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앞선 기술 가지고도 디지털 시장 거부

코닥의 몰락

  • 김선우│동아비즈니스리뷰 기자 sublime@donga.com

    입력2012-02-22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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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선 기술 가지고도 디지털 시장 거부

    코닥의 디지털카메라 ‘이지쉐어’.

    세계 5대 브랜드 중 하나였던 코닥이 1월 19일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결코 망할 것 같지 않았는데 망한’기업에 합류한 것이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소중한 순간을 ‘코닥 모멘트(Kodak Moment)’라고 표현할 정도로 전 세계인에게 단순한 상품이 아닌 추억을 파는 기업이었던 코닥이 파산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디지털 시대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닥의 몰락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위기감을 느낀 코닥도 기업을 살리기 위해 1990년대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코닥은 자사가 개발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이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 실패했고 성공의 덫에 빠졌으며 사진의 소비 패턴이 변화하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동아비즈니스리뷰(DBR)’99호(2월 1일자)에 실린 기사 ‘사진왕국 코닥의 몰락…도대체 무슨 일이’를 통해 코닥의 몰락에 숨은 진실을 살펴보자.

    조지 이스트먼은 자신이 만든 첫 카메라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그는 철자가 잘못 쓰이거나 발음이 잘못될 염려가 없으면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이름을 고민하다가 어머니 성의 첫 글자인 K를 두 번 넣어 강력한 이름을 만들어냈다. 1888년 ‘코닥(Kodak)’이라는 상표는 이렇게 태어났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다합니다(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유명한 슬로건과 함께였다.

    이후 코닥은 사진의 대명사가 됐다. 1889년 투명롤 필름을 만들었고 1900년 ‘브라우니’라는 1달러짜리 카메라를 내놓았다. 그 안에 들어가는 필름 가격 15센트였다. 브라우니는 1940년대까지 자그마치 2500만 대가 팔렸다. 코닥은 1935년 처음으로 컬러 필름 ‘코다크롬(Kodachrome)’을 내놓았으며 1969년 인류가 달에 착륙한 장면을 찍은 것도 코닥 카메라였다. 1976년 코닥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필름 90%, 카메라 85%에 달했다. 1990년대까지 코닥은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5대 브랜드에 들었다.

    그런 코닥이 1월 19일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금융회사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와 자동차기업 사브(Saab)에 이어 ‘망할 것 같지 않았는데 망한’ 기업에 합류한 것이다. 코닥은 이 중에서도 가장 의외의 기업이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소중한 순간을 ‘코닥 모멘트(Kodak Moment)’라고 표현할 정도로 코닥은 전 세계인에게 단순한 상품이 아닌 추억을 파는 기업이었고 거의 모든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대중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나가던 코닥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코닥이 파산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디지털 시대에 대비하지 못한 데 있다. 미국의 서열 2위 서점이던 보더스(Borders)가 아마존(Amazon)에 밀려 파산하고 비디오와 DVD 대여점인 블록버스터(Blockbuster)가 온라인 기반의 넷플릭스(Netflix)에 밀려 쇠락한 것처럼 코닥도 캐논(Canon)과 니콘(Nikon), 소니(Sony)에 밀린 것이다. 물론 소니도 워크맨과 디스크맨에 치중하다가 애플(Apple) 아이팟에 MP3플레이어 시장을 내주기는 했다.

    그러나 코닥의 몰락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위기감을 느낀 코닥도 기업을 살리기 위해 1990년대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대 초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디지털 이미지 그룹으로 사업 구조를 조정하는 데 성공한 경험도 있다. 1995년 코닥의 기업가치는 133억 달러로 코카콜라(Coca Cola), 맥도날드(McDonald′s), IBM에 이어 세계 4위에 올랐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휴대전화에까지 카메라가 일반화되면서 코닥은 디지털의 세계에서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필름으로 돈 버는 코닥에 ‘디카’는 존재를 부정하는 제품

    앞선 기술 가지고도 디지털 시장 거부

    코닥의 주력 상품이었던 컬러 필름은 2009년 생산이 중단됐다.

    1975년 코닥 연구소에서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가 개발됐다. 이 디지털카메라는 토스터만큼이나 컸고 사진 해상도는 약 10만 화소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을 기록하는 데는 23초가 걸렸다. 코닥의 연구원이었던 스티브 사손(Steve Sasson)이 개발한 이 신기술은 연구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하지만 코닥 임원진의 반응은 싸늘했다. “좋기는 한데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마세요(That′s cute- but don′t tell anyone about it).” 개발 초기 단계였던 디지털카메라 기술은 당시의 아날로그 사진 기술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무엇보다도 필름이 필요 없는 카메라였기 때문이다. 필름으로 돈을 버는 코닥에 디지털카메라는 회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기술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도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시장에 선보일 기회를 두 번 더 놓쳤다. 1981년 소니가 처음으로 디지털카메라(Mavica)를 발표하자 코닥은 디지털 사진 기술이 가져올 위협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계속 필름 사업에 치중했다. 당시로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 필름, 화학품, 인화 사업은 이윤이 60%에 달한 반면 디지털 관련 사업은 이윤이 15%에 지나지 않았다. 디지털 사업에서는 필름과 사진 인쇄로 창출되는 지속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코닥은 1992년에도 다른 업체보다 한발 앞서 소비자용 디지털카메라를 출시할 수 있었지만 주력인 필름시장이 잠식당할까봐 주저하다가 결국 다른 기업이 디지털카메라를 내놓기 시작한 1994년에야 부랴부랴 출시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디지털카메라가 확산되면서 시작된 전면승부에서 코닥은 맥을 추지 못했다. 뒤늦게 디지털 시장에 진출하는 바람에 일찍부터 디지털 시장을 대비한 캐논과 니콘 등에 밀렸다. 코닥의 디지털카메라는 예쁘고 깜찍한 캐논과 니콘 제품에 비해 디자인이 투박했고 적목 현상 없애기, 얼굴 인식 등 일본 기업의 디지털카메라에 있는 다양한 기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코닥은 결국 구식 필름카메라 만드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바꾸지 못했다. 1991년 190억 달러에 달하던 매출은 2010년 72억 달러로 추락했고 1990년대 후반∼2000년대 후반 10년 동안 코닥의 주식 가치는 75%나 떨어졌다.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존속성 기술에 의지

    코닥은 하버드 경영대학원 클레이트 크리스텐슨 교수가 저서 ‘혁신가의 딜레마(Innovator′s Dilemma)’에서 지적한 대로 선도 기업이 후발 기업에 밀려 시장지배력을 상실한 전형적인 케이스다. 코닥은 그들이 잘 만들고 대다수의 소비자가 사용하고 있는 필름을 더 잘 만드는 데 집착했다. 존속성 기술(Sustaining Technology)에 의지한 것이다. 디지털카메라 기술이 기존 고객이 요구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전혀 다른 기능을 요구하는 새로운 고객이 원하는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지속성 기술에 집착하고 와해성 기술을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창업자인 이스트먼이 와해성 기술을 인식하는 데 귀재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스트먼은 필름 기술의 수준이 낮았던 1800년대에 초기 기술이었던 ‘드라이 플레이트’에서 필름으로 재빨리 옮겨왔고 흑백 필름이 대세였을 때 아직 개발 초기 단계였던 컬러 필름에 투자해 성공했기 때문이다.

    코닥의 몰락이 더 뼈아픈 이유는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내부적으로 개발해놓고도 이를 즉각 상용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일류 기업이 실패하는 이유는 고객의 요구에 따르고 고객이 원하는 대로 상품을 개선해 대량으로 제공할 수 있는 기술에 투자하고 시장 경향을 분석해 당장 수익을 가져다주는 혁신에 투자하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했다. 코닥의 창립자 이스트먼은 창립 초기 경영 원칙을 세웠는데 △저가의 대량 생산 △국제 유통 △광범위한 광고 △고객 중심 △지속적인 연구를 통한 성장 및 개발 촉진 △직원을 존중하는 마음과 공평한 대우 △사업 확장을 위한 수익 재투자였다. 크리스텐슨의 설명과 당시에는 첨단 경영 방식이었을 이스트먼의 원칙이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과거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에 집착

    코닥은 기본적으로 저가의 사진기를 고가의 필름으로 채우는 전략으로 성장했다. 이윤이 많이 남는 필름에 치중하면서 카메라와 같은 장치보다는 필름 및 필름과 관련된 화학적인 면에 강한 면모를 보인 기업이다. 한마디로 코닥은 뼛속까지 필름 기업이었다. 1993년 모토로라 출신 조지 피셔를 CEO로 영입하면서 디지털 이미지 그룹으로 거듭나려는 전략을 폈지만 근본적으로는 필름을 토대로 디지털에 발만 담그는 전략을 고수했다. 코닥이 진정으로 디지털을 받아들인 시점은 2000년대 들어서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러한 코닥의 행보를 설명하는 이론은 많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제임스 마치 교수는 이를 ‘근시안적 학습과 성공의 덫’으로 표현했다. 기업이 원래 전략이나 자원을 계속해서 활용하다 보면 역량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능숙해진다. 이는 그 기업이 성공적으로 성과를 창출하는 ‘성공 공식(success formula)’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기존 성공 공식의 반복 활용은 치명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다. 성공 공식의 반복 적용 과정에서 기업은 다른 대안적 역량이나 가능성들로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고립된다. 그러다가 기존의 성공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불연속적이고 역량파괴적(competence-destroying) 환경 변화가 일어나면 기업은 무너진다. 1990년 중반 이후 경영 환경은 급변했다. 이런 새로운 환경에서는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상품이나 기술,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혁신 역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코닥은 과거의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에 집착했다. 마치 교수는 경영자들은 항상 단기 생존을 위한 기존 역량의 효율적 활용과 신성장 동력 창출을 위한 탐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 도널드 설 교수의 ‘활동적 타성(Active Inertia)’ 이론도 잘나가는 기업이 시장의 변화를 무시하고 과거 성공의 발자취나 방식을 답습하는 성향을 지적했다. 폴 캐럴과 춘카 무이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쓴 ‘실패로 인도하는 7가지 길’에서 시장이 새로운 신호를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전략에 따라 투자를 늘리는 것은 재앙에 가까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코닥에 조언자 역할을 했던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로사베스 모스 칸터 교수는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코닥 임원들은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데만 혈안이 돼 있어서 일단 만들어서 판 다음에 문제점을 수정하는 하이테크 기업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코닥의 변화가 느린 이유다. 또 미국 뉴욕 주의 로체스터라는 한 지역에만 기반을 둔 점도 약점으로 작용했다. 코닥 임직원들은 지역사회로부터 좋은 얘기만 듣고 살면서 세상과 동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ofoto 인수해놓고 단순 인화 사이트로만 활용

    코닥이 근본적으로 필름 기업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한 문제와 관련이 깊지만 소비자가 찍은 사진을 그냥 지워버리거나 인쇄하지 않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한 것도 코닥의 패착이다. 소비자의 사진 사용 패턴 변화를 읽지 못한 것이다. 1990년대까지 소비자는 코닥의 필름으로 사진을 찍은 뒤 코닥의 인화센터에서 사진을 인화했다. 카메라까지 팔았으니 코닥은 사진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필름이 필요 없는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소비자는 코닥의 필름을 사용하지 않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며 찍은 사진의 극히 일부만 인화했다. 필름도 팔지 못하고 인화지 및 인화 서비스 매출도 줄어들면서 카메라도 잘 안 팔리니 코닥으로서는 설 땅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와해성 기술의 흐름을 잡는 법

    수없이 개발되는 신기술 중에 대체 어떤 기술이 와해성 기술인지 파악해서 대응전략을 수립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인 조지프 보우어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1995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쓴 ‘Disruptive Technologies: Catching the Wave’에 제시된 방법론은 판단에 도움을 준다. 이들이 소개한 와해성 기술을 인지하고 이용하는 팁은 다음과 같다.

    ● 해당 기술이 와해성 기술인지 존속성 기술인지 판단하라: 대다수의 기업은 현재의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존속성 기술은 잘 인지하지만 와해성 기술을 인지하는 데는 서투르다. 신제품 개발과정에서 마케팅이나 재무부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반면 기술부서가 반기는 프로젝트 중에 눈여겨볼 만한 와해성 기술이 있다.

    ● 와해성 기술의 전략적 중요성을 판단하라: 와해성 기술 후보 중에 기술 수준이 지금은 매우 낮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서 현재 주력 제품 시장의 기술 수준을 넘어설 가능성이 보이면 그 후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 와해성 기술을 적용할 만한 시장을 찾아라: 와해성 기술이라고 판단되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기업 조직은 현재의 주력 시장에 집중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을 탐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새로운 시장은 중소기업들이 탐색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몸집이 작은 중소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을 탐색하고 그에 적응해나가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다만 그 기업들을 계속해서 눈여겨보아야 한다.

    ● 별도의 조직이 와해성 기술을 개발하도록 하라: 새로운 기술이 이윤이 적고 기존 제품과는 다른 고객군을 대상으로 할 때는 별도의 조직에서 개발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 와해성 기술 관련 조직은 계속 독립적으로 놔두라: 기업들은 별도로 뒀던 와해성 기술 관련 조직이 성공하면 다시 합치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 경우 기존 사업 부문과의 갈등이 커질 우려가 있다. 역사적으로 디스크 드라이브 업계에서 주력 제품과 와해성 기술 제품을 한 조직 내에서 관리한 기업은 모두 실패했다.


    코닥은 2001년에 ofoto라는 사진 공유 사이트를 인수했다. 온라인에 기반을 둔 사업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를 사진 공유 사이트로 키우기보다는 단순히 소비자가 사진 인화를 주문하는 사이트로 활용하는 데 그쳤다. 만약에 코닥이 미래를 내다보고 이 사이트를 플리커(Flickr)와 같은 사진 공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키웠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코닥이 사진 공유가 지금처럼 최고의 유행이 될 것을 예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5년에 코닥은 세계 최초의 Wi-Fi 기능이 있는 디지털카메라를 출시했다. 당시로는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소비자들이 찍은 사진을 e메일로 전송하거나 인터넷에 올려 공유하려는 성향을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이 카메라가 잘 팔리지 않자 사업을 재빨리 접어버렸다.

    계속되는 전략의 실패

    2000년대 들어 현 CEO인 안토니오 페레즈를 HP에서 영입한 코닥은 2007년에 잉크젯 프린터 사업을 주력으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잉크젯 프린터 사업과는 다른 사업 모델을 들고 나왔다. HP 등 대부분의 프린터 업체들은 프린터를 싸게 파는 대신 잉크를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기는 데 반해 코닥은 소비자의 높은 잉크 가격에 대한 불만을 포착해 프린터의 가격을 올리는 대신 잉크를 절반 가격에 팔겠다고 발표했다. 예전 코닥의 사업 모델이었던 카메라를 싸게 팔고 대신 필름을 비싸게 파는 것과도 상반된 이 전략도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소비자는 초기에 프린터를 살 때의 가격에 집착하지 프린터를 소유하는 동안 들어가는 총비용인 총소유비용(Total Cost of Ownership)은 잘 따지지 않았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코닥의 프린터 세계 시장점유율은 2011년 1∼9월 2.6%에 지나지 않는다. 코닥은 중국 등 신흥시장에서 필름의 수요가 계속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신흥시장도 급속도로 디지털로 바뀌는 바람에 예상은 빗나갔다. 또 거의 모든 휴대전화에 카메라 기능이 부가되면서 어렵게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안착한 코닥은 다시 한 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코닥의 지난해 매출은 약 62억 달러로 예상된다. 지난해 3분기에는 2억2200만 달러 적자를 냈다. 1988년 전 세계적으로 14만5000명을 고용했던 코닥의 종업원 수는 1만4000여 명 수준으로 줄었다. 전 세계를 호령했던 20여 년 전의 10분의 1 수준이다. 코닥의 창업자인 이스트먼의 75세 생일을 맞아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사진이나 영화 필름을 통해 즐거움을 얻은 사람이 필름을 처음 만든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면 그 인사를 가장 많이 받게 될 사람은 75번째 생일을 맞은 조지 이스트먼일 것이다”고 썼다. 그만큼 코닥은 이미 1930년대에 최고의 기업이었던 것이다. 척추협착증으로 고통스럽게 투병 중이던 이스트먼은 이로부터 2년 뒤인 1932년 77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친구들에게.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To my friends. My work is done. Why wait?).” 어쩌면 코닥의 할 일은 아날로그 시대에 다 끝났는지도 모른다. 코닥은 오랜 자구 노력 뒤 더 기다리지 않고 결국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경쟁사 후지필름은 달랐다

    앙숙이었던 코닥과 후지는 코닥이 파산보호를 신청한 후 더욱 비교되곤 한다.

    ● 각각 미국과 일본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코닥과 후지는 1984년 LA올림픽 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다. 코닥이 머뭇거리는 동안 후지가 LA올림픽의 스폰서십을 따냈다. 코닥은 홈구장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스폰서십을 후지에 내줬으니 이는 ‘진주만 공습’에 비견되는 일이었다.

    ● LA올림픽 때 미국 내 인지도를 쌓은 후지는 값싼 필름으로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선다. 후지의 공세에 코닥도 ‘펀타임’이라는 저가의 필름을 내놓지만 이는 고가였던 코닥의 기존 필름 라인 판매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후지를 겨냥한 제품이 자사의 고가 제품 시장을 갉아먹은 것이다.

    ● 반면 일본 시장에서 고전한 코닥은 비관세장벽 탓이라며 1995년 후지를 미국 정부에 통상법 위반으로 제소했다. 미일 간에 ‘필름무역 마찰’까지 촉발됐다.

    ● 디지털 시대를 대비한 행보에서는 후지가 한발 빨랐다. 후지는 1980년대에 이미 필름 산업에서 최대한 수익을 내면서 디지털 시대에 대비하고 신사업에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 후지는 디지털뿐만 아니라 의료, 화장품, 검사장비, 복사기, LCD 패널 소재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매출 규모가 크지 않은 디지털 이미지 사업만으로는 큰 기업을 살릴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필름이 후지의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도 되지 않는다.

    ● 2000년 취임한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 사장은 2004년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며 사진 부문을 중심으로 5000여 명의 감원을 단행하고 90억 달러를 투자해 40개 사를 인수합병했다.

    ● 후지의 시가총액은 126억 달러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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