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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한국적 삶의 원형을 보여주다

탄생 100주년 맞은 4人4色의 삶 - 윤동주·박정희·윤이상·신용호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한국적 삶의 원형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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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속죄양 윤동주
  • ● ‘한국의 나폴레옹’ 꿈꾼 박정희
  • ● 한국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 길어 올린 윤이상
  • ● 학력(學歷) 없이 학력(學力)의 꿈 일군 신용호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4명의 한국인이 있다. 1917년에 태어난 시인 윤동주(~1945), 정치인 박정희(~1979), 음악가 윤이상(~1995), 기업가 신용호(~2003)다.

1917년엔 러시아혁명이 발발했다. 또 중국혁명가 쑨원(孫文)이 광저우(廣州)에 국민당 정부를 수립했다. ‘혁명의 세기’로 기록될 20세기의 기점과 같은 해였다(20세기를 ‘혁명의 세기’로 명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또한 1917년생이다). 그 ‘격동의 세기’를 예고한 해에 각각 이북(북간도 명동촌), 영남 내륙(경북 구미), 영남 바닷가(경남 통영), 호남 바닷가(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4인은 그 출신 배경만큼 걸어간 길도 달랐다.

윤동주의 길은 ‘시인의 길’이었다. 유교적 선비 정신과 기독교적 순교자 정신이 접목된 그의 시심(詩心)은 20세기 전반 한국적 삶의 조건을 규정한 일본 제국주의가 끝내 지배할 수 없었던 한국적 심성의 원형을 보여줬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꿈꿨음에도 일본 제국주의 흉수에 요절한 그는 민족독립의 제단에 바쳐진 ‘최후의 속죄양’으로 추모된다.

박정희는 ‘군인의 길’을 택했다. 이는 두 갈래였으니 대외적 투쟁에서 영광을 추구하는 강병(强兵)노선과 대내적 가난과 싸움을 종식하려는 부국(富國)노선이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답게 ‘군사적 효율성’으로 이를 돌파하며 ‘혁혁한 정공’을 세웠지만 그 반작용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그는 ‘산업화의 영웅’과 ‘민주화의 원흉’이란 엇갈린 평판을 얻는다.

윤이상의 길은 예술적 자유를 찾아 만리타향을 떠돈 ‘예인의 길’이었다. ‘박정희 체제’에 대한 환멸로 한국을 떠나 유럽을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면서 세계적 음악가로 우뚝 섰다. 하지만 ‘박정희 체제’에 대한 염오와 ‘김일성 체제’에 대한 우호가 엇갈린 이중 잣대로 인해 고향 바닷가에 안장되지 못한 채 20년 넘게 ‘떠도는 영혼’이 됐다.



신용호의 길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 ‘상인의 길’이었다. 가난과 교육 못 받은 설움을 이겨내기 위해 독학으로 공부하고 중국 대륙을 떠돈 풍찬노숙의 세월 끝에 ‘세계 최초의 교육보험’을 탄생시키며 보험왕이 됐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을 교육사업과 독서문화 진흥을 위해 쏟아부어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존경받는 기업가’상(像)을 제시했다.

‘서시’의 시인 윤동주는 4인 중에 생일이 가장 늦지만 가장 먼저 생을 마쳤다. 1917년이 저물기 이틀 전인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숨졌다. 27년 2개월의 짧은 생이었다.
 


순백의 영혼

그때까지 그는 철저히 무명의 시인이었다. 정식으로 등단한 적도 없고 시집을 발표한 적도 없어서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그가 죽고 35개월 뒤인 1948년 1월에 발간됐다. 그가 남긴 31편의 시를 모으고 정지용이 발문을 쓴 이 시집은 처음엔 별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무치는 사랑을 받으며 증보판을 거듭해 수록된 시는 128편까지 늘어났다.

사실 윤동주 시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같은 이북 출신으로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던 정지용과 백석의 아류로 봤기 때문이다. 창씨개명까지 하고 유학 간 일본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옥살이하던 도중 생체실험 대상으로 사실상 말라죽었다는 비극적 최후로 인해 저항시인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이 역시 이상화나 이육사 같은 저항시인의 작품에 비하면 강렬함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의 시를 사랑했다.

왜 사랑받을까. 그의 시에는 순수한 삶에 대한 원초적 희구가 담겼다. 밤하늘의 별을 동경하고 구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그 시심은 20세기를 관통한 적자생존의 논리로도 범접할 수 없는 종교적 힘을 발휘한다.

일제가 이 아름다운 청년에게 왜 그토록 가혹한 형벌을 가했느냐는 의문도 여기서 풀린다. 자신들의 추악함을 비추는 거울을 마주할 때 느끼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견디다 못해 아예 인간이기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광복 이후 윤동주가 재발견된 데에는 2가지 죄의식이 작동했다고 봐야 한다. 첫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그 야만의 시간을 견뎌낸 끝에 광복의 희열을 나눌 때 엄습하는 죄의식이다. 일제의 폭압에 굴종하며 비겁하게 살아남은 다수의 우리가 그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소수의 저들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연민이 복합된 감정이다.


이중의 죄의식

이는 특히 우리와 저들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을 때 증폭된다. 윤동주는 투철한 독립투사는 아니었다.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느끼면서도 차마 목숨 걸고 싸울 용기는 없어 그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 식민지 조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으로 유학 가기 위해 부산에서 배를 탈 때 꼭 필요한 도항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히라야마 도주(平沼東柱)로 창씨개명을 받아들였다. 그 닷새 전에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속에/내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王朝의 遺物이기에/이다지도 욕될가’로 시작하는 시 ‘참회록’을 썼을지언정.

이는 윤동주의 사촌이자 절친으로 함께 일본유학을 떠나 같은 운명을 맞은 송몽규와 비교했을 때 더 뚜렷하다. 윤동주에 비하면 송몽규는 독립투사에 더 가까웠다. 군사투쟁을 위해 중국 군관학교에 들어가기도 했고 일본 유학 온 조선인 학생들 상대로 독립투쟁의 필요성을 주도적으로 역설했다. 한마디로 투사로선 송몽규가 한 수 위였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이름은 송몽규가 아니라 윤동주다. 그렇기에 더욱 윤동주는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민족의 독립을 위한 제단에 바쳐진 숭고한 속죄양으로 자리매김했고, 그의 ‘서시’는 광복된 조국의 앞날을 밝힐 서설(瑞雪)의 지위를 획득했다.

윤동주의 시를 계속 소환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광복 이후 한국에서 윤동주가 희구하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집단죄의식이다. 해방 공간에서 이념투쟁과 6·25전쟁 그리고 이후 냉전체제 아래 한국인의 삶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희구하는 삶과 거리가 멀었다. 처음엔 생존을 위해, 다음엔 잘살기 위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거나 타인의 불의에 대해 눈감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가톨릭의 고해성사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참회록)는 구절을 읊으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쉽게 씌어진 시)를 상상하는 것은 그런 죄책감을 씻어내는 정화행위에 가깝다.



부국강병의 화신

윤동주가 유가(儒家)적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구현자라면 박정희(11월 14일 생)는 법가(法家)적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화신이다. 법가는 인간의 도덕성 발현을 최대화하는 유가적 이상주의와 달리 엄격한 법질서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는 현실주의를 택한다.

일제강점기 소학교 교사와 관동군 장교로 일본식 규율과 질서, 기동성과 효율성을 내면화한 박정희의 목표는 임진왜란 이후 400년 가까이 약소국의 설움을 겪은 한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역할 모델은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었다. 천재적 군사전략가로 프랑스 황제에 오른 그는 능력주의에 입각한 인사제도, 근대적 법전의 원천이 된 나폴레옹 법전과 현재에도 통용되는 미터법의 도입으로 도량형을 통일하면서 프랑스를 근대국가의 모델로 일신시켰다. 중국 법가사상가 상앙과 한비자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박정희는 단구(158cm)의 포병장교(박정희는 본디 보병이었으나 장성 진급 후 병과를 포병으로 바꿨다) 출신으로 쿠데타를 통해 최고 권력자가 됐다는 점까지는 나폴레옹과 같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군사적 영광을 냉전체제 하 분단국가가 재현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그 대상을 ‘가난과 전쟁’으로 전환했다.

군사작전을 펼치듯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밀어붙였다. 나폴레옹의 기동전이 ‘선택과 집중’에 의거하듯 박정희는 수출주도 및 대기업 주도전략을 위해 국가역량을 집중했다. 또 보병을 기갑부대 중심으로 전환하듯 경공업 위주의 한국 산업을 중화학공업 위주로 재편했다. 군사작전에서 식량과 군수품의 안정적 보급로 확보가 최우선시된다. 박정희가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무상 3억, 유상 2억, 민간 상업차관 3억, 총 8억 달러를 받은 것 역시 수출 주도 산업전선을 확대하기 위한 보급 확보였다.

이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기간(1961~1979) 경제성장률은 최고 14.1%(1969년), 평균 8.3%를 기록했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91.6달러에서 1746.7달러로 스무 배 가까이 성장했다.


‘국가=나’

중국 역사에서 법가는 현실의 승자였다. 법가를 숭상한 진시황이나 조조는 천하의 패자(覇者)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패자(敗者)이기도 했다. 대부분 비극적 말로를 맞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진제국은 2대(代)를 넘지 못했고 조조의 위나라 역시 조조 사후 45년 만에 무너졌다. 법가의 시조로 불리는 상앙,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한비자와 이사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나폴레옹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럽 대륙을 호령하던 그의 최후는 대서양의 절해고도에서 외로운 죽음이었다. 박정희의 최후 역시 빗나가지 않았다. 1979년 10월 26일 평생의 혁명 동지라 믿었던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비명횡사했다.

법가에 속한 사람들은 왜 비극적 최후를 맞았을까. 법가의 사상이 세상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제공할 순 있어도 그 후에 찾아오는 정신적 허기를 채워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법가의 운명을 피하는 길은 절반의 성공에 만족하고 물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법가의 딜레마는 그 속성상 권력을 놓으면 엄청난 정치보복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국가와 자신을 등치시킨 박정희에겐 더 힘든 일이었다. 이는 5·16군사정변에 성공한 뒤 그가 직접 발표한 책 ‘국가와 혁명과 나’(1963)의 제목에서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 혁명은 결국 국가와 자신을 등치시키기 위해 필요한 등호와 같은 역할을 한 것임을 이 제목은 암시하고 있다.

박정희의 이런 성향은 영웅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으로 탄생했다는 것이 ‘박정희 평전’을 쓴 정치학자 전인권의 분석이다. 박정희는 어린 시절부터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같은 영웅이 출현해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영웅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또한 윗사람이나 아랫사람과 수직적 의사소통엔 능했지만 동년배 친구나 동료와 수평적 의사소통엔 젬병이었다. 수직적 위계질서에 입각해 대아(大我)를 위해 소아(小我)를 희생해야 한다는 국가주의가 내면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를 구할 영웅으로 자신을 설정한 강력한 자기암시가 ‘한강의 기적’을 낳은 동시에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선의 정치’라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금기가 된 이름

윤이상의 삶은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다.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3세 이후 통영에서 자란 그는 1956년 6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39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후 39년을 프랑스와 독일에서 살다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에서 숨을 거뒀다. 고향 바닷가에 묻히기를 바랐지만 만리타향에서 피곤한 몸을 누인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 오랜 세월 ‘금기가 된 그 무엇’을 상징했다.

그의 생애를 정확히 반으로 쪼개고 ‘방랑하는 영혼’이 되게 만든 사건은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동백림(동베를린)사건이다. 박정희 정부가 1967년 7월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북한에 포섭돼 대남적화활동을 벌였다며 발표한 194명 명단 서두에 독일에서 막 명성을 쌓고 있던 윤이상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집 ‘상처 입은 용’에서 윤이상은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반강제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끌려왔으며 고문을 받은 끝에 ‘나는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자다’라는 자백서를 썼다고 했다. 당시 나이 쉰이던 그에게 죽음의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실제 박정희 정부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대법원에서 10년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독일 정부의 강력한 항의와 구명운동으로 윤이상은 2년 만에 석방됐고 이후 2명의 사형수를 포함해 유죄판결을 받은 34명 전원이 단계적으로 석방됐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윤이상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이후 그는 한국 출신 음악가로선 전례가 없을 정도의 성취를 이룬다. 1972년 뮌헨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잇따라 선정됐다, 1995년에는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에 선정됐다.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

젊은 날 윤이상의 인생 행로는 윤동주·박정희와 묘하게 겹친다. 그는 윤동주처럼 아버지의 반대 속에 음악을 공부했고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또 윤동주가 체포된 1944년, 윤이상은 고향 통영에서 똑같이 불온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일경에 검거된다. 다행히 두 달 만에 풀려났지만 1945년 검거될 위기에 처하자 통영을 탈출해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 광복을 맞아 화를 면했다. 또 박정희처럼 몰락해가는 영남 유림 가문의 후손으로 가부장적 문화에서 자랐으며 생계 유지를 위해 소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다만 박정희가 정치경제적 모델로 일본을 동경했다면 윤동주와 윤이상은 문화예술적 모델로 유럽을 동경했다. 윤동주의 미완의 꿈은 28세에 멈췄지만 윤이상은 불혹의 나이에 유럽행을 택했고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며 세계 음악사에 남을 곡을 작곡한다.

그의 천재성은 그런 유동성을 현대음악과 접목한 점이다. 한국 전통음악 형식과 악기 연주법을 서양음악에 변용하고(‘바라’ ‘무악’ ‘예악’), 불교와 도교 같은 사상을 현대음악의 문법에 녹여내는 방식(‘오 연꽃 속의 진주여’ ‘나비의 미망인’)으로 참신함과 심오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 사냥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이상은 백남준과 함께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를 선취한 선구자다.

하지만 정작 모국에선 그의 음악도 연주되지 못했고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한국에서 ‘친북인사’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실제 윤이상은 자연스럽게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해외 한국인의 구심점이 됐다. 또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1990년 북한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통일음악제’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윤이상으로선 예술가로서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려 한 남한 군부 정권에 대한 반발이자 저항이었다. 하지만 남한의 민주화 이후에도 북한 김일성 정권의 독재에 대해 침묵했다는 점에서 ‘절름발이 저항’이란 냉소적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적 기업가의 원형

앞의 3명만큼 유명하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는 또 다른 길의 모범사례를 보여준 1917년생이 있다. 1917년 음력 8월 11일(양력 9월 26일)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기업가 신용호다.

장남으로 태어난 윤동주와 윤이상이 ‘윤리와 예술’이란 형이상학적 주제에 심취했다면 5남2녀의 막내이던 박정희와 6형제 중 다섯째이던 신용호는 ‘가난과 싸움’이라는 구체적 삶의 문제에 투철했다. 특히 신용호는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나 풍비박산 난 집안에서 가난하게 자란 데다 몸도 건강하지 못해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향학 열기가 남다르던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1000일 동안 쉬지 않고 책을 읽겠다는 ‘천일독서’를 실행하며 철저히 독학으로 지식을 쌓았다.

더 놀라운 점은 책벌레에 머물지 않고 20대 초반에 만주행 열차를 타고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양곡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점이다. 한국이 광복을 맞자 빈손으로 귀국한 그는 민족자본가의 꿈을 안고 맨손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한다. 출판 사업, 직물 사업, 제철 사업에 두루 손댔지만 9년간 실패의 쓴맛만 거듭 맛봤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교육열에 불타는 국민을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사업에 착수한다.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겠다’는 각오로 생명보험의 원리와 단계별 돈이 들어가는 교육학자금을 접목한 교육보험을 세계 최초로 창안해낸 것. 그는 이를 토대로 1958년 대한교육보험(지금의 교보생명)을 창업한다.

그 첫 상품이 매달 담배 한 갑 살 돈만 아끼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소개한 ‘진학보험’이었다. 교육열이라면 세계1위를 다투는 한국에서 이 보험 상품은 날개 돋친 듯 팔리며 30년간 약 300만 학생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줬다. 이를 토대로 교보생명은 1967년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올랐다. 또 1977년 퇴직적립보험, 1980년 암보험 등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며 승승장구한 끝에 1980년 종로1가 1번지에 광화문 네거리의 랜드마크가 된 교보빌딩을 세웠다. 

이 공로로 1983년 보험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보험대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신용호는 기업가로서 이런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또 다른 꿈을 향해 달려갔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독서입국(讀書立國)을 위해 1981년 6월 교보생명빌딩 지하1층에 교보문고의 문을 열었다. 4000만 권의 장서량을 자랑하고 연간 5000만 명이 방문하는 ‘국민책방’이 세워진 것이다. 또한 고향에서 보고 자란 월출산을 염두에 두고 지은 자신의 호 대산(大山)을 딴 대산농촌재단, 대산교육재단, 대산문화재단 3개 공익재단을 통해 자신이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해왔다. 1991년 1월부터 지금까지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광화문 글판’도 신용호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신용호는 힘없고 슬픈 것을 주목한 윤동주의 측은지심, ‘하면 된다’는 박정희의 도전 정신, 한국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을 끌어낸 윤이상의 창의성이 어우러진 인물이다. 누군가는 그런 신용호에 대해 “원 없이 돈 벌고 원 없이 돈 쓴 사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돈벌이가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기업가가 되려는 21세기 젊은이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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