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회 이야기
- 1920년 봄 조선인에 의한 신문이 창간되었다. 대한제국과 함께 사라진 지 10년 만이었다. 개조와 자각의 기운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1년 전 기미년 봄에서 비롯되었다. 3월 1일 시작된 ‘독립 만세’에 대한 응답은, 무력과 억압을 완화해 세련된 통치를 구사한다는 ‘문화 정치’였다. 9월 1일, 식민통치 2기를 수행할 새 총독이 부산항에 들어왔다. 다음 날 서울 땅을 밟은 총독을 맞이한 것은 폭탄이었다. 멀리 러시아 연해주에서 내려온 60대 노인의 허리춤에서 나온 한 발의 수류탄이 역두에 작렬했다.
2005년 재현된 3·1절 행사.
을사조약과 5년 후 병합조약은 한 방의 총성도 울리지 않고 체결되었다. 조인이 되고 나서 항의 표시로 개개인이 자결을 하거나 시위를 한 경우는 있었지만 조인에 이르기까지 이를 막고 나서는 집단적 움직임은 뚜렷이 없었다. 궁정 안에서 입씨름과 고함이 있었을 뿐 협정 통과 과정에서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은 무혈 조약이었다. 세월이 흘러 1919년 3월 초, 남대문통 거리는 유혈사태로 얼룩졌다. 그로부터 두 달간의 시위와 진압으로 전국에서 7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중보다 일찍 역에 도착한 환영객들은 명찰을 교부받아 가슴에 달고 역사 좌측 화물반출구를 통해 입장했다. 그리고 도면에 그려진 대로 플랫폼의 정해진 위치를 찾아가 섰다. 군인과 조선귀족, 조선총독부와 산하 각 관서의 기관장들이 다 모였다. 우도궁(宇都宮) 조선군사령관, 정법사(淨法寺) 20사단장, 방하(芳賀) 총독부의원장, 도변(渡邊) 고등법원장, 대야(大野) 군참모장, 오전(奧田) 여단장, 촌전(村田) 소장, 하내산(河內山) 재무국장, 송영(松永) 경기도지사, 금곡(金谷) 경성부윤 등이 구획별로 나뉘어 정렬했다. 여기에 각국 외교관 일동, 은행계와 실업계 유지, 신문 관계자들을 합쳐 1000명 규모의 환영단이 플랫폼을 가득 메웠다.
기미(己未) 1919년, 대정(大正) 8년이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조선어 신문인 조선총독부 관영 매일신보는 9월 2일의 남대문역 광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5시가 되자 121호 기관차가 끌고 온 부산발 임시급행열차가 천천히 역내에 굴러들어올 때 남산의 한양공원 서쪽, 성벽 고지에서 야포병 대대가 발사한 19발의 예포소리는 은은히 경성 용산의 하늘에 울렸다. 열차가 멈추자 맨 가운데 귀빈차에서 구보(久保) 만철경성관리국장의 선도로 차에서 내린 재등(齋藤) 총독은 흰 해군대장 정복에 가슴에는 훈일등욱일장(勳一等旭日章)이 찬란히 번쩍이고 수야(水野) 정무총감은 프록코트. 총독 부인, 총감 부인, 시전(柴田)학무국장, 환산(丸山)사무관, 수옥(守屋) 이등(伊藤) 양 비서관과, 부산까지 마중 나간 국분(國分)사법국장도 내린다. 출영자는 일제히 모자를 벗고 경례를 하였다.
미소를 띤 총독은 수야 총감과 더불어 플랫폼 환영객 앞을 차례로 통과하여 정중히 인사하고, 특별히 중요한 손님들과 외국영사단, 조선귀족들에게는 친히 손목을 잡고 인사한 후 일행은 귀빈실로 들어갔다.
군복에 프록코트에 일본 겉옷 하오리(羽織)-경성의 명사들이 저마다의 복장으로 총독의 뒤를 따라 영접장을 나섰다. 역 바깥에는 동원되거나 구경 나온 수많은 사람이 말 그대로 운집했다. 하늘에는 잔뜩 구름이 깔리고 대지에는 음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거리는 아침부터 일장기로 물결쳤다.
총독이 탄 열차가 부산을 출발한 것은 오전 7시 반이었다. 7시 정각 출발로 알고 새벽잠도 설친 채 일찌감치 역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300여 출영객은 영문도 모르고 저마다의 위치에서 30분을 더 대기했다.
5시쯤 둥둥 떠오르는 햇빛이 망망한 바다에 키스할 적에 신 총독과 정무총감 일행은 일찍이 잠을 깨어 초가을 새벽바람이 부드러이 얼굴을 스쳐갈 적에 응접실 의자에 늘어앉아 부산의 아침 경치를 바라보며 즐거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좌좌목(佐佐木) 경남도지사, 전중(田中) 이왕직 사무관, 본전(本田) 부산부윤, 구보(久保) 만철경성관리국장 등의 예방이 있었고 수행원들은 분주히 짐을 옮겼다. 부산시내는 오전 5시부터 검은 무늬 놓은 하오리와 프록코트 차림의 전송자들이 정거장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각 여관에 투숙한 서울서 온 환영자들도 일찍부터 일어나서 모두 출발 준비를 하고 6시경의 정거장에는 전날 총독이 부산에 도착할 때와 같이 관리 시민 재향군인회와 애국부인회원, 경성에서 온 환영단으로 파묻혔다.
1933년 하늘에서 본 경성 시가지 모습.
“조선에 부임한 후 첫인상? 그것은 산야가 푸르게 된 것이다. 대정 4년에 이곳을 통과할 적에 비교하면 생기가 발랄하다. …원래 조선은 구미 각국이 가지고 있는 식민지와는 다르다. 다른 나라의 식민지들은 그곳 토인들의 지식도 낮을 뿐 아니라 인구도 별로 많지 못하고 본국사람이 이주하면 자연히 그 세력에 눌려서 점점 수효도 줄어가는 것이지만 …조선을 통치할 때는 결코 외국에서 식민지를 다스리는 것처럼 하여서는 불가하다.”
자결
기차가 수원을 지날 때 신임 총독은 양복을 벗고 해군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기모노 차림의 총독 부인의 가는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였다. 부산까지 1박2일로 마중 내려온 이완용도 열차에 동승했다. 조선의 귀족 노릇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관악산 자락을 끼고 안양천을 따라 오르던 북행 열차는 경인선과 만나며 급우회전한다. 영등포역을 지날 때 총독부 토목국 관리들의 환영을 받았다. 영등포역이 1899년 9월 경인선 철도와 더불어 생긴 지도 꼭 20년이 되었다. 너른 평야의 비옥한 토질에서 나오는 채소와 기와를 나룻배에 실어 마포 용산 서울에 공급하던 영등포의 논밭과 포구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기차는 시흥군 영등포면을 지나 북면의 노량진리로 접어든다. 왼편 여의도 백사장 너머 육군 야외 연병장과 간이 비행장이 보인다. 세계대전 중에 촉발된 각국의 비행장 건설 경쟁으로 일본과 조선, 대만에 비행장이 서둘러 지어졌다. 조선에서의 첫 작품으로 여의도에 간이 비행장이 완료된 것이 꼭 3년 전인 1916년 9월이었다. 작년 1918년까지 4년에 걸쳐 사상 최대의 전쟁이라 할 세계대전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1910년대의 절반가량이 이 신종 괴질과도 같은 국제전쟁의 소용돌이에 파묻혔고 일본도 거기에 명함을 들이밀었다. 조선반도는 그 전란의 흙먼지 바깥에 있었다.
다 끝난 나라 밖 전쟁에 조선 사람들이 뒤늦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전쟁 끝마무리의 처리과정에서 기술적 필요에 의해 윌슨 미국 대통령이 꺼낸 제안 중 ‘민족 자결’이라는 구절이 복음과도 같이 다가온 것이다. 윌슨 대통령의 염두에 없었던 조선인들은 그 한 마디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큰 희망을 걸었다. 일본이 미국과 대등한 전승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희망은 머지않아 실망으로 바뀌었다.
판단과 믿음이 설혹 착각이고 오인이었다 하더라도 거기서 나온 행동은 그 나름의 힘으로 새 길을 열어가게 된다. 나라를 둘러싼 세계의 기운이 스스로 일어서라 독려하는 것 같고 나라를 짓누르는 임금의 붕어(崩御)가 울분을 토하게 하는 시점에 기미년 만세는 일어났다. 2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전국적인 집단 봉기에서 적어도 750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부상자는 그 두 배가 넘었다. 희생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 희생자들이 지금 새 총독과 그의 양복 입은 신사들을 불러온 것이다.
강물에 비친 인도교의 장식등
노량진역을 통과한 기차는 한강을 향해 좌로 방향을 틀며 강가 언덕 위 초라한 묘소를 비켜 지난다. 친족 간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며 원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그 이듬해 무력정변을 꾀하다 극형을 당한 사육신이 묻힌 곳이다. 최고급 관직에 있던 그 여섯 명은 참혹한 죽음으로도 부족해 가족까지 연좌되어 남자는 사형, 여자는 종으로 팔려갔다. 일족을 멸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국법, 곧 왕의 법이다. 왕이 곧 국가고 법인 것이 왕조국가다. 463년 전의 일이다. 이민족의 왕위 찬탈에 항거해 국권을 돌려달라고 9년간의 침묵 끝에 태극기 휘날리며 비무장으로 만세 부르다 집단 피살된 것이 6개월 전의 일이다.
1920년 순종의 오찬회에 참석한 인사들. 순종과 윤 황후를 비롯해 일본 총독, 외교관, 친일 인사들이 보인다.
달리는 새 조선총독부는 철교로 올라섰다. 1㎞의 한강철교는 꼭 7년 전인 1912년 9월에 하나가 더 세워져 쌍 다리로 위용과 편리를 더하고 있다. 특별 열차는 초가을 한강의 반짝이는 남빛 물결 위로 철교를 지난다. 동쪽 상류 500m 거리에 인도교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강인도교는 여름이면 경성부민이 몰려드는 피서지다. 중앙 차도 4.5m에 좌우 보도 1.6m씩 해서 폭 7.7m의 날렵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인도교 위에서 사람들은 강바람을 맞으며 전망을 즐기고 중지도 휴게공원 버드나무 그늘에서 한나절을 지내다 간다. 어둠이 내리면 인도교에 줄줄이 달린 장식등이 강물 위에 비추이며 넘실댄다. 심하게 가물었던 지난 여름, 불과 며칠 전까지도 그런 풍경 속에서 서울사람들은 애써 갈증을 달랬다.
철교와 인도교와 수원지가 들어선 그 자리에 언제 적부터인지도 모르게 오랜 세월 있어온 노량진(鷺梁津), 즉 노들나루는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다. 정조(正祖)왕이 비명에 간 아버지의 넋을 참배하러 화성에 내려갈 때마다 들러서 쉬어 갔다는 정자 터가 인도교를 남쪽 언덕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여기를 건널 때 정조와 수행원들은 강에 배다리(舟橋)를 놓았다. 왕이 행차하는 길에 만나는 개천에서는 임시 다리를 놓고 사용 후 걷어버리는 것이 조선조의 도강(渡江) 방식이었다. 행차 때마다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평상시도 백성들이 다리를 이용하도록 하라는 정조의 특별명령을 받들어 영구적으로 쓸 돌다리 하나를 만든 것이 큰 화제가 되었다. 관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안양천 상류의 개천에 축조된 30m 길이의 만안교(萬安橋)다. 1795년, 그러니까 124년 전의 일이다. 1900년 한강에 기차 지나는 철교가 놓이고, 1917년에 사람과 자동차 다니는 인도교가 놓이게 될 때까지 한강에 다리는 없었다.
나루터는 서북쪽 마포와 동남쪽 동작리에서 어느 날이 마지막일지 모를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저 멀리 마포 앞 밤섬 위로 새들이 무리 지어 날고 동작리 못미처 흑석리 강변 봉긋 솟은 언덕 위에 한강신사(神社)가 서 있다. 일명 웅진(熊津)신사로 불린다. 웅진이라면 서기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옛 수도였던 지금의 공주(公州) 땅인데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강 유역에서 밀려나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던 것인데, 그 곰나루―웅진에는 금강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 속의 여자 곰의 영혼을 위로해 참배하는 곰 사당이 있다 한다. 일본인들은 그 곰 사당도 웅진 신사라 부른다. 한강변 한산성(漢山城)을 버리고 100㎞를 남하한 백제의 64년 천도지 곰나루가 1400년 세월을 건너 한 일본인이 경기도 시흥군 흑석리 한강변에 1912년 10월 건립한 일본사당의 이름에 다시 붙었다.
한강의 웅진신사에서는 관원도진(菅原道眞)을 비롯한 세 신(神)을 모신다고 한다. 관원도진은 천년 저편 일본에서 대학자, 시인, 정치가로 활동하다 죽어 신격화되었다. 학문의 신, 천신(天神)으로 추앙받는다. 일본 사람들은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은 죽어 신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산다 한다. 작년에 예산 50만 원을 1차로 책정해 남산 중턱에 20만 평을 확보하고 내년에 성곽 벽을 허물고 부지 조성에 들어간다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은 두 신을 참배할 것이라 한다. 태양신이자 건국시조라는 천조대신(天照大神), 그리고 7년 전 향년 60세로 서거한 가장 근래의 천황 명치(明治)다.
기미만세 7500명, 병인박해 8000명
굉음과 검정 연기로 감싸인 철교 주변 강둑에는 널어둔 무명 흰 빨래를 걷는 아낙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이고 지고 돌아가는 초가마다 곧바로 흰 연기를 피워 밥을 지을 시간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열차는 새남터를 통과해 용산역의 거대한 단지 내로 진입한다. 사육신 중 다섯 명이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 베르뇌를 비롯해 서역에서 온 많은 신부가 대륙의 끝 이곳 새남터 강가에서 지상의 최후를 맞았다. 이때부터 수년간의 천주교 탄압으로 약 8000명의 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한다.
용산역은 단순한 역이 아니다. 동서남북으로 주요 철도노선이 뻗어나가고 수렴되는 조선 철도망의 심장이다. 나아가 일본제국이 그려가고 있는 동아시아 광역교통망의 중심이기도 하다. 3평 남짓한 오두막으로 시작한 용산 역사(驛舍)는 경의선의 시발점이 되면서부터 북유럽풍 목조 2층으로 들어섰다가 지금의 480평 규모의 고딕식 서양 건물로 재탄생했다.
용산 역사 서쪽, 선로 건너편은 반원형의 광대한 부지에 차량기지가 숱한 선로와 얽혀 들어차 있다. 역사 옆 남쪽으로는 총독부 철도국과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이 자리 잡고 있다. 역사 앞 광장은 한강통 대로를 향하여 방사형 도로로 이어져 있다. 남에서 올라오는 군인과 보급물자, 북조선과 그 너머 만주 시베리아 방면으로 북상하는 군인과 무기가 모두 이리로 집결한다.
역사 밖에서 한강에 이르는 한강통 대로의 양편으로 철도 관사가 바둑판처럼 반듯반듯 형성되어 있다. 철도 종사자들이 사는 수백 호의 주택이다. 길 건너 철도병원 뒤편에까지 늘어선 관사부지는 철로를 중앙선으로 해 용산역 구역 안과 바깥을 하나의 거대한 원처럼 형성하고 있다. 여기를 중심으로 한강통 3정목 일대를 일컬어 신용산이라 한다.
9시간 반의 여정
열차는 용산역에서 용산 군사령부의 환영을 받았다. 역 앞 한강통 대로 너머 용산헌병대가 버티고 있다. 헌병은 올봄 지방 곳곳에서 일어난 시위 진압을 주도했다. 헌병은 이제 새 총독 부임과 함께 민간치안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헌병대 뒤로 조선군사령부로 통하는 진입로가 열린다. 북조선의 나남 19사단과 남조선의 용산 20사단, 그리고 나진 원산 진해의 해군요새사령부를 통할하는 총지휘부다. 유럽풍 건축의 백미라는 평을 받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 총독 용산 관저도 그 안에 있다. 여기서부터 오른쪽 차창 밖으로는 한강통 길을 따라 상가의 좁은 띠를 두른 군부대의 담장이 한참 동안 이어진다. 군수물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거대한 육군창고를 끼고 기차는 욱천(旭川)을 따라 오른다. 일본식으로 개명되기 이전의 원 이름은 만초천(蔓草川)이다. 덩굴내라고 불려온 서울 서부 지역의 가장 큰 개천이다. 성 안에 청계천이 있다면 성 밖에 만초천이 있다.
현저동 무악재에서 발원한 개천은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밖 사거리의 고양군청 뒤를 돌아 경교(京橋) 밑을 흘러, 6개월 전 만세 소요 속에 20년 만에 폐지된 서대문기차역 앞으로 해서 서소문 밖 옛 사형터를 끼고 염천교 밑을 흘러 오른쪽으로 약현성당을 올려다보며 남대문역 뒤로 흐른다. 열차길과 나란히 흘러가다 용산역에 가까워지면서 ㄴ자로 크게 방향을 틀어 용산역 철도부지 뒤를 활처럼 감돌아 한강철교 서북방 한강으로 흘러든다.
서울 서부의 황량한 넓은 들을 가로지르는 만초천 양편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은 밤이면 등불을 들고 넝쿨풀 무성한 냇물을 헤치며 게 잡이를 벌이곤 했다. 이제 개천 주변은 일본인 주거지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다. 냇물 주위를 아우르며 길게 자리 잡은 원정(元町)은 남산 자락에 이어 최대의 일본인 거주 구역이 되었다. 구용산이라 부르는 이곳은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전 한강 나루터로 나가는 모래벌판이었다.
그 욱천을 거슬러 올라 제3대 총독을 실은 기차는 목적지에 다가서며 기적을 울린다. 툭 터진 전방으로 인왕과 북악과 목멱의 산봉우리가 한눈에 가득 펼쳐 들어온다. 분지 위에 가득 고인 흐린 구름 아래 경성은 고요해 보인다.
“각하, 게이조(京城)입니다.”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장의 설명이 있고 곧 열차는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띠구름과도 같은 인파가 긴 행렬을 이루고 있다. 9시간 반의 여정이었다. 동경 출발로부터 5박 6일간의 긴 여로가 종점에 다다랐다.
10년 만에 사라진 칼과 제복
그날 아침, 총독 일행을 태운 기차가 떠나가고 300여 전송객도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갈 때 한림도 노인을 대동하고 부산역 구내를 빠져나갔다. 바로 옆 선착장으로 향하면서 한림은, 총독이 가는 서울은 어떠할까―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회사 사장과 연분이 있는 서부 경남 지역의 원로 실업인이다. 신임 총독 환송식에 초대받고 아침 일찍 역에 나왔던 것이다. 그저께 지방에서 올라와 이틀 밤을 묵었다. 이제 한림의 보좌를 받아 배를 타고 집으로 향할 것이다.
노인과 한림은 어제도 일찍 일어나 발길을 서둘렀다. 그날의 행선지는 부산항. 일본에서 들어오는 총독을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9월을 맞는 첫날, 월요일 아침이었다. 잔뜩 흐린 바다 쪽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9월 1일 오전 8시. 용두산 바로 위 복병산(伏兵山)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 화약이 아침 하늘을 뚫고 올랐다. 색색의 빛깔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산정의 하늘가를 물들였고 은은한 폭음은 500m 동쪽 항구 일대를 감싸며 울려 퍼졌다. 복병산 위 배수지와 측후소 주변 산벚나무들 위로 새떼가 날아올랐다. 복병산은 개항 전 저 아래 있던 왜관(倭館)을 감시하던 봉우리라 한다. 저 앞 부산포와 절영도 앞 바다는 1592년 임진(壬辰)년의 음력 9월 1일,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를 이순신의 수군이 기습하여 대파한 곳이다.
특별 연락선은 기적 소리와 함께 부산항에 코를 들이밀었다. 신라환(新羅丸)이라 쓰인 이름이 뱃머리에 선명하다. 신임 총독과 수행원과 하인 등 29명이 탄 배가 항구에 다가오자 환영하는 사람들이 잔교(棧橋)로 향하여 물결치듯 밀려갔다. 항구 밖에는 부산 전역에서 몰려든 자동차가 부산역 앞까지 길게 줄지어 섰다.
부산 방면에서 사사키(佐佐木) 경남도지사, 전소(田所) 진해(鎭海) 해군사령관, 러시아 영사, 류택(柳澤) 부산지방법원장, 송정(松井) 세관장, 본전(本田) 부산부윤, 진엽(榛葉) 토목출장소장이 출영 나왔다.
강촌(岡村) 부산역장의 안내를 받아 총독과 총감은 갑판에서 300여 관민(官民) 환영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 상륙하여 적택(赤澤) 헌병분대장 교본(橋本) 부산경찰서장이 앞장선 가운데 자동차로 도열한 군중 사이를 지나 대지(大池)여관으로 향하였다.
총독이 부산항에 발을 디딘 바로 그날부터 경성의 조선총독부와 전국 산하 기관 및 관청에는 관리들의 복장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금테 두른 위압적인 제복과, 덜렁덜렁 시선을 제압하던 문관(文官) 칼 착용이 9월 1일부로 폐지된 것이다. 무단(武斷)통치는 10년 만에 끝났다는 상징적인 몸짓이었다. 매일신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날 아침 총독부에는 각 과장들이나 고등관들은 양복들을 입고 점잖게 앉은 모습이 마치 은행이나 회사에 들어선 것도 같아 보인다. 그전에 입던 제복에서 금테만 떼어버리고 그대로 입고 온 사람도 있다. 모자걸이에는 일제히 파나마 혹은 맥고모자가 걸려 있었다. 별안간 복색이 변한 까닭에 그네들은 허리가 허전한 것처럼 더듬어보기도 하며, 이제는 퇴근길에 국수집을 좀 들어가도 상관이 없겠다고 매우 시원히 여기는 모양이며 이왕에 못 보던 평민적 기분이 총독부 안에 가득하였다.
9월 1일은 개학일이었다. 어제까지 기차역마다 붐비던 학생들의 모습은 일제히 사라졌다.
그동안 하기휴가를 이용하여 시골학생들은 모두 집에 돌아가서 그리운 부모형제를 만나 두어 달 동안 편히 쉬고 서울학생들은 각처 지방으로 명승지를 찾아 여행하여 시커멓게 그을은 얼굴로 가을 개학을 위하여 요 며칠은 남대문역에 학생의 얼굴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날 새벽. 검은 해협의 갑판 위를 총독은 홀로 거닐고 있었다.
“각하,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동승한 일본 기자의 인사에 61세의 총독은 대답했다.
“일찍 일어나면 대단히 상쾌하지. 더욱이 배 안에서는 일찍 일어나야 해.”
사이토 총독은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최초의 미국 주재 무관을 지내며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 안목을 기른 이래 7년간 해군차관을 거쳐 9년간 해군대신을 역임하기까지 일평생 해군으로 지내왔다. 매일신보 특파원은 오전 6시 신라환 안에서 무선전보로 밤사이 신임 총독의 동정을 경성 본사로 송고했다. 부산과 나가사키(長崎)를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이 가설된 지 35년이 되었지만 최근에는 무선공학의 발달로 장소에 구애하지 않고 전파에 의해 무선으로 전보를 쏠 수 있게 되었다.
경성 불온(不穩)
서울 이촌지구에 재현된 배다리.
앞서 총독의 기차는 31일 밤 9시 종착역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일행은 곧바로 연락선으로 갈아탔다. 하관에 미리 도착해 있던 수야(水野) 정무총감이 산현(山縣) 전 정무총감과 인수인계를 한 뒤 동승했다. 그는 동경제대 법학과 출신으로 법학박사다. 제3기 조선총독부의 제반 사무는 그의 손에서 거의 처리될 것이다.
사무인계는 31일 아침 수야 신총감이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함과 함께 10시 반부터 호텔 2층 9호실에서 거행되었다. 둥근 테이블을 중간에 놓고 안락의자에 마주 앉은 신구 총감의 얼굴에는 각각 섭섭한 빛과 희망의 빛이 나타났다. 뭉텅이로 쌓인 서류는 지난 십 년동안의 조선통치를 말하는 듯하다.
8월 12일 임명장을 받은 사이토 총독이 동경을 떠난 것은 8월 28일이었다. 그사이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통치방식에 대한 천황의 발표가 있었다. 이세(伊勢)신궁에 들러 참배하고 경도(京都)에 여장을 푼 29일 총독은 “경성 불온(不穩)”이라는 정보 보고를 받았다. 두 무관을 먼저 경성으로 출발시켰다. 병합 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북해의 여인
복병산 아래 40계단 층층대를 한림은 내려섰다. 9월 2일 아침, 저마다 집을 나선 발걸음들이 분주하다. 남쪽으로 빤히 보이는 용두산 자락까지 5분을 걸어 내려가면 본정(本町) 거리가 시작된다.
한림은 부두에서 노인을 보내고 오는 길이다. 승강구를 통해 갑판에 올라 1등석 자리를 잡아 앉히고 인사를 드린 뒤 잔교(棧橋)로 내려선 한림은 여객선이 뱃고동을 울리고 암회색 연기를 토하며 선착장에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배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장기가 미풍에 흔들리는 뱃머리 너머 구름 사이로 여름을 막 비켜선 태양이 뿌연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잔교의 나무 상판 사이로 몇 가닥씩 얽히고 뻗은 열차 선로의 서늘하고 미끄러운 금속 촉감을 구두 바닥에 느끼며 한림은 잔교 앞 식당으로 들어갔다.
밥 먹는 사람 차 마시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 환영객 환송객, 웃는 사람 우는 사람, 일본 사람 조선 사람, 언제나 잔교식당은 붐빈다. 낯익은 일본인 지배인이 한림에게 다가와 인사한다. 그 곁에 선 낯선 처녀가 어색한 몸짓으로 주문을 받는다.
“하나코 양, 백산상회의 단골이시다. 한 선생, 언제나처럼 잘 부탁드립니다.”
전국의 유학생들은 엊그제까지 모조리 일본으로 다 빠져나갔다. 지난 한 주 동안 여기서 마시고 간 커피 잔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학생들이 없어서 멋쟁이들은 많이 사라진 듯해도 간혹 우글대는 좌석들 사이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우아한 자태들도 있다. 그네들의 연지 묻은 찻잔과 수저를 크고 두꺼운 쟁반 가득 쓸어 담고 수수하게 지나가는 새 종업원을 쳐다보며 지배인은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하나코는 북해도 시골에서 왔습니다. 대도시의 메인 스트리트에 인접한 조선의 관문, 이곳에 출입하시는 우미(優美)하신 고객들을 모시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무엇보다 성격이 좋아 특별 채용했습니다.”
개학 시즌의 대목을 성공리에 완료하고 총독 일행 행차라는 뜻밖의 대행사까지 막 치러낸 긴장의 뒤끝이어서인지 동경에서 대학도 다녔다는 그는 어느 때보다도 누그러진 표정에 말이 많다. 한마디를 더 보탠다.
“북해도는 먼 곳이지요. 어제 들어오신 총독께서 총애하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등 뒤로 아름답고 위압적인 붉은 벽돌의 르네상스식 2층 부산세관 청사와 그 위로 뻗어 오른 4층탑이 망루처럼 부산항과 9월의 바다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조선의 문호(門戶)라 부르는 그 세관 옆 해변에 부두 진입로를 끼고 마주 선 부산역은 조선의 현관(玄關)이란 호칭답게 유럽풍의 거대한 몸집을 10년째 드러내고 있다. 배에 싣고 내리는 화물은 잔교에 깔린 선로를 통해 바로 역사와 이어져 수송되고 연락선으로 입항한 사람들은 바로 부산역에서 경부선을 타고 경성과 만주로 향한다. 부산역만큼 웅장한 역사는 서울에 아직 없다. 전국 교통의 중심인 용산역은 외관은 멋지나 규모에서는 비교가 안 되고 초라한 구식인 남대문역은 몇 년 뒤에나 현대식으로 새로 지을 것이라 한다.
경주 최부잣집
출근 시간이 다가온다. 한림의 직장은 부두로부터 서쪽으로 걸어 10분 거리다. 어제 아침 연기폭죽이 터졌던 복병산 위를 한번 올라가 보고 싶어 그리 둘러 오는 길이다. 이 부근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3년이 넘도록 한 번도 올라볼 생각을 못한 동산이다. 어제 아침 총독을 태운 배는 저 항구로 들어왔고 오늘 아침 총독을 태운 기차는 저 역을 떠나 북상했다. 총독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제와 오늘 아침 새벽잠을 설치며 총독 맞이에 동원된 노인은 저 부두에서 여객선을 타고 서쪽 지방으로 떠났다. 지역 유지 노릇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런 소감도 없다. 여생을 북해도에서 보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농경으로 일생을 끝막으려던 계획 중, 원(原) 총리의 간청을 묵살하기가 어려워 조선에 부임하게 되었다.”
동경을 출발하기 전, 재등 총독은 일기에 그렇게 썼다. 독일 지멘스사가 군함 수주 건으로 해군 요로에 뇌물을 뿌린 사건이 해군에 숙정 바람을 불러오자 예편을 한 뒤에 총독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하지 마라.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 없게 하라. 흉년기에는 밭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이런 가훈 아래 300년 이상 갑부로 내려오는 경주 최부잣집의 적통 최준(崔浚)은 선대부터 노인과 오랜 지기다. 최준은 부산의 대표적 회사인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사장이다.
동쪽 바다 위로 한참이나 솟아오른 햇살 아래 역과 부두를 내려다보며 한림은 출근시간도 잊고 한참을 서 있었다. 1919년 9월. 만 스무 살이 다가오고 있다.
배와 기차가 해안 안팎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 안쪽으로 전차와 자동차가 이어지고 인력거와 자전거와 수레와 행인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화요일의 아침. 남쪽 용두산 꼭대기의 신사가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백산과 독립자금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안희제.
설립 3년간 백산상회(白山商會)로 더 잘 알려진 이 회사는 올해 5월 주식회사로 전환해 7월부터 영업을 재개했다. 자본금 100만 원. 최준과 더불어 대주주인 윤현태(尹顯泰)와 안희제(安熙濟)가 이사진을 맡고 있다. 백산은 최대주주인 안희제의 호다.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설립인가를 받은 1919년 1월부터 영업을 개시한 7월까지 조선총독부 허가를 받아 설립된 회사는 23개인데 자본금이 100만 원에 달한 회사는 서울의 경성방직과 부산의 백산무역 둘뿐이었다.
곡물과 면포 해산물 구매 및 위탁판매를 주업으로 하는 이 회사에서 한림은 해산물 구매 담당 부서의 말단 서기 일을 하고 있다. 윤현태의 숙부인 윤상은(尹相殷)과 안희제가 부산 서부지역 구포(龜浦)에 공동으로 세운 구명소학교를 한림은 다녔는데 그 인연으로 입사했다. 윤상은의 장인 박기종(朴琪淙)이 설립한 사립 부산개성학교의 후신인 부산제2공립상업학교가 한림의 최종 출신교이다. 12년 선배가 되는 윤상은은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저축주식회사 설립자이기도 하다.
백산회사가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제공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임시정부 설립 이전에도 최준과 안희제는 1916년부터 백산상회 경영과 동시에 독립자금 지원을 해왔다고 한다. 일찍이 1909년부터 안희제와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 활동을 함께 해온 윤현진(尹顯振)은 올해 1919년 4월 상해에 발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내무차장이 되었다. 함께 활동하던 남형우(南亨祐)는 임정 초대 법무차장이 되었다. 안희제는 병합 이후 1911년부터 3년간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점을 두고 중국과 러시아를 떠돌다 1914년 9월 귀국했다. 그 첫해에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마지막 해에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특파원 통신원 선전원의 이름으로 잠입하고 있다는 얘기가 7월부터 꾸준히 나돌았다. 이들이 안희제를 만나고 간다는 얘기를 한림은 여기저기서 들었다. 8월 하순에 상해임시정부에서 나왔다는 ‘독립(獨立)’이라는 신문의 창간호가 이들 인편을 통해 막 들어왔다는 소문도 돌았다. 미국 동포들의 성금을 싸들고 5월에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가 내는 돈으로 이광수가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아 신문 제호도 직접 써가며 실무 작업까지 다 한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회사에서 듣지 못하는 얘기가 어시장 위판장의 큰손들 사이에서 나돌곤 했다. 임시정부 운영자금 절반은 안희제가 모금해 조달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돈을 요구하는 모금책에게 안희제는 원하는 금액의 두 배를 안겨준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들리곤 했다. 그는 임정첩보(臨政諜報) 36호의 총책임자로, 출장 중에는 여관 36호에 투숙한다는 설에서부터, 변장술도 능하며 일본 옷을 입어 신분을 감추며, 술집에서는 항상 일본 기생을 곁에 앉힌다는 둥 별별 소문이 다 있었다.
한림에게 안희제는 그저 갈 곳 없는 청춘에게 보금자리를 주는 고마운 사주일 뿐이었다. 한림은 안희제를 자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갈색 소형 가죽가방을 들고 꼿꼿한 걸음으로 회사를 들고나던 견실한 사업가로서의 기억뿐이다. 짙은 눈썹 아래 두툼하면서도 단정한 콧수염은 꾹 다문 입매와 더불어 강직(剛直) 검박(儉朴)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멀리서 보면 그는 마치 한 그루 통 큰 대나무 같은 느낌을 언뜻 주기도 했다. 한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경칩 즈음
6개월 전, 백산의 주식회사 발족 준비가 한창이던 기미년의 봄에 만세운동이 터졌다. 회사에서 구독하는 조선어 매일신보와 일본어 부산일보에서는 그 소식이 며칠 동안 보도되지도 않았다. 독립선언서가 부산에 배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3월 3일 월요일의 퇴근 무렵이었다. 고종 임금의 국상이 치러진 날이었다. 그 장례행렬을 보려고 전국에서 20만 명이 상경하였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틀 앞서 3월 1일 토요일 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가두행진이 벌어졌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11일에 부산에서 학생들 주도로 100명이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는 이미 서울에서 5일 두 번째 대규모 시위로 남대문 일대에서 유혈 진압 사태가 벌어진 뒤였다. 상경했던 조객들이 그 광경을 보고 겪고 낙향한 뒤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서울보다 지방이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부산부(釜山府)는 부민 6만여 명 중 44%가 일본인으로, 전국에서 일본인 거주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경성인구 25만여 명 중 일본인 비율은 27%다. 들리는 말로는 경성부의 시위대 일부가 남촌의 본정통 좁은 가로를 지날 때 군경이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벌였는데 그곳 상인들이 앞장서 체포를 도왔다고 한다. 서울은 남촌만 그렇지만 여기 부산부는 본정통뿐 아니라 중심가 거의 전역이 일본 상권이고 거주지다. 개항 이전 부산포는 조그만 어촌이었다. 한림은 최대주주인 안희제가 이번 만세운동에서도 경남지방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에 간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림은 어물전과 회사를 오가며 기미년의 3월을 맞았다. 바다와 땅에서 초봄의 기운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겨울 내내 들끓었던 우역(牛疫)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던 소들이 날씨가 풀리면서 집단 폐사에서 벗어나 서서히 생기를 되찾고 있다. 서울에서 2차 시위가 벌어졌다는 5일이라면 경칩 즈음이었다.
유혈 시위
3월 5일 아침. 고양군 면서기 유광렬은 서대문 사거리의 고양군청에서 나와 남대문역전으로 갔다. 8시부터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었다. 지방으로 내려갈 사람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유광렬처럼 무슨 말을 듣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고종의 장례식이 끝난 3일 남대문역은 몰려드는 귀향객들로 사상 초유라 해도 좋을 대혼잡을 빚었다. 표를 사지도 못하고 되돌아선 사람이 상당수였다. 그야말로 물밀 듯하는 인파에 역당국은 개찰구를 미리 막아 표를 갖고도 승차하지 못하는 승객이 속출했다. 저마다 한 보따리씩 물건을 사가지고 내려가는 길이어서 혼잡은 더했다. 4일 종로와 진고개 본정의 상점들은 시골 손님들로 뒤덮였다. 시계와 귀금속을 위시해 시골에서 사기 어려운 물건을 파는 상점에서는 점원들 밥 먹을 틈도 없이 열을 올려 기록적인 매상을 올렸다. 4일과 5일 만철경성관리국은 경부선과 경의선의 객차편성을 늘리고 임시열차를 편성했다.
9시가 넘자 운집한 군중 속에 홀연히 고동색과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두 사람이 인력거를 타고 나타났다. 10년 만에 보는 태극기와 ‘조선독립’이라 쓰인 큰 깃발을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들을 선두로 행렬이 남대문으로 향하는 동안 길목마다 엉성하게 그린 태극기를 든 학생들이 줄지어 튀어나왔다. 나흘 전보다 더욱 조직적인 시위대로 보였다. 민족대표 원로들이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의 요릿집, 명월관 지점으로 급히 변경하여 총독부와 경무총감부와 종로경찰서에 집회사실을 알리고 선언문을 배달시킨 뒤 점심식사를 주문해놓고 선언문을 읽고 붙잡혀가는 동안 인근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생 군중이 별도로 만세 부르고 출발해 시가행진을 벌인 1일과는 양상이 달랐다.
전날 밤 학생대표들이 세운 계획대로 시위대는 숭례문 안으로 접어들었다. 숭례문 저지선에서 군인과 경찰은 칼을 빼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학생들을 흰 가운 입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들이 들것에 실어갔다. 시위행렬은 남대문시장으로 해서 조선은행 앞을 거쳐 명치정 입구에 도달했다. 선두에 선 30대 학생 강기덕(康基德)이 이마에 일본군인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시위대는 남대문통을 거슬러 올라 광교를 건너 보신각으로 향했다. 이와 동시에 여러 갈래의 시위행렬이 도성 안을 누볐다. 이날 이후 시위는 지방으로 번져가면서 각계로 확산되었다.
손병희와 이완용의 대좌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손병희는 거사를 모의하면서 구 왕조의 중신인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 김윤식을 참여시키려 했으나 저마다 사정을 들어 고사했다. 그는 이완용도 참여시키자 했다. 이 뜻밖의 제안에 이완용보다 더 놀란 것은 손병희의 천도교 제자들이었다. ‘매국적(賣國賊)의 이름이 선언서에 들어가면 신성한 운동을 더럽힌다. 또 그가 경찰에 고발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손병희는 이렇게 주장했다 한다.
“매국노까지 독립을 원한다면 2000만이 다 원한다는 뜻이다. 또 그는 매국적은 되었을망정 고자질할 사람은 아니다.”
손병희는 어느 비오는 날 옥인동 이완용 집을 찾았다. 깜짝 놀란 이완용은 정자를 치우고 마주 앉았다.
58세의 손병희가 물었다.
―세상에서 당신을 매국적이라고 하는데 흥국대신(興國大臣) 한번 될 생각은 없느냐.
61세의 이완용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맙다. 나는 매국적이라는 이름을 들은 지 오래다. 새삼스럽게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 없다. 이번 운동이 성공하여 독립하면 동네 사람들이 먼저 몰려와 때려죽일 것이다. 손 선생의 운동이 성공하여 내가 그렇게 맞아죽게 되면 다행한 일이다.
이완용은 손병희의 예상대로 고발하지 않았다.
독립선언서 작성을 맡은 29세의 최남선은 황금정 동양척식회사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출판사 신문관과 인근 삼각정에 있는 조선광문회 건물 양쪽을 오가며 선언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좀 더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거사에 참여한 임규(林圭)의 집으로 집필 장소를 옮겼다. 임규의 부인이 일본인이라 경찰의 감시가 덜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52세인 임규는 일찍이 을미사변이 있던 해에 일본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유학한 이래 서울의 사립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친 일본통이었다. 3월 1일 오후에 서울을 빠져나가 동경으로 간 그는 최남선이 쓴 선언서, 일본 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앞으로 작성한 독립의견서 및 통고문을 번역해 3일 일본 총리와 의회에 우송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문 초안을 일본인이 경영하는 극장 우미관(優美館)의 영화광고지 뒷면에 낙서처럼 날려 썼다. 보안을 위해서였다. 이렇게 초안을 잡은 원고는 임규의 부인이 재혼할 때 데리고 온 일본인 아들을 시켜 황금정 3정목 집에서 재동의 최린(崔麟) 집으로 보내졌다. 최린은 원고를 그의 집 벽에 걸린 거문고 안에 감추어두었다가 동지들에게 돌려 보였다. 모두 다 문안에 만족했는데 단 한 사람, 한용운만이 불만을 표시했다. 장중한 문체와 고원한 사상이라는 일반의 칭송과 달리 문장에 조예가 깊은 한용운의 눈에는 문체가 불만스러웠거나 내용이 관념적으로 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광고 전단에 날려 쓴 독립선언문
최종 결정된 원고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활자를 뽑아 조판했다. 이번에도 역시 임규의 수양아들인 일본인 중학생이 품속 깊이 숨겨 운반했다. 급박한 시간과 조여드는 긴장 때문이었을까.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선언문 첫 문장의 ‘朝鮮’은 ‘鮮朝’로 활자가 뒤바뀌었다. 임박한 예정일에 쫓기며 인쇄는 27일 밤 견지동의 천도교 직영 보성사에서 야음을 틈타 진행됐다.
이날까지 참가자들의 연명 날인도 그룹별로 완료되었다. 천도교 측 인사들은 재동의 손병희 소실(小室) 집에 모여 서명 날인식을 치렀다. 손병희는 하인이 내어온 인장을 들어 무겁게 날인했다.
그 전날 이갑성(李甲成)은 한강인도교 위에서 기독교 측 참가자들을 모아 비밀 집회를 열었다. 아직 바람 찬 인도교에는 나들이객이 많지 않은 때였다. 인도교 입구의 경관 파출소는 이 9명의 신사에게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이 특별파출소의 주요 임무는 자살자를 방지하는 일이었다. 인도교가 경성의 명물로 떠오른 이후 강물 투신 속출이 당국의 고민거리였다. “잠깐 참자(一寸待己).” 다리 난간에 크게 나붙은 팻말의 네 글자가 그날도 선명했다.
2월의 마지막 날 손병희의 가회동 집에서 열린 최종 모임에서 독립선언 장소는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으로 변경됐다. 군중심리에 의해 폭력화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터는 한 해 전까지 이완용 소유였다. 벼락이 떨어져 집 마당 고목이 두 쪽 나는 것을 보고 매물로 내놓은 것을 때마침 그해 화재로 소실된 광화문통 명월관의 주인이 인수한 것이다.
노인의 남하
9월 4일. 강우규는 안국동으로 접어들었다. 남대문역 거사 전 인근 남대문통 5정목 뒷골목에 마련했던 임시 숙소에서 폭탄 투척한 그날과 다음 날 이틀을 더 묵고서 돌아오는 길이다. 안동별궁 동쪽 담장 너머 작은 가정집으로 노인은 들어섰다.
3월 4일. 나라가 병합되자 식솔을 이끌고 길림성에 이주하여 건설한 한인촌에서 3·1만세 소식을 접하고 동포들과 만세를 부른 것이 꼭 6개월 전이다. 압록강 너머까지 북상한 조국의 만세운동에 화답해 그는 3월이 가기 전에 노인동맹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연로한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서 청년들에게 모범이 되자는 취지였다. 러시아인에게서 구입한 수류탄 하나를 사타구니에 숨겨 지니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기선을 타고 원산으로 출발한 것이 6월 11일. 다시 원산을 떠나 기차로 서울에 도착한 8월 5일에 처음 찾아든 곳이 이곳 안국동이었다.
원산에서부터 그를 도운 지인들에게서 소개받은 이 집에 머무르면서 노인은 남대문역을 왕복하며 거사를 준비해나갔다. 3·1만세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는 한편으로 만주 러시아령에서의 무장투쟁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지만 국경 바깥이 아니라 조선의 심장부에서 그 뇌관을 처음으로 터뜨린 것은 먼 길을 남하해온 64세 노인에 의해서였다.
온 경성을 뒤흔들어놓은 채 두어 곳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9월 17일 조선인 경찰의 검문을 받고 순순히 연행에 응했다. 남대문역 사건 그날 현장에 배치되었다가 파편에 부상당한 본정경찰서 소속 김태석이었다. 그는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일본 유학을 하고 귀국해 교원 생활을 하던 중 조선총독부 경찰관 통역 일을 시작으로 경찰에 입문해 고등계 형사로 수완을 보였다. 강우규와 같은 평안남도 출신이었다.
3·1만세의 여진은 더위가 오기 전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만세운동에 나섰던 사람 중 4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상당수는 재판 중이다.
7월과 함께 주식회사로 전환해 영업재개에 들어간 백산무역은 별 차질 없이 두 달을 넘겼다. 9월에 접어들면서 바닷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선선해진다. 회사는 장학회를 만들어 11월부터 운영할 것이라 한다. 이름은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라 한다. 강우규 노인이 노인동맹단으로 기미년을 기념했듯 , 이 해에 확대 개편한 백산상회도 그 나름대로 기미년을 기념하고자 함인 것 같았다.
우수한 청년을 선발해 국내 및 국외에 유학시킨다는 장학회의 준비 작업을 어깨너머로 본 한림은 ‘빛을 잃고 숨어있는 준재(俊才)를 선발 연마하여 뜻을 이룰 길을 열어준다’는 그 취지문에 감격했다. 제1회 장학생으로 10명을 선발하는데 신청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한림은 망설였다. 서울과 일본은 물론 유럽 미국도 갈 수 있다고 한다. 재능과 번민 사이에서 방황하던 이광수가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할 기회를 가졌다가 세계대전 발발로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림은 뭔지 모를 생의 분수령 같은 것을 연상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한림은 배 타고 바다 건너 외국으로 가는 길을 마음에서 접기로 했다. 무엇보다 장학회의 규칙 2조가 마음에 걸렸다. ‘사회를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사회를 위한 인재가 될 자신이 있다고 그는 말하기 힘들었다.
10월의 어느 날 한림은 경영진의 호출을 받았다. 서울에 민간 신문사가 생기는데 거기 사원으로 들어가 볼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신문 발행 허가를 전제로 주식모집이 진행되고 있으며 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에 백산의 경영진이 여러 명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최준과 윤현태와 윤상은, 그리고 안희제였다. 안희제는 신문사의 부산지국을 운영하는 지국장도 맡을 것이라 했다.
10월 20일 강우규는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세계대전의 종료로 수년간의 호경기가 끝나고 전후 불황이 본격화하는 시기였다. 중국에서 시작된 호열자(虎列刺), 즉 콜레라가 국경을 넘어 빠른 속도로 남하하며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북경에 있는 스페인 공사가 호열자에 걸려 중태라 한다.
이번 겨울부터 봄까지 서반아 독감이라 불리는 유럽형 돌림감기가 창궐해 무려 750만 명이 앓았다. 그중 14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조선인구의 44%가 감염되어 총인구의 0.8%가 사라진 것이다. 고종 임금은 그 한가운데 시점에서 숱한 과거의 백성들과 더불어 승하한 셈이었다. 거기에 이어진 봄날의 만세 와중에서 7500명가량의 건강한 사람이 더 숨졌다.
그러고 나서 찾아온 여름은 또 지독한 가뭄이었다. 그 여름 끝을 타고 이번에는 콜레라가 남하하고 있다.
그렇게 죽어나갔는데도 인구는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무서운 번식력이다.
한림은 생각한다. 다시 부산항에 나갈 일은 없을지 모른다. 혹시 부산역에 나갈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내가 북상할 차례인지도 모른다고.
매일신보 / 삼천리 /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 이동언, ‘독립운동자금의 젖줄 안희제’, 역사공간, 2010 / 박환, ‘강우규 의사 평전’, 선인, 2010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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