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요즘 모든 공기업이 구조조정 문제로 난리인데요.
“교육진흥원은 2005년 연간 80억원의 예산으로 출범했어요. 그때 정원이 21명이었고요. 올해는 연간 600억쯤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21명이죠. 동결조치 때문에. 공기업을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신이 버린 직장’입니다. 일 굉장히 많이 해야 해요. 내가 온 뒤로 컨트롤타워를 두는 등 체계화하고 공정한 평가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건가요?
“공기업 선진화가 일률적인 축소화여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체질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비만은 줄이고 근육은 늘려야 하는데, 교육진흥원은 미래 창조산업의 중추인 근육에 해당합니다. 직원이 수천, 수만 명인 공기업과 우리처럼 수십 명인 곳을 같이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한 10, 20명 늘려도 별 차이 없고 예산낭비 아닙니다.”
▼ 사업규모는 7배 이상 늘었는데 그동안 일을 어떻게 해나간 거죠?
“수십여 명의 비정규직원이 돕고 있어요. 내가 시간강사를 10년 정도 해봐서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잘 압니다. 참 안타까운 게 인턴사원들은 12월 말 그만두거나 다음 단계로 올라가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올라갈 방안이 없어요. 성실하고 능력 있는 분도 꽤 있는데 말이죠. 직을 걸고 한번 말하고 싶어요. ‘늘려야 할 곳은 늘려달라’고 말입니다.”
▼ 정부에 건의해봤나요?
“여러 번 의견을 개진했죠. 사실 우리 기관은 급여 현실화도 시급해요. 최소한 유사 기관과 비슷하게 임금체계가 그루핑(grouping)되도록 형평을 맞춰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는데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직원들은 열정 하나로 일하고 있어요.”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이름으로 풀이하자면 ‘문화예술을 가르치는 교육을 진흥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되는 거죠?
“그렇죠. 전국 상당수 초중고교에 예술강사를 보내 학생들에게 문화예술을 가르치고 있고 사회에서도 시민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어요.”
▼ 같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그곳은 문화예술 ‘창작자들’을 지원합니다. 반면 우리는 문화예술 ‘소비자들’을 육성해내는 곳이죠. 교육을 통해 청소년과 국민들이 문화예술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갖도록 해줌으로써 장차 이들이 문화예술의 미래 소비자, 잠재 고객이 되도록 해주는 거죠.”
교육진흥원은 주로 문화체육관광부, 교육과학기술부 등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 사업을 집행한다. 지난해 예산은 300억원이었지만 이 원장이 맡은 올해엔 6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 원장이 “청소년과 국민의 문화예술의식 함양에 힘을 써야 한다”고 주창한 것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고 한다. 그는 자사 사업을 ‘국가중추사업’이라고 했다.
▼ 국가중추사업으로 볼 근거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체험교육을 통해 ‘예술적 안목이 있는 문화시민’을 양성합니다. 그 숫자는 앞으로 수백만 명, 혹은 1000만명이 넘어설지 모릅니다. 이들은 문화예술 작품들을 보고 들으러 다니게 돼요. 졸작과 수작을 쉽게 구별해냅니다. 좋은 작품들에는 관객이 몰리고 창작자들은 흥이 나는 거죠. 창작활동이 활성화되고 다시 소비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됩니다. 이런 풍토에서 세계적 브랜드의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 두꺼운 소비자층이 존재해야 창작품의 질적 수준도 높아진다는 거죠?
“창작자들이 아무리 애를 쓰면 뭐합니까. 봐주는 관객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죠. 서울이 문화예술을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세계적 작품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도시가 되면 외국에서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우리 문화와 소통하겠죠. 뉴욕이나 파리처럼 이내 일류 브랜드 도시로 올라서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문화국가의 위상을 얻게 됩니다.”
문화예술 소비자 만들기
▼ 그런데 소수의 천재적 창작자가 그 사회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백남준이라는 천재는 한국인이지만 그를 세계적 예술가로 키운 건 한국 사회가 아니라 미국 사회였죠. 그래서 백남준의 공간들은 고스란히 미국에 쌓여있죠. 수용자층이 두꺼운 사회에서 셰익스피어가 나오고 바흐가 나옵니다.”
▼ 문화예술 교육은 ‘여가시간 제공’ 이상의 ‘전략적 가치’가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정부는 대한민국을 ‘강한 나라’ ‘더 큰 대한민국’으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무엇으로 만들죠? 강한 군대로? 우리의 국격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해답은 문화예술에 있다고 봐요.”
최근 들어 한국이 나아가야 할 진로는 ‘경제문화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매일경제 2009년 2월4일 보도, 머니투데이 2009년 7월7일 보도) 이를 위해선 ‘문화예술을 즐길 줄 아는 대중’이 출현해야 하고 이러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예술이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한류(韓流)로 우리의 잠재력은 확인됐다. 그러나 더 분발해야 한다. 높은 문화예술 수준은 국민 개개인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의 품격을 높여준다”고 했다.
지난 3월3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1500여 명의 예술강사가 참여한 가운데 발대식이 열렸다. 교육진흥원은 실기능력을 갖춘 예술분야 대학 졸업자를 예술강사로 채용해 전국 초중고교에서 가르치게 하고 있다. 현재는 국악, 연극, 영화, 무용, 만화-애니메이션 등 5개 분야로 되어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 사업에 250억원을 지원했다.
예술강사를 채택하는 학교는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3~6월 교육진흥원은 전국 1만1000여 개 초중고교 중 7698개 학교에 3483명의 예술강사를 배치했다. 이는 지난해의 4500여 개 학교보다 훨씬 더 늘어난 수치다. 대체로 학생 1인당 일주일에 2~3시간 예술수업을 받는다. 정규수업시간에 교육하기도 하고, 방과 후 수업, 동아리활동을 이용하기도 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방과 후 수업을 권장하고 있다.
학교 측이 예술강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고 해서 다 보내주는 건 아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고 한다. 진흥원 관계자는 “학교 측이 예술강사를 교사와 똑같이 대해주지 않으면 강사를 소환한다”고 말했다.
예술강사는 경력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략 시간당 4만원의 강사료를 지급받는다. 400시간을 가르치면 1600만원을 받게 되는 셈이다. 일부 강사는 “액수가 적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예산이 한정되어 있는데다 대학 강사의 강의료 수준을 고려했을 때 쉽게 인상해줄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교육진흥원 기영준 학교교육팀장 “예술강사는 정규직은 아니지만 문화예술 분야 일자리 창출 효과가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