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좋은 사람’<br>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416쪽, 1만3000원
나는 긴 역삼각형의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지명들을 눈으로 읽었다. 뭄바이, 캘커타, 벵골만…. 질병인 멀미증이 간간이 일었다. 스크린의 인도 대륙을 응시하며 무릎 위의 소설책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저 좋은 사람’에 수록된 단편 ‘길들지 않은 땅’의 주인공 루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낯선 미국에 와 살면서 친족이 있는 인도를 다녀오곤 하면서 시달렸을 이방인의 멀미증을 살며시 눈을 감고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가장이라는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살았던 인도 출신의 사내, 그녀의 아버지가 느꼈을 이방인의 긴장감과 서글픔도 헤아려보았다.
어떻게 가건 인도로 가는 길은 언제나 대장정이었다. 갈 때마다 느꼈던 스트레스가 아직 생생했다. 그 많은 짐을 싸서 공항으로 옮기고 서류를 빠짐없이 챙겨 몇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가족을 안전하게 이동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 여행은 아내에겐 삶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들은 돈이 들어도, 아이들이 커가면서 싫어해도, 갈 때마다 슬프고 수치스러워도 인도에 갔다. - ‘길들지 않은 땅’에서
‘길들지 않은 땅’의 주인공 루마는 서른여덟 살의 인도계 여자다. 그녀의 부모는 인도 벵골 출신으로 자식들의 더 나은 미래와 환경을 위해 고국을 떠난 이민자다. 그녀는 부모가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주에 정착하기 전 몇 년 동안 머물렀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두 살 때 그녀의 부모는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남동생을 낳았고, 미합중국의 다국적 이민자들 중 인도계의 일원이 된다. 한국의 이민 부모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남매의 교육에 헌신적이고, 남매 또한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려고 애쓰며 성장한다.
인도계 벵골인 2세로 살아가기
루마는 아이비리그 입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성실한 모범생으로 자라고, 아들 로미는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해 부모의 자랑이 되지만 졸업 후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보다는 영화판에 들어가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루마는 미국의 교육을 받으면서 인도에서 나고 자란 부모의 눈이 되어주고, 발이 되어준다. 남동생 로미는 누이보다 수재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의무감에서 벗어나 미국식으로 자유롭게 살고, 어쩔 수 없이 누이는 부모님에 대한 부채 의식을 껴안고 살아간다. 여기까지가 ‘그저 좋은 사람’에 수록된 ‘길들지 않은 땅’의 기본 줄거리다.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이 네 사람, 인도 캘커타 출신인 부모와 런던(‘그저 좋은 사람’), 또는 베를린(‘지옥-천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 뉴잉글랜드로 건너왔다는 딸 루마(또는 수드하), 그리고 미국에서 낳은 아들 로미(또는 라훌). 이 네 명의 인물 중에 딸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단편들에서 다른 이름의 인물들로 등장한다. ‘길들지 않은 땅’의 루마, ‘그저 좋은 사람’의 수드하, ‘아무도 모르는 일’의 생, ‘뭍에 오르다’의 헤마 등이 그들이다. 이 딸들, 그러니까 소설의 여성 화자들은 뉴잉글랜드와 런던, 로마와 시애틀, 뉴욕 브루클린 등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인도 벵골인 2세로 살면서 치러야 했던 부모 세대 삶의 내력과 새로운 정착지 삶의 풍경들을 세밀하고도 차분한 언어로 그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