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동아일보 특파원의 아이티 현장취재

죽음보다 더한 산 자의 고통… 희망의 싹을 뿌려 주소서

  • 신치영│동아일보 뉴욕특파원 higgledy@donga.com │이진한│동아일보 교육복지부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입력2010-03-02 18: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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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티는 절규하고 있었다. 통곡의 땅을 2명의 기자가 다녀왔다. 서울대 의대 출신의 이진한 기자는 현지에서 수술과 취재를 병행했다. 산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다.
    아이티로 가는 길은 멀었다. 미국 플로리다주 남동쪽에 위치한 카리브해에 있는 작고 가난한 섬나라 아이티. 1월12일(현지시각) 오후 건국 이래 최악의 지진이 발생해 사상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당했다는 외신의 긴급 소식이 들어왔다. 밤새 전해진 뉴스를 보니 나라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상황은 급박했다. 수많은 사람이 건물 더미 밑에 깔려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오지 말라”

    동아일보 뉴욕특파원으로 일하는 기자는 현지에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3일 새벽 서울 마감 시간에 맞춰 일하던 기자에게 마침 회사에서 출장 지시가 왔다.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에 아이티에 도착하라.”

    곧바로 인터넷을 뒤졌다. 아이티로 가는 비행기편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1월13일 오후 뉴욕을 출발해 마이애미에서 아이티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에어프랑스 비행기를 갈아타는 일정을 찾았다. 하지만 예약을 할 수 없었다. 에어프랑스로 전화를 걸어보니 포르토프랭스 공항도 지진 피해로 폐쇄돼 아이티로 가는 비행편이 무기한 연기됐다는 것이다.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아이티와 한 개의 섬을 나눠 국경이 닿아 있는 도미니카공화국을 통해 들어가는 길이었다. 도미니카에 도착해서는 한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도미니카 주재 한국대사관은 부정적이었다.

    “아이티는 지금 아수라장이다. 통신도 두절됐다.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무조건 도미니카로 날아가기로 했다. 마침 1월13일 저녁 7시발(發) 비행기가 있었다. 도미니카 수도 산토도밍고에 도착한 시각이 새벽 1시경. 미리 섭외한 현지 한인 여행사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이날 밤 아이티에서 빠져나온 한국계 건설회사 관계자를 찾아가 인터뷰도 하고 현지 사정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한국계 기업 직원 16명과 함께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산토도밍고에 도착한 그 역시 기자가 아이티에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걱정을 했다. 도로도 성하지 않아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호텔에 들어갈 틈도 없이 한국대사관으로 향했다. 도미니카 주재 한국대사관은 아이티 지진 이후 24시간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공관을 지키던 대사관 관계자들을 만났지만 예상대로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보장은 못 한다”

    포르토프랭스 공항이 폐쇄됐기 때문에 아이티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산토도밍고에서 가이드를 구한 뒤 육로를 통해 국경을 넘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구호팀과 구호물자를 싣고 포르토프랭스 공항으로 가는 국제연합(UN) 항공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UN 출입기자인 덕분에 포르토프랭스행(行) UN 항공기가 산토도밍고에서 수시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육로를 통해 아이티로 들어가는 방법은 여의치 않았다. 모두 빠져나오려는 판국에 위험한 아이티로 안내해줄 사람이 없었다. UN 항공기 사정도 녹록지 않았다. UN은 도미니카 현지 여행사로부터 헬리콥터나 소형 비행기를 수배해 되는 대로 각국에서 도착하는 구조대와 구호물자 등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지진 이후 미 공군 관제사들이 포르토프랭스 공항 통제권을 넘겨받아 UN 등 구호 관련 비행기에 한해 제한적으로 이착륙을 허용하고 있는 터라 항공기 수송이 원활치 않았다. 적십자 등 국제 구호팀, 의료단, 각국 구조대 등도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10시간 정도 비행장에서 대기했지만 결국 UN 수송기를 타지 못했다. UN 관계자는 “내일 다시 와서 대기해달라. 내일도 비행기에 태워준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다. 이러다 결국 포르토프랭스행이 무산되는 것은 아닐까. 초조해졌다.

    그런데 이날 저녁 예기치 않은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현지 한국식당에 식사를 하러 들렀다가 다음날 새벽 버스로 포르토프랭스로 들어간다는 선교단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과 도미니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 등 10여 명이 의약품과 구호품을 싣고 간다며 버스에 자리가 있으니 태워줄 수 있다고 했다.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다음날 산토도밍고에서 구호품을 모두 실은 버스는 오전 10시경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버스에서 점심을 해결하면서 달리기를 7시간. 국경도시 히마니(Jimani)에 도착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주유소였다. 아이티에서 나온 사람들이 기름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티에서 휘발유 품귀현상이 벌어져 도미니카로 넘어와 휘발유를 사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름을 수입하는 아이티에서 지진으로 수송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휘발유를 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도미니카 당국은 아이티 사람들이 생필품을 살 수 있도록 비자가 없어도 히마니까지는 들어올 수 있도록 국경을 개방하고 있었다.

    오후 6시20분경 국경을 통과한 버스는 2시간을 더 달려 목적지인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했다. 지진으로 포르토프랭스 공항이 폐쇄되지만 않았다면 미국 뉴욕에서 비행기로 4시간 정도면 닿을 곳인데 뉴욕에서 비행기에 오른 지 만 이틀 넘게 걸린 셈이었다.

    포르토프랭스 외곽은 상황이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정전 때문에 촛불 하나를 켜놓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고 거리에는 인적도, 차량 통행도 거의 없었다. 간혹 담벼락이 무너져내린 집들도 보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날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들어갈수록 참혹한 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아팠을까

    현장은 참혹했다. 도심은 마치 전쟁이라도 휩쓸고 간 듯 성한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건물 밑에 깔려 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서울의 명동쯤 되는 대표적인 번화가인 델마(Delmas)를 둘러봤다. 큰길 양쪽 편에 2, 3층 되는 건물들이 줄지어 내려앉아 있었다. 얼마 전 개장했다는 삼성 대리점도 눈에 띄었다. 무너져내린 건물 잔해 사이로 보이는 ‘SAMSUNG’이라는 로고로 그곳이 삼성 대리점이 있던 자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빈민층이 많이 모여 사는 라 빌(La Ville)의 상황은 더 끔찍했다. 다닥다닥 붙은 소규모 주택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됐다. 거리에는 무너진 건물에서 꺼낸 시신이 수십 구씩 나뒹굴었다. 사람들은 손이나 옷깃으로 코를 막고 시신 옆을 지나다녔다. 거리를 돌아보고 있는데 한쪽에서 굴삭기가 시신들을 트럭에 옮겨 싣는 모습이 보였다. 현지 주민의 말을 들어보니 인근 화장터로 실어 나르는 것이라고 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신 더미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옆에서 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음식을 해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통령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흰색 건물인데 가운데 원형 지붕을 만들어 미국 백악관과 외관이 흡사했다. 울타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원형 지붕이 있는 건물의 가운데 부분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건물은 철골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고 콘크리트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동아일보 특파원의 아이티 현장취재

    의사, 기자가 따로 없었다. 오른쪽 어시스트가 수술에 참여한 이진한 기자

    이재민들은 도시 곳곳에서 비닐 천막을 나무에 걸어놓고 땅바닥에서 생활하는 천막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대통령궁 앞 천막촌에는 수천 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천막촌으로 들어가자 식량이나 물이 부족해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누워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전세계에서 구호품을 보내오고 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UN이나 아이티 정부가 이재민들에게 충분히 나눠줄 수 있는 구호품이 쌓일 때까지 배분을 하지 않고 있었다. 부족한 상태에서 구호품을 나눠주면 받지 못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고 서로 받으려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구호품이 쌓여 있는 창고나 먹을 것이 있을 만한 곳에는 음식을 구하러 나온 이재민이 수백 명씩 몰려들었다. 외국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소나피 공단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의 구호단체나 자원봉사자들이 UN군의 보호를 받으며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 음식을 구걸하는 이재민들이 하루 종일 공단 정문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무장한 UN군은 이들의 출입을 막느라 하루 종일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굶주린 이재민들의 행동은 더욱 격해지는 듯했다. 무너진 상점 터에서 찾은 음식을 놓고 긴 ‘정글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민간 구호단체 등이 구호품을 전달할 때 구호품을 서로 받으려는 이재민들 때문에 구호단체 관계자들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일도 벌어졌다.

    발 밑 지반이 흔들거릴 정도의 여진도 위협적이었다. 기자는 아이티에서 3박4일간 머무는 동안 매일 서너 차례 강도 5.0~6.0의 여진에 시달려야 했다. 늦은 밤 건물 안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여진이 일어나면 노트북을 들고 건물 밖으로 뛰어나와야 했다.

    1월18일 아이티를 떠날 때는 다행히 UN의 헬기를 타고 나올 수 있었다. 포르토프랭스의 UN군 기지를 출발해 2시간 만에 도미니카공화국 산토도밍고 공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뉴욕행 비행기로 갈아타니 4시간 만에 뉴욕에 도착했다. 아이티에 다녀온 지 3주가 넘었지만 지금도 아이티에서 겪은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신문과 방송 보도를 보면 아이티 현지인들의 고통은 크게 줄어든 것 같지 않다. 하루빨리 아이티의 재건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임무 교대

    신치영 뉴욕특파원에 이어 아이티에 들어간 기자는 ‘동아일보’ 교육복지부 소속으로 의사다. 아이티에선 취재와 진료를 병행했다. 귀국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 시차가 13시간이어서 낮과 밤이 바뀐 탓도 있지만 그곳의 참혹한 광경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는 1월22~30일 8박9일 일정으로 아이티에 들어가 진료와 취재를 병행했다. 세브란스병원, 한국기아대책기구와 함께 짐을 꾸렸다. 한국기아대책기구는 국제 네트워크를 가진 NGO. 상위 기구인 세계기아대책기구가 UN에 등록돼 있다. 이 단체가 아이티까지 길 안내 및 현지 병원 소개, 구호물품 기증 등을 담당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티로 가져가야 할 의료물품 수송이 문제였다. 110개의 의료물품 상자 속엔 수술용 도구, 항생제, 수액제 등이 담겨 있었다. 물품 비용만 1억원이 넘었다. 급하게 준비하다보니 상자별로 무게가 달랐다. 부리나케 짐을 다시 쌌다. 상자 1개의 무게가 25㎏이 넘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의료 물품 중 에탄올(수술 중 사용하는 소독제)은 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결국 싣지 못했다. 의료진은 수술에 영향을 끼칠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에탄올을 대신할 수 있는 소독제인 베타딘(빨간약)을 가져갈 수 있었다. 미국 일본 등은 자국의 군용 수송기를 이용해 의료물품을 옮겼다고 한다. 부러울 따름이다.

    동아일보 특파원의 아이티 현장취재

    병원 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아이티로 가는 길은 멀고도 힘들었다. 인천공항, 미국 애틀랜타 공항, 마이애미 공항에 이어 산토도밍고 공항. 우리는 물품을 손으로 직접 날랐다. 이마와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1월22일 오후 10시(현지시각) 도미니카공화국에 입국해서 아이티로 직행하는 대형 트럭에 물자를 옮겨 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다행히 의료물품은 한 개의 분실도 없었다. 현지 공항 직원들도 아이티를 도우러 가는 이들의 짐이라는 걸 알고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산토도밍고는 아이티로 가는 관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생수 품귀 현상이 벌어지고 70달러 하던 호텔비가 100달러로 올랐다. 다행히 산토도밍고의 한인 선교회 협의회가 한국 의료진을 도와줬다.

    산토도밍고의 월드 그레이스 미션 선교회 백세현 센터장은 “현지 교민들이 당번을 정해서 한국에서 오는 의료진을 돕는다”면서 “이를 위해 차량도 1대 더 구입했다”고 말했다.

    진료팀이 일한 병원은 두 곳. 20병상 규모의 희망병원(에스포아·ESPOIR)과 포르토프랭스에서 규모가 두 번째로 큰 300병상 규모의 코뮈니테 병원.

    장총을 들다

    1월23일 오후 7시 포르토프랭스 델마 75번지에 위치한 희망병원에 먼저 도착했다. 소규모 병원인 이곳엔 병원 복도에 20여 명, 앞마당에 설치한 임시 입원실에 20여 명 등 총 40여 명의 환자가 누워 있었다.

    마당엔 텐트와 천막을 쳐서 만든 임시 입원실이 있었다. 대부분 손이나 발 골절상 또는 몸, 얼굴, 손, 발 등의 피부가 찢겨져 있었다. 일부 어린이가 장염을 앓았고,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도 보였다. 병원 원장, 미국인 의사, 독일인 의사 등 총 6명의 의사가 일했는데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열악한 의료 환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퇴부 뼈가 부러진 환자의 경우 부러진 뼈를 바로 펼 때 무거운 추를 이용한다. 그런데 이곳에선 돌멩이 또는 물을 가득 넣은 페트병을 추 대신 사용했다. 또 전신 마취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큰 수술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대신 척추 마취가 가능해 뼈가 부러진 환자의 핀 고정, 상처 꿰매기 정도의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진료팀은 희망병원엔 의료진을 한두 명만 파견하기로 하고 코뮈니테 병원을 진료 장소로 선택했다. 수술 위주로 팀을 구성했기 때문에 수술장이 많은 코뮈니테 병원을 선택한 것이다.

    코뮈니테 병원의 입구는 탄창을 장착한 장총으로 무장한 현지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먹을 걸 찾아 병원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병원 내부엔 프랑스 일본 미국 스웨덴 등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의료진이 있었다. 수많은 환자가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길에서 대기했다.

    현지인들은 병원에서 현지어를 영어로 통역해주는 통역인(옷에 T자로 테이프를 붙였다), 환자를 옮기거나 의료기기를 나르는 발런티어(옷에 V자를 붙였다)를 하려고 줄을 섰다. 병원 내에서 이러한 일을 하면 먹을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당 5달러를 받고 통역 일을 하는 현지인도 있었다. 우리가 고용한 현지인은 첫날엔 5달러를 받았으나 며칠 지나서는 하루 100달러를 요구했다. 아수라장 속에서도 사람들은 돈을 벌고자 갖은 방법을 썼다.

    코뮈니테 병원의 환자들의 상태는 처참했다. 머리, 얼굴, 손, 발에 난 찢어진 상처가 곪거나 뼈가 부러진 경우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손, 발이 절단된 사람이 많았고, 잘린 부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생긴 2차 염증으로 고름이 뚝뚝 떨어졌다. 상처 부위에선 냄새가 진동했다. 급하게 절단 수술을 하다보니 관리가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조세프 야니크(26)씨는 담이 무너지면서 다리를 짓눌러 부종이 심했다. 부종이 다리 신경을 자극하는 바람에 통증이 무척 심했다. 그녀는 “지진이 난 이후 지금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호소했다. 진즉 진통제와 수면제만 처방했어도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름이 뚝뚝

    우리는 수술팀과 약 조제팀, 진료팀으로 조를 나눴다. 진료팀에 소속된 기자도 환자를 진료했다. 상처가 덧난 곳을 소독하는 일이 많았다.

    유독 요도염, 질염 등의 비뇨기과 질환을 호소하는 이가 많았다. 깨끗한 물로 씻지 못해서 생긴 것이리라. 에이즈 환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우리 팀의 한 의료진이 환자에게 항생제 주사를 놓다가 자신이 주삿바늘에 찔리는 사고가 생겼다. 그 의료진도 이곳 주민의 20%가 에이즈 환자라는 말을 전해 들은 터였다. 다들 불안한 마음으로 환자의 혈액을 뽑아서 에이즈 검사를 했다. 다행히 음성으로 나와 모두 안도했다.

    요도염이나 질염은 소변 검사를 한 뒤 항생제 처방을 해야 하지만 그럴 만한 시설이 없어 환자가 밝힌 증상에 맞춰 약을 처방했다. 같이 일을 했던 이혜진 약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약사는 간호사 출신의 주희숙씨와 함께 약 조제를 맡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진료를 받던 한 어린이가 필자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 아이는 다음날에도 먹을 걸 찾아 병원에 왔다. 그 어린이의 옆엔 3명의 아이와 어머니가 서 있었다. 조용히 다가와 감기약을 달라거나 통증 완화제를 달라고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요구하는 대로 줬다. 물, 빵, 약을 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우리가 인심이 후하기로 소문이 난 모양이다.

    진료팀과 이웃해서 임시 진료실을 꾸린 일본 의료진은 “한국 의료봉사단은 자체적으로 약 조제실까지 갖춰 한자리에서 진료 및 처방, 조제를 한다”면서 부러워했다.

    기자는 김원옥 교수(마취통증의학), 문은수 교수(정형외과), 김경아 간호사 등으로 구성된 수술팀에 속해서 이곳 병원의 수술장에 들어갔다. 수술장은 총 6곳이 있었는데, 2곳을 미국팀에서 독차지했고, 다른 나라 의료진이 나머지 4곳의 수술장을 이용했다. 프랑스 미국 스웨덴 등 여러 팀이 와서 수술하다보니 수술장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 팀은 김원옥 교수가 수술장 내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수술장 입구까지 환자 보호자가 들어올 만큼 정돈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수술장 문 앞에서 파리와 모기가 날아다녔다. 한마디로 끔찍했다.

    수술 환자는 임신 6개월의 미즐즈 아리스(38)씨. 왼쪽 무릎을 절단하는 치료를 받았는데, 2차 감염이 심해 재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 지진 때 집이 무너지면서 자식 둘이 죽었고 그 충격으로 “나는 아이가 없다”고 말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도 앓고 있었다. 재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패혈증으로 인해 태아도 위험한 상황. 수술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스씨는 “재수술이 큰 수술이 아니길 바란다”고 걱정했다.

    아리스씨는 몸무게가 90㎏에 달해 수술장으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자 4명이 달라붙어서 그를 수술장으로 옮겼다. 수술장은 한국의 1960~70년대 수준. 자동마취 기기가 없어 김원옥 교수는 직접 손으로 짜서 공기를 주입하는(앰뷰백) 기기를 사용해 환자를 마취해야 했다.

    ‘연합뉴스’ 한상용 기자가 손전등을 비춰 수술을 도왔다. 수술용 조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술 전 해야 하는 피 검사, 심전도 검사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1시간 넘게 척수수술(부분마취)을 진행했지만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데다 임신 중이어서 마취에 실패했다.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응급상황.

    김원옥 교수는 “다행히 전신마취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보통의 경우 40분가량 걸리는 수술인데 열악한 환경 탓에 마취와 수술 뒤 마무리까지 2시간쯤 소요됐다. 의사 출신인 SBS 조동찬 기자도 수술에 합류했다. 재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아리스씨를 무사히 회복실로 보낼 수 있었다. 수술 도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뤄진 염증 제거 수술은 무척 힘들었다. 의료진 모두 땀범벅이 됐다.

    동아일보 특파원의 아이티 현장취재

    이진한 기자와 함께 아이티에 들어간 한국 의료팀.

    포르토프랭스에 파견된 중앙 119구조대 대원 4명은 1월26일(현지시각)부터 살충 분무기 장치가 장착된 0.8t 흰색 차량과 안내 차량 두 대에 나눠 타고 방역 활동에 나섰다. 기자도 동행했다. 구조대는 도미니카에서 5000달러짜리 방역 장비를 구입했다. 이날 119구조대는 6시간 동안 대통령궁이 있는 시내 중심부와 포르토프랭스에서 우범지역으로 손꼽히는 시티솔레이 등 80㎞ 구간을 소독했다.

    시내 중심부에선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신발, 옷, 허리띠, 과일, 야채 등을 파는 노점상이 등장해 거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림을 팔러 나온 사람도 있었다.

    “천국에 온 것 같다”

    주민들은 뿌연 연기를 내뿜는 방역기기를 신기하게 여겼다. 오래전 한국에선 아이들이 날뛰면서 차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궁금증을 참다못한 주민들은 창문을 두드리며 “차가 고장 난 것 같다” “왜 이상한 것을 뿌리느냐”고 물었다.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이도 많았다. 그래서 대원들은 창문을 열고 “라퓨멜(방역한다) 무슈(파리)”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피해가 심한 대통령궁 주위 난민촌에서 만난 한 남성은 “방역은 필요 없다. 먹을 것과 물을 달라”고 요구했다. 반면 시티솔레이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좋은 일을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이 차 꽁무니를 따라오기도 했다. 시티솔레이에 거주하는 마시에 조세프(38)씨는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 쓰레기를 버려 모기와 파리가 많다. 주민들의 위생 문제가 심각하다”면서 “꼭 필요한 일을 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외신 기자 중에서도 이러한 방역 활동을 처음 본 사람이 많았다. 방역차를 부지런히 촬영하면서 구조대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대통령궁 주변에 있던 사진기자 4명이 방역차 쪽으로 달라붙어 연방 셔터를 눌러댔다. 119구조대 최종춘 대원은 “아이티에서 이런 방식으로 방역하는 건 우리가 처음인 것 같다”면서 “사람들이 왜 이상한 걸 뿌리느냐면서 몰려들때는 상당히 긴장했지만 총 200L의 방역제를 성공적으로 살포했다”고 말했다. 방역활동에 동참한 KOICA(한국국제협력단) 박경미(29) 단원은 “지진피해가 없었더라도 빈민가가 많아 방역이 꼭 필요했다”면서 “방역 활동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포르토프랭스 북부지역의 밤거리를 돌아봤다. 저녁 7시경 출발해서 중심지역 골목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전기가 부족한 탓에 가로등은 아예 없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여진의 공포에 시달렸다. 집이 파괴되지 않았는데도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스팔트로 포장한 길이 지진으로 파손돼 비포장도로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차가 덜컹거렸다. 땅에선 뿌연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산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저녁 준비로 마을은 분주했다. 등잔 같은 것에 불을 붙여서 바나나를 구워 먹었다.

    멜리제이 존니(22)씨는 “골목길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도 마찬가지로 어두웠다”면서 “우리는 어두운 것에 익숙하다”고 말했다. “현지인이 외국인을 공격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그동안 미국 CNN 등이 아이티 사람들이 과격한데다 폭력도 행사한다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선입관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배가 고프고 두려워 폭력 사태가 벌어졌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국인을 환영한다”고 답했다.

    희망의 싹

    현지 NGO에서 일하는 한 인사는 “아이티인은 다혈질적인 면이 있지만 대부분 낙천적이고 착하다”고 말했다.

    귀국 길에 오르면서 기자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돌아갈 안전한 나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나 아이티에서 만난 현지인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안도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이철휘 선교사는 “아이티에서 도미니카로 나오면 마치 지옥을 벗어나 천국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티의 무너진 건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10~20년은 족히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아이티는 6·25전쟁 때 한국에 물자를 제공한 나라다. 아이티 사람들은 지금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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