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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삶 뒤에 숨은 사랑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가족, 삶 뒤에 숨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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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랜드는 충격이었다. 갑자기 미국의 교외에 갇혀 평생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부딪힌 것이다. (중략) 웨일랜드에서 그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뉴잉글랜드 지방(미국 북동부 지방을 일컫는 말로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버몬트, 메인 주 등이 포함)의 작은 마을의 관습에 따라 살았다. 그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둘을 조화시키며 사는 것보다 헷갈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특히 수드하에게 의지했다. 아빠에게 긁어모은 낙엽을 집 건너편 숲 앞에 두지 말고 비닐 백에 담아두라고 설명한 것도 수드하였다. 그녀는 완벽한 영어로 리치미어의 A/S 센터에 전화를 걸어 가정용품을 수리받았다. 라훌은 그런 식으로 부모님을 돕는 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드하가 부모님이 인도에서 떠나와 사는 것을 기복이 심한 암 같은 병 같다고 생각한 반면, 라훌은 부모님 삶의 그런 측면에 냉담했다. “누가 끌고 온 것도 아니잖아.”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빠는 부자가 되려고 인도를 떠났고, 엄마는 다른 할 일이 없었으니까 아빠와 결혼했고.” 가족들의 약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었던 라훌은 수드하가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조차 조금도 덮어두지 않았다. - ‘그저 좋은 사람’에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삶의 사실들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벵골인 2세 작가다. 그녀 소설의 지향점은 한결같이 우리가 살면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삶의 사실들’에 있다. 그녀가 소설에서 그려 보여주는 인생들을 만나다보면, 미국에 정착한 한인 친척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는 2, 3년에 한 번 뉴욕에 갈 때면 허드슨 강 건너 주택가에 있는 친척집에 얼마간 머물곤 하는데, 중·고등학생 때 그곳으로 떠난 조카들은 이제 성장해 대학을 나와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대학원에 진학해 있고, 그만큼 그들의 삶은 안정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하루 이틀 그들의 삶에 끼어 살다보면, 어느 순간 집안에 깊숙이 스며 있는 알 수 없는 고적함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때로 고독이 되기도 하고 외로움이 되기도 하고 서글픔이 되기도 하고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정서들은 자식들의 것이 아닌 그들 부모의 것이다. 두 대륙의 두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고, 두 나라의 대중문화 코드를 습득하고, 두 나라의 정체성과 현실감을 잃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살아야 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들의 행복과 안정에도 불구하고, 때로 형언할 수 없는 연민에 사로잡히곤 한다.

자식들이 그 사회에 뿌리내리기까지 헌신해야 했던 책임감과 피로감, 나름대로 성공했다는 자부심과 안도감, 나고 자란 곳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그리움. ‘그저 좋은 사람’에 수록된 ‘길들지 않은 땅’의 딸(장녀)과 아버지(가장) 사이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정서가 장벽으로 작용하며 그로 인해 둘은 경직된 관계로 살아왔다. 줌파 라히리 식 가족 서사의 힘은 바로 이 지점을 정곡으로 꿰뚫어 풀어가는 데 있고, 거기에서 독자가 체험하는 울림은 압권이다.



작품을 잠시 들여다보면, 뉴잉글랜드에서도 평생 인도 여자로 살았던 루마의 어머니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고, 평생 이민 가장으로 두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살았던 아버지는 다니던 회사에서 은퇴한 후 삶을 정리해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연금으로 세계 여행을 하는 것을 낙으로 살아가게 되면서 여행지에서 만난 노년의 벵골 여자와 친구와도 같은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맺는다. 딸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는 딸의 새로 이사한 시애틀 집을 방문하게 되고, 일주일을 함께 보내면서 오랜 세월 부녀간에 응어리져 있던 부채 의식을 풀어간다.

더 나은 삶, 그저 좋은 사람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까. 줌파 라히리는 ‘그저 좋은 사람’의 가족 이야기들을 통해 잔잔하면서도 명징한 문체로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아버지가 샤워하는 동안 루마는 차를 준비했다. 차를 마시는 건 루마가 좋아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어도 낮이 저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형식을 갖춰 인정하는 거라 할 수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시간도 대충 보내기 마련인데, 아버지와 함께 베란다에서 차와 캐슈넛과 나이스 비스킷을 먹을 수 있으니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들리는, 거대한 산들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가 좋았다. 아카시가 아기였을 때 깊이 잠들면 내던, 만족스런 한숨소리를 확성한 것 같았다. 나뭇잎은 마치 나무 속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 빛나고, 차갑지 않은 공기 속에서 떨고 있는 듯했다. - ‘길들지 않은 땅’에서

신동아 201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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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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