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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의 심心중中일一언言

한국 교회가 망각한 루터의 세 가지 메시지 ‘질문하라, 저항하라, 소통하라’

종교개혁 500주년, ‘루터의 재발견’ 펴낸 최주훈 목사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한국 교회가 망각한 루터의 세 가지 메시지 ‘질문하라, 저항하라, 소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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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월 31일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독일 동북부 작센안할트 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 성채교회 정문에 로마교황청을 공개 비판한 ‘95개조 논제’를 내건 것을 그 기점으로 삼아서다.

유럽에선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특히 본고장인 독일에선 10년 전부터 국가 프로젝트로 이를 기념한다. 10년간 매년 주제를 바꿔가며 포럼과 음악회·전시회를 열었고, 무수한 논문이 발표됐다. 하지만 동아시아 최대 개신교 국가인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10월 28, 29 양일간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22개 교단의 연합예배와 기념대회가 준비 중이지만 열기가 느껴지진 않는다.

왜 그럴까. 최근 출간된 ‘루터의 재발견’을 읽으면서 실마리를 발견했다. 전 세계 개신교 신자는 8억~9억 명으로 추정된다. 그중 신도가 가장 많은 교파는 셋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성공회와 침례교 그리고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교다. 각각 1억 명 안팎의 신도를 자랑한다.

반면 한국 개신교인 860만 명 중 600만 명이 장로교를 믿는다. 장로교는 프랑스 출신의 장 칼뱅을 시조로 삼는다. 전 세계 장로교 신자는 1800만 명으로 전체 개신교 신자의 4%다. 하지만 한국에선 75~80%를 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 교회에선 루터보다 칼뱅을 중시한다. 루터를 기점으로 삼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마냥 반길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다. 그래서 한국에선 “천연기념물 수준”이라는 루터교 목사에게 한국에선 여전히 낯선 루터의 진면목과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루터의 재발견’의 저자이자 서울 중구 후암동에 위치한 중앙루터교회 최주훈(48) 담임목사다. 최 목사는 1년에 딱 4명의 학생만 받는다는 한국루터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 신학과 석사 과정을 거쳐 2001~2006년 독일 레겐스부르크대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0월 11일부터 3주에 걸쳐 방영 중인 CBS 특집 다큐멘터리 ‘다시 쓰는 루터 로드’의 출연진 4명 중 한 명으로 독일 현지답사를 다녀온 루터 전문가다.





루터교가 낯선 이유

‘루터의 재발견’을 읽으면서 루터교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1823년 한국을 찾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독일 출신 루터교 목사 카를 귀츨라프였고 그가 한국에 감자를 처음 전파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선교는 해당국에 들어와 살면서 전도 활동을 하는 것이지만 일시적으로 방문해 전도 활동을 하는 방문선교라는 게 있습니다. 귀츨라프는 중국에 주재하면서 한국을 찾은 최초의 방문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이때 신구약을 중국어로 완역한 최초의 한문 성경을 전하는 한편 한문으로 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게 했고 한글의 존재를 서양에 처음으로 알렸습니다. 또 감자와 그 재배법을 전파했는데 이게 감자 전래에 대한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루터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그 135년 뒤인 1958년입니다. 다른 교단에 비해 상당히 늦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온 4명의 선교사는 ‘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자’는 선교 원칙을 세웠습니다. 교회를 세우기보다 종파를 초월해 하나님의 가르침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릴 자양분을 제공하는 데 주력한 거죠. 기독교 통신강좌, 한국 최초의 헌혈운동, 최초의 성서연구 프로그램 ‘베델성서’를 운영하면서도 루터교 이름을 숨겼고 ‘예수를 믿고 싶으시면 가장 가까운 교회를 가십시오’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 해외 지원이 중단되면서 한국 내 자생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학교도 세우고 1년에 2개씩 교회를 세워간 겁니다. 신학생 수도 매년 필요한 2명의 배수인 4명씩만 받습니다. 루터교에선 교회를 짓는 것도, 목사의 최저생계비와 복지비용, 자녀들 학자금도 총회 예산으로 충당하는데 한국총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래서 현재 교회 수가 49개, 목사 수는 100여 명밖에 안 됩니다.”



‘양심의 종교’

비텐베르크의 루터하우스에 보관된 헌금함의 열쇠가 셋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루터교에선 교회 헌금을 지역사회를 위해서만 쓰도록 못 박고 목사 대표, 평신도 대표 그리고 시의회 대표 셋에게 나눠준 열쇠가 다 모여야 열 수 있게 했다고요.
“그 헌금함은 초기의 것이고 1523년 라이스니히 금고규정 이후 공동모금함 열쇠가 4개, 이를 관리할 사람은 10명으로 늘어납니다. 귀족 대표 2명, 시의원 대표 2명, 일반 시민대표 3명, 농민 대표 3명이 4개의 열쇠를 나눠 관리합니다. 주목할 점은 열쇠가 셋일 때 3분의 2를 차지했던 교회 관계자가 아예 빠졌다는 점입니다. 대신 공동모금함은 교회에 두고 매주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오전 11시경 10명의 대표가 모여 그 돈의 사용처를 결정했습니다. 대상은 재난을 당한 사람, 홀로 된 여인과 고아, 전임 목회자였죠. 그중에는 청년복지기금도 있었는데 지참금이 없어 결혼을 못 하는 청춘남녀 모두에게 대략 밀 서 말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했습니다.”

현재의 루터교회 헌금에서도 이런 원칙이 적용됩니까.
“루터교회의 이런 전통을 ‘디아코니아’(봉사라는 뜻의 라틴어로 개신교회의 자선과 구제 활동을 뜻한다)라고 하는데 이 디아코니아의 시스템이 유럽 복지국가 시스템으로 이어집니다.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같은 복지제도를 잘 갖춘 국가의 최대 종파가 루터교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선 기독교 신자에게 거두는 종교세에서 목사의 일정액 월급을 제외한 돈은 모두 사회복지비로 씁니다. 흥미로운 점은 국가가 이를 집행하는 게 아니라 지역 교회에 나눠주고 구체적 집행을 맡긴다는 점입니다. 500년에 걸쳐 교회가 이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전통이 확립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종교세의 도입 이후 루터교회에선 많아야 1만~2만 원의 소액 헌금을 받아 교회 비품 구입비 정도로만 씁니다.”

교회도 세습하는 한국 사회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네요.
“루터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양심이었습니다. 그 양심에 비춰봤을 때 천국행 티켓으로 판매되는 면죄부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로마교황청과 싸운 겁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 헌금을 유용하고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비텐베르크 성채교회 목사에게 한국의 교회 세습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며 경악을 금치 못하더군요. 현재 한국 기독교가 먹는 욕의 98% 이상이 목사의 문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윤리의식이 없어서 발생한 겁니다. 루터가 그토록 강조한 양심의 문제입니다. 루터가 그토록 저주를 퍼부었던 가톨릭 사제와 그들 목사 간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한국 사회가 아직도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를 깨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좌입니다.”  



왜 1517년인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6하 원칙에 입각해 풀어봤으면 합니다. 제일 먼저 ‘언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종교개혁 기점을 1517년 10월 31일로 보는 이유는 뭔가요.
“루터가 라틴어로 쓴 ‘95개조 논제’를 게재한 사건 때문이죠. 핵심은 역시 면죄부에 대한 비판입니다. 당시 진행 중이던 로마의 바티칸 성당 건축자금과 종교기득권자들의 빚을 갚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이를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종교 기득권자들의 권위가 막강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단독으로 반기를 든 겁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며 돈으로 양심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종교적 구원을 거래할 수 없다는 것이죠. 라틴어로 된 글이라 처음엔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독일 내 면죄부 판매 총책이던 알브레히트 대주교가 그해 12월 로마교황청에게 이를 보고하면서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그리고 3년여 뒤인 1521년 1월 루터를 파문한다는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가 발표되면서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란 의미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으로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이 가져온 ‘지성의 타락’이 ‘교회의 부패’를 낳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중세의 전성기는 스콜라 철학이 꽃피운 13세기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사제 계급은 이를 이끈 최고의 엘리트였죠. 1347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신의 저주’로 불린 전염병이었는데, 모든 시신의 수습을 사제들이 하다 보니 희생이 컸습니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라틴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마구잡이로 사제로 만든 거죠. 교회 안에 사유의 능력이 사라지고, 대신 돈과 권력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겁니다. 그 결과 가톨릭 역사에서 최악의 암흑기로 불리는 ‘르네상스 교황기’(1440~1520) 80년이 시작됩니다. 돈이면 주교도 되고, 교황도 될 수 있는 때였죠. 일례로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10세는 13세 때 주교가 됐습니다. 유럽 최고의 상인 가문인 메디치 가문 출신이어서 돈으로 성직을 산 거죠.”

신대륙의 발견, 인문주의의 발흥,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대륙의 발견은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런 질문에 응답할 능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지요. 교회를 대신해 그 질문에 응답하려고 등장한 게 인문주의입니다.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라는 그 구호 속의 원천은 사실 성서를 뜻합니다. 라틴어 성경 이전 헬라어(고대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응답할 능력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 같은 인문주의자의 한계는 라틴어로 자신들끼리만 소통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사회에서 라틴어 문맹률이 95% 이상이었습니다. 루터는 달랐습니다. 지성인들에겐 라틴어로 신학과 철학을 논하고, 민중에겐 시장통에서 쓰이는 쉬운 독일어로 교회의 부패상에 대해 맹공을 퍼부으며 이런 문제의식을 확산시켜 종교개혁의 물꼬를 트게 한 겁니다.”



왜 비텐베르크인가

다음은 ‘어디서’에 대한 질문입니다. 왜 그 장소가 독일의 변방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였을까요.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많이 떨어진 남서부 소도시던데….
“동서를 도보로 횡단하는 데 15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원래 이곳은 작센공국에서도 무명에 가까운 시골이었습니다. 그러다 15세기 말 작센공국이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같은 대도시 중심의 부유한 서부 지역과 비텐베르크 중심의 미개발 동부 지역 둘로 나뉩니다. 이때 비텐베르크 지역을 물려받는 대신 황제 선출권을 지닌 ‘선제후’의 직함을 택한 게 프리드리히 3세입니다. 야심가였던 그가 깡촌 개발을 위해 처음 한 일이 대학을 세운 거였습니다.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을 세워 유럽의 우수한 인재를 대거 영입했죠. 당시 비텐베르크의 주민 숫자가 2300명이었는데 학생 숫자는 1600명이나 됐습니다. 당시 독일 최고 대학이던 쾰른 대학 학생수(300명)의 다섯 배가 넘었습니다. 루터는 1512년 여기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임용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럽 최대 지식인 그룹의 지지를 등에 업을 수 있었던 거죠. 비텐베르크 성채교회가 바로 이 대학 채플(예배당)이었습니다. 또 이곳에 모인 수재들이 북유럽과 덴마크, 스위스,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면서 종교개혁의 확산을 낳게 된 겁니다.”

종교개혁 성공에는 프리드리히 3세와 이를 계승한 작센선제후들의 보호와 후원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루터를 후원한 진짜 이유는 뭘까요.
“루터를 후원한 작센선제후는 3명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프리드리히 3세(1463~1525)와 동생 요한(1448~1532) 그리고 요한의 아들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1503~1554)입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지원한 이면엔 장삿속이 숨어 있습니다. 그는 2만여 점의 성물을 수집했는데 가톨릭 축일마다 이를 전시하면서 돈을 챙겼습니다. 그런데 로마교황청에서 면죄부 직판에 나서는 바람에 장사가 안 되자 면죄부를 맹비판한 루터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겁니다. 그래서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의회)에서 루터에게 최후의 항변 기회도 마련해주고 루터가 교황청에서 파문당하고 신성로마제국에서 추방령을 받자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城)에 숨겨주고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돕습니다. 처음엔 이런 정치경제적 이유로 지원했지만 점차 루터에게 감화돼 진심으로 그를 보호하고 지원하게 됐고 동생과 조카 때 이르면 루터의 생각과 제도를 정말로 좋아해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됩니다.” 


독일 표준어의 탄생

언어학적이나 지정학적으로도 비텐베르크가 요지였다고요.
“당시만 하더라도 독일어의 표준어가 확립되지 않은 시절이라 남부와 북부 사람이 만나도 대화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비텐베르크는 그 남북의 방언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중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11주 만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할 수 있었던 저력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많은 분이 루터의 독일어 번역이 최초의 독일어 성서로 잘못 알고 계신데 루터의 번역 이전에 이미 12종의 독일어 성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성서의 독일어가 워낙 조야해 외면받은 반면 루터의 독일어 번역이 워낙 탁월해 히트를 치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1522년 발표한 독일어 신약성서(9월 성서)와 1534년 완역한 신구약성서에 쓰인 독일어가 표준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당시엔 라틴어 외에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게 ‘죽을죄’였다면서요.
“화형에 처해지는 중죄였습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년 잉글랜드에서 한 부모가 자기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주기도문을 영어로 번역했다가 전 가족 7명이 광장에서 화형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죠. 하지만 1516년 출간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서’를 통해 당시 신성불가침의 정전으로 꼽히던 라틴어 역 ‘불가타 성서’의 오류가 드러납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서가 로마교회가 독점해온 성서 해석의 권한에 금이 가게 했다면 루터의 독일어 성서는 그 둑을 무너뜨리는 효과를 낳게 돼 유럽 전역에서 자국어 성서 번역 바람을 몰고 옵니다.”



루터는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누가’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볼까요. 바로 루터 자신에 대한 질문입니다. ‘루터의 재발견’에선 그를 질문하고, 저항하고 소통을 꿈꾼 인물로 포착했습니다.
“루터는 한마디로 ‘사람 냄새 나는 인물’입니다. 화를 내야 할 때 불같이 화낼 줄 알고, 웃어야 할 때 동료들과 시끄럽게 먹고 마시며 웃을 줄 알고, 가족과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고, 때로는 아내 흉보다가 걸려서 꼬리 내리는 동네 아저씨 같은 인물이죠. 그렇지만 루터는 무엇보다 ‘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에 대한 최종 심문이 이뤄질 때 심문관이 루터의 저술을 쫙 펼쳐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적힌 모든 주장을 철회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에 대한 루터의 변론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불안하거니와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거니와 내 어떤 주장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러곤 탁 돌아서서 나가요. 루터가 어떤 인물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에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천국에 가기 위해 공덕을 쌓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양심의 삶’, 우리가 보통 말하는 ‘기독교적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실제로 루터는 그런 양심에 비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질문을 던지고, 잘못된 권위에 저항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염원한 ‘프로테스탄트 제1호’였습니다.”    

루터 이름은 원래 루더(Luder)였는데 그 의미가 ‘유혹하는 사냥꾼’이란 뜻을 함축하고 있어 헬라어로 자유를 뜻하는 ‘엘류테로스’에서 앞뒤 철자를 빼고 가운데 류테로와 발음이 비슷한 루터(Luther)를 성으로 삼았다고요. 그 이유가 1512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체험한 ‘복음의 자유’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자유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중세 사회는 계급화된 종교 사회였죠. 가장 아래엔 생산자 그룹으로 불리는 평민과 농민, 그 위는 수호자 그룹으로 영주와 기사, 최상위엔 사제와 수도사 그룹으로 각각 나뉘었습니다. 이 계급 구분은 태생적인 것이지만, 이론적으론 누구든지 사제 그룹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있었지요. 그것이 수도사가 되는 길이었는데, 대가가 필요했습니다. 세속의 모든 쾌락과 관계를 끊고 금욕적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대신 사후세계의 안락을 보장받는 것이죠. 이것이 루터가 수도원으로 들어가며 희망한 ‘종교적 자유’입니다. 지금 당장 죽으면 지옥 갈 것 같다는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수도사가 된 것이지요.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불안감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후에 루터는 참된 자유는 속세를 떠난 수도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사는 세상 한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천국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음을 깨달은 거죠. 그래서 1520년대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을 유심히 살펴보면 교회가 세상에서 게토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교회는 언제나 지역사회와 함께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두 얼굴의 루터

루터는 혁명가와 보수주의자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 ‘두 얼굴의 사나이’로 유명합니다. 수도사 시절엔 하루에도 수십 번 고해성사를 할 만큼 죄의식에 대한 강박관념이 강했고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1543)이란 글에서 반유대주의를 선동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525년 개신교 혁명을 지지한 독일 제후들의 착취에 맞선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이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을 지지했습니다.
“‘두 얼굴의 루터’라는 표현이 아주 인상적이네요(웃음). 맞습니다. 그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미신적 세계관, 농민전쟁에서 보인 태도, 반유대주의적 관점, 여성 비하적인 태도에서 시대적 한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역사적 인물이건 단면적 평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단면적 평가는 대부분 시대의 간격을 고려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 같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오해하고 왜곡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지점입니다. 루터 역시 철저히 자기 시대라는 한계에 갇혀 있던 사람입니다. 이를 간과하면 영웅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역사의 인물을 평가할 땐, 당시 문화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현시대에 그가 남긴 가치 있는 유산이 무엇인지 창조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저에게 루터는 보수주의자일 수도 있고 혁명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할 줄 아는 힘과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95개조 논제의 핵심 내용

다음은 ‘무엇을’에 해당하는 질문입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채교회 정문에 내건 ‘95개조 논제’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죠?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1조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명하셨을 때 그 회개는 우리의 전 삶이 돌아서야 함을 명한 것입니다.’ 지금 읽어보면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당시로서는 ‘로마교회에 1100년 동안 속아왔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1조는 신약 마태복음 4장 17절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구절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에로니무스(영어명 제롬)가 5세기경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성경엔 ‘죗값을 치러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돼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에선 이 번역문을 토대로 고해성사라는 성례전을 만들면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기 위해선 반드시 죗값을 치르는 ‘보속’을 거치게 했습니다. 이 보속이 중세에 들어 돈으로 치르는 것으로 바뀌었고 면죄부로 발전한 것입니다. 95개조 논제의 첫 조항이 바로 이 오역 문제를 지적하며 그 구절의 원래 의미를 되살려낸 것입니다.”

그럼 나머지 94개조를 추릴 수 있는 메시지 두 가지는 무엇인가요.
“하나는 ‘독일 교회는 독일인의 교회다. 그러니 독일 교회 헌금을 로마의 사적 소유 재산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독일에서 면죄부 판매로 거둔 돈을 로마 바티칸 성당 건축 자금으로 썼는데 독일인의 헌금은 독일에 사는 사람들의 가난을 해결하고 복지를 위해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교황이나 그 어떤 사람도 사후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신 앞에 평등하다’는 겁니다. 면죄부를 통해 지옥 갈 사람을 천국에 보낼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죠. 이는 훗날 모든 사람은 평등한 권리와 가치를 지닌다는 ‘만인사제직’과 ‘직업소명론’으로 발전합니다. 이 사상이 아이들과 여자들도 교육받을 수 있는 보편 교육과 근대적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고, 유럽 복지국가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만인사제의 정신

한국 교회에선 루터의 종교개혁을 주로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 같은 신학용어로 설명하는데 피부에 잘 안 와닿습니다. 목사님은 이보단 오히려 ‘만인사제의 정신’을 강조하셨는데 명쾌하게 이해되더군요.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핵심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됐다. 신의 형상은 가치 있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인간 개개인은 가치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입니다. 그러니 사람 위에 사람이 올라설 수 없는 겁니다. 이걸 신학에선 ‘만인사제직’ 또는 ‘만인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확장된 것이 성직자뿐 아니라 모든 세속 직업은 거룩하다는 ‘직업소명론’입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정의, 평등, 생명의 가치죠.”

한국 교회에선 루터의 종교개혁을 ‘만인사제직’에 입각해 설명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만인사제직은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대한 권위’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고 평신도와 차별성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에선 그런 내용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죠.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게 된 겁니다.”

루터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도 하던데 조금 어렵더군요.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입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루터는 ‘내 손 안에 잡혀 있는 신이라면 그는 더는 신이 아니다’라는 말로 이를 부정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이를 회피하지 말고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많은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영광의 신학’ 내지 ‘성공의 신학’은  ‘내가 열렬히 원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자기중심적 성공지상주의입니다. 미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이 대표적이죠. 십자가의 신학은 그 대척점에 서서 하나님 자리에 내 욕망과 탐심을 올려놓는 것이 교만이고 죄라고 말합니다.” 


16세기의 스티브 잡스

‘어떻게’의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엄청나게 열정적으로 집필과 연설활동을 펼쳐 그 저술을 집대성한 게 8만 페이지에 달한다는데 불교의 팔만대장경이 떠오르더군요. 또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신들린 듯 활용했습니다. 목사님이 ‘소통의 귀재’로 그린 루터가 제 눈에는 ‘16세기의 스티브 잡스’로 비치더군요.
“기막힌 비유입니다(웃음). 하지만 16세기라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루터가 잡스보다 더한 천재가 아닐까 합니다. 루터는 우선 천부적 음악가였습니다. 미성의 테너이자 작사·작곡에도 능했죠. 노래를 못 부르는 목사에겐 노래부터 다시 배워오라고 할 만큼 음악을 중시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찬송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것도 루터 덕입니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노래는 사제만 부를 수 있었고 회중은 입도 뻥긋하면 안 됐는데 루터가 노래 부를 권한을 회중에게도 준 겁니다. 루터는 또 그림의 중요성을 간파해 그가 내는 책마다 풍부한 삽화를 집어넣었는데 대부분을 당대 독일 3대 화가였던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렸습니다. 루터의 독일어 신구약성서(1534)의 각 챕터에 채색삽화를 넣어 글자를 전혀 모르는 무지렁이가 보아도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123면이나 되는 그 채색삽화가 모두 크라나흐 작품입니다. 루터는 또 당시 막 등장한 출판인쇄업의 힘을 십분 이용해 독일어 성경뿐 아니라 엄청난 설교집도 인쇄해 독일 전역에 배포합니다. 또 ‘지라시로 성공한 세계 최초의 인물’이라 할 만큼 개신교 사상을 전단 형태의 글과 그림으로 널리 배포합니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아디아포라(adiapora)의 신학’으로 부르는데 엄숙한 칼뱅의 신학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요.
“아디아포라라는 헬라어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신앙에 도움이 되면 뭐든지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뭐든지 버릴 수 있다, 그 외에는 개인의 자유라는 뜻입니다. 루터는 음악, 미술, 출판 같은 모든 미디어의 사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반면 츠빙글리나 칼뱅은 이를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구시대적이고 중세교회적이라는 이유였지요. 츠빙글리가 극단적으로 거부했다면 칼뱅은 단선율의 시편송 정도만 허용하는 식으로 극히 일부만 허용했습니다. 유럽 개혁파 교회를 가보면 스테인드글라스나 성화는 물론 파이프오르간도 없습니다. 십자가도 없이 설교단만이 높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난 것은 한국 장로교회에 가면 칼뱅이 금한 그 모든 게 호화롭게 펼쳐집니다. 칼뱅이 이를 봤으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 겁니다(웃음).”

마지막은 ‘왜’입니다. 500년 전 종교개혁이 왜 지금도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한국 교회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어요. 기독교는 태동부터 언제나 세상 속에서 소금 역할을 하는 약자들 편이었고, 종교개혁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부패한 권위에 질문하고 저항한 것이죠. 혼자 개기는 게 아니라 함께 손을 잡고 소통하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겁니다. 그게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에선 이런 의미를 전혀 건져내지 못하고 있어요. 500년 전 개혁 대상이 부패한 로마 가톨릭이었다면 이제는 개신교 자체가 개혁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합니다. 그러면서 중세교회보다 더 중세교회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외부와 담을 쌓고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더욱 배타적으로 변해갑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교회는 반사회적 단체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꼴이지요. 개신교라는 자기정체성을 다시 되돌아봐야 합니다. 성서 말씀을 간명히 요약할 수 있는 ‘경천애인’의 정신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구습과 권위의 남용에 질문하고 저항하면서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기독교와 한국 사회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것은 본디 한 개인의 성향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을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사용하면 명기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흉기가 됩니다.”  
심중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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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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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망각한 루터의 세 가지 메시지 ‘질문하라, 저항하라, 소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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