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한국 여성 정치인은 왜 하이힐을 신지 않을까

패션 탐닉 여기자의 눈으로 본 여의도 풍경

  • 김민경 기자│holden@donga.com

    입력2012-02-22 0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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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인의 패션에 관한 한 지금은 퇴행과 위선의 시대다.
    • 지난 몇 년 동안 디자인, 패션, 아름다움이 사치, 부도덕, 부자들을 위한 장식이란 개념으로 오염되면서, 정치인이란 검은 정장이나 헐렁한 점퍼를 입어야 하는 존재인 듯 여겨지고 있다.
    •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이 여야 양당 대표를 맡았지만, ‘그녀들’의 패션 역시 ‘점잖게 촌스러울’뿐이다.
    • 도덕적으로 결백함을 보여주기 위해 결벽적으로 옷을 못 입고, 아마추어적인 촌티 이미지를 연출해 권력에 욕심 없음을 드러내 보이려 하는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 여성성은 ‘저주받은 운명’이 아니고, 대중의 의식은 정치인의 편견보다 훨씬 유연하다. 그러니 제발 거울 앞에서 ‘쫄지’ 마세요.
    한국 여성 정치인은 왜 하이힐을 신지 않을까

    옷은 말과 행동처럼 인간을 이루는 총합 중 한 부분이다. 왼쪽부터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인 카를라 브루니 여사,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 나경원 전 의원,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전현희 의원,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드디어 ‘그녀들’이 만났다. 지난 1월 당대표로 선출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상견례를 한 것이다.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이 여야 모두의 당대표를 맡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으니, 우리 정치사에서 이만큼 신선한 작품도 별로 없었다. 그녀들의 말 한마디, 시선과 미소가 엇갈리는 한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 플래시들이 그야말로 천 개의 형광등처럼 빛났다.

    내가 이 ‘정치적 레드카펫’에서 궁금한 건 하나였다. 이 순간을 위해 그녀들은 어떤 옷을 선택했을까. 이혼을 결심하고 하이힐을 꺼내 신은 다이애나 비처럼 특별히 성장하고 또각또각 걸어가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면, 얼마나 볼만할까(다이애나 비는 남편이자 대영제국의 황태자인 찰스보다 키가 커 보일까봐 파경 전까지는 단화를 신었다).

    한 대표는 박정희 정권에서 고문을 당하는 등 혹독하게 탄압을 받았다. 그것이 한 대표의 정치적 이력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아버지 박정희를 연상시키는 정적, 아니 박정희의 화신인 박 위원장에게 정치적 선전포고를 한대도 이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 두 여성은 약속이라도 한 듯 브라운 컬러의 슬랙스 정장을 입었다. 브라운 컬러는 압존법(壓尊法)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묻는 색이다. 만약 한 사람은 브라운 컬러를 입고, 다른 한 사람은 블랙이나 레드를 입었다면 어쩔 수 없이 주연과 조연이 결정돼 꽤 도발적인 분위기가 연출됐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의 패션저널리스트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로빈 기번은 “여성 정치인이 입은 옷은 정치적 성명 발표와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믿자면, 이날 박 위원장과 한 대표는 옷을 통해 상호 존중의 뜻과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표한 셈이다.

    두 사람 모두 바지 정장을 선택했다. 언론에서 박 위원장의 ‘전투복’이라고 부르는 차림이다. 지금은 여야 모두에 전투 상황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여전히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안팎의 적들과 유권자들 앞에 서야 한다.



    재킷 안에 입은 이너웨어의 컬러가 시선을 끌었다. 한 대표는 흰색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가 입었고, 박 위원장은 빨간색을 입었다. 박 위원장이 신중하게 고른 ‘파워 드레싱’이었을 것이다. 옷의 의미와 수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 위원장이 선택한 색이다. 새누리당의 상징색이 결정되기 전부터 박 위원장은 결단이 요구될 때 빨간색 옷을 입곤 했다. 절대 그냥 예쁘니까 고른 색이 아니다.

    무조건 단정하게, 한명숙

    이날의 공교로운 일치를 제외한다면, 패션에서 박 위원장과 한 대표는 한 점에서 교차하고 멀어지는 두 개의 직선과 같은 사람들이다. 옷을 입는 방식, 스타일에 대한 생각, 심지어 옷의 가짓수까지 어느 한 점에서도 두 여성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이 살아온 삶처럼.

    박 위원장의 ‘빨간’색에는 소신에 대한 열정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도 되지만, 한 대표의 스타일에서 뭔가 읽어내면 오해가 될 수 있다. 이날 한 대표의 재킷 소매엔 일명 ‘호피’ 무늬라고 불리는 얼룩덜룩한 프린트 장식이 있었다. ‘호피’ 무늬는 과하게 여성적이어서 대부분 남성은 싫어한다. 어떤 남성들은 속된 말로‘미친다’고 하는 비일상적인 소재다. 그런데 한 대표는 이 재킷을 즐겨 입는다. 그저 점잖은 갈색 정장으로 입는 것이다. 한 대표의 수많은 사진을 통해 옷장을 정리해보면, 감색과 감색 줄무늬 정장, 밝은 파란색의 재킷, 베이지색 재킷, 보르도 컬러 빌로드 재킷, 검은색 코트 2벌과 점퍼 2벌(열린우리당의 노란색, 민주당의 녹색) 정도다. 한 대표는 매일 아침 옷장을 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은 공식 행사가 있구나…. 제일 가까이 걸린 정장을 입어야지.”

    한 대표와 이화여대 동문인 패션디자이너 안윤정 씨는 “한 대표가 장관 시절, 동창회에서 만났는데 옷이 ‘좀 신경이 쓰여’라고 해서 -패션 관계자들은 우리나라 여성 정치인들의 옷에 불만이 많다- 물어보니 시장에서 10만 원대 정장을 사 입는다고 하더라. 내가 ‘외교 사절인 장관이 그러면 한국 패션산업이 발전하지 못한다, 균일가 판매하는 옷이 있다’고 하니 (뒤에) 비서가 왔다. 그때 사간 옷을 얼마나 많이 입었는지, 나중에 보니 가슴 부분이 옷핀 자국으로 해져 있었다. 그래서 거기 주머니를 달아주었다”고 말한다.

    싸고 튀지 않는 옷을 단정하게 입는 것, 그것이 한 대표의 스타일이다. 아쉽지만 흥미진진한 패셔니스타는 아니다.

    반대로 박 위원장은 한 가지 스타일을 지키면서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패션을 선보여왔다. 많은 패션전문가는 박 위원장이 정확한 TPO(시간과 장소, 상황에 따라 적절한 차림을 하는 것)를 갖고 있고, 스타일에 대한 철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대 여성 정치인 중 베스트드레서라고 말한다.

    기묘한 베스트드레서, 박근혜

    한국 여성 정치인은 왜 하이힐을 신지 않을까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스타일에 대한 철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대 여성 정치인 중 베스트드레서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30년 전 라도 시계를 차고 다니는 데서 알 수 있듯 과거의 스타일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클린 케네디의 원피스와 진주목걸이, 커다란 선글라스가 ‘재키룩’이라면 ‘박근혜룩’은 깃을 세운 원브레스티드(한 줄로 단추를 잠그게 디자인) 재킷에 볼륨감 있는 액세서리와 실용적인 토트백이라고 할 수 있다. 목선에 걸린 목걸이는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차단하며 토트백은 공적·사적인 일을 참모진에게 맡기기보다 직접 결정하는 타입이라고 말해준다. 칼라를 세운 V라인의 재킷은 권위적이면서 한복의 V자 앞섶 라인과 일치하는데, 두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의 아이콘이자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스타일과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인다.

    박 위원장은 지난해 5월 유럽을 특사 방문할 때 국내에서 보여주지 않던 화려한 스타일로 화제를 모았다. 방문국의 상징색, 면담 대상자와 장소에 맞춰 하루에 서너 번씩 옷과 구두를 바꿨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한국 언론은 분석에 열을 올렸고 이 같은 보도에 인상을 찌푸린 사람도 많았다. 왜 ‘옷 따위’에 관심을 갖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옷은 말과 행동처럼, 그 인간을 이루는 총합 중 한 부분이다. 게다가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영국의 다이애나 비나 프랑스의 브루니 여사, 미국의 미셸 오바마 여사 등이 자국 디자이너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듯 박 위원장도 ‘패션 한류’를 알리는 역할을 해주었으면 했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30년 전이었다면. 박 위원장은 퍼스트레이디다운 태도와 외교상 TPO를 정확히 교육받은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하루에 옷을 서너 번 갈아입은 것, 옷이 바뀔 때 구두와 백과 액세서리를 바꾼 것, 당연하다. 추모를 위해 군인묘지를 방문할 때와 여왕을 알현할 때 똑같은 차림을 하는 것은 결례 아닌가. 폴란드 아우슈비츠 해방 기념식 날 검은색으로 성장한 유럽 정상들 사이에 스키파카와 털모자, 등산용 부츠를 신고 혼자 ‘등 따스운’ 표정으로 서 있던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이 ‘무식하고 오만하다’는 평을 들어도 싸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한국의 여성정치인대부분은 거무칙칙한 정장 슈트로 때웠겠지만, 박 위원장은 스스로 ‘내추럴 본’ 국가대표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계는 30년 전 국빈을 만나던 은성한 연회장에서 멈춘 듯했다. 20세기 말 ‘벨 에포크’와 반 세기 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뉴룩을 연상시킨 박 위원장의 특사 패션은 최근 미국의 미셸 오바마 여사나 콘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 독일의 메르켈 총리 등과 비교했을 때 전혀 ‘동시대적’이란 느낌을 주지 않는다. 클래식이라고 부르기엔 과거의 디테일들이 두드러진다. 박 위원장은 실제로 30년 된, 이미 업체에서도 생산을 하지 않는 오래된 ‘라도 시계’를 차고 다닌다. 이미지 메이킹을 공부한 한 패션 전문가는 “진부한 옛날 스타일이다. 그런데 왜 기묘하게 (박 위원장과)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 정치부 기자는 “박 위원장이 유럽 특사 패션이 국내에서 크게 기사화되고, 비판적인 칼럼 등이 나오는 데 대해 매우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그 후 한동안 같은 옷을 몇 번씩 입고 나오기도 했다”며 “이는 전에 없던 일”이라고 전했다.

    박 위원장은 결벽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데, 옷은 너무 많은 걸 이야기한다. 박 위원장이 정치적 소신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비판과 논란으로 단련되면서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다면, 그녀의 우아한 스타일도 동시대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혹은 그 역도 가능하다. 그런 예가 미셸 오바마 여사다. 그녀는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스타일을 바꾸면서 스스로의 역할 변화와 자존감을 표현해왔고, 영부인이 된 후에는 미국 디자이너들, 그중에서도 제이슨 우, 타이쿤처럼 다문화(아시아계) 배경을 가진 신진들의 드레스와 제이크루 같은 중저가 미국브랜드를 입고 나와 세계에 그것을 홍보했다. 그것에 대해 예쁘다 아니다라거나, 특정 브랜드의 ‘옷 로비설’을 이야기하는 이는 없다. 모델의 비쩍 마른 몸매와 비교하기 좋아하는 우리 눈에 미셸은 이상적인 체형이 아닌데도, 미국 언론은 미셸이 ‘아메리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며 찬사를 보낸다(Kate Betts,‘Everyday Icon: Michelle Obama · the Power of Style’ ).

    퇴행과 위선의 시대

    4년 전 ‘여성의 지위변화로 본 한국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변화’를 발표한 최현숙 동덕여대 디자인학장은 5선 의원이던 박순천(1898~1983) 여사와 대선에도 나섰던 김옥선 전 의원이 각각 한복과 남성양복을 입음으로써 여성성을 극도로 배제했던 과거에 비하면, 박 위원장 등장 이후 여성 정치인들은 최근 분위기가 퇴행하기 전까지 부드러움, 아름다움 같은 여성적 특징으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고 세상이 진보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여성적 패션 이미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강화한 최근의 여성 정치인은 강금실 전 법무장관일 것이다. 2006년 서울시장선거 출마 전까지 그녀는 지적이고 자신감 있는 ‘파워 우먼’ 스타일로 보였다. 마치 중년의 뉴요커 같았달까. 그러나 유명세와 함께 보라와 핑크가 자주 등장하고 ‘오버’횟수가 많아지더니, 급기야 시장선거 과정에선 보라색 정장에 보라색 구두를 신고, 보라색 파시미나를 휘날리면서 나타나곤 했다. 참신한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는 증발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판타지만 남았다. 길에서 보라색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중년의 여인을 만났다고 상상해보자. 참 난감하다.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다. 개성 있고 능력도 있는 정치인들이 나왔고, 국회의원들이 패션 화보를 촬영하고 국내 디자이너들과 친분을 자랑하기도 했다. 국회에 ‘백바지’를 입고 들어오기도 했다. 거칠기는 해도 스타일로 자신을 알리려는 정치인들로 시끌벅적했다.

    한국 여성 정치인은 왜 하이힐을 신지 않을까

    2011년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셸 여사가 한인 디자이너 정두리 씨가 디자인한 한쪽 어깨 끈이 없는 드레스를 입고 이명박 대통령 내외를 기다리고 있다.

    정치인의 패션스타일로 보자면, 지금은 퇴행과 위선의 시대다. 현 정국의 드레스코드는 ‘카무플라주(은폐와 위장)’다. 남성 정치인들은 검은색 정장과 헐렁한 바람막이를 유니폼 삼아 입고, 여성 정치인들은 촌스럽게 옷을 입는다. 민생 현장을 살피는 정치인이 입은 퍼런색 공무원 바람막이 아래로 길고 두툼한 다운 패딩이 비죽 나온 모습은 ‘워스트 드레서’란 말로도 부족하다. 제대로 위장하지 못할 바엔 명품 패딩을 입고 나오는 게 낫다. 이런 현상은 ‘부자 정권’에 대한 국민의 혐오에 대응하는 정치인 나름의 보호방식일 것이다. ‘부자 정권’이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여권 여성 정치인들은 블랙·화이트 또는 블랙·블루 일색이다.

    베스트드레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나경원, 정옥임, 조윤선 (전현직) 의원도 최근엔 무채색 유니폼 의상 일색이다. 특히 나경원 전 의원은 서울시장선거 캠페인 기간에 검은색 정장과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었다는 헐렁한 점퍼에 납작한 일명 간호사 신발을 신어 베스트드레서에서 ‘패션 테러리스트’로 변신했다. 피부과 진료비가 정책 공약보다 표심에 더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몸뻬’에 고무신을 신었다고 해서, 개인사적 배경과 당적이 바뀌진 않는다. 차라리 그녀가 가진 좋은 취향으로 우아하고 개성 있는 ‘여성 시장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다양한 계층을 배려하는 여유를 보였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위선적이라는 말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피부과 사건’이 여권에 치명상을 입히자, 정권에 비판적인 여성 작가 공지영의 백이 ‘샤넬’이냐 ‘샤넬풍’이냐를 놓고 전선이 형성되기도 했다. 한 치의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그 전투에 대통령 손녀딸의 ‘몽클레르’ 패딩이 끌려오기도 했다.

    ‘강부자 정권’ ‘고소영 내각’을 공격하는 야권 여성 정치인의 스타일은 ‘여성성의 배제’와 ‘공주 스타일’의 혼란스러운 믹스매치라고 하겠다. 때로는 옷을 입은 의도가 너무 명백해서 사람과 옷이 겉도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주요 행사날 야권 여성 정치인의 전형적인 스타일은 귀여운 레이스나 러플 블라우스에 검은 정장 재킷을 매치하거나 단순한 이너웨어에 노랑, 빨강, 분홍 등 원색 재킷을 매치하는 것이다. 여성이 아니라 야성 강한 국회의원으로 보이겠다는 목적과 여성성으로서 얻을 수 있는 대중적 지지도 잡겠다는 욕심이 빚어낸 패션이다.

    공주풍 투사의 역설

    최근 두 차례의 경선을 거치며 대중 정치인으로서 인지도가 크게 높아진 박영선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서울시장 후보 경선일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하늘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롱재킷을 입었고, 당대표 경선일엔 흰색 레이스 블라우스에 빨간색 롱재킷을 입었다. 도대체 그녀는 왜 정부 여당에 대한 강력한 투쟁의 변을 외치면서 공주풍 블라우스를 입었을까(추미애 의원 역시 꽃분홍색 재킷을 입고 열변을 토했다. 그 역시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제1야당의 대표직을 놓고 지지를 호소하는 자리에 어린이 같은 빨간 재킷에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고 나온 이유는 뭘까. 그녀는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던 다음 날 첫 회의석상에도 같은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다. 앵커우먼 시절 박 최고위원의 시크한 스타일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스타일리스트가 안티로 여겨질 정도였다.

    몇몇 패션 전문가는 이 ‘사건’에 대해 ‘요즘 여성 정치인의 스타일이 경직된 정치 사회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면서 “패션 이야기하면 욕먹기 딱 좋다”고 자조했다. 한 패션디자인 전공 교수는 “개성과 스타일 있는 정치인이 각광받는 시대라고 말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공격받기도 하니까 정치인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고 아쉬워했다. 국민이 등 돌린 ‘부자 정권’의 일원으로 비칠까봐, 혹은 ‘부자 정권’ 공격에 소홀한 것으로 보일까봐 최대한 촌스럽고 ‘없어 보이게’ 스타일링을 하는 것이다. 한 진보 진영 여성정치인의 의뢰를 받아 스타일링을 맡았던 H 씨는 “운동권과 아마추어적인 이미지가 강해 세련되고 당당한 전문직 여성으로 콘셉트를 바꿔 홍보물 사진까지 촬영했다. 여성 정치인 당사자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사진을 본 당직자, 보좌진의 반대가 극심했다. 순박, 투박해야 한다는 거였다. 결국 그 사진은 폐기했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정치인이 한두 번은 이미지메이킹 전문가의 조언을 받는다. 하지만 이미지 연구가 제대로 된 적 없다 보니 조언 자체가 도식적이다. 초등학교 미술 수업 수준이다. 빨간색은 정열·젊음이고, 파란색은 이성과 차가움이니, 젊고 강해보이려면 빨강 넥타이를 매라고 가르치는 식이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게 꿈이었는데 젊은 의원도 너무 보수적이라 절망적인 경험을 한 셈이다.”

    박 최고위원은 여성성을 배제하고 검소함을 강조하는 정장 재킷 디자인을 선택하되 부드러운 여성 정치인으로서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꼬불꼬불 레이스와 빨간색을 골랐을 것이다. 한 디자이너는 내게 “박 최고위원이 우리 매장에 온 적이 있는데, ‘점잖게 촌스러운 옷’을 고른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귀띔해주었다. 우리나라 여성 정치인에게는 ‘점잖게 촌스러운 스타일’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옷 입기로 보인다고 했다.

    여성 정치인, ‘쫄지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없이 ‘정치공학적’으로 맞춰 입은 옷은 종종 재난이 되곤 한다. 미국의 대선후보였던 사라 페일린은 지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늘 무채색 단정한 정장에 올려붙인 머리를 하고 모범생 안경을 쓰고 나왔지만, 미국 내에서는 ‘에로 여배우 스타일’-에로 여배우가 변신 코스프레한 것 같다는 의미-이라는 혹평을 들으며 ‘솔직하지 못한 아마추어 정치지망생’이라는 인상만 남겼다. 이에 비해 미셸 오바마는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화려한 드레스, 꽃무늬 원피스, 정장 등 연일 ‘화려한’ 패션을 선보였지만, ‘고급스러운 패션 테이스트를 가진 미국 엘리트 여성 스타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스타일이란 단지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 정치인이 스타일에 대해 평가받는 것이 남성과 비교해 불편하고 부당하다고 여긴다면 김옥선 전 의원처럼 극단적인 방법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여성 정치인이 여성적인 정서와 언어를 통해서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에서 여성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설득하려 하고, 대중도 그런 여성 정치인에게 참신한 대안을 기대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여성 정치인의 스타일은 남성 중심 현실 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방어를 위한 ‘정치적 성명’처럼 보인다. 지난 몇 년 동안 디자인, 패션, 아름다움이 사치, 부도덕, 부자들을 위한 장식이란 개념으로 오염된 탓도 있다. 여성 정치인이 꽤 비싼 국내 디자이너 옷을 입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디자이너 옷을 우리 여성 국회의원이 입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입어줄까. 해외의 럭셔리 브랜드 옷을 휘감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가격 놓고 비난하는 건 치사하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양장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채 해외브랜드와의 경쟁에서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유통망이 없어 일부러 찾아가주는 손님들이 없다면 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 여성 정치인들이 국내 디자이너가 만든 좋은 옷을 입는 건 당연하다. 뇌물로 받은 법인카드로 해외 쇼핑하는 남성 정치인들과는 의도도 결과도 다르다. 여성 정치인들이 온갖 정치적 공격과 탄압과 악성루머에는 꿋꿋하면서 자신의 아름다운 스타일을 보여주는 일에서는 ‘쫄고’ 방어적이 되는 건 안타깝다.

    ‘도덕적으로 결백함’을 보여주기 위해 결벽적으로 옷을 못 입고, 아마추어적인 촌티 이미지를 연출해서 권력에 욕심 없음을 흔들어 보이려 한다. 드세다는 말을 들을까봐 빅토리아 시대 여왕처럼 너풀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고 나서, 무엇보다도 여성성으로 어필한다는 비난을 듣는 것이 제일 두렵기 때문에 남자 양복 같은 재킷을 걸치거나 아이처럼 유치한 차림으로 유세를 다니기도 한다. 여성성이 아닌 정치적 역량으로만 평가받기를 원한다면 차라리 김옥선식 스타일이 촌스러운 차림보다 낫다. 정치적 역량에 관심이 모아지기보다는 ‘남자 옷을 입는 이상한 여성의원’으로 보이겠지만.

    여성성이란, ‘저주받은 운명’이 아니고 대중의 의식은 정치인들의 편견보다 훨씬 유연하다. 헌정 사상 최초로 양당 대표가 여성이다. 남성 중심의 정치 지형이 변화하길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정치 분위기가 달라지면 여성 정치인들의 스타일도 바뀔 것이다. 또는 그녀들의 달라진 스타일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니 그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부디 거울 앞에서, 하이힐 위에서, 쫄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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