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여성의 인간 됨을 선언한 페미니즘 정전

  • 김학순│언론인·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입력2012-02-21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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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인간 됨을 선언한 페미니즘 정전

    ‘여성의 권리 옹호’<br>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지음, 문수현 옮김, 책세상, 228쪽, 7900원

    “여자란 머리카락은 길어도 사상은 짧은 동물이다.”(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여자는 깊이 있는 척하는 껍데기다.”(프리드리히 니체) / “여자가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면, 우리는 그녀를 어떤 남자보다 우러러볼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여자가 그런 업적을 이루리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쇠렌 키에르케고르) / “여자는 죽고 나서 석 달 뒤에 철이 든다.”(라틴 아메리카 원주민 속담) / “여자를 만든 것이 알라의 유일한 실수다.”(이슬람 속담) / “여자와 북어는 사흘 걸러 때려야한다.”(한국 속담) / “여자와 소인은 길들이기 힘들다.”(공자)

    여성에 대한 야박한 평가는 고금과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이쯤 되면 중세 말기에 등장한 유럽 최초의 여성작가 크리스틴 드 피장이 한탄조로 던진 질문을 이해하고 남는다.

    “학식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그토록 수많은 남자들이, 기나긴 명단으로 이어질 그 많은 철학자·시인·도덕론자들이 어찌하여 그 많은 논문과 저작에서 여성을 사악한 존재로 여기고 여성의 행동을 비난하는가?”

    실망스러운 건 계몽시대를 거친 근대 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자가 정부의 우두머리가 된다면 국가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여자는 보편적 요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일시적 기분과 우발적 의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헤겔)



    우리를 더욱 절망에 빠뜨리는 건 프랑스혁명을 잉태시킨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다.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 그가 우리 프랑스인이든, 독일인이든, 국왕이든, 노예든, 학자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저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조차 우리와 똑같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다. 단 하나 여성은 예외다.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 그러므로 교육시킬 필요도 없으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인물인 루소조차 이런 주장을 펼쳤을 무렵 ‘여성에게도 동등한 인격과 권리를 달라’고 용기 있게 선언하고 나선 여성이 영국에서 혜성같이 나타났다. 불꽃처럼 살다가 38세에 요절한 ‘최초의 페미니스트’ ‘최초의 여권옹호론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 1797)다. 급진주의 정치사상가인 울스턴크래프트는 1792년 불멸의 대표작 ‘여성의 권리 옹호(원제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여성이 복종해야 할 대상은 아버지나 남성이 아니라 이성(理性)’이라고 주창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페미니즘의 어머니’라는 헌사를 받게 한 이 책은 프랑스 혁명 후 탈레랑 의원이 삼부회에 제출한 교육법안에 대한 반론으로 쓰여졌다. 그렇지만 루소의 명저 ‘에밀’ 비판에 절대적인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한때 ‘나는 늘 그를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루소 사상에 심취했다. 루소의 ‘천부인권’ ‘자연법’ 사상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이 말하는 ‘인간’에는 남성만 있을 뿐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울스턴크래프트가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몽사상가들의 열린 생각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다.

    여성을 자유롭게 하라

    울스턴크래프트는 먼저 루소의 사상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여성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남편과 아버지의 결정을 교회의 결정만큼이나 확신을 가지고 따라야 한다.’ ‘여성들의 교육은 언제나 남성들과 관련되어야만 한다. 우리 남성들을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 우리의 사랑과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되는 것, 우리가 어릴 때는 우리를 교육하고, 우리가 자라는 동안은 우리를 돌보고,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충고해주고, 우리의 인생을 안락하고 기분 좋게 하는 것, 이것들은 언제나 여성의 의무이고, 그들이 어릴 때부터 받아야 하는 교육의 내용이다.’ ‘여성이 한순간도 독립되어 있다고 스스로 느껴서는 안 되며, 남성이 쉬고자 할 때는 언제나 보다 유혹적인 욕망의 대상이자 그의 보다 달콤한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여성이, 요염한 노예가 되어야 한다.’ 루소의 생각은 한마디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법에 속하는 일이며, 여성이란 남성에게 순종하도록 교육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울스턴크래프트는 “우리에게 부드럽고 가정적인 짐승이 되기만을 충고하는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지독하게 모독하는 것인가!”라며 루소를 비롯한 뭇 남성을 통박한다. 그러고선 “남성들이여, 여성들에게 권리를 나눠주라”고 촉구한다. 그는 또 “여성을 자유롭게 하라. 그러면 그들은 즉시 남성처럼 현명하고 덕이 많은 존재가 될 것이다. 진보는 상호적인 것이어야 하고, 인류의 절반이 종속되기를 강요받는 불공평은 억압자에 대한 보복을 수반하기 때문에, 남성의 미덕은 그가 발아래에 기르는 벌레들에 의해 좀먹게 될 것”이라고 고언한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프랑스) 혁명이 여성들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할 때다. 다시 말해 여성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야 할 때다. 여성도 인간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을 개혁하고 세계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동료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나선다.

    그러고 나선 이렇게 다그친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여, 그처럼 편협한 편견을 뛰어넘도록 하자! … 우리의 생각을 일상의 사소한 사건에만 국한하거나, 우리의 지식을 연인이나 남편의 마음을 알아내는 데 한정하지 말자. 우리의 지성을 증진하게 하고 지금보다 고귀한 상태를 위해 우리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위대한 목적 아래, 삶의 모든 의무를 다하자.”

    “사회에는 보다 많은 평등이 자리 잡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덕성은 결코 사회적 기반을 다지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숙명적으로 바위 아래에 묶여 있다면 실질적인 평등이 바위 위에 세워질지라도 결코 굳건하게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참정권도 요구한다. 물론 투표권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이 같은 주장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이었는지는 영국이 남성의 보통선거권을 수용한 게 1918년이며, 여성에게 투표권이 돌아간 것이 1928년이라는 사실만 떠올려봐도 알 만하다.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

    이 책은 첫 출간 직후 프랑스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됐다. 18세기 프랑스사 전문가인 미국의 문화사가 린 헌트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옹호’가, 미국 혁명기의 베스트셀러로서 혁명 발발을 가능케 한 것으로 평가받는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보다 공화국 초기 미국 시립 도서관들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2년 앞선 저작인 ‘인간의 권리옹호’에서 국민은 나쁜 군주를 제거할 권리가 있으며 당대의 노예제도와 빈민들에 대한 시각이 비도덕적이라고 신랄하게 질타해 필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울스턴크래프트가 제대로 인정받기까지는 무려 1세기가 넘게 걸렸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은 당시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불온사상이었다. ‘여성의 권리옹호’는 혁명의 시대에 여성을 정치적 평등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한 자유주의자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예상대로 여론은 급진주의자인 그에게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같은 여성인 한 어머니는 잡지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 책 때문에 네 명의 내 딸이 타락했다”고 헐뜯었다.

    ‘여성의 욕망을 인정해야 한다’며 성적 자유를 주장했던 대목은 그를 한층 더 곤경에 빠뜨렸다. 당시 신문은 그를 ‘철학적 바람둥이’라고 매도했다. 어떤 사회평론가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그를 ‘페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고 조롱했다. 그 뒤 세상은 오랫동안 그를 판타지 소설의 효시가 된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의 어머니로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의 삶이 워낙 짧았던 데다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로 말미암아 그의 가치가 왜곡된 탓도 컸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이 쓴 책의 신념을 그대로 실천하며, 파란만장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살았다.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직업 활동을 하며 직접 생계를 꾸렸다. 여성 교육을 위해 학교를 운영하는 모범도 보였다. “나는 새로운 종(種)의 시조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관점이라면 울스턴크래프트는 온건한 여성운동가에 불과하다. 여성의 지위 개선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 미흡하고, 종속·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까지 확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안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들어 이 책의 역사적 비중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참정권론자인 밀리센트 포세트가 ‘여성의 권리옹호’ 출간 100주년 기념본에서 평가한 한마디가 이 책의 위상을 명징하게 대변한다.

    “근대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의 비조) 애덤 스미스에게 기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여성은 울스턴크래프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여성의 권리옹호’는 오늘날 ‘페미니스트의 성서’ ‘페미니스트 선언문’으로 불리는 저작이다. 이제 이 책은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정치·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까지 파급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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