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에 숨어 있는 인재(人災)들

제1장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라

  •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12-02-29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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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의 1절과 2절을 자세히 읽은 독자라면 왜 일본에는 전력회사가 여러 개 있을까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좀 더 예리한 독자라면 쓰나미 피해는 도호쿠 지방에서 일어났으니 도호쿠전력이 운영하는 원자력발전소가 피해를 당했어야 하는데, 왜 도쿄전력의 원자력발전소(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해를 입었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의문을 품은 독자라면 그는 Think the Unthinkable을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사람이다. 관료주의에 물들지 않고 사회와 조직을 변혁시킬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에는 일본 전력산업계의 모순이 숨어 있다. 이러한 모순은 한국 전력산업계의 모순을 혁파하는 데도 참고가 되므로 주의 깊게 살펴보기로 한다.

    자기 영토를 가진 일본의 전력회사

    한국에는 한국수력원자력㈜을 비롯해 6개의 발전회사가 있다(중소 발전회사 제외). 일본에는 10개의 전력회사가 있다(중소 발전회사 제외).



    전력산업은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發電)’과 발전한 전기를 가정과 공장 등 소비자에게 보내주는 ‘배전(配電)’을 양 축으로 한다. 한국의 6개 발전회사는 발전만 한다. 한국에서 배전은 6개 발전회사의 모기업인 한국전력이 맡고 있다. 반면 일본의 전력회사는 배전도 한다.

    과거 한국에서는 한국전력이 발전도 하고 배전도 했다. 2001년 한국전력의 발전부문을 6개 회사로 쪼개 독립시키기 전까지, 한국전력은 발전과 배전을 모두 했다. 한국은 제주도 등 몇몇 섬을 제외하면 국토가 연결돼 한국전력이라는 공기업이 전력산업을 독점했다.

    일본은 혼슈(本州)로 불리는 본토와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의 큰 섬 4개를 중심으로 여타 섬이 보태져 구성된 나라다. 그런 까닭에 지방별로 특색이 강하다. 필자는 제1장 제1절의 에서 일본은 8개 지방으로 나눠진다고 설명했다. 섬이라는 특징과 강한 지방색 때문에 일본은 8개 지방에 발전과 배전을 모두 하는 과거의 한국전력이 하나씩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일본의 최남단 광역단체인 오키나와(沖繩)현은 류큐(琉球)제도에 있다. 오키나와현은 규슈 지방에 속한다. 그런데 규슈 섬에서 오키나와현이 있는 류큐제도까지는 너무 멀어 류큐제도에 ‘오키나와전력’이라는 또 하나의 전력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간사이 지방에 호쿠리쿠 전력이 추가돼 10개의 전력회사가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원자력발전을 하지 않는 것은 오키나와전력뿐이다.

    원자력발전소는 발전용량이 크기에 전력 소비가 많은 곳에 지어야 한다. 오키나와현은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산업이 발달해 있지 않다. 총 인구도 140만 명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 여러 섬에 흩어져 있어 원자력발전을 할 메리트가 적다.

    원자력발전을 하는 9개 회사(호쿠리쿠 전력 포함) 외에 또 하나의 회사가 원자력발전을 한다. 제1장 제2절에서 도카이 제2발전소 운영 주체로 소개한‘일본원자력발전㈜’이다. 약칭 ‘일본원전’은 일본이 원자력발전소를 도입하던 초창기, 일본의 전력회사들과 일본 정부가 투자해서 세운 발전 전문회사인 ‘전원(電源)개발㈜’이 공동으로 투자해 세운 원자력발전 전문 회사다.

    일본원전은 원자력발전을 해도 괜찮은지 알아보기 위해 세운 ‘파이어니어 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원전이 일본에서 최초로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보고, 나머지 9개 전력회사도 원자력발전소를 짓게 되었다. 일본원전은 원자력발전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세운 회사인지라 전기를 생산만 하고 판매하는 배전은 하지 않는다. 일본원전은 생산한 전기를 전력회사에 판매하고 있다.

    남의 영토에 원전을 지은 도쿄전력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 원자력발전을 하는 회사는 10개가 되었다(9개 전력회사+일본원자력발전). 일본의 전력회사는 자기 지방을 토대로 발전과 배전을 독점한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도호쿠전력이 독점적으로 전기를 생산해 공급하고, 도쿄가 중심인 간토(關東) 지방에서는 ‘도쿄전력’, 간사이(關西) 지역에서는 ‘간사이전력’이 전력산업을 독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발전회사들은 ‘자기 영토’를 갖고 있다.

    를 근거로 한다면 도쿄전력은 간토 지방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야 한다. 그런데 도쿄전력은 도호쿠전력의 영토인 도호쿠 지방의 후쿠시마(福島)현에 제1, 제2발전소를 지어 운영하던 중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 사고를 당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도쿄전력이 후쿠시마에 원전을 지어 운영한 것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를 확대한 측면이 있으므로 분석해보기로 한다.

    1장 2절에서도 설명했지만, 원자력발전을 하려면 반드시 복수(復水)를 해야 하므로 원전은 바닷가에 지어야 한다. 원자력발전소 입지 조건으로 단단한 지반이 필수다. 원전은 무겁고 예만한 시설이기에 개펄 같은 곳에는 절대로 지을 수가 없다. 그냥 단단한 지반이 아니라 활성 단층대 등이 없어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지반이 단단한 곳 가운데도 단층대가 있을 수 있으니, 원자력발전소 입지를 찾을 때는 반드시 과학적인 조사를 해봐야 한다.

    사람이 많이 사는 곳도 피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선량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극히 미미하다. 자연방사선의 수백~수만 분의 1에 불과하다. 이미 사람들은 자연방사선을 쬐고 있는데, 거기에 0.0001~0.01%를 추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주파수가 다른 일본의 전기체계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에 숨어 있는 인재(人災)들
    원자력발전소가 끼치는 피해 가운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전자파다. 원자력발전소는 대용량의 전기를 생산하기에 발생하는 전자파도 강한 편이다. 원자력발전소가 일으키는 또 하나의 문제는 복수를 하고 나온 바닷물인 온배수(溫排水)다. 증기가 흐르는 관 밖을 흐르게 된 바닷물은 관 안의 증기를 식혀 물로 돌려주고 자신은 3~6℃ 정도 온도가 올라간다. 배수는 들어갔다 나오는 물인데, 복수기에 들어갔다 나오는 바닷물은 따뜻하기 때문에 ‘온배수’라고 한다.

    원전 1기당 초당 270t의 온배수가 쏟아지면 원전 주변 바닷물의 온도가 올라간다. 따라서 그 바다 환경에 맞게 설정한 양식업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원전회사 측은 온배수가 영향을 끼치는 범위를 조사해 그 안에서 양식과 어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배상을 한다. 전자파 피해와 온배수 피해 등을 줄이려면 사람이 덜 사는 곳에 원전을 지어야 한다.

    간토 지방은 일본의 중심지이기에 대부분의 지역이 도시화돼 있다. 를 보면 다른 지방은 바다를 면한 영역이 많은데, 간토 지방만은 북쪽으로는 바다를 접하지 못해 임해 지역이 좁다. 둥그런 형태로 태평양만 좁게 마주하고 있는데, 태평양 지역으로는 대도시가 많다.

    도호쿠 지역은 한반도의 함경도에 비유할 수 있다. 인구도 적다. 따라서 도쿄전력은 돈을 지불하고 도호쿠 지방에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짓게 되었다. 후쿠시마 발전소 사고가 나기 전까지 도쿄전력은 3개의 원자력단지를 운영했는데, 2개 단지는 도호쿠 지방에 세우고, 1개 단지는 추부(中部) 지방에 세웠다.

    가장 먼저 세운 것은 도호쿠 지방인 후쿠시마(福島)현 후쿠시마 제1발전소였다. 이어 후쿠시마 제1발전소 남쪽에 후쿠시마 제2발전소를 짓고, 추부(中部)지방인 니가타(新瀉)현에 가시와자키 가리와(柏崎刈羽) 발전소를 지어 운영했다.

    가시와자키 가리와 발전소는 도쿄전력이 운영한 최대의 원전 단지인데, 이 발전소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와 연계되므로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가시와자키 가리와 발전소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간의 연계 관계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일본은 지방별로 서로 다른 주파수의 전기를 생산하고 사용한다. 도쿄 이북에 있는 3개 전력회사는 50Hz(헤르츠)의 전기를 생산해 사용하고, 그 이남에 있는 7개 전력회사(오키나와전력 포함)은 60Hz의 전기를 생산하고 사용한다. 는 주파수로 나눠본 일본의 전력회사 일람이고, 은 일본의 주파수 지도다. 을 보면 일본은 본토 정중앙을 경계로 주파수가 확연히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50Hz든 60Hz든 대부분의 나라는 한 주파수로 통일돼 있다. 그러나 일본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수리남 등과 함께 50Hz와 60Hz의 전기를 혼용하는 흔치 않은 나라다. 한 나라에 2개의 전기 주파수가 존재하는 것은 문제다. 50Hz 지역에 살다가 60Hz 지역으로 이사 가면 전기제품을 사용하는 데 애로가 생긴다. 물론 변환기를 통해 주파수를 바꿔줄 수 있지만, 변환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비용 낭비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계기로 갈라선 간토와 간사이

    일본 전력계는 주파수가 나눠져 있는 것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일본이 두 개의 주파수를 사용하게 된 것은 간토와 간사이 사이의 지독한 라이벌 의식 때문이다. 간토와 간사이 간의 적대감은 한국의 영·호남 갈등 이상이다. 역사적인 갈등을 풀지 못했기에 일본은 선진국답지 않게 2개의 주파수를 혼용하는 나라가 되었고, 그 결과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가 났을 때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사고가 확대되는 과정에는 그 지역 사람들이 만들어온 역사와 문화가 큰 영향을 끼치므로 이 부분도 상세히 살펴봐야 한다. 조선 초기 일본은 다이묘(大名) 등으로 불리는 수십 명의 성주가 패권을 잡기 위해 싸우는 전국(戰國)시대였다. 우리의 삼국시대는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이 쟁패했다. 가야를 보탠다 해도 4국이 다툰 시절이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구니(國)’로 불린 수많은 나라가 갈등하며 싸웠다.

    이 혼란을 제압해 패권을 잡은 이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도탄에 빠지게 한 ‘우리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다. 도요토미의 시절은 그의 사망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도요토미가 죽자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철수해 임진왜란이 막을 내렸다. 그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을 따르는 세력과 이에 반기를 든 세력이 대립했다.

    반기를 든 세력의 대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두 세력은 한판 싸움으로 승부를 갈랐는데, 그 결정전(決定戰)이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다. 이 전투는 1600년 10월 21일 일어났다.

    일본 지도를 보면 본토 중앙에 ‘비와(琵琶)호’라는 아주 큰 호수가 있다. 그리고 도쿄와 오사카 사이에 우리의 울산광역시에 비교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업도시 나고야(名古屋)가 있다. 세키가하라는 비와호와 나고야 사이에 있는 전략 요충지다. 기후(岐阜)현 남서쪽 끝인 후와(不破)군에 있는 이부키(伊吹)산지와 스즈카(鈴鹿)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다.

    간토와 간사이 간의 갈등

    서기 794년 일본인들은 이곳에 일종의 국경 검문소인 관문을 짓고 ‘절대로 뚫리지 않는 관문’이라는 뜻으로 ‘불파관(不破關)’이라 이름 짓고, 일본말로는 ‘후와노세키’로 읽었다. 서기 794년 우리는 신라로 통일돼 있었다. 일본은 여러 나라가 다투고 있었으므로 이곳에 국경 검문소를 만든 것이다.

    세키가하라의 ‘하라(原)’는 ‘들판’, 즉 분지라는 뜻이니, ‘불파관(후와노세키)이라는 관문이 있는 지역의 벌판’이 된다. 이 관문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거셌다. 그리하여 이 관문 동쪽을 ‘관동(關東)’으로 적고 일본어로 ‘간토’, 서쪽은 ‘관서(關西)’로 적고 일본어로 ‘간사이’로 발음했다.

    당시 도요토미 아들 세력은 간사이 지역인 오사카를 기반으로 했기에 서군(西軍)으로 불렸다. 도쿠가와 세력은 간토를 배경으로 했기에 동군(東軍)이 되었다. 도요토미 시절까지 일본 역사의 주무대는 간사이였다. 일본의 왕은 대대로 교토(京都)에 있었다. 도요토미는 오사카(大阪)에 머물렀다. 교토와 오사카는 간사이의 중심 도시였다.

    그런데 간토에 기반을 둔 동군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했으니 일본의 중심지는 동쪽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도쿠가와 세력은 에도(江戶)를 본거지로 삼았는데, 에도가 지금의 도쿄(東京)다. 고려 후기 무신이 권력을 잡은 시절, 무신들은 ‘도방(都房)’을 만들어 고려를 지배했다. 무신 정권 시절 고려왕은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도쿠가와 가문이 만든 ‘막부(幕府)’가 도방과 비슷했다. 일본왕은 고려왕과 같은 처지였다. 막부가 에도에 있으니 힘이 없는 일본 왕은 에도에도 궁을 만들어, 일년에 한 번씩 교토와 에도를 오가며 생활했다. 지금의 일본 왕은 거꾸로 도쿄에 머물다 이따금 교토의 궁을 찾는다.

    이러한 역사가 있기에 간토와 간사이 사이엔 한국의 영·호남 갈등 이상의 응어리가 졌다. 지금은 간토의 힘이 간사이보다 월등히 세다. 그러나 개화기 때만 해도 양측의 세력은 비등비등했다. 따라서 한쪽이 A를 선택하면 다른 쪽은 일부러 B를 고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양쪽은 서로 다른 전기 주파수를 선택한 것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에 숨어 있는 인재(人災)들
    에디슨과 테슬라 간의 직류·교류 전쟁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에 숨어 있는 인재(人災)들

    전력사(史)에서 유명한 직류 ·교류 전쟁을 한 에디슨(왼쪽)과 테슬라

    간토와 간사이는 개화기인 메이지(明治) 시절 일본 전기 역사에서 유명한 ‘전류전쟁’을 치렀다. 이 싸움은 도쿄를 무대로 한 ‘도쿄전등(電燈)’과 오사카를 거점으로 한 ‘오사카전등’이 벌인 직류·교류 싸움이다. 그러나 직류·교류 싸움은 일본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전기를 발명한 과학자들 사이에서 촉발된, 세계 과학사에서 유명한 전쟁이다.

    ‘발명왕’으로 유명한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은 1881년 축음기와 전구를 개발했다. 그가 전구를 밝히기 위해 사용한 전기는 직류였다. 에디슨은 직류 애호가가 됐는데, 직류는 전압이 약해 각 가정까지 보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손실이 커서 발전소에서부터의 거리가 4㎞만 넘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AP 기자의 에디슨 비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에디슨 연구소’를 통해 전기를 소비자에게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에디슨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이를 알고 에디슨 연구소를 찾아온 이가 크로아티아 출생의 세르비아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1856~1943)였다. 테슬라는 전기를 값싸게 각 가정에 보급하는 방법을 찾아주면 후사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연구소에 취직했다.

    이 연구소에서 테슬라가 개발해낸 것이 교류 시스템이었다. 테슬라는 전기를 먼 거리까지 보내는 기술을 개발하면 10만 달러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에디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가 난 테슬라는 에디슨 연구소를 나와 후발 업체인 웨스팅하우스에 들어갔다.

    당시 전기시장을 주도한 것은 직류 송전을 연구하는 에디슨 연구소였다.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의 기술을 토대로 교류 송전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전력사(電力史)에서 매우 유명한 ‘직류·교류 전쟁’이 촉발됐다. 승부는 빠르게 갈렸다. 먼 거리를 보내는 데는 교류가 월등히 유리했기에 에디슨의 입지가 좁아진 것이다.

    에디슨은 테슬라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개와 고양이가 교류가 흐르는 전선에 감전돼 죽는 장면을 시연했다. 당시 뉴욕교도소에서는 사형 집행을 하는 데 목을 조르는 교수형을 택했다. 테슬라를 ‘엿 먹이기로 한’ 에디슨은 뉴욕교도소 관계자들을 움직여 전기의자를 써서 사형을 집행하게 했다. 물론 전기의자에 사용하는 전기는 교류였다.

    당시 뉴욕교도소에는 ‘도끼 살인마’로 불린 케믈러가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돼 있었다. 뉴욕교도소는 전기의자를 써서 케믈러의 형을 집행하기로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교류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보고 교류에 대한 거부감을 품었다. 교류의 위험성을 알리려는 에디슨은 노력은 대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일어났다.

    에디슨과 테슬라 간의 직류·교류 전쟁은 워낙 유명했기에 케믈러의 전기의자형 집행은 세기의 관심사가 되었다. 케믈러를 전기의자에 앉힌 뉴욕교도소 측은 전기를 넣었다. 그러나 케믈러는 즉사하지 않고 산 채로 구워졌다. 새카맣게 탄 모습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케믈러의 전기의자 사형 집행은 큰 관심사였기에 집행 현장에 AP 기자가 입회해 있었다.

    AP 기자는 산 채로 구워져 나온 케믈러의 모습을 보고 놀라 기절해버렸다. 정신을 차린 AP 기자는 에디슨의 주장이 허구였다며 에디슨을 맹비난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언론의 힘은 막강했다. 이 기사로 에디슨이 치명타를 입었다. 이것이 에디슨과 테슬라 간의 승부를 가른 1차 직류·교류 전쟁이다.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을 거부한 두 천재

    2차전은 1893년 시카고 박람회장에서 일어났다. 당시의 금융재벌 JP 모건은 에디슨 연구소를 중심으로 기타 전기 회사를 합병해, 제너럴일렉트릭(GE)이라고 하는 거대한 회사를 만들었다. GE는 시카고 박람회의 조명시설 입찰에 의기양양하게 도전했다. 그러자 테슬라가 이끄는 웨스팅하우스(WH)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세인들은 에디슨과 테슬라의 대리전인 ‘GE vs WH’ 싸움에 주목했다. 이 싸움은 단판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라 ‘미국판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인주시리(萬人注視裏)에 치러진 이 경쟁에서 이긴 것은 웨스팅하우스였다. 에디슨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3차전을 치르게 되었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거대한 나이애가라 폭포가 있다. 이 폭포가 갖고 있는 수력에 주목한 캐터랙트 사가 수력발전소를 지어 26마일 떨어진 버팔로 시에 전기를 공급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수력발전소에서 버팔로 시까지 전기를 보내는 송전 사업권 경쟁이 벌어졌다. 이 싸움도 역시 GE vs WH 구도가 되었다. 결과는 웨스팅하우스의 승리.

    테슬라는 에디슨을 꺾은 전기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15년 미국의 일부 언론은 테슬라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다른 언론들은 에디슨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것 같다는 기사를 내놓았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졌을 때 두 사람은 기뻐했다. 그런데 ‘뉴욕타임스’가 테슬라와 에디슨 두 사람이 공동으로 노벨상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보도를 내놓으면서 태도를 바꿨다.

    두 사람 모두 수상을 거부한 것이다. 오랜 경쟁으로 감정이 꼬이고 꼬여서 ‘저 사람하고는 같이 받을 수 없다’고 한 것. 그 결과 스웨덴의 한림원은 191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영국의 윌리엄 헨리 브래그 부자(父子)를 최종 선정했다.

    인류에게 전기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남겨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고 깊은 원망(怨望) 때문에 생애 최대의 영예를 버린 것이다. 이후 테슬라는 1917년 미국 전기공학자협회가 수여하는 큰 명예인 에디슨 메달을 받았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경쟁이 끝난 후 세계는 교류로 기울었다. 제너럴일렉트릭마저 교류로 송전하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보다 앞섰다는 소리를 듣던 유럽은 미국에서 벌어진 싸움을 지켜보다 일찌감치 교류를 선택했다. 에디슨과 테슬라가 치열하게 직류·교류 전쟁을 벌일 때 일본에서도 같은 싸움이 벌어졌다. 미국에서는 회사끼리 싸웠는데, 일본에서는 지역으로 나눠 싸움을 했다.

    주파수 변환이 어려운 나라

    즉 간토의 중심지 도쿄를 무대로 한 도쿄전등은 미국 GE 기술을 받아들였기에 1887년부터 직류로 송전을했다. 반면 1888년 설립된 오사카전등은 교류의 효율성을 알고 있었기에 교류로 송전했다. 에디슨과 테슬라 간의 직류·교류전쟁을 지켜보던 도쿄전등은 교류가 송전에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교류 송전으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독일의 AEG 발전기를 도입했다. 지금도 독일은 50Hz의 전기를 사용한다. 따라서 도쿄전등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도쿄는 그때부터 50Hz의 전기를 쓰게 되었다.

    애초부터 교류 송전을 한 오사카전등은 미국 GE의 발전기를 수입했다. 미국은 60Hz의 전기를 사용하기에 오사카는 60Hz 전기 사용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구도를 양측은 끝까지 견지했다. 일본은 2개의 주파수를 사용하는 상태로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것이다.

    그 사이 간토 이북 지역은 모두 50Hz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남 지역은 전부 60Hz를 쓰게 되었다. 전쟁 기간에는 많은 물품이 소모되기에 공업이 발전한다. 전기산업도 발전한다. 따라서 일본은 한 나라에서 2개의 주파수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간토와 간사이의 경쟁이 자심했기에 어느 한쪽의 주파수로 통일할 수가 없었다. 전쟁의 광풍도 통일을 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1945년 패전한 일본은 한국의 6·25전쟁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때 일본에서는 주파수를 통일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자기 지역의 주파수에 맞춰 돌아가는 공장이 너무 많다 보니 주파수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2개의 주파수를 쓰는 불편한 나라가 되었다.

    압력이 높을수록 멀리 간다는 것은 상식이다. 가정에서 쓰는 전기도 100V보다는 220V가 효율이 좋다.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100V, 220V 혼용을 시작해 지금은 완전히 220V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일본은 220V 승압도 하지 못했다. 일본은 변화를 하기엔 너무 무거운 나라인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후 이 발전소를 운영해온 도쿄전력이 관할하는 간토 지방에서는 전기가 매우 부족해졌다. 그러나 간사이 지역은 쓰나미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전기 피해가 크지 않았다. 따라서 간사이의 전력을 간토로 보내줄 수 있는데 일본은 이것도 하지 못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엔 人災 요소가 많다

    이유는 주파수 변환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직류와 교류를 호환하려면 변환소가 있어야 한다. 일본의 간사이와 간토 사이에 ‘신시나노(新信濃) 주파수변환소’ ‘사쿠마(佐久間) 주파수변환소’, ‘히가시시미즈(東淸水) 변전소’ 를 두고 있다. 이 변환소와 변전소 덕분에 간사이와 간토는 전기를 교환한다.

    그런데 전기 주파수를 바꿔주는 변전소와 변환소를 지어 운영하는 것은 주파수를 바꿔주는 전기 양만큼을 생산하는 발전소를 운영하는 것과 맞먹는 비용이 들어간다. 따라서 일본은 변전소나 변환소를 많이 짓지 못하고, 간사이는 60Hz, 간토는 50Hz 전기를 주로 쓰는 체제를 고수한다. 3개의 변환소는 유사시를 대비한 것이다.

    전기가 부족한 도쿄전력에 전기를 공급해줄 수 있는 곳은 같은 주파수를 사용하는 도호쿠전력뿐이었다. 그러나 도호쿠전력은 간사이전력만큼 큰 회사가 아니다. 도호쿠전력과 도쿄전력은 별도의 발전·송전체제를 구축해왔기에 전기를 쉽게 주고받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구조가 맞물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는 확대되었다.

    일본 전기체계의 복잡함은 모두 사람이 선택한 것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비상발전기를 지하에 설치한 것도, 발전소를 저지대에 지은 것도 기상청 자료만 믿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에는 천재와 함께 인재가 겹친 측면이 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에는 인재적(人災的) 요소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다음 분석에 들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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