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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아름다운 노년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 이정옥│시인 beata65@hanmail.net│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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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영상을 보고 있는 노인들.

조급증 환자의 좌충우돌

식탁마다 사각휴지통이 하나씩 올라 있다. 통이 비면 식구들이 돌아가며 가져온다. 우리 식탁 휴지통이 비었다. 아딸리아 할머니의 날선 목소리다.

“율리에따 할머니 차례라고 알려드렸는데 빈손으로 오셨네요.”

“아이고, 또 잊어버렸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니까. 내일 아침엔 잊지 말아야지.”

저녁식사 후 산책을 나서는데 복도가 떠들썩하다.



“니가 뭔데, 식탁에서 말했으면 됐지 노크도 없이 남의 방문을 밀고 쳐들어와! ”

아딸리아 할머니의 뒤통수에 대고 율리에따 할머니가 퍼붓는다. 율리에따 할머니의 오장육부가 뒤집힐 정도로 훈계했겠지. 아딸리아 할머니의 행동을 심리 상태로 표현하면 어떤 경우일까? 내 눈에는 자신과 남을 동시에 피곤하게 하는 조급증 환자로 보이는데….

아흔일곱의 바실라 할머니는 식사도 잘하고 건강하다. 그 식탁에서 할머니의 시달림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정신 좀 차려! ”

고개를 꺾고 식탁에 앉은 안토니아 할머니에게 호령이다. 며칠 전부터 기력이 떨어지더니 오늘은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다. 재차 불호령이 떨어진다.

“고개 들고 밥 먹으라니까! ”

식사 때마다 옆 식탁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나도 자유롭고 남도 자유롭게 하려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노년다운 품격

‘현대사회와 노년기의 삶’이란 제목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강사는, 60대 중반의 행정학 박사. 강의 중간에 본인의 삶이 예화로 등장한다. 여기는 각종 노인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요양시설이다. 몇 걸음 물러서서 제대로 이곳을 바라보았다면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제 박사논문의 주제가 ‘성적 욕구와 노년기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 관심이 있다는데 저도 그래서 이 문제를 주제로 삼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아 독신처럼 지낸 지 오래입니다. 주변에 보면 요령껏 해결하는 사람도 있는데….”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는 분들 앞에서 ‘성적 욕구’‘요령껏 해결’이라니! 할아버지 열네 분 중 열 분이 보행이 어려운 환자인 이곳에서 이성교제가 행복의 특효약이라 강조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문화다.

지난 9년간 조용하고 품위 있었던 이곳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포옹도 하며 육체적인 접촉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부추긴 강사의 열강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고르넬리오 할아버지가 구둣발로 도미니카 할머니 방으로 쳐들어갔다. 고르넬리오 할아버지의 치밀한 계획은 미수에 그쳤지만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이틀 밤을 새운 할머니가 원장수녀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런 인간과는 죽어도 한집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고르넬리오 할아버지 부부를 퇴소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라르고 할아버지는 부부실에 혼자 입소한 분이다. 원장 수녀님이 제안했다.

“여생을 친구처럼 지낼 동반자 한 분을 소개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그때 할아버지의 대답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고 한다.

“남은 시간은 책 몇 권 머리맡에 두고 지내는 고요이고 싶습니다. 이 집을 둘러싼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지요.”

현대의 성문화가 노년을 유혹한다. 그 유혹 속에서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평화로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70대 중반의 고르넬리오 할아버지처럼 살 것인가, 라르고 할아버지처럼 품위 있게 노년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존엄한 죽음을 생각할 때다. 노인에게는 여생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죽음에 대한 문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노년의 죽음이 의료장비에 의해 중환자실에 유폐당할 때의 문제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잔인한 배려일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이 ‘생명존엄’이라는 이름으로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2008년 6월10일, 드디어 ‘식물인간 연명치료’가 서울서부지법 305호 법정에 서기에 이르렀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 75세 환자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구하며 병원을 상대로 낸 가처분신청에 대한 첫 재판이 열린 것이다. ‘존엄사’에 대한 법적 장치를 고려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문’의 필요성을 모든 이에게 전하고 싶었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음의 끝은 어디인가? 답을 찾아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유혹을 물리치며 지켜온 양심, 풍랑과 싸우며 지켜온 자존심,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랑, 마지막 순간까지 불태운 삶에 대한 열정…. 이 모든 이야기가 육신의 죽음으로 끝이라면 너무 허망하다. 전생이 없고 현세만 있다면 나는 어디서 왔는가? 현세만 있고 내세가 없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영원이 되기 위한 이어달리기, 릴레이경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로부터 인생이라는 바통을 받아 달려온 것이라면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겨야 할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현세에서 나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시간, 다음 선수에게 바통을 넘겨야 할 시간, 죽음의 시간이다.

40대 중반인 아나톨리아 수녀는 이틀에 한 번 혈액투석 치료를 받아야 하는 만성신부전증 환자다. 투석을 시작한 지 석 달, 아나톨리아 수녀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수술이나 의지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면 이건 분명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소립니다. 하느님 집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세상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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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시인 beata6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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