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安秉萬 <BR>● 1941년 충북 괴산 출생 <BR>● 경기고, 서울대 법대 및 동 대학원, 美 플로리다대 정치학 박사<BR>● 한국외국어대 총장 <BR>● 한국행정학회 회장<BR>●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이사장 <BR>● 대통령 자문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BR>● 現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현 교과부에 대한 평가도 그다지 좋지 않다. ‘의욕과 열정은 넘치지만 실적은 지지부진하다’ ‘모든 것을 독선적으로 바꾸려 한다’는 등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신동아’는 최근 발표된 교과부의 교육정책과 현안, 개혁추진 정도 등을 짚어보기 위해 안병만(68) 장관 인터뷰를 요청했다.
한동안 역사교과서 문제, 학업성취도 평가 논란 등 주요 현안에 함구로 일관해왔던안 장관은 최근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외부 강연도 비교적 활발하다. 언론에서는 지난 연말 교과부의 대규모 실국장 인사 이후 교육개혁에 더욱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안병만 장관과의 인터뷰는 3월10일과 13일, 두 번의 만남과 서면을 통해 이뤄졌다. 안 장관은 목소리가 작진 않았지만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직설적인 표현 대신 에두른 표현을 선호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도 그에 앞서 반대되는 입장을 한마디씩 언급했다. 예컨대 “~와 같은 비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혹은 “그분들도 잘하셨습니다만” 식으로 언급한 뒤 자신의 논리를 펴는 식이다. 종종 답변의 처음과 끝에 ‘허허’ 호탕한 웃음을 섞었고, 그 때문에 자칫 날이 설 수 있을 분위기가 누그러지곤 했다. ‘온화한 성품’ ‘원만한 인간관계’ ‘소통 중시하는 덕장(德將) 스타일’이라는 언론의 평가가 왜 나왔는지 짐작됐다.
2008년 8월 김도연 장관 후임으로 들어온 안 장관은 한국외국어대에서 두 차례 총장을 지내며 임시이사 체제였던 학교에 공영재단을 도입해 정상화시켰고 용인외국어고와 사이버외대를 설립했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1941년 뱀띠 동갑으로 같은 테니스 동호회 소속이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중이던 2006년 안 장관은 서울시 산하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이사장을 지냈다. 안 장관은 새 정부 출범 뒤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실국장 인사 이후 자신감 얻어
▼ 기사를 검색해보니 지난 연말부터 인터뷰가 잦아졌던데요. 인사개혁 이후 자신감이 생긴 듯하다는 평이 있습니다. 한동안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취임하자마자 국정감사가 있었고 내부에서도 여러 대화를 통해서 정책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을 접촉해 인터뷰할 기회도 없고 장관으로서 지식도 부족했기 때문에 그동안 공부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럼 이젠 자신감이 생긴 겁니까.
“자신감은 원래 있었지요(웃음). 대학교수, 총장을 지냈기 때문에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과학기술 분야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할 분야라 가정교사(권동일 과학기술정책보좌관)를 두고 공부를 했습니다. 입각 뒤 과학기술과 교육 분야에 투입한 시간을 비교한다면 9대 1 정도가 될 겁니다. 물론 초중고교의 현안까지 마스터했다면 거짓말이죠. 특히 그 분야는 굉장히 복잡해요. 풀어야 할 과제도 많아서 별도로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관이 침묵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 관료사회와 학교는 사뭇 다르죠?
“네, 관료사회의 핵심은 효율성이거든요. 효율성의 기초는 합리성인데 교과부 직원들이 일을 참 잘합니다만 더 좋은 정책을 만들려면 합리성을 뛰어넘는 직관이라든지 정책적 배려 같은 게 필요합니다. 그런 부분은 정책 결정자가 맡아서 사유하고 결정해야 하는데 거기서 관료들의 지식, 합리성과 부딪칠 때가 있어요. 그것을 설득하고 넘어서는 게 제가 할 일입니다. 처음 교과부 직원들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게 사실입니다. 그 뒤 저도 많은 걸 배웠고, 공무원들과 토론하는 가운데 서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제 마음을 알게 되고 저도 그분들이 원하는 걸 알면서 접합점이 생겼습니다. 그 시기가 한 2~3개월 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적인 성장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들은 제가 가만있다가 튀어나왔다고 여길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