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계 세계적인 부품 기업 보쉬는 창립 이후 125년 동안 세계 1위 부품 회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B2B 사업에서 고객사와 B2B 기업 간에는 ‘갑을 관계’라 일컫는 종속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그나마 시장을 주도하던 B2B 기업들의 위상도 약화되는 추세에서도, 보쉬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보쉬라는 특별한 기업을 통해 시장을 주도하는 B2B 기업은 무엇이 다른지, 또한 그 본질적인 경쟁력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LG경제연구원이 1월 중순 펴낸 보고서 ‘시장을 주도하는 B2B 기업, 보쉬는 왜 특별한가’를 통해 살펴보자.
프란츠 페렌바흐 독일 보쉬 회장.
자사의 운명이 고객사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B2B 기업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사업 모델은 ‘고객사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시장을 주도하며 다수의 고객사를 대상으로 거래해 높은 수익을 기록하는 것’이다. ‘인텔 인사이드’로 대표되는 인텔은 PC 표준을 주도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OS도 PC 시장을 쥐락펴락했다. 국내 삼성전자 및 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 부품 사업, 포스코의 철강 사업도 다수의 고객사를 대상으로 주도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위상도 예전 같지는 않다. 경쟁 환경의 변화로 시장 지위가 하락하고 수익성이 낮아지고, 시장에 대한 영향력도 점차 하락하는 추세다.
지난 5월, 독일에 있는 부품 기업인 보쉬의 창사 125주년 겸 창업자인 로버트 보쉬의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리더 2000여 명이 참석해 화제가 됐다. 글로벌 자동차 기업은 물론 중국, 인도 등 신흥국 자동차 기업의 경영진 대부분이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집결한 것이다. 이는 자동차 기업과 부품 기업 간의 ‘갑을 관계’가 명확하게 형성된 자동차 산업에서 부품 기업에 불과한 보쉬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전반적으로 B2B 기업의 위상이 약화되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보쉬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B2B 기업 영향력 하락 추세
그렇다면 수많은 고객사가 거래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존중하는 B2B 부품 기업인 보쉬는 과연 어떤 기업인가? 2010년에 473억 유로의 매출을 올린 보쉬는 150여 개 국가에 진출한 명실상부한 글로벌 1위 자동차 부품 기업이다. 종업원 숫자만 해도 약 30만 명에 달한다. 많게는 매출의 10% 가까이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기술 지향적인 기업이기도 하다. 이익률도 상당하다. 최근 약간 주춤하지만, 지난 5년간 평균 10%를 웃도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한 탄탄한 기업이다.
보쉬는 순수 발명가라기보다는 사업가로서의 기질이 강했던 로버트 보쉬가 1886년 2명의 동료와 함께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설립한 ‘정밀 기계 · 전기 엔지니어링 작업장’에서 시작됐다. 20세기 초반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피할 수 없었던 보쉬의 초기 성장 경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세계 대공황 때 전체 인력의 25%를 해고하기도 했고,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의 주축국 출신 기업으로 매출이 급락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창사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을 거듭했고, 수익성도 경쟁 자동차 부품 기업은 물론 주요 자동차 기업보다 우월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사업 영역도 다양하다. 한때 낙농업, 철강업, 그리고 가전제품 및 휴대전화 사업에도 진출했던 보쉬는 현재 자동차 부품 외에도 세계적인 전동 공구 기업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차량용 반도체(Microelectronics) 및 센서(Machined sensors)를 개발하고 제조하는 기업이다. 2009년에는 반도체 생산 설비에 6억 유로를 투자하기도 했다.
창업 이듬해에 출시한 자동차용 엔진 점화기(Magneto ignition device), 그리고 디젤연료 분사장치인 커먼레일, 이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제동안전장치인 ABS 시스템(Anti-lock brake system), 차량의 주행 안전성을 향상한 전자식 주행안정시스템(Electronic stability program) 등으로 대표되는 보쉬의 제품은 탄탄한 기술력을 토대로 탄생한 부품들이다. 이들 부품 시장에서 보쉬의 점유율은 50%를 웃돌 정도로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품 기업인 보쉬를 이렇게 특별하게 만들었는가? 오랜 역사에 기반을 둔 보쉬만의 본질적인 ‘성공 DNA’는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아보자.
체크 보쉬 브레이크패드(왼쪽)와 보쉬 와이퍼.
① 인간 중심의 경영 철학
보쉬 내면에는 휴머니스트 기업가인 로버트 보쉬가 최우선적 가치를 두었던 ‘인간 존중’의 창업 정신이 흐르고 있다.
1861년 독일 남부 사업가 집안에서 12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난 로버트 보쉬는 성장하면서 사람의 중요성, 그리고 리더십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사업을 시작할 즈음부터는 기술과 사업이 아무리 중요해도 이는 결국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점을 주목하고 강조했다. “당신의 인간성을 높이 평가하고, 타인과 거래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항상 존중하라”고 언급하면서 종업원을 동료(Associate)라 칭하던 로버트 보쉬는 1906년부터 8시간 근무 제도를 시행했고,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던 1929년에는 종업원을 해고하기보다 퇴직자 연금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매우 더운 여름날에는 종업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쉬게 하기도 했던 로버트 보쉬는 “왜 종업원들에게 그렇게 높은 급료를 지급하는가?”라는 질문에, “내가 부자라서 동료들 월급을 많이 주는 것이 아니다. 동료들에게 높은 임금을 주니까 내가 부자가 되었다”고 강조한, 종업원을 최우선으로 대우한 인간적인 기업인이다.
로버트 보쉬는 기업 간의 신뢰관계도 인간관계의 연장선상에서 매우 중시했다. “신뢰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돈을 잃는 것이 낫다”라고 말한 로버트 보쉬의 철학은 “기업을 운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를 쌓는 것이고, 이를 쌓기 위해 빈틈없는 품질, 우수한 성능, 동료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라는 보쉬의 경영 이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더에 대한 신임도 절대적이다. 단기 실적에 수명이 결정되는 유럽 기업의 전문 경영인 체제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창사 이래 125년간 보쉬에는 6명의 CEO만이 있었다. 이는 보쉬만의 철학이 끈끈하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안정적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의미한다.
②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지배 구조
보쉬의 지분 구조는 독특하다. 비상장 회사로서 보쉬의 지분 대다수를 가진 로버트 보쉬 재단은 의결권이 없다. 소수 지분을 가진 보쉬 가문은 의결권이 있지만,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분이 없는 신탁법인이 위임을 받아 의결권을 행사한다. 지분과 의결권이 별도로 운영되는 구조로서 안정적이며 장기적 관점의 사업 수행이 가능하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무렵에 로버트 보쉬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점찍었다. 로버트 보쉬는 장자인 로버트 보쉬 주니어가 열한 살 때부터 회사의 재고 관리를 시켰고, 스무 살이 될 무렵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후계자로서 회사를 이끌어가야 할 로버트 보쉬 주니어는 오랜 지병으로 더는 회사 업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외부 환경에 쉽게 흔들리는 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로버트 보쉬에게 던지고 있었다. 나치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회사를 보호하고, 전쟁 과정과 그 이후에도 반복해 발생할 수 있는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회사를 지키고 오랫동안 지속시키고자 로버트 보쉬는 독특한 지배 구조를 도입하기로 한다.
그는 보쉬의 경영은 전문 재단에 맡기기로 하고, 공개된 주식을 다시 사들여서 비공개 유한회사로 운영하기로 결정한다. 현재 보쉬의 지분은 공익재단인 로버트 보쉬 재단이 92%를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 7%는 보쉬 가문이, 그리고 1%의 지분만이 보쉬의 소유로 되어 있다. 92%의 지분을 보유한 로버트 보쉬 재단의 경영에 대한 권리는 로버트 보쉬 산업 신탁에 위임되어 관리되고 있다. 소유와 경영의 완벽한 분리다. 보쉬에서 발생하는 이익금은 로버트 보쉬 재단에 의해 건강, 교육, 민족 간 이해도 증진 같은 공공사업에 재투자돼 많은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로버트 보쉬는 “로버트 보쉬 재단은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유지돼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재단은 재무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운영되어서 적절한 행동을 스스로 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재단의 설립 목적을 밝혔다. 운영상의 높은 자유도, 탄탄한 재정적 뒷받침, 그리고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독립 덕분에 회사의 지속가능성은 커지고 장기적 관점에서의 사업 계획 및 대규모 투자도 적극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③ 삶을 풍요롭게 하는 혁신 유전자
보쉬의 슬로건은 ‘삶을 위한 발명’이다. 제품 성능만을 위한 혁신과는 차원이 다른, 사용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가치가 있는 제품을 만들자는 의미다. 보쉬에서 개발되는 제품이나 부품에는 쉽게 모방할 수 없을 만큼 혁신적이면서도 삶에 이로워야 한다는 창업자의 정신이 살아 있다. ‘기술의 진보는 인류에게 이로워야 한다’라며 기술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설계되고 개발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로버트 보쉬의 사상이 보쉬만의 혁신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1920년대 초반, 연료 급유기 개발의 필요성에 대해 보쉬 내부적으로 논쟁이 있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급유기 시장이 너무 작고 기술적 난도가 높아서 제품 개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부품의 잠재적 가치에 주목한 로버트 보쉬는 지속적으로 개발을 추진했고, 2년 후에야 가까스로 성공하게 된다. 시장 규모는 비록 작았지만, 우수한 기술력으로 제품화 이후 곧바로 40%에 가까운 점유율을 보였다. 그리고 시장의 빠른 성장에 힘입어 보쉬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품으로 자리 잡는다.
1950년대 중반부터 보쉬는 자동차 산업에서 전장 부품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사용자 편의성은 물론 안전성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기계 부품의 전자화가 필요하다고 인식한 보쉬는 차량용 전장 부품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입한다. 당시만 해도 자동차는 기계 부품들이 조립되어 구성된 기계산업의 총아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보쉬는 자사의 기존 사업 영역과 중복되고, 사업 성과에도 별다른 효과가 없는 전장 부품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게 된다. 이제는 필수 부품이 된 ABS, ESP 등 전자화된 자동차 부품을 주도하는 보쉬의 역량은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다.
보쉬의 성장 전략
보쉬는 경쟁이 치열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자동차 산업에서 주도적 위치를 잃지 않은 기업으로서 창사 이후 항상 업계 수위를 지킨 기업이다. 또한 ‘갑을 관계’로 형성된 고객사와 부품 기업 간의 일방적 거래 패턴을 뒤집은 기업으로서 보쉬는 고객사의 의견에 따르기보다 우월한 기술력으로 고객사를 선도하며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성을 유지하고 있다. 자동차의 경쟁력 향상에 반드시 요구되는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부품 기업이지만, 고객사가 함부로 관리하기 어려운 기업인 것이다. 고객사가 두려워하고, 경쟁사들이 부러워하며 배우고 싶어하는 보쉬의 성장 전략을 알아보자.
① 고객사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은 독립적 사업 수행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보쉬 자동차사업부 본사.
로버트 보쉬가 사업을 처음 시행하던 시대에 독일에는 다임러, 벤츠, 디젤 등 자동차 역사상 전설적 거장이 많이 있었다. 이들 거장이 이끄는 사업체는 보쉬의 훌륭한 사업 파트너가 됐다. 보쉬의 첫 작품으로 출시 5년 만에 회사 매출의 50%를 점유해 안정적 성장의 바탕이 된 자동차용 엔진 점화기는 개발 단계부터 다임러와 공동으로 제품화를 추진한 부품이다.
부품 사업에서 다양한 파트너의 중요성을 인식하던 로버트 보쉬는 한정된 소수 기업에만 과도하게 의존하기보다는 안정적 생산 규모를 갖추기 위해 다수의 파트너를 찾는 것을 마다치 않았다. 기존 파트너는 보쉬가 자신들과의 관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돈독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보쉬는 부품의 표준화 및 모듈화를 통해 최소한의 자원 투입으로 다수 파트너를 만족하게 했다. 심지어 보쉬는 기존의 사업 파트너와 경쟁 관계에 있는 새로운 파트너와 제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고객사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조직적 대응도 서둘렀다. 1926년에 소개된 ‘보쉬 자동차 서비스’는 지금은 140개 국가로 확대돼 있다. 보쉬와 거래 관계에 있는 고객들은 마치 자신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처럼 느낀다. 이렇게 형성된 신뢰 관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에 보쉬와 기존 파트너의 거래 관계가 바로 복구되는 기적을 일으킨다.
② 사업 매각 및 제휴가 자유로운 조직 운영을 통한 성공적 사업 다각화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보쉬의 조직은 불필요한 사업은 정리하고 유망한 영역에는 빠르게 진입할 수 있도록 매우 유연한 구조로 되어 있다. 전기차의 핵심인 리튬이온전지 산업에 진출하고자 2008년 삼성SDI와 제휴를 맺은 보쉬는 2011년 다임러와 합작법인을 세워 전기차의 또 다른 핵심 부품인 모터 산업에도 진출했다. 심지어 태양광 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태양광 발전의 핵심 부품인 웨어퍼 셀과 모듈 제조회사인 에르솔 솔라를 2008년에 인수하기도 했다.
현재 보쉬의 사업 영역은 자동차 부품 부문, 전동공구 및 가전제품이 속해 있는 소비자 제품 및 건설 부문, 그리고 공장 자동화 설비 및 식품과 의약품 포장 사업을 수행하는 산업 제품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다양한 영역에 진출해 있는 사업 구조 덕분에 보쉬는 특정 시장의 상황이 어려워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기록해 왔다.
보쉬 사업 확장의 원칙
창업 초기에 보쉬의 주력은 자동차용 엔진 점화기에 한정돼 있었다. 사업 초반 일시적 어려움으로 24명의 전체 직원 중 22명을 해고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보쉬는 자동차용 엔진 점화기에 집중해 12개의 변종 제품을 출시했을 뿐 다른 제품을 개발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안정적 성장을 누리던 1920년대 중반까지 보쉬의 사업군은 자동차 부품에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대공황에 이은 정치적 불안정은 수주 물량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고, 매출 규모가 반 토막 나면서 로버트 보쉬는 수많은 직원을 다시 해고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마침내 로버트 보쉬는 제한된 사업 영역을 벗어나기로 했다. 사업 다각화를 통해 예측이 어려운 수요 변화에 대응하고 정체된 사업 성장세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한때 낙농업에도 진출하고, 자동차 사업도 전개한 적이 있지만, 보쉬의 사업 확장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먼저, 시장 상황에 맞게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디젤 엔진이 주목받으면서 당시 보쉬의 전체 매출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자동차용 엔진 점화기가 디젤엔진에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보쉬는 디젤엔진에 필요한 부품을 빠르게 개발했다. 마침내 보쉬는 모든 디젤 엔진에 필요한 부품과 시스템을 직접 개발하고 생산, 판매까지 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표준화된 부품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현재 보쉬는 모델별로 변형된 제품까지 포함한다면 35만 개의 제품을 보유하고 있다. 창사 당시에도 자동차용 엔진 점화기의 변형 제품을 고객사의 요구에 맞추어 12개까지 제작했다. 고가 제품인 인젝션 시스템도 인도의 자동차 기업인 타타의 초저가 모델인 나노에 적용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변형했다.
두 번째로, 지속적 수익 창출을 위해 기존 사업군에 집착하지 않았다. 2003년에 과감하게 매각한 보쉬의 조명 시스템은 90년 가까이 보쉬의 핵심 사업 영역이었다. 최근 보쉬가 잇따라 진출한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리튬이온전지, 모터, 그리고 제어시스템 영역도 내연기관 사업 영역의 매출을 잠식할 가능성이 큰 부품이다.
③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을 기회로 인식한 적극적 현지화
글로벌 전략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1920년대 초반에 로버트 보쉬는 “경쟁이 없는 시장을 오랫동안 독점하는 것만큼 기업에 나쁜 환경은 없다”며 “경쟁을 위협이 아닌 기회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버트 보쉬는 창업 전에 다양한 국가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독일에서 3년간의 도제 경험, 영국 및 미국에서의 직장 생활을 거친 후 회사를 창업한 로버트 보쉬는 “글로벌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함은 인류에 이로운 제품을 만드는 기업인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현지에 진출하는 것만이 다양한 사업 기회를 창출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한 보쉬는 1906년에 신흥 시장으로 주목받던 미국에 생산 공장을 설립했고, 1913년에 이미 전체 매출의 88%를 독일 밖에서 창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보쉬에서 생산한 점화 시스템은 영국산 자동차의 90%에 장착돼 있었다.
보쉬는 현지에서 성공하기 위해 현지 기업과 제휴는 물론 경쟁사와의 제휴도 마다치 않았다. 무려 90년간 프랑스의 라발레트(Lavalette)와 제휴관계 유지, 1994년 한 해에만 다섯 군데의 한국 기업과 조인트 벤처(JV) 결성, 그리고 중국 및 러시아 시장에서도 다수의 현지 기업과 JV를 구축한 것 등이 그 예다. 2006년에는 경쟁사인 일본의 덴소와 JV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요 시장의 특성에 맞추는 적극적 현지화 전략으로 오늘날 보쉬는 60개 국가에 직접 진출했고 판매 법인까지 포함하면 150개 국가에 진출해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현지 기업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현지화된 보쉬는 자동차 부품산업의 특성에 적합한 현지화 전략을 구현하며 강력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④ 연구개발을 중시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개발 인력 육성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절대로 줄일 수 없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회사 수익구조의 어려움에 직면한 보쉬의 CEO가 강조한 말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안정적인 연구개발 환경을 보장받은 보쉬의 연구개발 인력은 전체 인력의 12%가 넘는다. 해마다 3000건이 넘는 특허가 출원되는 매우 활발한 조직이다. 사업에 어려움이 있어도 연구개발을 중시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개발 인력을 육성하는 전통은 보쉬가 창의적이고 우수한 기술 역량을 보유한 비결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혁신이라고 인식하는 보쉬는 업계 최다 연구 개발 투자를 통한 차별적이고 끊임없는 기술 혁신으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매년 매출의 10% 수준까지 연구개발에 투자하면서 신기술 및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적극적으로 발굴한다.
보쉬에 의해 등장한 최초의 기술은 일일이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디젤엔진 연료공급 펌프, 엔진 전자제어 시스템, 커먼레일 시스템 등은 자동차의 핵심 기술 분야인 구동 부품에서 보쉬의 높은 점유율의 원천이기도 하다. 전동공구에서도 보쉬는 리튬이온전지를 최초로 채택했고 향후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했다.
그렇다고 보쉬가 새로운 기술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기존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전략도 병행한다. 자동차용 엔진 점화기는 보쉬가 최초로 내놓은 작품은 아니었다. 독일 여행을 하는 중 로버트 보쉬가 우연히 발견했지만, 특허 출원이 안 돼 있는 것을 알고는 실용적으로 변형해 출시한 것이다. 한편 이때부터 로버트 보쉬는 특허권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1909년에 보쉬는 이미 모든 특허 이슈를 관장하는 별도의 부서를 설립했다.
또한 보쉬의 혁신 기술은 시장 동향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다. 1900년대 초반, 로버트 보쉬는 자동차가 이미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며 급속하게 대중화될 것임을 예측했다. 최초의 대중적인 자동차인 포드의 모델 T에 보쉬의 자동차용 엔진 점화기가 장착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자동차용 부품의 전장화도 일찍부터 예측하고 준비했다. 자동으로 엔진의 가동 및 정지 시점을 제어해 차량의 운행 효율성을 증진하는 Start·Stop 시스템은 물론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 전기차의 주력인 리튬이온전지, 변환기기, 그리고 모터를 이미 내재화해 다가오는 전기차 시대를 앞장서서 준비하고 있다.
시장을 주도하는 B2B 기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업 환경이 빠르게 바뀌면서 고객사가 시키는 것만 잘하는 ‘순종적인 B2B 기업’보다는 ‘알아서 잘하는 경쟁력 있는 B2B 기업’이 주목받고 있다. 완제품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부품의 차별적 성능, 원가 경쟁력, 그리고 현지화 역량으로 고객사의 성공을 돕는 ‘시장 주도적 B2B 기업’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다.
불황이 본격화되면서 고객사는 하루가 다르게 ‘더 싸고 더 좋은 부품’을 요구하고 있다. 사업 환경이 더 악화될 것 같은 불안감을 안고 있는 B2B 기업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론을 보쉬의 성공 사례에서 찾는 것은 어떨까.
보쉬만의 특수한 환경에서나 적용 가능한 사례라고 여길 수 있지만, 보쉬가 속해 있는 자동차 부품 산업은 수많은 부품의 성능 및 원가 경쟁이 글로벌하고 치열하게 펼쳐지는 산업으로, B2B 사업으로 일반화하기에 적합하다. 최근 사업 환경이 어렵다 한들 보쉬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세계 대공황을 견딜 때보다 열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을 주도하는 보쉬와 같은 B2B 기업은 탁월한 성과 저변에 깔려 있는 일관된 경영 철학, 그리고 이를 구현하는 치열한 성공 전략이 있다. 국내의 B2B 기업도 보쉬의 성장 전략인 고객사와 균형 잡힌 관계 형성, 사업 매각 및 제휴가 자유로운 조직 구조, 경쟁을 기회로 인식하는 적극적인 해외 진출, 그리고 연구개발을 중시하고 장기적 관점의 연구개발 인력을 육성하는 전략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적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