 자기만이 구원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현대 세계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을 보면 그러한 고민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 그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사제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셨겠네요.
“적극적으로 참여한 분도 있고, 소극적으로 참여한 분도 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이 주관하시다가 돌아가셔서 바오로 6세 교황님이 공의회를 마치셨는데, 당시 임명된 추기경님 주교님 중에서 세상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진 분이 많이 계신 걸로 압니다. 교황청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이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하실 거라고 보고 임명하셨던 건지도 모르지요. 요즘에도 정의구현사제단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신부님이 있는 것처럼 견해가 다 같은 건 아닙니다.”
“순수한 동기는 탓하지 말라”
얘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1975년에 만들어진 정의구현사제단으로 옮겨갔다.
▼ 김 추기경이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드신 건가요?
“추기경님이 만드신 건 아닙니다. 1974년 지학순 주교 사건을 계기로, 조직적으로 대항해야겠다는 필요성에서 사제단이 생긴 거지요. 물론 그 정신에는 동의하셨습니다. 1975년 시국강론이 실린‘추기경 김수환 이야기’283쪽을 보세요. ‘사건(유신정권 폐지를 주창한 ‘3·1명동 사건’) 관련 신부들을 무조건 잘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신앙적 소신과 양심에서, 나아가 더욱 밝고 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애국심에서 한 행동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방법을 탓하더라도 순수한 동기는 탓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셨어요.
그렇지만 방법 면에서는 생각을 달리 하신 걸로 압니다. 289쪽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신부들이 본당과 사목활동까지 나 몰라라 하고 밖에 나가 조직적 민주화 운동을 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다. 불의에 저항하는 신부들의 올곧은 양심은 높이 살 만하다. 때론 정치 사회 문제에 나서서 의견을 밝히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제 본연의 임무까지 등한시한 채 정치 사회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참여 활동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추기경님은 사제단이 기도회를 자주 여는 것에는 반대하셨습니다. 정부를 자극하면 할수록 우리의 선택 폭이 좁아진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 잦은 사회참여를 반대하시던 분이 정치에 대해 발언하신 이유는 뭔가요.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학생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저도 각하께서 지적하신 정교 분리 원칙을 교회도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정부의 인사나 경제정책 등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도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그 나름의 인생관 사회관 세계관이 있고, 그 원리에 따라야 인간과 사회 또는 세계의 발전과 구원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정치, 경제가 여기에 위배될 때에는 발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250쪽)는 내용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 왜 그렇게 인권, 기본권을 중시하셨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의 기본권 존중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인권을 유린당해 눈물 쏟는 사람이 많아지면, 원한이 쌓여 우리 사회가 화해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는 추기경님 자신이 독일 유학시절(1956~1963년)에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전공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
▼ 대다수 신부가 추기경과 같은 생각이었나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추기경님을 ‘권력욕과 허영으로 넘치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교황청에 투서성 고발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혜화동 주교관 식당에 걸린 ‘김수환 추기경과 신부들이 함께 찍은 사진.’
▼ 그런데도 사회 참여에 열성적이셨네요. 교회사(史)에 그런 분이 많습니까.
“이미 구약의 예언자 아모스, 호세야라는 분이 당시의 권력층이 백성을 짓밟는 걸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릇된 통치자를 비판하셨지요.(루카복음 22장 25절) 현대에 와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브라질의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님도 계시지요. 나치 시절에 히틀러 독재에 대항하다 처형된 디트리히 본훼퍼라는 목사님도 계시고요.
▼ 김수환 추기경을 예언자라고 하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요.
“교회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고 불의와 싸우는 자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기경님은 예언자이지요.
▼ 김 추기경이 천주교 내적으론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한마음 한몸 운동’을 주도하셨는데,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에게 뭔가를 나눠주자는 것이었죠. 한줌의 쌀을 모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장기를 기증하기도 하고. ‘소공동체운동’도 하셨습니다. 교회가 커진 탓에 서로 이름도 모르는 교우들끼리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소모임을 만들자는 뜻이었지요. ‘내 탓이오 운동’도 벌이셨는데, 많은 신자가 차에 그 문구를 붙였으니 기억하는 분이 많을 거예요.
이 운동은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주창한 건데, 추기경님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셨습니다. 정리하자면 추기경님은 본인이 특별한 신학적 의견을 내세우셨다기보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추기경은 늘 주님을 그리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본인도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하느님 체험이 없다’는 고백도 하셨습니다.”
▼ 뜨거운 체험 없이 어떻게 사제로, 그것도 추기경으로 사실 수 있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지만 뜨거운 체험 없이 사제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뜨거운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지 않습니까. 추기경님도 저도 부모님이 권하셔서 사제가 됐는데 말하자면 연애결혼이 아니라 중매결혼을 한 셈이지요. 게다가 추기경님은 할아버지께서 순교하셨으니 그 영향을 많이 받으셨을 거예요. 기도를 하면서 어떤 확신 같은 건 생기죠. 마음이 열리고 가슴이 찡하고…. 부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살다 보면 저 사람이 날 사랑하는가 의심스럽다가도 신뢰가 있으면 믿고 살아가게 되잖아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뜨거운 체험 없이 인생을 걸어 사제가 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네요.
“가정을 못 갖는다는 것이 대단한 희생처럼 보이겠지요. 그렇지만 신뢰라는 게 점점 없어지는 이 사회에서 신부라는 이유로 전적으로 신뢰받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희생이라면 희생인 점을 상쇄하고도 남아요. 신앙은 감정이 아닌 의지의 차원입니다. 하느님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체험이 있으면 좋지만 그것 없이도 믿을 수 있는 것이지요. 추기경님뿐만 아니라 마더 테레사도 주님을 느낄 수 없을 때가 많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일반인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거죠. 추기경님도 내세울 만한 체험이 없다고 하셨는데….”
▼ 무슨 근거로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나에 앞서서 수많은 사람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사랑으로 하느님을 증거하고 목숨까지 바친 것을 보고 믿게 됩니다. ”
▼ 순교한 사람들이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지 않나요.
“2000년이란 긴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판단했는데, 그럴 리가요. 그리고 앞서 가신 분들 덕분에 우리가 좋게 살게 됐잖아요. 김대건 신부님만 해도 개인적으로만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분 덕에 한국 교회가 이렇게 성장해 민주화의 디딤돌이 됐잖아요.”
▼ 추기경은 1951년 사제서품 성구를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 왜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카를 라너(1904~1984)라는 독일 신학자도, 자신이 운명할 때 의식이 있다면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루카복음 18장 13절)라고 기도하겠다고 했다는데 그런 점에서 두 분이 통하시죠.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인간을 비하하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게 정말로 많은데, 왜 이것밖에 못했느냐 하는 깨달음입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부모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동안 내가 잘못했구나 깨우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지요. 추기경님은 자신을 가리켜 ‘바보’라고 하셨는데,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미화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셨어요.”
▼ 추기경이 가시니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추기경님이 쓰신 다른 책들을 읽어보았는데, 사제 생활 내내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신 것을 본받으려고 노력했지만, 거기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바보’라고, ‘죄인’이라고 하신 것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어른은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구도(求道)의 길을 걸어가셨는데, 나는 너무 안이하게 타협적으로 사는 게 아닌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그분은 그런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더 기도해주실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송 신부는 김추기경이 평소 방문객에게 선물로 주던묵주를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신학적 견해를 정리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때 그분을 생각하며 기도해보세요. 곁에서 도와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