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한국, M&A 몸 사리기 그만해라”

삼성과 GE, 매각 투자비용 16배 차이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2-02-22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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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M&A 몸 사리기 그만해라”

    리처드 돕스 맥킨지 서울사무소 파트너, 팀 콜러 뉴욕사무소 파트너, 빌 휴이트 보스턴사무소 파트너. (왼쪽부터)

    영원히 잘나가는 기업은 없다. 10년 전 30대 기업 목록을 살펴보면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업이 다수다. 뒤처지면 바로 낙오한다. 현재 최고의 실적을 내고 있더라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면서 미래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한다. 기업 오너와 투자자 모두에게 ‘불확실성’은 최대의 공포다.

    좋은 기업이란 어떤 기업일까? 세계적인 컨설팅 업체 맥킨지가 1990년 발행한 책 ‘밸류에이션(Valuation)’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이 책은 맥킨지 컨설턴트들을 위한 내부 가이드로 출발해 20여 년 동안 기업 가치 평가 분야의 바이블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서도 5판까지 발간되며 학계와 전문가들에게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너무 두껍고 전문 지식이 많아 어렵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는데, 맥킨지는 지난해 11월 밸류에이션의 보급판이라 할 수 있는 ‘밸류(Value), 기업가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내놓았다. 2월 1일 ‘밸류’의 공동 저자이자 세계적인 컨설턴트 3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팀 콜러 맥킨지 뉴욕사무소 파트너, 리처드 돕스 서울사무소 파트너, 그리고 빌 휴이트 보스턴사무소 파트너다.

    “한국 M·A 큰손? 여전히 걸음마 단계”

    국내 대표적인 대기업과 미팅을 위해 방한한 세 사람은 “‘좋은 기업’이란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이라고 정의했다.

    “가치 창출이란 투자한 자본비용보다 높고 시장의 기대를 웃도는 수익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한 해 한국의 24개 기업이 당기순이익 1조 원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업이 많은 가치를 창출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삼성전자의 경우 2010년 한 해 당기순이익 16조 원에 약 10조 원의 가치를 창출했지만, SK이노베이션은 1조1000억 원의 당기순이익에 1000억 원의 가치를 창출했습니다. 이러한 잣대로 바라보면 사실 많은 흑자 기업은 실제로 가치를 파괴하고 있죠.”(리처드 돕스)



    기업 가치 창출을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은 총 4가지로 △가치의 핵심 △가치 보존 △기대 쳇바퀴 △최상의 소유자 등이 그것이다. 먼저 ‘가치의 핵심’이란 투입된 자본비용보다 더 높은 수익을 만들어낼 때 기업 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가치 보존’은 현금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만 가치가 창출될 수 있는데, 현금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업 회계, 인수합병(M·A), 기업 포트폴리오 결정, 배당정책 등을 이용해야 한다. 셋째 ‘기대 쳇바퀴’란 좋은 기업에 투자한다고 무조건 좋은 투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현재 좋은 기업의 주가에는 미래 성과가 이미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최상의 소유자’ 원칙은 누가 기업을 소유하고 운영하느냐에 따라 큰 현금 흐름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업 가치에 대해 첫 책을 낸 것은 1990년. 22년이 지났지만 이들 3명은 “기본적인 원칙은 변화가 없고, 원칙을 깨뜨렸을 때 닷컴버블이나 글로벌 경제위기 등이 발생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기업들도 M·A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다. 두산그룹이 대표적이다. 두산은 한국중공업,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 진로 등을 인수하고 OB맥주 등 비핵심사업을 매각했다. 박용만 부회장의 지휘를 통한 적극적 M·A로 국내외 영향력을 넓히는 데 앞장섰다.

    최근 한국 기업이 세계 M·A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관점이 많다. 국제연합무역개발협의회(UNCTAD)에 따르면 2010년 한국 기업이 해외 기업 M·A에 사용한 비용은 99억1500만 달러로 전년의 69억 달러에 비해 30억 달러 이상 늘어났다. 자본시장연구원 측은 “최근 국내 기업이 풍부한 현금보유고를 바탕으로 외국 기업 인수에 나서는 경우가 늘어났고, 당분간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맥킨지 전문가들은 “아직 한국 M·A 시장은 걸음마 상태”라고 진단했다.

    “삼성그룹의 경우 2000년 이후 50여 개 부문을 매각했습니다. 이는 약 6조 원 규모죠. 같은 기간 GE는 370여 개 약 100조 원에 해당하는 매각 활동을 벌였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산업 성장이 둔화되고 마진이 악화되면 사업을 매각하지만, 성장단계에 있는 사업이라도 경쟁력 약화가 우려되거나 사업 포트폴리오에 맞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매각해야 합니다.” (팀 콜러)

    ▼ 한국 기업들이 M·A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 기업의 한계는 성장과 수익률의 균형을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장에만 치우치는 한국 기업들은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착하고 큰 로드맵이 없습니다. 성장과 자본수익률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많은 아시아 기업이 고민하는 부분인데 기업들이 이에 대해 충분히 토의해야 합니다. 성장과 ROIC(투하자본순수익률)를 좌우하는 인력, 부서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부서 간에 성과 지표를 적절히 설정해야 합니다.”(빌 휴이트)

    ▼ 한국의 경우 경영권이 세습되는 기업이 많습니다. 이 같은 체계는 M·A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앞서 말한 4가지 원칙 중 하나가 ‘최상의 소유자’입니다. 오히려 한국식 경영권 세습이 기업 가치 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규사업과 관련된 상당수 창의적 아이디어가 실무급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창적이고 책임감 있는 오너 임원들이 실무 직원들과 소통하고 움직인다면 훨씬 결단력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팀 콜러)

    팀 콜러 씨는 “한국 시장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금융산업 통합이 필수적”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규모가 작은 금융기관이 난립하면 결국 국가가 큰 리스크를 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시아 시장 진출 위해 금융산업 통합 필수

    ▼ 덩치가 큰 기업의 경우 섣불리 M·A에 나섰다가 모기업까지 휘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호아시아나의 대우건설 인수입니다. 그만큼 만전을 기해야 할 텐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이야말로 그만큼 리스크를 부담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대기업은 충분한 인력과 재무역량이 있기 때문입니다.”(리처드 돕스)

    “단순히 ‘무조건 M·A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략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 성장하는 시장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IT, 대체에너지 등 현재 가장 핫한 분야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디를 파야 ROIC가 높은지는 정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빌 휴이트)

    이들은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판로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공항 관리, 의료 관광 분야 등을 예로 들었다.

    “한국의 제조업은 전 세계 생산성 1위인데 한국의 서비스 사업 생산성은 한국 제조업의 절반밖에 못 따라갑니다. 한국은 서비스 산업 역량을 충분히 갖췄습니다. 타국 공항, 발전소를 건축, 운영, 유지, 보수하는 업무나 아시아 20억 명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의료 관광 등 제조와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산업으로 국가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리처드 돕스)

    ▼ 한국 경제가 협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중국인데요. 중국 진출에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요?

    “현재까지 한국은 중국의 저렴한 인건비를 보고 제조 기반을 중국에 많이 내보내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제는 중국을 생산, 조립하는 공장이 아니라 소비의 근원이 되는 시장으로 이용해야 합니다.”(팀 콜러)

    “중국 기업과 M·A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공안 당국의 규제도 엄격하고 아직까지 자본주의 체제가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은 것도 한계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굳이 M·A를 통하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중국 내 사업 부문을 설립하는 등 유기적인 투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빌 휴이트)

    ▼ M·A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어떤 원칙이 중요할까요?

    “M·A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M·A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해당 기업의 가치 창출을 위해서인지, 기술 확보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지역 확장을 위해서인지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또한 제품 디자인을 하듯 여러 가지 옵션을 면밀히 살펴보고 신중하고 정밀한 분석이 필수적입니다.”(리처드 돕스)

    “가장 중요한 것이 거래 이후입니다. ‘M·A 이후에는 전 직원이 휴가를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요, M·A 경험 있는 인력들을 활용해 인수 기간을 3~6개월 단위로 쪼개 지속적으로 통합 과정을 관리해야 합니다.”(팀 콜러)

    “한국 기업의 경우 M·A에 참여할 때 ‘업계에 경쟁사가 들어가니까 나도 들어가야지’ ‘ 좋은 매물이 나왔으니 무조건 인수해야지’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차별화된 역량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M·A를 해서는 안 됩니다.”(빌 휴이트)

    리처드 돕스 서울파트너는 글로벌 기업금융담당 디렉터로 일하다 2007년 9월 서울사무소 파트너로 발령 났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한국의 M·A 컨설팅 규모가 급증할 것으로 진단했기 때문이다. 금융 격동의 시기를 서울에서 보낸 돕스 씨의 경고는 날카로웠다.

    “한국은 가장 역동적인 나라입니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타격을 입었지만 한국에는 유리하게 작용한 면이 있습니다. 한국 부동산 사업은 안 좋아졌지만 원화 약세에 힘입어 재벌기업의 수출 성과가 높아졌습니다. 그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를 추진할 계기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본격적으로 M·A나 서비스 중심 전환을 해야 합니다. 유럽 경제에 2차 위기가 온다면 또다시 쓰나미가 한국을 피해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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