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미 CSIS ‘오바마 행정부의 對러시아 정책’보고서

경제위기가 부른‘훈풍’핵무기 감축협상 기대

  • 입력2009-04-02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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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CSIS ‘오바마 행정부의 對러시아 정책’보고서
    주식 및 부동산 거품 붕괴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지난해 가을, 그루지야전(戰) 승전 소식에서 눈을 돌린 러시아 지도자들은 경제위기가 미국의 업보이며 실물위기를 겪는 나라도 주로 미국일 것이라고 일갈했다. 지난해 10월만 하더라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는 경제위기로 인한 러시아 국민의 타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전세계 에너지 수요 급감으로 광물 및 에너지 기업 지분을 보유한 억만장자 올리가르히(신흥재벌)의 수입이 대폭 축소됐고, 이들이 보유한 주식 가치는 러시아 주요 주가지수가 75% 이상 폭락한 지난해 5월을 기점으로 하락을 거듭했다.

    유가 하락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러시아 경제 전체와 러시아 지도층의 자신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에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12월이 되자 배럴당 35달러선으로 폭락했다(현재는 배럴당 40달러 수준). 루블화 가치는 달러 대비 25% 이상 하락했으며(대다수 러시아 국민이 루블화를 받자마자 달러로 환전한다), 유로화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하락세를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은 점차 높아져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이하로 하락할 경우 15~2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늦여름 6000억달러에 달했던 외환보유고 역시 루블화 방어를 위한 러시아 중앙은행의 노력에도 1600억달러 이상 줄어든 상태다.

    여기에 그루지야 전비(戰費)까지 더해져 러시아의 잉여예산은 급격하게 고갈되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일부 주요 부문의 생산이 20~30% 감소하면서 지난해 12월 공식적인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러시아의 국부이자 에너지 초강대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거대 국영기업 가즈프롬조차 정부의 구제금융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러시아 국민 역시 물가상승과 은행의 유동성 위기, 저축액 감소에 따라 심화되는 생활고를 겪고 있다.

    한풀 꺾인 러시아

    난공불락이던 푸틴 총리의 위상도 시험대에 올랐다. 자동차 수입관세 인상 문제로 불거진 극동러시아 지역의 시위(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값싼 일본산 수입자동차에 의존하고 있다)가 폭동으로 번지면서,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발성에 그칠지, 아니면 전국적인 폭동으로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오바마 행정부가 지난 몇 년의 오만한 러시아가 아니라 자신감이 한풀 꺾인 러시아를 상대하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군비통제 협정이나 미사일방어, 이란·북한 및 기타 긴급 현안과 관련한 전략적 협정을 조인할 능력이 없는 무력한 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양국의 상호 비난은 지난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이어졌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개최된 세계정책회의에서 ‘일방적인’ ‘무책임한’ ‘이기적인’과 같은 용어를 써가며 세계경제위기뿐 아니라 그루지야 전쟁, 중동사태, 코소보 독립 문제까지 미국에 책임을 돌리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반시간가량 지속된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연설은 2007년 2월 뮌헨에서 있었던 푸틴 전 대통령과 게이츠 미 국방장관의 맹렬했던 상호비난을 상기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정상들 간에 오고 간 마지막 설전이 됐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워싱턴 G20정상회담에서 행사를 주관한 미국의 노고를 칭송하고, 베네수엘라 방문시에는 후고 차베스 대통령의 대미(對美) 비판에 동조하지 않았다.

    3주 후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외무장관회의에서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회원국 행동계획(MAP) 승인이 거부됐을 때도 러시아는 미국을 칭찬했다. 이는 두 국가가 영영 회원국 지위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은 일부 NATO 회원국(프랑스와 독일)의 반대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NATO 외무장관들은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데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 문제는 미·러 분쟁의 핵심 사안인 까닭에 여전히 긴장요인으로 남아 있다.

    미 CSIS ‘오바마 행정부의 對러시아 정책’보고서
    오바마 당선 직후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동유럽에 배치되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를 ‘무력화(neutralize)’하기 위해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이스칸데르 방공미사일을 배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시기적으로 차기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경고였으며,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이후 발표 시기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하면서도 미사일 배치계획에는 변동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 전문가이기도 한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에스토니아 연설을 통해 러시아의 이번 계획이 “불필요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드보르킨 러시아 예비역 중장은 러시아의 정치적 흥정도구일 뿐, 군사적 사용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언급했다.

    NATO는 러시아의 2007년 유럽재래식무기(CFE) 감축조약 이행중지 선언 이후 이에 대한 지속적인 복귀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그루지야 주둔 군대에 전력을 쏟아 부으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 지도부는 오히려 NATO의 세력 확장을 CFE 이행중단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면서, 강력한 동맹이 러시아 국경 주변에서 세력 확장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을 좌시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MD와 START-1

    CFE조약은 복잡한 미·러 간 군비통제 문제의 일단에 불과하다. 양국 지도부의 최대 관심사는 NATO의 동유럽 MD구축과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 갱신이다.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 방어체제의 일부를 배치한다는 계획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수년에 걸친 외교적 난항 끝에 일련의 저지 대책을 내놓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칼리닌그라드에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러시아 정부의 발표는 오바마 행정부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파워게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스칸데르 배치 계획은 그 실효성이 입증되지 않는 한 오바마 행정부가 미사일 방어체제에 미온적일 때만 소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사일 방어체제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날 경우에 한해 배치를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전략미사일군 니콜라이 솔로프초프 사령관은 신형 다탄두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RS-24를 내년에 실전 배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가 MD 문제를 최우선 의제로 삼는 반면, 미국은 올해 12월 만료되는 START-1 갱신에 주력하고 있다. 1991년 체결된 START-1은 미·러 양국이 배치 중인 전략 핵탄두를 각각 1600개 수준까지 감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START-2는 미국의 1972년 탄도탄 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 탈퇴로 발효되지 못했다.

    이후 양국은 2003년 전략공격무기감축협정(SORT·모스크바협정)을 맺고 배치 중인 전략 핵탄두를 1700~2200개 수준까지 감축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미국의 고민은 실질적인 운반수단(delivery vehicles) 확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 국방부는 비전통적 적대세력(테러리스트·불량국가)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재래식 탄두로 무장 가능한 중폭격기, 잠수함,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등의 무제한 배치를 원하고 있다.

    START-1 만료일이 올해 말로 다가오면서 미 행정부는 새로운 협정 체결에 대한 의지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게이츠 국방장관은 유임의사를 타전받기 전인 지난해 10월, 오바마 대통령에게 (운반수단이 아닌) 탄두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새로운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유연성을 확보한 새 핵무기협정을 러시아와 체결할 것을 건의했다. 미 국무부는 ABM 체제와 START-1 조약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11월과 12월 모스크바에 협상대표단을 파견했다. 루가 상원의원은 12월 모스크바 방문에서 START 대체협정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키신저 전 국무장관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를 만나 협정체결을 조속히 진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러시아 지도부는 군비통제 문제를 오바마 행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새 정부 출범을 기다려온 것으로 보인다. 최근 번즈 미 국무차관과 루드 국무부 군축담당관의 모스크바 방문은 성과 없이 끝났다. 이들은 미국이 동유럽 MD 계획을 재고한다면 START 대체협정 체결에 러시아가 협조적인 자세를 보일 것이라고 보고했다. MD 배치가 계획된 폴란드와 체코 현장에 러시아 전문가 파견을 허가해달라는 요청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러시아가 이란에 S-300을 포함한 지대공 미사일을 판매했다는 12월23일자 발표가 나오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S-300은 탄도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최신예 방공체제로 이란의 공중 방어능력을 크게 개선시켜 전투기를 이용한 이란 핵 시설 공격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즉각 러시아 정부의 해명을 요구했지만 러시아 측은 확인도 부인도 안 하고 있다.

    적의 이웃과 친구하기

    파키스탄 육로를 통해 아프간 주둔 NATO군을 지원하는 문제도 난관에 봉착해 있다. 아프간 주둔 5만여 NATO군은 군수품의 80% 이상을 파키스탄 남부 카라치항에 하역한 후 트럭으로 북서부의 페샤와르를 거쳐 카이버 패스를 잇는 보급로를 통해 조달해왔다. 그러나 지난 12월 무장세력이 페샤와르 인근 화물 집결소를 이틀에 걸쳐 습격, 군수품 수송차량 260대를 불태우자 파키스탄 당국이 카이버 패스를 봉쇄했다. 올해 미국의 2만명 증파 계획으로 안전한 보급로 확보가 더욱 중요해졌으나 최근 파키스탄과 아프간 접경 보급로에 대한 무장 세력의 기습공격이 이어지고 있어 해결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곳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세력균형을 이룬 지역이다.

    아프간의 폭력상황과 파키스탄 정부의 무력한 대응으로 NATO와 미국은 새로운 보급로를 물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파키스탄의 정치적 혼란 지속, 인도·파키스탄 전쟁, 기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발생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간 북부로 넘어가는 보급로가 유력한 후보로 대두되고 있다.

    첫 번째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아프간으로 들어가는 루트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경로이나 파키스탄 보급로보다 약 3배 길며 도로 상태와 겨울 지형이 열악하다는 단점이 있다.

    두 번째는 흑해에서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바쿠항을 거쳐 카스피해, 카자흐 아크다우항을 지나 카자흐스탄을 통과하는 경로다. 두 번째 경로의 카자흐 아크다우항에서 우즈벡을 통해 아프간으로 진입하는 경로가 세 번째 후보이며, 두 번째 경로의 카스피해에서 투르크멘바쉬항을 거쳐 육로로 아프간에 진입하는 것이 네 번째 방법이다. 네 번째 루트는 최단거리이긴 하나 미국-투르크메니스탄의 복잡한 관계를 고려할 때 정치적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NATO가 어떤 경로를 선택하든지 러시아의 협조는 필수적이다.

    미국의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개입과 그루지야전 당시 미 해군의 흑해 파견으로 자극받은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러시아도 미국의 뒷마당에서 외교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한 포석을 깔았다.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참석차 페루를 방문하면서 브라질, 베네수엘라, 쿠바 등 중남미 국가들을 순방한 것이다. 2005~2007년 약 44억달러의 러시아산 무기를 수입한 베네수엘라 방문에서는 러시아-베네수엘라 간 카리브해 합동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주요 에너지 거래 문제를 논의했으며, 이어 브라질 방문에서는 30억~35억달러에 이르는 러시아 전투기 120~150기 구매 의사를 전달받았다. 다만 브라질 정부는 자국의 방어산업 생산기반 강화를 위한 러 측의 기술이전이 동반되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중남미 방문, 베네수엘라와의 해군합동군사훈련에 대해 아무런 견해도 표명하지 않았다.

    러시아 방위산업체들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고객이던 동남아시아의 무기 수출시장 개척에 주력하고 있다. 태국은 지난해 초가을 민·군 겸용 목적으로 러시아제 헬리콥터 Mi-17을 구매한다고 발표했고, 인도네시아도 러시아로부터 3억달러에 구입한 Su-30MK2 다목적 전투기 2대 중 1대를 지난해 12월 인도받았다. 러시아 무기거래업체들의 활동에 당황한 미 국무부는 지난 10월 이란, 북한, 시리아에 민감한 기술을 제공했다는 이유를 들어 러시아 국영 무기회사 로소보론엑스포르트 및 중국, 수단, 베네수엘라 등의 방위산업체에 대한 제재조치를 발표했다.

    최근의 경제위기에도 러시아 정부는대규모 극동지역 개발계획 규모를 축소하지 않았다. 푸틴 총리는 지난해 11월 러시아가 국가전략사업으로 추진하는 ‘동시베리아-태평양’ 연결 파이프라인(ESPO) 건설사업을 연기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2007년 크렘린은 2013년까지 217억달러, 2025년까지 3260억달러를 동시베리아 극동 프로젝트 개발기금에 배정했으며, 이는 우호적이지만 친밀하다고는 할 수 없는 동북아시아에서의 외교적, 경제적 (또한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더는 나빠질 게 없다

    러시아 지도부는 부시 행정부와 어떠한 협정도 맺지 않은 채 오바마 정부의 출범만을 기다려온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미 외교정책의 최우선순위라고 밝힌 만큼, 2009년 초 양국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특히 군비통제 문제는 외교정책의 주요 이슈가 될 것인바, 조만간 러시아가 이란에 실제로 S-300미사일을 판매했는지 밝혀질 것이다. 사실로 판명될 경우 러시아와 미국·이스라엘 간 긴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마지막으로 아프간 주둔 NATO군의 신규 보급로 확보 문제에 러시아가 얼마나 협조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2008년 8월에 바닥을 친 미·러 관계는 2009년 다소 나아질 것으로 전망되며, 이는 양국 관계가 더는 악화될 수 없는 상황에서 좋아질 일만 남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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