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북자·국군포로 송환 및 식량지원 문제 탓에 결렬
- 청와대 고위관계자 “현 시점에서 정상회담 관련 당국 간 논의 없다”
- 정상회담 추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2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왼쪽)을 만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정부 고위 인사들이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대풍그룹은 북한이 2006년 설립한 대외경제협력기관이다. 박 총재는 옌볜대를 졸업하고 베이징 대외경제무역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1959년생인 박 총재는 1990년대 후반 중국국영 석유회사 임원으로 일했다. 조선족이 30대 후반의 나이에 고위직에 오른 건 이례적인 일. 북한 군부에 휘발유를 공급하는 일을 하면서 북측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박 총재는 남북경협 현장에서 ‘박철수’가 아닌 ‘박성철’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박철수는 사기꾼’이란 말이 나돈 적도 있다.
대풍그룹은 2006년 중국과 홍콩에 법인을 등록했으나 매출이 거의 없는, 사실상 페이퍼 컴퍼니인데도 “박 총재를 잘 안다”는 경제계 인사가 적지 않다. 대풍그룹이 다수의 한국기업에 제안서를 넣었기 때문이다. 사기꾼이라는 말이 나돈 건 성과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임원 C씨는 “박 총재가 중국에서 대학교수로도 활동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박 총재는 왜 서울을 다녀갔을까?
1월21일 오전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열린 남북물류포럼 조찬간담회. 한 참석자가 강연자로 나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에게 물었다.
“북한이 국가개발은행을 세운다는데….”
정 전 장관이 참석자 중 K씨를 가리키면서 답했다.
“대풍그룹 사람이 여기 와 있네요.”
K씨는 ‘대풍그룹 부장’ 직함으로 활동한다. 한 인사는 “서울에서 박철수 총재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풍그룹 실체
이명박 대통령은 다보스포럼에 참석했을 때 “올해 안에라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한 당국자는 “이사회에 참석한 사람 중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달지 않은 사람은 박 총재가 유일하다”고 했다. 대북소식통 C씨는 “박철수는 금융전문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김양건, 장성택이 금융을 아는 것도 아니다. 외자 유치가 잘 될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박 총재는 남과 북에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신동아’는 ‘국가개발은행 설립 제안서’라는 제목이 붙은 A4용지 15장 분량의 대풍그룹 내부 문건을 입수했다. 2009년 작성된 이 문건엔 국가개발은행의 ‘임무’ ‘목표’ ‘지분구조’ ‘자금원천’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문건은 ‘국가개발은행의 목표’를 ‘국가경제발전전략에 따라 국내외 자금을 조달, 인도하며 경제 및 사회발전의 자금 병목 장애를 완화, 해소하며 경제 및 사회의 전면적인 조화와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정부’와 ‘대풍그룹’이 각각 40%, 60%의 자본금을 출자해 설립한다. 대풍그룹은 60%의 자본금 중 30%를 독자 조달하고 나머지 70%는 ‘세계은행’ ‘아세아은행’ ‘기타 나라 금융재단’에서 유치한다. 또한 한국, 유엔개발계획(UNDP) ‘유럽동맹은행’의 협조를 구한다.”(문건에서 발췌)
‘세계은행’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아세아은행’은 아시아개발은행(ADB), ‘유럽동맹은행’은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국제 금융거래가 가능한 은행을 가지려면 미국과 협상을 통해 ‘보통 국가’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북한이 세운 은행이 국제금융결제망에 들어올 수 있으며, IBRD나 ADB의 자본을 유치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국가개발은행 설립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북한이 밝힌 대로라면 국가개발은행은 중국국가개발은행, 한국산업은행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박 총재는 국가개발은행의 외자 유치를 담당한다.
“정부가 조율 중이라…”
“남북 간 정상회담 논의가 합의 단계까지 갔다가 결렬됐다. 박철수도 한발 걸쳤다.”
지난해 12월 한 인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한 말은 이후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박 총재 일을 돕는다”는 K씨의 소재를 수소문했다.
임태희 장관은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시절이던 2008년 11월 ‘파주통일경제특구법’을 발의했다. 북한은 그를 ‘비핵·개방 3000 구상’의 입안자로 파악한다. 임 장관은 2008년 8월19일 한 세미나에 참석해 ‘통일경제특구 개발전략’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박 총재의 심부름꾼’이라는 K씨도 ‘대풍그룹 부장’ 직함으로 이 세미나에 참석했다. 발언 기회를 얻은 K씨는 “북한이 개혁·개방을 준비 중이다. 베이징의 대풍그룹은 평양에 아파트 10만호를 건설하려고 한다. 또한 북한의 철도 및 고속도로 공사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K씨는 남북물류포럼 회원 명부에 ‘인성실업 직원’으로 등록돼 있다. 인성실업은 원양에서 참치 메로 등을 잡는 수산회사다. 경남 통영시 욕지도에서 한국 최초로 참치를 양식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인성실업 직원 명부엔 OOO이라는 사람이 없었다.
강종원 전 인성실업 대표의 설명.
“K씨를 잘 알죠. 박철수 밑에서 일하는. 임의로 인성실업 직함을 쓴 겁니다. 박철수를 만난 적이 있어요. 남대서양에서 오징어를 잡는데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에 값이 폭락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오징어가 너무 많이 잡혔어요. 2007년 K씨를 통해서 박철수 회장을 만났습니다. 한국 정부는 우리가 잡은 오징어를 구매한 뒤 북한에 인도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을 박철수와 논의했습니다. 이재정 당시 통일부 장관도 논의에 참여했고요. 노무현 대통령 임기가 얼마 안 남은 데다, 지원 액수도 상당해서 성사되지는 않았고요.”
K씨와의 전화통화는 1월말이 돼서야 이뤄졌다.
“기자라고요? 저를 어떻게 알았어요….”
그는 당황했다. 정상회담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정상회담은…. 정부가 조율 중이라…. 죄송합니다. 말을 못합니다.”
2월초 수차례 이어진 전화통화에서도 그는 사실 관계를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답했다.
대풍그룹은 남과 북을 연결하는 비선 중 하나일 뿐이다. 남북 간 파이프라인은 복잡했다. A씨는 싱가포르 회동에 관여했다. 정부 관계자는 “대풍그룹, A씨가 관여한 것까지는 맞다”고 확인했다. 싱가포르 만남과 관련해서는 A씨가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북미관계 개선 뒤 국가 주도 발전 전략을 추구하려고 한다.
임 장관과 김 부장이 싱가포르에서 접촉하기 전까지 당국 간 대화라인은 가동되지 않았다.
‘합의 단계’서 결렬
리종혁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해 8월4일 금강산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났을 때 “정부와는 전혀 접촉이 없는데요 뭐…” “남측 당국이 우리한테 그런 것들을 전달할 통로가 없어서 그런가”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부 실무진은 그대로 남아 있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도 “남측 당국이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협상하려는 당국자가 없는 것 같아요”라고 현 회장에게 말했다.
남북대화 채널은 크게 셋이다. 통일부가 주연 격인 공식-공개 채널은 남북이 협상장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언론에도 보도된다. 공식-비공개 채널의 주연은 정보기관이다. 통일부도 공식-비공개 라인을 가동할 때가 있다. 끝으로 비공식-비공개 채널, 즉 ‘비선’(秘線)이 있다.
임 장관이 이끈 비선은 공식라인에 배턴을 넘겼다. 11월 열린 후속 대화는 ‘통-통(통일부와 통일전선부) 라인’이 진행했다. 양측은 11월7일, 14일 두 차례 개성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7일 협의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14일 다시 만나기로 했으나 10일 서해교전이 벌어졌고 14일 협상은 결렬됐다.
남북 접촉에 관여한 한 인사는 “MBC와 아사히신문이 비교적 정확하게 보도했다. 일국의 장관이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다. 싱가포르에서 남북이 정상회담에 거의 합의했다가 결국 파기됐다고 보면 된다. 북한이 납북자·국군포로 중 한두 가족을 고향 방문 형식으로 남측으로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 ‘송환’이 아니라 ‘고향 방문’ 형식이었다. 이 대통령과 가족들이 함께 남측으로 귀환하면 모양이 좋을 뻔했다. 통일부가 11월 접촉 때 그 수를 대폭 늘리자고 했다. 평양 처지에선 윗선에서 합의한 것을 나중에 뒤집은 셈이다. 정상회담 때 핵 문제를 논의하고 정상회담을 상시화하는 방안도 싱가포르에서 의견 접근을 이뤘다. 지금은 당국 간 대화는 아무것도 없다. ‘현재 시점에서 남북 당국 간 대화는 전혀 없다’고 써도 틀리지 않는다.”
‘아사히신문’은 2월4일 “임태희-김양건 만남에서 2009년 특정일에 정상회담을 갖기로 기본 합의가 이뤄졌다”며 “하지만 임 장관이 귀국 후 합의내용 가운데 △북한의 비핵화를 둘러싼 부분이 애매하고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는 것이 명문화되지 않았으며 △대북 식량지원이 정상회담의 전제로 받아들여지는 표현이 한국 정부 내에서 문제가 돼 최종합의는 결렬됐다”고 전했다
MBC도 같은 날 “싱가포르 극비접촉에서 북핵과 납북자, 식량지원 등 3대 의제에서 거의 의견 접근을 이뤘고 택일만 남은 상황이었던 걸로 전해졌다”면서 “북한에 지원하는 쌀 일부를 정상회담 전에 미리 선적해달라는 북측 요구에 우리가 ‘대가’가 아닌 ‘인도적 지원’임을 이유로 난색을 표해 진전을 보지 못한 걸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한 정보소식통은 “대북 협상 경험이 없는 임 장관이 성사가 안 될 일을 시작했다는 의견과 통일부가 더 많은 양보를 받으려고 해 임 장관의 성과가 결실을 보지 못했다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고 전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현 시점에서 정상회담과 관련한 남북 당국 간 논의는 전혀 없다”고 확인했다. 그는 또 “통일부로 남북 대화 창구가 단일화됐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국정원이 직접 대북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는 원칙도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1월29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했을 때 B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연내 남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언급한 뒤 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화제가 됐다. 이 대통령은 “올해 안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뭔가 일이 진행 중’이라는 뉘앙스를 풍긴 것이다.
“당국 간 논의, 현재는 없다”
청와대가 이 발언을 “김 위원장을 안 만날 이유가 없다”고 바꿔 전달한 것은 정무적 판단의 결과라고 한다. 청와대가 인터뷰 직후 BBC에 이 대통령의 발언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고 BBC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 그런데 KBS가 인터뷰 전문을 입수해 보도하면서 왜곡 논란이 벌어졌다.
이 대통령의 ‘한발 더 나간’ 언급 때문에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걸 전제로 현재 어느 선에서 협의가 진행되느냐에 관심이 모아졌으나,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 대북소식통들의 발언을 종합해볼 때 정상회담과 관련한 당국 간 대화는 중단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비선을 자임한 인사들의 대북 접촉은 끊이지 않는다. ‘MB 복심(腹心)’을 자처하면서 중국에서 남측 인사가 북측 인사를 접촉하는 것이다. A대기업의 북한 내 식품공장 추진설, B대기업의 인프라 투자설이 회자되는 까닭이다.
복수의 한나라당 인사, 민간 연구기관의 북한 전문가, 민간단체에 발을 담근 여권 인사 등이 중국에서 북측과 접촉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의지가 확인된 터라 정치권 인사들의 대북 접촉은 더욱 잦아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진행형
한 북한전문가는 “정부가 책임 있게 나서면 비선이 활동할 공간은 사라진다. 여러 비선 채널을 경쟁시켜 성과물을 내는 게 북한의 대남 협상전술 중 하나인데, 여러 채널이 나서면 북한의 기대감만 높여 오히려 협상력이 떨어진다. 중재자의 이해관계가 끼어들면서 될 일도 안 된다. 노무현 정부 때가 그랬다.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엔 류우익 주중대사가 남북 정상회담에 관심을 갖고 움직인다는 말이 나온다.
재외공관장 회의 참석차 서울에 온 류 대사는 2월10일 외교부 출입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현재로서는 남북관계와 관련해 베이징에서 진행되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류 대사는 지난해 말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남북관계와 관련해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류 대사는 최근 평양과 소통이 가능한 인사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중국 주재 북한대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맡는 자리다. 최진수 주중 북한대사가 그렇다. 류 대사는 이 대통령이 신뢰하는 인물. 류 대사는 최 대사와의 접촉 여부에 대해 “일부러 만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류우익 라인’이 형성되면 말 그대로 ‘핫라인’의 기능을 할 수 있다.
남북관계는 정상회담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후퇴했다. 당국 간 대화는 중단된 것으로 보이지만, 정상회담 추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대통령이 의지를 나타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