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인권위의 국제적 리더십 모색과 좌절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④

  •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ahnkw@snu.ac.kr

    입력2012-02-22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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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내 인권 문제를 대하는 인권위의 자세
    • 국군포로, 납북피해자, 이산가족, 새터민 인권 보호
    •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의 인권위
    • 인권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서
    2006년12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북한 인권에 관한 종합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기자회견 형식이었다. 전원위원회 의결을 거친 의견서 전문을 위원장이 읽고 질문에 답했다. 1년 전인 2005년 12월, 전원위원회 의결로 북한인권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상임위원을 포함한 5명의 인권위원이 참여했다. 북한인권특위는 무려 21차에 걸친 회의를 거듭하며 격론을 벌였다. 각종 단체의 증언과 의견, 전문가의 의견도 청취했다. 외국 기관의 보고서도 충실히 검토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5장의 의견서 초안을 작성했다. 그 초안을 전원위원회 심의와 의결을 거쳐 확정했다.

    나는 내심 완곡하게나마 초안보다 약간 ‘전향적인’ 문구를 넣고 싶었다. 위원장으로서의 정무적인 판단이었다. 외교적인 표현을 써서라도 뻔히 예상되는 보수언론의 공세를 다소마나 둔화시킬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싶었다. 어차피 문구에 따라 활동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을 터이니. 그러나 새로 부임한 위원장이 개입할 틈이 전혀 없었다. 초안 작성에 관여한 동료들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했다. 자칫 잘못하면 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마저 흔들릴지 모를 상황이었다. 잠자코 초안을 전원위원회 토론에 부쳤다. 위원 두 사람이 약간의 이견을 제기하다 이내 물러났다. 원안대로 통과됐다. 중견 언론인 출신의 한 상임위원은 내가 부임하기 전에는 소외감이 컸다고 고백했다. 나도 그분에 대한 뒷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부 위원들은 그가 북한 인권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을 선출한 정당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포로가 된 듯하다고 귀띔했다. 비공개로 진행한 회의 내용이 때때로 언론에 누출된 배경에 그가 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그분의 양식을 믿었다. 이번에는 그분도 쉽게 넘어가주어 만장일치의 의견서를 만들 수 있었다. 전원위원회 의결이 끝나고 언론에 발표되기 직전, 사본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기관 간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북한 내 인권침해 관할권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한 가지 쟁점에 집중됐다. 북한 내 인권침해행위에 대해 위원회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인권위가 이 문제를 직접 다룰 법적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은 매우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막무가내였다. 업무관할권 같은 기술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김대중 좌파정부’가 만든 인권위가 햇볕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한다는 비난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열중했다.

    인권위의 의견은 북한 내 인권문제를 조사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법리적으로 상식적이고 정직한 의견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실효적 관할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다분히 명분상의 문제였다. 그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의제들은 당연히 위원회의 관할사항이고,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국군포로, 납북피해자, 이산가족, 새터민 등의 문제는 인권위 관할사항이다. 또한 제3국에 체류하는 탈북자도 우리 정부의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에는 인권위가 나설 수 있다. 이렇게 개념적 범주를 정리한 후에 몇 가지 대원칙을 정립했다. 즉 국제사회가 발전시켜온 인권의 보편성을 존중할 것, 평화적 방법으로 북한주민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것, 그리고 정부 차원의 활동과 시민사회 차원의 활동이 비판적 조언과 협력 속에서 이뤄지도록 할 것 등의 원칙을 세웠다. 이런 대원칙에 근거해 정부에 대해 다섯 가지 항목을 촉구했다.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출 것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계속하고 모니터링을 강화할 것 △재외 탈북자와 새터민의 인권 증진을 위해 적극 노력할 것 △이산가족,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를 담당할 전담인력을 확충해줄 것 △객관적인 정보수집 및 평가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업무체제를 구축할 것 등이다. 그리고 향후 위원회의 업무방향을 이렇게 밝혔다.



    “정부의 북한 인권 관련 정책을 검토하고 그에 관한 권고 또는 의견표명 등의 정책적 활동을 행하고, 국제인권기구 및 국내외 NGO 등과의 교류·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또한 위원회는 북한 내 인권 상황, 재외 탈북자의 인권 실태, 국군포로·납북자·이산가족의 인권 문제, 새터민의 인권 증진 등에 관한 실태조사 또는 정책연구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등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실태조사나 정책연구를 통해 북한 내 인권문제에 ‘간접적으로’ 접근하겠다는 뜻이었다. 직접적인 조사권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설령 권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

    북한인권포럼

    인권위 설립 초기부터 북한 인권에 관련된 진정이 접수됐다. 그러나 모두 각하로 종결됐고, 당사자들도 인권위의 업무적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구제를 받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언론의 주목을 받고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 의 인권위니까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성의를 보이라는 원론적인 주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2003년 6월 3일,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피진정인으로 하는 진정이 접수됐다. 요지인즉 “300만 아사자(餓死者)와 20만 해외탈북자가 생긴 데서 알 수 있듯 노예보다 못한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전체 북한 인민의 생존권과 인권문제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북한 인권 문제 개선을 남북회담의 최우선 의제로 채택하라”는 것이었다. 북한 정부 수반을 피진정인으로 지정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에 구제를 요청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게다가 인권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속된 말로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각하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인권위의 국제적 리더십 모색과 좌절

    2006년 11월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5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인권에 대한 생각을 적은 종이를 들어 올리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임채정 당시 국회의장, 김대중 전 대통령, 이희호 여사, 안경환 당시 인권위원장.

    다른 예도 있다. 2004년 10월의 일이다. 중국 주재 한국영사관에 진입을 시도했던 북한 주민 8명이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이어서 베이징 근교에서 한국 입국을 준비하던 북한 주민들이 체포됐다. 그해 10월 한 달 동안 중국 정부에 체포돼 송환 대기 중이거나 송환된 북한 난민이 80명에 달했다. 배후에 조직적으로 탈북을 추진한 단체가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인권위에 진정이 접수됐다. 피진정인은 외교부 장관이었다.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사람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그들이 인도적인 처우를 받도록 노력하라는 주문이었다. 인권위는 이 진정을 각하했다. 조사대상이 아니거나, 조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설사 권한이 있다 해도 조사할 능력이 없었다. 단 한 명의 담당직원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굳이 성의를 보이자면 외교부에 대고 권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부인들 무슨 뾰족한 수단이 있겠는가? 할 수 없는 일을 권고하는 것은 책임 회피일 뿐이다. 나의 재임 중인 2008년 8월 인권위는 ‘재중 탈북자의 강제송환 중단을 촉구하는 권고’를 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직하게 말해 인권위는 나름대로 북한 인권에 관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많은 자료를 보면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해마다 탈북자와 새터민 실태조사보고서를 냈고 국제심포지엄을 열었다. 영문 자료집도 외국인에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됐다.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 몽골, 태국, 라오스 등의 탈북자 수용소에도 접근했다. 발간 자료는 부지런히 국회의원과 관계기관에 제공했다. 정부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정책권고와 의견표명을 했다. 다만 한 가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한 주민의 진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인권위에 법적권한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국정조사나 업무보고에서는 판에 박은 듯한 정치공세가 이어졌다. 양식과 균형감각은 국회의원의 미덕이 아닌 듯했다. 언론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언론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욱 격렬했다. 전형적인 기사 제목은 “북한인권, 인권위 소관사항 아니다”였다.

    어쨌든 나는 기존 활동을 체계화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리하여 인권위는 북한 인권 문제를 2007년의 10대 중점업무과제로 채택했고 2008년에는 6대 중점과제의 하나로 격상했다. 첫째 정부 내에 상시 업무협조 체제를 만드는 것. 통일부, 외교부, 인권위가 최소한 자료라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국가정보원에도 공유할 수 있는 자료가 있으면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민간도 마찬가지다. 이해관계와 관심의 초점이 다른 여러 북한 인권 관련 단체를 한자리에 모아 북한인권포럼을 출범시켰다. 포럼에는 보수, 진보 인사는 물론 종교계 학계 대표자가 대거 참석했다. 2008년부터 유남영 상임위원이 성의와 인내로 포럼을 이끌어주었다. 매우 힘든 일이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둘째, 국제적 협력 체제를 강화하는 것. 우선 북한 인권에 관련된 영문자료를 집적해 영문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국제전문가들과 상시 소통할 수 있는 채널도 만들었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의 북한 전문가들과 위원회를 방문한 유럽의회 대표단이 내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유엔총회는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인권이사회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을 선임했다. 보고관에 선임된 태국의 비티트 문타본 교수와는 해묵은 인연이 있다. 왕립 출라롱코른대의 국제법 교수인 그는 명석하기로 국제사회에 정평이 나있다. 명문가 태생의 옥스퍼드대 박사로 여러 국제어에 통달한 그는 대학 사회의 스타이자 국제인권법의 총아다. 그는 북한 인권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지만 한 번도 직접 북한을 방문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의 보고서도 내실은 별로 없었다. 그는 나를 보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고국에서 쿠데타가 날 때마다 객쩍어하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한마디로 북한 인권의 개선에 대해서는 유엔도 무력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7월, 필자의 후임으로 현병철 인권위원장을 임명하면서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예산을 증액하고 인원을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으로 과거보다 더 나은 성과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난해 3월, 인권위 내에 북한인권침해센터와 북한인권기록관을 설치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권위 업무에서 ‘북한 인권’은 실체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권위가 북한 인권을 다루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번영이라면 북한 인권의 어떤 측면에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긴장완화와 신뢰회복이 절실한 과제 아닌가? 경색된 적대논리로 한반도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인권 중에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살아남을 권리’ 아닌가? 그렇다면 북한 인권의 핵심은 인도적 지원의 문제가 아닌가? 2008년 9월 30일 인권위는 ‘인도주의적 대북식량지원’을 권고했다. 이것이야말로 정치를 초월한 인권위 본연의 자세가 아닐까?

    북한 인권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 3주 전인 2006년 11월 24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인권위 창립 5주년 기념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축사를 했다. 임채정 당시 국회의장도 별도의 축사를 했다. 내가 취임하기 전 이미 주선돼 있던 일이다. 인권위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애정은 각별했다. 그해 10월 초의 일이다. 서울대에서 김 전 대통령을 초청했다. 공식 일정이 끝난 후 총장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나도 참석했다. 이장무 당시 총장의 배려로 나는 김 전 대통령 내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김 전 대통령의 치적 중 대표적인 것이 인권위 설립이라고 하자 그는 크게 반색했다. 그러나 정작 기념식장에서는 주최자로 영접한 나를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았다. 2개월도 채 안된 일인데도. 내가 그 일을 상기시켜드렸지만 그저 덤덤한 표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기념사는 솔직했다.

    대통령의 소임

    “집권 당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인권위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입법하는 과정에서는 참으로 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민단체가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타협에 타협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세계가 부러워하는 인권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소회를 밝힌 김 전 대통령은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길게 언급했다.

    “우리는 북한의 인권 상태가 얼마나 열악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시민적 인권도, 생존적 인권도 최하의 상태에 있습니다. …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 대량의 식량과 비료, 의약품과 의류 등을 지원함으로써 북한의 생존적 인권의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 북한은 우리의 이러한 지원에 대해서 감사하고, 우리를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민심이 크게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인권에 대해서는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 공산국가의 인권은 외부의 간섭과 억압에 의해서 해결된 예가 없습니다. … 그러나 개혁, 개방으로 유도했을 때는 독재적 통제가 크게 완화되고 심지어 민주화까지 되었습니다. … 저는 햇볕정책이야말로 남북한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평화적 공존과 평화적 교류 협력, 평화적 통일을 통해서 북한의 인권을 개선하고 장차 민주화를 실현시키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축사를 마감했다.

    “저는 인권위 출범 5주년을 계기로 이제 북한 인권에도 관심을 갖고 가능한 노력을 다해줄 것을 바라고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인권위가 발표한 내용은 대체로 김 전 대통령의 축사의 수준을 반영했다.

    현직 시절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특별한 입장 천명이 없었다. 인권위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스치듯이 “개성 이북으로는 좀 신중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한 정도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2월 10일, 인권위가 주관한 세계인권선언 제55주년 기념식에 직접 참석해 기념사를 했다. 강력한 언어를 사용해 인권위의 독립성을 옹호했다. 인권위의 권고나 요구사항을 정부가 십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도 했다.

    “여러분 중에서 인권위가 하자는 대로 정부가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면 좋지 않으냐고 말씀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충돌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해야 할 일이 있고, 정부 안에도 서로 충돌되는 여러 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이 모순들을 되도록이면 모순 없이 조화롭게 가져가는 것이 성숙한 사회입니다.”

    심지어 노 대통령은 정부에 맞서는 인권위의 자세를 바람직한 업무 자세라며 칭찬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인권위가 정부와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 인권위의 주장과 정부의 주장이 부딪치는 것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당연한 현상이고, 그것이 서로 존중되고 수용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인권위와 정부가 서로 신뢰를 공유하는 동반자가 되자고 제안했다.

    “인권위도 대통령을 존중하면서 때로는 비판하지만 때로는 많은 정책적 대안도 건의하고 있습니다. 저도 인권위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돕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권위뿐만 아니라 인권위가 대변하고자 하는 많은 분의 처지와 생각과 이해관계를 최대한 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말보다 실천이 모자라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저의 생각이나 실천보다 우리 정부는 훨씬 더 모자람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판하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말고 함께 가십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인권을 침해받는 많은 사람이 의지할 수 있고, 그들에게 믿음과 기대를 심어주는 기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권위를 설립한 전임 대통령에 대한 찬사와 함께 설립 당시의 자신의 인권의식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겸양을 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인권위를 만드실 때 저도 ‘어지간히 됐는데 인권위 만들어서 뭘 할 것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에야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원장에 취임한 직후 나는 이 연설문을 읽고 적잖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 대통령이었기에 더욱 존중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그도 사석에서는 때때로 인권위의 과도한 행보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특히 2004년 자신이 공들여 만들었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 담길 내용을 인권위가 비판하고 나서자 격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인권위 독립성의 철학과 원칙을 천명했기에 인권위는 소신껏 일할 수 있었다. 창립 이후 6년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아래서 인권위는 순항한 셈이다. 개별 사안에서는 정부와 충돌했지만 큰 틀에서 인권위의 기능에 대한 대통령의 이해와 양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친(親)인권적 여건 아래 신생 대한민국 인권위는 국제사회의 찬사와 부러움을 사면서 모범적인 인권위로 성장할 기대를 받고 있었다.

    인권위의 국제적 위상

    취임사에 쓰고, 임명장을 받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밝혔듯 나는 인권위의 국제적 명성을 높이고 싶었다. 그것이 나라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위원장에 취임하기 전 인권위 국제자문법률가의 자격에서 다른 나라 인권위들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봐도 우리 인권위의 위상은 높았다. 인원과 예산 면에서도 많은 나라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선진국은 오래된 사법부 중심의 인권보장 체제에 대한 국민적인 신뢰가 깊어 우리와 같은 종합적인 인권기구의 필요성이 적다. 미국은 고용평등위원회(EEOC·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와 같은 차별시정기구들이 사법구제의 보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서유럽 국가의 인권기구는 대체로 연구소 구실을 한다. 멕시코, 인도,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같은 나라가 파리원칙과 유엔체제(1993년 이후)에 따라 인권기구를 설립한 예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국제적인 경험을 갖춘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빠른 시일 내에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지역에는 국가인권기구포럼(APF·Asia- Pacific Forum for the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es)이 결성돼 호주 시드니에 사무국을 뒀다. 호주정부의 전략적인 투자에 힘입은 것이다. 출범 당시부터 호주가 연 50만 달러, 뉴질랜드와 인도가 각각 10만 달러를 출연했다. 늦게 합류한 한국도 연 1억 원의 회비를 납부한다. 당연히 호주 인권위의 발언권이 강할 수밖에 없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자국공동체의 ‘아시아화’를 위해 엄청난 정성을 쏟는다. 인구 몇 백만 명에 불과한 뉴질랜드는 큰 독립변수는 아니지만 호주의 옷자락에 매달린다. 그들은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과 서구 법치주의 전통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인권선진국으로 후진적인 (진짜) 아시아 국가들을 계도한다는 은근한 자부심에 차 있다. 아태지역 인권담론에서 이들의 선도를 견제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북한 인권 문제에 관한 위원회의 입장 발표를 앞두고 있던 2006년 12월 초, 볼리비아에서 열린 세계국가인권기구대회에 참석한 신혜수 위원과 곽노현 사무총장이 낭보를 들고 돌아왔다. 이 대회는 세계국가인권기구협의회, 즉 국제조정위원회(ICC·Inter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 for the Human Rights Institutes) 주관 아래 2년 주기로 열린다. 매년 3월 제네바에서 열리는 정기총회와는 별도로 대륙별로 순회하면서 중요한 인권 현안을 토의한다. 그런데 당시 대회에서 향후에 적용될 의장, 부의장 선출 원칙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3년 단위로 5개 대륙별로 돌아가며 담당한다는 원칙이다. 2007년 3월 총회에서는 (남북)아메리카대륙에서 의장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부의장을 선출하기로 결의했다고 했다. 의장, 부의장은 현직 인권위 수장 중에서 (그러나 국가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선출한다.

    이 보고를 받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천재일우의 기회다. 부의장을 낸 대륙에서 차기 의장을 선출하도록 했으니 우리나라에서 2007년 부의장, 2010년 의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따내야겠다. 경쟁자인 호주, 뉴질랜드, 인도, 필리핀의 위원장들은 개인적인 명성 면에서 모두 나를 능가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뒤에는 대한민국이 있다. 우리는 2004년에 세계국가인권기구대회를 주최해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김창국 당시 인권위원장은 거의 1년 반 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치밀한 정성을 쏟았다. 대회의 유치단계에서부터 국제사회에 명성이 높은 박경서 상임위원의 기여가 컸다. 대회에서 신혜수 위원이 개막식, 내가 폐막회의 사회를 맡았다. 신 위원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제적인 신망이 높았고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아태지역에서 회장국을 맡는 시기를 2010년으로 유도하는 데 신 위원의 숨은 공이 컸다.

    ICC 부의장 당선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할 구체적인 기회를 잡은 뒤 내부체제 정비에 나섰다. 우선 영문 홈페이지를 개설해야 한다. 위원장의 국제 활동을 보조할 국제비서도 필요하다. 많은 경쟁자 중 한 사람을 뽑았다. 2007년 3월 선거에 대비해 사전 정지작업에 나섰다. 2월 20일, 덴마크로 날아갔다. 현직 ICC 위원장 모턴 키에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2004년 서울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틀에 걸쳐 그에게서 3년 동안 의장직을 수행한 경험을 들었다. 집중 개인교습을 받은 셈이다. 3월 총회에서 부의장에 나서고 싶다고 털어놓고 지원을 요청했다. 아태지역 내의 문제라서 자신이 표면에 나설 수는 없다면서도 여러 가지 귀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3월 18일, 개회를 이틀 앞두고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인도와 필리핀의 위원장들을 찾았다. 드러나지 않게 이들에 대한 사전연구를 한 터다. 새로 취임한 인도의 바부 위원장은 전직 대법원장이었다. 인도대법원이 내린 사회권에 관한 선구적 판결들은 비교헌법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가 쓴 판결문을 구해 읽었다. 인도대법원에 대한 나의 관심과 영국과 미국의 헌법에 관한 전문지식이 더없이 유용했다. 그는 ‘범상치 않은 학자’인 나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 후 2년 반 동안 우리는 더없이 결속력 강한 동료가 됐다.

    필리핀 위원장 퀴줌빙 여사는 1960년대부터 유엔 무대를 화려하게 누비던 원로 중의 원로다. 현직 대법관인 남편과 함께 필리핀국립대 법학과 출신이다. 나는 필리핀의 상류사회에 지인이 많다. 시오닐 호세와 같은 문인과도 교류가 깊다. 서울대 법대 학장 재직 시에는 아시아 국립법대연합회 결성에 참여한 경험이 있기에 퀴줌빙 여사와 공동의 지인이 많았다. 그에게는 유명세에 비례해 개인적인 적(敵)이 많았다.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인 자신을 알아주는 ‘예의바른 안 교수’를 지지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인권위의 국제적 리더십 모색과 좌절
    안경환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1984년 미국 샌타클래라대 법학 박사

    제4대 국가인권위 위원장(2006.10~2009.06)

    現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 ‘법과 사회와 인권’ ‘법, 영화를 캐스팅하다’ ‘조영래 평전’ 등


    70세가 훌쩍 넘은 호주의 폰 두사 위원장은 은퇴를 결심하고 있었다. APF 자문법률가로 3년 동안 함께 작업한 지인이다. 손자보다 어린 아들을 돌보고 젊은 아내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은퇴한다고 말했다. 준비한 아이 선물을 받고 활짝 웃었다. 사흘에 걸친 막후작업 끝에 뉴질랜드의 로슬린 누난 위원장이 아태지역의 합의로 나를 추천하는 각본을 짜는 데 성공했다. 2007년 3월 23일, ICC는 캐나다의 제니퍼 린치를 의장으로, 대한민국의 안경환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대한민국이 포기한 ICC 의장 자리는 다름 아닌 뉴질랜드의 누난에게로 돌아갔다. 천추의 한이다. 15년 후에나 다시 기회가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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