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되는 장밋빛 청사진, 새나간 국부
- 대통령 보고가 세 번 미뤄진 까닭
- ‘수리온’ 성과 사장시키는 소형헬기 개발계획
- 육군의 ‘하이-로 믹스’ 운용 개념의 자가당착
- 미국도 폐기한 적지종심작전 고집하는 한국군
- 획득비용은 시작일 뿐, 유지비용 급증이 더 큰 문제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소속 UH-60(블랙호크) 기동헬기가 충북 괴산 부근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국방예산(10위권) 및 군 보유 항공기(고정익 8위, 회전익 6위), 운항수요(여객 14위, 화물 3위) 등 항공의 시장수요가 충분한 나라다. 이를 감안할 때 선진국 항공업체를 따라잡을 수 있는 성장추진력을 확보하고 날로 커지는 민항기 분야의 시장진입을 준비할 적기가 도래했다는 것이 기본계획이 작성된 기본적인 배경이다. 한국이 2020년까지 ‘항공산업의 G7’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항공산업을 육성한다는 비전이다.
정부가 항공산업 발전전략을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한국은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의 비전을 그려왔고,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 때는 한국형전투기사업(KFP)을 추진하면서 미래 한국의 독자적인 전투기 모델을 보유한다는 꿈을 제시한 바 있다.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청사진과 발전전략이 발표됐다. 지난 30년간 발표된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한국형 전투기는 이미 전력화가 끝나고 우주산업이나 민수용 항공분야에서도 항공 강국이 돼있어야 한다.
특히 그동안 정부가 쏟아 부은 예산규모를 고려한다면 우리가 왜 항공산업에서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 스웨덴,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스라엘보다 후발주자 처지에 놓여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선진국 몇몇이 항공시장을 독식하는 독과점 체제에서 한국이 차지한 세계 15위권이란 겨우 명함을 내밀까말까 한 수준이다. 그 많은 돈이 어디로 새나가고 아직도 ‘선진국 따라잡기’라는 고루한 구호에 머물러 있는지, 왜 ‘잃어버린 30년’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나 진단이 없는지부터 설명돼야 할 것이다.
대다수 전문가는 일관성 없는 정책이 주범이라고 말한다. 장기적인 발전전략을 만들어도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흔들리는 동안 항공산업은 극심한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겉으로는 국내 항공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해놓고 실상은 외국업체, 특히 미국의 몇몇 군수산업체에 더욱 종속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국내 항공산업 육성에 투입됐어야할 국부가 유실되는 현상이 굳어져왔다.
이러한 그간의 문제의식 때문인지 이번에 발표된 기본계획에서는 “그간 군 요구사양(ROC)을 중점적으로 고려했던 군용기도 경제성과 수출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개발 여부를 판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군용기에 대한 군의 요구사항보다 항공산업 발전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통해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취지인 듯하다.
그러나 기본계획이 입안되는 과정에서 핵심 군용기 사업에 대해 정책당국이 벌여온 지리멸렬한 결정과정을 들여다보면 이 계획의 장밋빛 그림에 과연 진정성이 담겨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2009년 하반기의 언론보도를 종합해 보면 한국형 전투기(KFX)나 한국형 공격헬기(KAH) 같은 한국군 핵심 군용기 사업은 일관된 청사진 없이 표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0여 년에 걸쳐 개발해놓은 T-50이 과연 한국형 전투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지, 지난 정부부터 심혈을 기울여 개발해놓은 기동헬기(KUH)가 한국형 공격헬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 경로 자체가 불투명해진 것이다.
대통령에게 책임 떠넘기기?
이 때문에 국회 국방위원회나 항공업계는 정부의 조속한 의사결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군용기 개발사업이 지리멸렬해지면 국방당국은 필연적으로 외국의 전투기나 헬기를 직구매하는 방향으로 경도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반면 지식경제부, 국방부, 방위사업청, 소요군은 차일피일 정책결정을 미루다 여론의 압력에 밀려 궁여지책으로 “대통령 보고 후에 결정한다”며 이 문제의 결정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국내에서 개발된 한국형 기동헬기(KUH) ‘수리온’.
대통령 보고가 진행되지 못한 상황에서 지식경제부는 국방부에 “대통령 재가를 받아오면 개발예산을 승인해주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주요 국책사업이 대통령 보고를 받지 못해 표류하는데도 누구도 이 문제를 책임 있게 처리하지 않으려 하자 항공산업이 여전히 ‘주인 없는 산업’이라는 현실을 잘 드러낸다는 비판이 국회로부터 터져 나왔다.
국가의 핵심 군용기 개발사업은 항상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과연 한국이 군용기를 개발하는 게 경제성이 있느냐 여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특히 틈만 나면 국내 방위산업을 외면하고 해외의 완제품 기종을 직구매하고자 하는 소요군은 더욱 개발사업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여기에 책임을 두려워하는 관료들이 대통령 보고 이후로 기본계획 마련을 미루는 일이 반복해 벌어진 셈이다.
역사상 최악의 선택
이러한 ‘혐의’는 ‘완제기 개발 추진현황 및 계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관심을 모았던 한국형 공격헬기 개발사업에 대해 기본계획에서는 2011년 예산을 확보한 후 공격헬기 탐색개발을 추진하되, 기종은 6~8인승 소형무장헬기를 개발하겠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최초의 국산헬기인 한국형기동헬기(KUH) 일명 ‘수리온’은 한국군이 갖추어야 할 공격헬기의 기본 플랫폼으로 활용되지 못하게 된다. 도리어 그보다 성능과 사양이 떨어지는 소형헬기로 한국 육군의 공격헬기 소요를 충족시키겠다는 뜻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1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한국형기동헬기를 먼저 개발하고 공격형은 기동형 개발이 성공한 시점에서 개발을 검토하기로 지침을 정한 바 있다. 기동헬기의 성공여부를 봐가며 공격헬기를 개발하겠다는 이 지침에 따라 그동안 기동헬기의 개발 성공은 공격헬기 개발로 이어지는 이른바 ‘KUH 전용 공격헬기’ 개발이 현실화될 것으로 기대돼왔다. 이 때문에 지난해 7월31일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수리온 시제기 1호기의 출고식은 기동헬기의 성공적인 개발과 더불어 한국형 공격헬기 개발을 예고하는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번 기본계획은 중형 기동헬기를 공격형으로 개조하는 항공산업 육성정책이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대신 성능이 낮은 무장헬기를 개발하는 것으로 정책방향을 급선회했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방향전환의 배경을 두고 다양한 의문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간의 개발성과와는 전혀 동떨어진 결정이 내려진 것을 두고 그 진정한 속뜻이 무엇인지 의구심이 제기되는 형국이다.
육군은 이와 관련해 유사시 적지 종심(縱深)을 깊숙이 타격하기 위해서는 고성능(high grade) 대형 공격헬기를 보유해야 하며, 한국형공격헬기는 성능이 낮은(low grade) 소형 무장헬기로 책정해 지상군과 합동작전을 수행하는 무기로 쓰겠다는 이른바 ‘하이-로 믹스(High-Low Mix)’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 눈여겨볼 것은 여기서 고성능 대형 공격헬기의 경우 2008년 4월 미 육군이 한국에 제안한 ‘중고 아파치 헬기 판매 제안’이 결정적인 변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제안을 받고 나서 그해 8월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한국형공격헬기 획득방안을 분석한 바 있다. 그 결과 KIDA는 중고 아파치 헬기 36대를 미국에서 직구매하고 소형 공격헬기 214대를 한국이 개발하는 방안이 타당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 보고가 있자마자 불과 한 달 만인 9월에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대형 공격헬기 소요를 결정했다. 아파치 도입을 위한 제반 업무를 발빠르게 수행한 것이다.
날아가는 ‘기대이익’
2003년 3월 바그다드 남서쪽에서 격추된 미군 아파치 헬기 앞에서 이라크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변무근 방위사업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새로운 헬기 획득방안은 아파치급(AH-X) 36대를 해외에서 직구매하고 소형무장헬기 214대를 국내에서 개발하는 2개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방안으로 변경돼 있었다. 당시의 보고는 9조원이 드는 한국형공격헬기 자체개발보다 약 4조원이 절감된 5조원으로 2개 사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경제적이라는 논리를 담고 있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경제성 없는 국내개발을 고려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면 해외구매도 고려해볼 만하다”며 “개발 기간과 비용을 추가 절감할 수 있는 방안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신동아’ 2009년 9월호 ‘방위사업청, 공격형헬기 도입사업 대통령 졸속보고’ 참조).
그러나 이 보고 직후 미국 측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이제껏 알려진 것보다 아파치 중고헬기 도입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도입 시기도 잘못 판단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육군의 하이-로 믹스 구상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육군의 헬기 확보 방안이 과연 경제적인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면서 타당성을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 결국 미래 한국군의 헬기사업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호한 상태에서 2년이 넘도록 검토만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이번에 발표된 기본계획에서는 앞서 설명한 대로 한국이 개발하는 헬기가 소형헬기로 명시됐다. 이는 아파치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국방부가 여차하면 한국의 헬기산업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중이 반영된 것이나 다름없다. 정책의 시선이 다시 한번 국내 개발보다는 해외 직구매로 선회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난 셈이다.
육군의 공격헬기를 단일기종이 아닌 2개 기종(아파치와 소형헬기)으로 나누어 운용하는 방안이 경제적이라는 방위사업청의 청와대 보고는,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소형헬기를 개발하려면 해외에서 민수용 헬기 플랫폼을 도입해 개조, 개발해야 하는데, 이 경우 이미 개발한 수리온과 중복투자가 불가피하다. 반면 수리온을 활용해 공격헬기 개발에 필요한 개발비용과 기간을 절감할 수 있는 ‘기회이익’은 날아간다. 또한 선진 해외업체 기술이전비로 국부가 유출되는 것 역시 불가피하다. 그 비용만 해도 총 개발비의 20~3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수리온 개발과정에서 이미 이 같은 명목으로 2억1000만유로가 지급된 바 있다).
아파치에 대한 환상
결국 기본계획이 담고 있는 방향대로 헬기사업이 추진될 경우 향후 한국군은 기동헬기(KUH) 양산, 소형헬기(KAH) 개발, 아파치(AH-X) 직구매라는 세 가지 사업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육군의 방위력개선비 3조원의 30% 이상을 매년 쏟아 부어야 할 정도로 과도한 부담이다. 더욱이 한국의 항공산업 기반은 그 활용가치가 저하되는 부작용이 나타날 우려마저 있다.
이처럼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도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사업추진이 강행되는 배경에는 헬기 운용에 대한 육군의 이해할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있다. 공격헬기를 통해 적의 종심(縱深)을 깊숙이 타격하겠다는, 항공작전사령부의 헬기운용에 대한 과도한 임무설정이 그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이미 아파치 헬기를 동원한 적지종심작전이라는 고전적인 신화를 폐기한 지 오래다.
2003년 3월23일의 깊은 밤, 미 11항공연대 아파치 롱보우 31대는 힐라에 주둔한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메디나 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적진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공화국 수비대원들은 이미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롱보우의 이동상황을 전파하고 AK소총과 RPG 로켓포, 23mm 대공포를 쏘아댄 이라크군의 공격에 롱보우는 1대가 격추되고, 6대가 심각한 피해를 당했으며, 나머지도 기체가 성한 게 없었다. 반면 전과는 이라크군의 전차 4~5대를 파괴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종심작전의 완전한 실패였다. 미군의 작전개념에서 공격헬기에 의한 적지종심작전이 소멸된 배경이다.
굳이 이런 작전을 모방해 아파치를 구매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한국군은 이미 공군의 전투기와 지대지미사일, 다련장포, 장사정포 등 종심을 타격할 수 있는 무기를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 현재 육군의 기갑작전 교리상으로도 이러한 무모한 공격헬기의 단독작전은 타당성이 없다. 공격헬기는 대부분 지상군과 ‘협조된 작전’을 수행하는 게 보편적인 추세인 까닭이다. 이러한 추세에 신경 쓰지 않을 만큼 한국 육군이 ‘용감한’ 군대라는 점에서는 감탄을 금할 수 없지만, 유사시 조종사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게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육군의 하이-로 믹스 개념으로 소형헬기를 개발하게 되면, 소형급은 장시간 작전에 필요한 무장과 연료를 탑재할 수 없는데다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심한 계곡풍으로 인해 안전성이 크게 제한된다. 전투효율성과 생존성 향상을 위해서는 다양한 임무장비와 무장을 장착해야 하는데 소형헬기는 그러한 군의 작전요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다 떠나 쉽게 생각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하이-로 믹스라는 개념 자체가 미국이나 구 소련 같은 초강대국에서 달성할 수 있는 개념이다. 전세계 국가들 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성능별로 구비하겠다는 개념을 채택한 나라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무분별하게 미군의 작전교리를 모방하다 굳어진 고정관념이 아닌 다음에야, 비좁은 국토와 제한된 자원을 가진 나라에서 다목적 단일기종이 아닌 여러 종류의 무기를 갖겠다는 구상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렵다.
무기의 종류가 많아지면 후속군수지원도 별도로 이뤄져야 한다. 운영유지비가 급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어쩌면 획득비용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바로 헬기 기종의 다양화로 인해 초래될 유지비용의 급격한 상승일 것이다. 과연 이러한 문제점을 이번 기본계획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진지하게 검토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국내 방산을 불신하는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래 한국군 핵심 무기체계에 대한 정책수립과 의사결정이 난맥을 겪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확인된다. 1월5일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면서 “무기 획득시 리베이트 근절을 위해 상용구매는 제한하고 정부 간 직구매, 즉 FMS(대외군사판매) 방식으로 구매하겠다”고 보고한 바 있다. 그러나 FMS 제도란 한국의 방위산업 기반이 취약하던 시절 군수업체와 직접 협상을 벌여 구매할 능력이 안 되는 까닭에 미국 정부에 의존하던 시스템이다. 국내 방위산업의 체계종합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지금은 업체 차원에서 필요한 부품과 기술과 노하우를 구입해 하나의 무기체계를 완성할 수 있는 중견국가로 도약하는 시점이다. 이러한 시기에 과거의 FMS 도입을 고집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국방부 수뇌부가 과연 획득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과 불안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다.
항공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우선 국내 방위산업체가 이룩한 성과의 기초 위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게 옳은 방향이다. 이러한 간단한 원칙마저 부정하고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책결정의 난맥상만을 고스란히 노출하면서 마련된 이번 기본계획은 항공산업의 도약이 아니라 추락으로 귀결될 공산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