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등 미국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여성 아이돌 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미가 돌연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원더걸스’의 성공 스토리가 실은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원더걸스에 앞서 미국 진출을 선언한 보아, 세븐 역시 변변한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일본 및 국내 복귀를 추진 중이다. 이들은 왜 미국에 갔으며, 왜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원더걸스의 미국 현지 공연 모습(큰 사진)과 지난해 10월 열린 ‘원더걸스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진입’ 관련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멤버 선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미는 그룹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선미의 탈퇴는 많은 이에게 충격을 줬다. 원더걸스가 미국 각지를 돌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중 불거진 사건이어서다. 선미는 소속사를 통해 “지난 1년 동안 미국 50개 도시를 돌며 무대에 선 것은 매우 행복하고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앞으로 계속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의 탈퇴 이후 ‘무릎팍도사’는 새삼 주목받고 있다. 당시 원더걸스 멤버들의 표정, 특히 선미의 의미심장한 발언과 표정이 팬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것. “최정상의 위치에서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에 모든 멤버가 찬성했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는 모습은 이들의 미국 진출 결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특히 선미는 이날 “(미국에서) 너무 외로웠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때문에 팬들은 원더걸스가 소속사의 일방적 의도에 따라 미국에 진출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전적으로 타의에 의한 ‘등 떠밀린 해외 진출’이 아니었냐는 지적이다. 이 가설이 맞다면 기획사는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어린 아이돌 가수를, 가족은 물론 또래와 떨어져 외로움과 싸우게 하면서까지 미국에 진출시킨 것이 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기회”
가장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금전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다. 아이돌그룹 SS501과 카라의 일본 진출을 이끌고 있는 DSP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우리 아이돌은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시장 규모가 작고, 수익 창구가 제한적이다. 최근 들어 음반 시장도 극도로 침체되고 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키운 아이돌로부터 최대한의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해외 진출이 필수불가결하다. 그중에서도 미국 진출은 가수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꼽힌다.
게다가 미국은 ‘세계 최고’라는 명성까지 한꺼번에 얻게 해주는 꿈의 무대다. 미국에서 성공한 가수는 자연스럽게 전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소위 ‘월드스타’로 발돋움하는 셈이다. 이 경우 엄청난 홍보효과가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앨범 한 장을 팔면 세계적으로 다섯 장을 더 팔 수 있다. 세계적인 가수들은 보통 미국에서 100만장을 팔고, 그 외 세계 각국에서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린다.
부가 시장도 크다. 미국 투어 공연은 세계 각지를 도는 월드투어와 맞먹는 수익을 가져다준다. 원더걸스가 오프닝 무대에 선 뒤 국내에까지 널리 알려진 미국 밴드 ‘조나스 브라더스’의 경우 공연 때마다 5만명의 관객을 모은다. 음원 판매, DVD 판매, 광고 수익 등으로도 돈을 벌어들인다. 미국 톱 가수는 연간 1조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획사의 경우 이 같은 기회와 꿈을 버릴 수 없다. 점점 수익창구가 줄어들고 있는 국내 음악 시장을 벗어나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시장, 나아가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한발 더 나아가보자. 기획사 입장에서 보면 미국에 진출한 가수 중 한 팀(명)만 성공해도 단박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기획사로 떠오르게 된다. 이 욕망은 달콤하다. 특히 동방신기 보아 등이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면서 우리 가수들이 미국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제작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등 대형 기획사들이 소속 가수들의 뜻과 관계없이 미국 진출에 매달리는 이유다. 그동안 SM은 보아, YG는 세븐, JYP는 비와 원더걸스 등 일본 및 아시아 시장에서 검증된 아이돌 스타들을 미국 시장에 내보내왔다.
초라한 성적표
미국에서 가수 및 연기자로 활동하는 비는 미국 시장에서 이익을 낸 거의 유일한 한국 아이돌 스타로 꼽힌다.
세븐의 경우 국내에서 한창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2008년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그의 미국 데뷔 싱글 ‘걸스’에는 릴킴이 피처링으로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릴킴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마야, 핑크와 함께 영화 ‘물랑루즈’의 OST 수록곡 ‘레이디마멀레이드’를 부른 가수. 작곡자는 마이클 잭슨의 ‘유 록 마이 월드’, 비욘세와 제이지의 듀엣곡 ‘데자뷰’ 등을 만든 프로듀서 겸 작곡가 닥 차일드였다. 하지만 이처럼 화려한 지원군에도 불구하고 세븐의 데뷔 싱글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세븐은 지난해 말 귀국해 올 상반기 국내 앨범을 발표할 계획이다.
보아의 미국 진출도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보인다. 수년간 미국 진출을 준비하고 지난해 3월 데뷔 싱글 ‘잇 유 업’을 선보이며 야심 차게 시장을 두드렸지만 지금껏 답보 상태다. 그 사이 한때 일본에서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던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더 이상 소녀다운 이미지를 가질 수 없고, 그렇다고 섹시 콘셉트로 활동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세븐과 보아의 아픔은, 이들의 실패가 단순히 미국 시장 진출 실패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젊은 시절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은 물론, 한국과 아시아에서 활동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기대 수익까지 날렸다. 이를 감안하면 기회비용은 수백억원이 넘을 것이라는 게 가요 관계자들의 얘기다. 실제로 보아는 일본에서 매년 1000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렸지만, 미국 진출을 선언한 뒤 한국 및 아시아 활동을 사실상 중단해야 했다.
막대한 기회 비용
한때 국내 가요계의 ‘기대주’로 주목받았으나 미국 진출 시도 후 사실상 잊히고 있는 가수들도 있다. JYP 소속 가수 지소울의 경우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와 연습생 동기뻘이다. 한때 ‘가요계 영재’로 꼽힐 정도로 촉망받던 그는 미국 생활만 6년 가까이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여전히 그곳에서 미국 시장, 나아가 세계 시장을 휘어잡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와 함께 미국서 활동하던 가수 민은 지난해 말 돌아오고 말았다.
가수 임정희의 사례도 뼈아프다. 국내에서 ‘거리의 디바’ 이미지를 구축하며 차세대 여성 솔로 가수로 주목받던 그는 별안간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물론 박진영의 계획 아래 이뤄진 프로젝트였다. 출발은 좋았다.
2007년 9월 미국 힙합 뮤지션 아웃캐스트와 앨범 계약을 할 때만 해도 미국에서의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 듯 보였다. 아웃캐스트의 빅보이는 타이틀곡 ‘사랑에 미치면’의 랩 피처링을 맡은 것은 물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손에 잡힐 것 같던 미국 진출 성공은 여전히 기약이 없다. 임정희는 지난해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 그가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는 지인들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임정희가 느꼈을 상실감은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원더걸스 멤버들은 미국 도착 후 처음 2개월 동안 아무 스케줄이 없자 불안해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가수들이 이처럼 미국 시장 진출에 실패하는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안이한 접근을 꼽는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국내 제작자들이 미국 현지 프로듀서와의 인맥을 강조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며 “박진영이 미국 주류 음악계에 인맥이 있다고 하는데, (그간의 실패 사례를 보면) 그 인맥이 과연 (우리 가수들의) 성공을 보장할 만큼 든든한 동아줄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미국 가요계의 메인 스트림을 공략하지 않고 이미 검증된 아시아권 팬들에게 기대려 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콘서트를 여는 한 가수의 경우, 재미교포와 중국·일본 등 아시아권 팬들을 상대로 공연을 펼치고는 국내에 오면 ‘미국 시장 진출 성공’이라고 포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던 가수 보아가 2008년 미국 진출을 선언하는 모습. 하지만 보아는 현재까지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아이돌 그룹의 미국 진출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걸림돌은 한국, 나아가 아시아와 전혀 다른 미국 음악 시장의 스타 시스템이다. 국내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대부분 기업형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오는 ‘맞춤형’ 스타들이다. 어린 나이에 기획사에 발굴된 뒤 수년간 트레이닝 받다 때가 되면 데뷔한다. 반면 미국의 가수들은 일반적으로 작은 무대에서 활동하다 서서히 메인 무대로 올라간다. 미국의 인기 가수 레이디 가가는 지난해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 가수들이 미국에 진출하려면 우선 지역 클럽을 공략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원더걸스, 절반의 성공
원더걸스는 이러한 ‘선배’들의 실패를 교훈 삼아 새로운 전략으로 미국 시장에 도전한 것으로 보인다. 세븐, 보아 등이 대규모 콘서트와 이벤트로 미국 진출의 포문을 열고도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고 말았던 것과 달리, 미국 인기 밴드 ‘조나스 브라더스’의 국내 투어를 따라다니는 식으로 조용히 이름을 알렸다. 지난해 10월 셋째 주 빌보드 싱글 차트 ‘Hot 100’에서 76위를 차지한 것은 ‘연착륙’ 성공의 신호탄이었다. 아시아 출신 가수가 빌보드 메인 차트에 진입한 건 1963년 큐사카모도(Kyu Sakamoto), 1979년 핑크 레이디(Pink Lady), 1980년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등 3개 팀 이후 30여 년 만의 일이다.
원더걸스는 이외에도 미국 ‘웬디월리엄스 쇼’의 ‘아시아 팝 센세이션’에 소개되고, 프라임 시간대에 방영되는 또 다른 지상파 프로그램 ‘소 유 싱크 유 캔 댄스(So you think you can dance)’에 출연해 얼굴을 알리는 등 미국 시장에서 나름 가장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국의 톱스타’ 지위를 버리고 공연장 주변을 돌며 열악한 조건에서 자신을 홍보하는 ‘굴욕적인 상황’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
앨범 판매 방식도 변칙적이다. JYP는 미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한 아동복 브랜드와 계약을 맺고 정규 음반 매장 대신 의류 매장에서 원더걸스의 싱글 CD를 팔았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이 약한 ‘트윈세대(8~14세 또래로 유아기와 청소년기의 사이를 뜻함)’를 적극적으로 공략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멤버들은 이런 식의 프로모션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고 수치심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근성을 키웠다는 설명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선미의 그룹 탈퇴는 소속사 측의 일방적인 해외 진출 요구와 예상 외의 현지 프로모션 전략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생긴 결과라는 뒷말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미국 자본, 미국인을 앞세운 현지 진출
이런 상황에서 한국 아이돌 가수의 미국 진출 전략이 이제는 근본적으로 수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미국 3대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 소니, 유니버설 등이 한국의 아이돌 가수를 주목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인 신호로 평가된다.
유니버설뮤직 그룹의 경우 아이돌 그룹 ‘포미닛’ ‘비스트’ 등이 소속된 기획사 플레이큐브엔터테인먼트에 투자하고, 음악 사업에 대한 전략적인 제휴를 발표하는 등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월 포미닛의 스페셜 앨범 ‘포 뮤직’이 아시아 지역 9개국에서 동시 발매된 것은 앨범의 라이선스와 퍼블리싱을 유니버설뮤직이 맡은 덕분이다. 유니버설뮤직은 이 앨범의 성공 여부에 따라 아예 미국 시장에 바로 진출하는 가수를 육성하겠다는 전략도 밝혔다. 이 회사의 맥스 홀 사장은 “한국 음악 산업의 역동적인 발전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 유니버설 뮤직의 마케팅 전략과 네트워크를 통해 플레이 큐브 소속 아티스트들을 세계 시장에 소개하게 돼 기쁘다”고 했다. 소니뮤직도 조만간 우리나라에 자체 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미국의 대형 음반사들이 한국 아이돌 가수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짧게는 2, 3년 길게는 9, 10년 동안 연습생 생활을 하며 춤, 노래, 끼를 익힌 ‘준비된 인재’이기 때문. 이들이 가진 무한한 성장 가능성에 세계적인 음반사의 지원이 더해지면, 한국 아이돌 가수의 미국 시장 진입과 성공은 좀 더 쉬워질 수 있다.
동시에 국내 기획사가 미국인을 선발해 길러낸 뒤 미국 시장에 진출시키는 전략도 눈길을 끈다. 지난해 말 ‘만만하니’라는 곡을 발표한 ‘유키스’는 출범 당시부터 세계 공략을 목표로 밝힌 아이돌 그룹. 미국 국적의 멤버 케빈과 일라이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홍콩에서 태어나 마카오, 싱가포르 등에서 산 중국 국적의 멤버 알렉산더는 영어, 중국어뿐 아니라 포르투갈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까지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기반을 다진 뒤 해외에 진출하는 게 아니라 한국과 해외에서 동시에 활동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JYP 역시 “조만간 영어에 익숙한 재미교포, 또는 미국 현지인을 발굴해 미국에서 데뷔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태국인, 중국인 등이 소속된 다국적 아이돌 그룹이 구성돼 있다. 이들은 해당 멤버의 국가에서 큰 인기를 누린다. SM은 그룹 ‘슈퍼주니어’의 중국인 멤버 ‘한경’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고, 그룹 ‘2PM’ 역시 태국인 멤버 닉쿤의 인기로 태국 황실의 초청을 받을 정도의 태국 ‘국민 그룹’이 됐다. 여성 그룹 베이비복스는 최근 그 전례를 따라 오디션을 통해 태국인 한 명을 멤버로 받아들였다. 이 그룹의 소속사인 DR뮤직 윤등룡 대표는 “외국인 멤버의 가세로 해외 시장 진출이 더욱 쉬워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제 이러한 공략 방법이 미국 시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JYP의 정욱 사장은 “미국 진출 성공은 곧 세계 진출 성공을 뜻한다. (미국은) 가수나 기획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무대”라며 “미국 시장을 향한 우리 회사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추진중인 새로운 방식의 미국 시장 공략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때쯤이면, 한국 아이돌 가수의 미국 진출기를 다시 한 번 기록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