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부산에서 활발한 시작(詩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것도 많은 시간과 지식, 끈기, 노력이 필요한 장편 서정시를 주로 쓴다. 지방에서 드물게 1000억 원대 수주 능력을 갖춘 데다 신용평가등급 ‘A。’를 유지하는 중견 건설업체도 경영하고 있다. 2010년 부산에서 세 번째로,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회원이 된 것도 바로 그다. 부산지역 건설업체인 신태양건설 박상호(58) 회장 이야기다.
박 회장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시인 CEO란 점도 그런데다 부산대 의예과를 중퇴하고 갑작스레 건설업이라는 길을 택했다는 점도 그렇다. 임직원 70여 명을 거느린 박 회장은 집무실 이외에 시를 쓰기 위해 한적한 곳에 별도 집필실을 두고 있다.
2006년 50대로 늦깎이 시인 등단
2006년 계간 ‘열린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그는 2009년 ‘동백섬 인어공주’(도서출판 작가마을)라는 시집도 발간했다. 등단이 늦었지만 실제로는 20대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를 써왔다. 발표하지 않았을 뿐이지 원고지 300장 분량의 작품을 비롯해 지금까지 원고지에 쓴 작품 분량이 1만 장에 달한다.
평단에서도 늦깎이 시인의 시를 높게 평가한다. 남송우 부경대 교수(문학평론가)는 박 회장의 시에 대해 “성향이 긍정적이고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이미지로 넘쳐난다”고 말했다. 한창옥 시인은 “다양한 가치와 자기의 시심(詩心)을 초월적 조화로 이끌어내고 있다”며 “설화에 새로운 시대의 영혼을 불어넣어 흥미 있는 이야기 골격을 다듬어가고 있다. 단순한 형식미보다 시인의 내면적 사고에 상상력을 합성한 특이한 구성으로 진한 생명력을 잉태시키고 있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부산의 대표 건축물을 논할 때 박 회장의 이름을 빼놓아선 안 된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린 곳으로 유명한 해운대 동백섬 누리마루를 신태양건설이 공동 시공했다. 지난해 ‘2011 부산다운 건축상’ 대상 작품으로 뽑힌 아미산 전망대(사하구 다대동) 역시 박 회장이 시공한 건물이다. 두 건축물은 요즘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기부활동도 가장 활발한 부산지역 CEO 가운데 한 명이다. 모교인 부산대를 비롯해 부산지역 주요 대학에도 발전기금을 쾌척하고 있다. 소년소녀가장 돕기, 저소득층 지원, 장학금 수여 등 지금까지 기부한 액수만 10억 원이 훨씬 넘는다.
박 회장에게서 4년째 매달 30만 원씩을 후원받고 있는 조손가정 김모(75) 할머니는 “손자가 급식비를 못 냈다고 울 때 죽고 싶었다. 박 회장을 보고 손자에게 ‘너도 꼭 남에게 도움 되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고 말했다.
부산 연제구 거제동 신태양건설 회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 시와 건축, 그리고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의학의 길 앞에서 시와 건축을 선택하다
▼ 1974년 부산대 의예과를 2년만 수료하고 갑자기 대학을 떠나 건설업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시와 깊은 관계가 있었나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고교 2학년 때 홀로 계시던 어머님이 대장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외동아들인 제게 유언 같은 한마디를 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구나, 내가 시인이라면 시라도 한 편 남기고 싶구나’라는 말이었어요. 평소 문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느낀 게 많았어요.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렵고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만든 암을 극복하기 위해 국립대이고 집 근처에 있는 부산대 의대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의예과에 다닐 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고가 났어요. 과외선생일 때 가르치던 제자 고교생과 해운대해수욕장에 갔는데 그 아이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거예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너무 이른 나이에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 그 길로 의대를 포기하고, 고교시절 때부터 늘 꿈꿔왔던 문학의 길로 가기로 결심했죠. 그리고 부모님이 어릴 때 돌아가신 데다 홀로 남은 제가 비싼 의대 등록금을 낼 엄두도 못 냈습니다. 후회도 했지만 미련은 없었어요. 그리고 행복하게 시를 써가는 저 자신을 볼 때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곧바로 등단하시지는 않고 건설업계 쪽에서 많은 일을 하셨군요.
“1975년 건축내장재 생산 공장에서 외삼촌과 함께 사업을 했어요. 거래하던 회사가 ‘사정이 어려운데 자재 값 대신 전문면허라도 받아달라’고 부탁한 게 제가 건축업을 하게 된 계기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짬짬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시인이 되려면 경제적 능력부터 키워라’고 하기에 그렇게 사업가의 길을 갔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아무리 바빠도 괴테, 셰익스피어, 단테, 밀턴이 쓴 고전 작품은 꾸준히 읽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문학작품을 접하면서 ‘내가 시를 쓰게 된다면 장시(長詩)를 선택할 것이다’라고 다짐했죠. 음주가무에는 재능이나 취미가 없어 틈틈이 시 창작에 더욱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시는 제게 황무지 같은 사회에서 오아시스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존재입니다. 또한 시는 나 자신뿐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위로를 안겨줬습니다. 지금도 시인과 CEO라는 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시인을 선택할 겁니다. 주위에서 그렇게 불러주는 게 더 기쁩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직업인 것 같고,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