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지금은 전시 상황, 자위대를 출동시켜라

제3장 전원 복구로 사고 수습에 성공하다

  •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12-03-02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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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전시 상황, 자위대를 출동시켜라

    원자로에 발생하는 수소를 촉매로 태워 없애는 수소제거기. 한국은 이 시설을 모든 원전에 설치한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 연이어 일어난 수소폭발은 원전을 운영하는 모든 나라를 긴장시켰다. 세계 6위의 원자력발전 설비를 갖추고 있는 한국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한국은 수소폭발에 대해 일찍 대비했다. 한국 최초의 상업용 원전인 고리 1호기는 2008년 설계수명 30년을 맞아, 더 사용해도 되는지 검사를 받게 되었다. 고리 1호기는 이 검사를 통과해 2009년부터 10년간 계속운전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고리 1호기를 대상으로 이러한 검사를 하기 전 대한민국 정부는 고리 1호기 운영자인 한국수력원자력㈜에 “원자로의 노심이 녹아 수소폭발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2007년 과학기술부는 2007-18이란 고시를 통해 ‘계속운전에 들어간 원전에서, 원자로 노심이 녹는 용융사고가 일어났을 때 발생하는 수소가 산소와 결합해 폭발하는 문제를 없애는 방안을 만들라’고 요구한 것이다.

    수소 제거기 설치한 한국 원전

    그에 따라 한국수력원자력이 2009년 고리 원전 1호기에 설치한 것이 ‘무전원(無電源) 수소 제거기’다. 이 기기는 외부전원과 비상발전기 전원 등 모든 전원이 끊어졌을 때도 녹은 핵연료에서 발생하는 수소를 제거하는 기능을 한다. 작동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촉매를 이용해 수소와 산소를 결합시켜 물로 만듦으로써 수소 농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약간의 에너지를 가해 수소 분자 2개와 산소 분자 1개를 결합하면 물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이를 화학식으로 표현하면 2H₂+O₂=2H₂O(수증기)다. 무전원 수소 제거기는 에너지 없이 촉매로 수소를 산소와 결합시켜 물로 바꿔주는 장치다. SBO 상황에서 발생한 수소를 산소와 결합시켜 물을 만들어야 하니 촉매를 사용하게 되었다. 촉매를 이용해 수소를 물로 바꿔주는 것이라 과거에는 ‘피동 촉매형 재결합기(Passive Auto-catalytic Recombiner·PAR)’라 했다.

    녹은 핵연료에서 발생한 수소는 격납용기 안에 존재하는 산소와 바로 섞인다. 이러한 대기가 무전원 수소 제거기 안으로 들어간다. 무전원 수소 제거기 안에는 백금이나 팔라듐이 코팅된 구멍이 매우 많은 ‘다공성(多孔性) 촉매체’가 있다. 수소와 산소가 섞인 대기는 이 촉매체(觸媒體)를 통과하면서 자연스럽게 결합돼 수증기(물)가 되는 것이다.

    이 수증기는 녹은 핵연료에서 열을 받아 매우 뜨거운데, 뜨거운 기체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수증기가 빠져 올라가는 무전원 수소 제거기의 윗부분에는 격납용기 바깥으로 나가는 관이 설치돼 있다. 생성된 수증기는 이 관을 통해 격납용기 바깥으로 나가 대기로 흩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격납용기 바깥은 격납용기 안보다 온도가 훨씬 낮으니, 관을 통해 격납용기 밖으로 나간 수증기의 상당량은 응축돼 물로 바뀌어 격납용기 외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물에는 방사성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으므로, 원전 측은 이 물을 따로 모아 방사성 물질을 제거한 후 방류한다.

    한국수력원자력은 격납용기 안에 두 종류의 무전원 수소 제거기를 설치했다. 첫째는 ‘설계기준 사고용 제거기’이고 둘째는 ‘중대 사고용 제거기’다. 설계기준 사고용 제거기는 격납용기 안의 수소 농도를 4% 이하로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

    정상가동되는 원자로의 격납용기 안에서 수소 농도가 4%까지 올라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원자로 안에 있는 핵연료가 녹아 원자로 바닥을 녹이고 나와야 이 정도의 수소가 발생한다.

    격납용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나면 매우 위험하기에 원전을 설계할 때는 격납용기 안의 수소 농도가 4% 이하가 되도록 한다. 이러한 설계 기준치에 맞추기 위해 여러 이유로 발생한 수소의 농도를 4% 이하로 낮춰주는 것이 ‘설계기준 사고용 제거기’다. 이 제거기는 원자로가 녹지 않았을 때부터 가동한다. 격납용기 안의 수소 농도가 2%가 되면 자동으로 가동돼 수소 농도를 낮춘다.

    격납용기 안의 수소 농도가 10%가 되면 수소는 산소와 결합해 수소폭발을 일으킨다. 원자로 안의 핵연료가 원자로를 바닥을 녹이고 격납용기 바닥에 떨어졌을 때 수소 농도가 10%까지 치솟는다. 이는 원자로 안의 핵연료가 녹는 것이라 중대사고(重大事故)로 분류된다. 중대사고용 제거기는 원자로가 녹아 다량의 수소를 발생시킬 때 작동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 제거기도 수소 농도가 2%가 되면 바로 가동한다. 격납용기 안의 수소 농도가 2%에 이르면 설계기준 사고용 제거기와 중대사고용 제거기가 모두 가동하는 것이다. 설계기준용 제거기와 중대사고용 제거기는 이름만 나눠놓았을 뿐 하는 일은 똑같다. 2009년 한국수력원자력은 두 종류의 제거기를 계속운전에 들어간 고리 1호기에 설치했다.

    그런데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나자 과학기술처의 후신인 교육과학기술부는 모든 원전에 이 제거기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계속운전에 들어가기 위해 안전성 검사를 받아야 하는 월성 1호기에 먼저 설치하고, 이어 2013년까지 가동 중인 모든 원전에 설치하기로 했다. 후쿠시마 사고는 한국의 원전 안전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나눠놓은 일본 전력체계의 맹점

    1,2,3,4호기에서 수소폭발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전경은 참혹했다. 일본의 과학자들은 일본이 원자폭탄 두 발을 맞고 패망한 것을 가슴 아파했다. 따라서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원자력에 관심을 기울였고 원자력 기술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도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공장을 가진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일본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공장은 아오모리(靑森)현의 롯카쇼무라에 있다.

    일본은 중국을 가상의 적국으로 생각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평화헌법과 비핵 3원칙 선언에 따라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로 했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다섯 번째로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가상 적국인 중국이 핵무장을 하자 일본은 원자력발전에 매진해 프랑스와 함께 세계 최고를 다투는 원자력발전 선진국이 됐다.

    그런데 4기의 원전이 날아가는 처참한 사고를 당했으니 처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쿄전력은 쓰나미로 모든 전원이 상실된 날(3월 11일)로부터 여드레째인 3월 19일에야 간신히 외부전원을 복구했다. 1,2,3,4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기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천천히 작업했기에 여드레 만에 복구한 것이 아니다.

    해수를 주입하는 와중에도 작은 수소폭발은 계속됐다. 도쿄전력은 수소와 반응해 수소를 태워버리는 촉매를 집어넣어 발생한 수소를 긴급해 제거해가며 녹은 핵연료를 식히기 위해 해수를 주입했다.

    도호쿠전력과 도쿄전력 사이의 장벽

    도쿄전력의 외부전원(소외전원) 복구 과정이 국외자인 기자가 보기엔 너무 처연했다. 앞에서 설명했듯 간토(關東)와 도호쿠(東北), 홋카이도(北海道) 지방은 60Hz의 전기를 사용한다. 일본의 10개 전력회사 가운데 동쪽의 도쿄전력 도후쿠전력 홋카이도전력은 60Hz의 전기를 생산하는 유삼(唯三)한 회사다. 앞에서 설명했듯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도쿄전력이 도호쿠지방에 지은 원전이다. 따라서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간토 지역으로 가져가기 위해 철탑을 세우고 긴 송전선을 설치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생산한 전기를 보내고, 이 철탑을 통해 발전소 운영에 필요한 외부전기(소외전원)를 공급받아왔다. 그런데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발전소와 신후쿠시마 변전소 사이의 철탑이 쓰러져 전선이 끊어졌다. 신후쿠시마 변전소와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전기 시설도 자동으로 차단되거나 깨져나갔다. 신후쿠시마 변전소와 간토지방 사이에 있는 철탑도 상당부분 훼손되었을 것이다.

    도쿄전력은 이러한 시설을 다 복구해야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 전기를 보낼 수 있다. 복구 공사를 하려면 중장비를 투입해야 하는데 도로는 곳곳에서 대지진으로 훼손돼 있다. 도쿄전력은 이러한 어려움을 뚫고 공사를 해야 했으니, 19일에야 겨우 전기를 연결한 것이다. 이러한 사투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도쿄전력은 왜 저렇게 어렵게 일을 하지?’ 하는 의문을 품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있는 도호쿠에는 도쿄전력과 같은 60Hz의 전기를 생산하는 도후쿠전력이 있다. 그렇다면 도호쿠전력의 전기를 끌어와 응급조치를 취하고 도쿄전력의 전선을 연결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기자는 일본의 전력전문가를 만나지 못했다. 이 의문은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이종훈 선생이 대신 답변해주었다.

    “전력회사를 쪼개놓으면 그렇게 된다. 도쿄전력과 도호쿠전력은 다른 회사라는 인식이 있어 서로 신경을 쓰지 못한다. 도호쿠전력도 오나가와 원전이 위험한 지경에 달했었고, 대지진과 쓰나미로 도처에서 전기가 끊어졌기에 이를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남의 땅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도쿄전력이 당한 사고를 도호쿠전력이 내 일처럼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다.”

    홋카이도나 시코쿠, 규슈, 오키나와처럼 멀리 떨어진 섬에는 따로 전력회사를 세워야 한다. 그러나 일본 본토를 7등분해 7개의 전력회사를 만든 것은 아무리 봐도 실수다. 미국이나 러시아처럼 면적이 아주 넓고 중간에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 있다면 여러 전력회사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일본 본토는 그렇게 넓은 지역이 아니다. 중간에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 발전 부문 분할의 문제점

    이런 점에서 살펴볼 것이 한국의 전기체계다. 한국에서는 한국전력㈜이 발전과 배전을 도맡아 하는 독점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국가 전력산업을 독점한 한국전력의 경영상태는 좋지 않았다. 주된 이유는 싼 전기요금에 있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전기요금이 가장 싼 나라로 꼽힌다. 전기는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이 써야 하는 것이라 역대 정권은 전기요금 인상을 최대한 억눌러왔다.

    그런데 한국은 경제성장 속도가 빨랐기에 전력소비도 급증했다. 이에 대처하려면 발전소를 많이 지어야 하는데, 전기요금이 싸니 발전소를 지을 여력이 적었다. 따라서 빚을 지고 발전소를 지었는데, 여전히 전기요금은 싸니 한국전력의 경영 상태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 때부터 ‘한전을 민영화해서 경영효율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란 논의가 있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은 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경제개혁의 신호탄으로 한국전력 분할을 거론했다. 한국전력의 발전 부문을 쪼개 여러 회사로 만든 후 민간에 매각하고, 이어 배전 부문도 쪼개 매각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2001년 한국전력의 발전 부문이 한국수력원자력 등 6개 회사로 쪼개져 나갔다. 그러나 전력산업 민영화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았기에 6개 발전회사는 매각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대중 정부 시절이 지나갔다.

    6개 발전회사는 한전이 100% 지분을 가진 ‘한전의 자회사’ 처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전이 지주회사로서 이들을 지배해야 하는데 엉뚱한 현상이 일어났다. 전력산업은 공공성이 강하기에 전력산업을 담당하는 산업자원부(지금은 지식경제부)가 6개 발전회사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발전회사가 생산한 전기는 증권처럼 거래소를 통해 사겠다고 했다.

    증권은 증권거래소에서 실시간으로 거래된다. 사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팔겠다는 이가 없으면 가격은 급등한다. 반대인 경우는 급락한다. 김대중 정부는 전기를 이렇게 사고팔겠다고 한 것이다. 생산한 전기를 파는 쪽은 6개 발전회사이고 사는 곳은 한국전력 한 회사다. 한국전력은 발전회사로부터 전기를 사서 소비자인 가정과 공장 등에 공급하는 일, 즉 배전 업무를 한다. 이러한 거래를 위해 전력거래소를 만들었다.

    그런데 전기는 실시간 거래가 불가능했다. 생산한 전기는 저장할 방법이 없다. 생산하는 순간 소비되지 않으면 날아가버리는 것이 전기다. 그런데 생산한 것을 모두 소비하게 되면, 전국의 전기가 일시에 나가버리는 대정전(black out)이 일어난다. 따라서 소비량의 10% 정도를 더 생산하는 것이 좋다.

    전력 거래의 문제점

    수시로 변하는 소비에 대응하려면 생산자는 재고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기는 재고가 없으니 예상되는 소비량보다 10% 정도 더 생산하고 있다가 소비가 늘면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공급이 달리면 가동하지 않고 있던 발전소를 돌려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발전소는 금방금방 가동되지 않는다. 정지한 원전을 재가동하는 데는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소비는 분(分) 단위로 급증하는데 대용량인 원전은 일(日) 단위로 움직이니 전기 부족 문제가 발생한다.

    발전소에서는 돌아가는 것이 많다. 터빈도 돌아가고 발전기도 돌아간다. 돌아가는 것이 많으면 마찰로 인해 닳는 부분이 많아진다. 닳은 것이 많은 부품은 교체해줘야 한다. 따라서 발전회사들은 전력 소비가 적은 때 기일을 정해놓고 발전소 가동을 멈춘 다음, 부품을 바꾸는 정기 점검을 한다. 점검 중인 발전소는 기기를 재조립할 때까지 발전할 수가 없다. 전기가 부족해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전회사에 전기가 부족하니 당장 발전을 더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런 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발전소별 단가는 천양지차다. 발전단가가 가장 싼 것은 수력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수력발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2%도 되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다음으로 싼 것이 원자력이다. 이어 석탄화력 양수발전 가스발전 순으로 발전단가가 높아진다. 따라서 한국전력이 제일 먼저 구입하는 것은 원자력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수력과 양수발전까지 하니 거의 100% 돌아간다. 그리고 5개 발전회사가 단가에 따라 적절히 발전을 한다.

    이렇다 보니 전력거래소는 실시간으로 전기를 구입하지 못하고 전날 오전 10시에 다음 날 구입할 전기를 결정해 발전회사에 통보한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생산한 전기는 다 사고 5개 발전회사에 대해서는 무슨 발전기를 돌리라고 지시한 후 전기를 사주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 곡선이 실시간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경직된 구조로 발전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다음 날 구입할 전력량 결정은 배전을 하는 한국전력이 아니라 전력거래소가 한다.

    그런데 전력거래소는 산업자원부(지금은 지식경제부) 관료들이 퇴직하고 고위직으로 들어가는 기관이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2011년 9월 15일 한국은 아찔한 순환 정전 사태를 맞았다.

    9·15대정전 때 호통 친 이명박

    그 전날 전력거래소는 그날 구입한 전기량을 결정해 각 발전회사에 통보했는데, 9월 15일은 아침부터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로 인해 전기 소비가 급증해 10% 정도여야 하는 예비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러할 때 긴급히 가동하는 것이 양수발전소다. 양수발전소는 전기가 남아도는 심야에 수백 m 산 위에 만들어놓은 저수지로 물을 퍼올려 놓았다가 전기 소비가 급증하면 밑으로 떨어뜨려 수력발전을 한다.

    수력발전소는 낙차가 작기에 수만~십수만 kW의 전기를 생산하지만, 양수발전소는 낙차가 워나 커서 원자력발전소에 육박하는 60만~100만 kW의 전기를 생산한다. 그러나 산 위의 저수지에 물을 저장하는 데 한계가 있어 줄기차게 발전하는 것은 최대 8시간 정도다. 그날은 매우 더웠기에 오전 8시부터 전기 소비가 급증해 비상용으로 대기시키는 모든 양수발전소를 가동시켰다.

    그리고 오후 3시가 넘자 양수발전소마다 물이 떨어져 차례로 정지하게 되었다. 날은 여전히 더운데…. 한국은 8000만 kW가 넘는 발전 설비용량을 갖추고 있다. 보통 전기 소비는 7000만 kW 이하다. 7000만 kW가 소비된다면 예비량으로 10% 정도인 700만 kW 정도를 더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 예비 전력량이 24만 kW까지 떨어졌다. 웬만한 발전소 한 기만 정지되면 전국이 완전 정전(black out)될 상황이었다.

    전력거래소에는 전기가 부족할 경우 각 발전회사에 긴급히 추가 발전을 지시하는 급전(給電)지령소가 있다. 전국의 전기를 컨트롤하는 급전지령소는 양수발전소들이 멈춰서 전기 예비율이 바닥에 이르자 중소도시를 골라 돌아가면서 강제 정전시킴으로써 예비율을 올리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그 지역 주민들은 예상치 못한 정전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 날이 더운 만큼 저녁 손님이 많을 것으로 보고 음식을 많이 장만한 음식점은 냉장고의 전기가 나가 음식을 버려야 했다.

    비상발전기가 없는 중소병원은 수술과 진료에 어려움을 겪었다. 전기가 끊어지면 컴퓨터를 돌리지 못하니 인터넷 뱅킹도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원성이 높아지자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전력을 찾아가 호통을 쳤다. 강제 순환정전을 시킨 것은 한전이 아니라 급전지령소인데….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급전지령소는 야단을 맞을 것이 아니라 칭찬을 받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날 급전지령소가 강제 순환정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전국의 전기가 일시에 나가는 블랙아웃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상발전기가 없는 제철소에서는 용광로가 멈춰 서 용광로와 쇳물이 한 덩어리가 된다. 비상발전기가 없는 공항과 기차역에서는 매표가 불가능해진다. 최전방에 있는 국군은 155마일 휴전선에 불을 밝히고 경계를 서는데 불을 켜지 못하게 된다. 상상할 수도 없는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발전회사를 독립시켜 놓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한국전력이 전기의 모든 것을 조절하는 체제를 유지했을 것이다. 급전지령실은 한국전력에 있었다. 전기거래소의 급전지령실은 발전소 사정에 익숙하지 않지만 한국전력의 급전지령실 근무자는 발전소 사정에 밝다. 따라서 긴급으로 돌릴 수 있는 발전소를 골라 무조건 돌리라는 지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발전회사와 급전지령실이 분리돼 있으면 이러한 지시는 잘 먹히지 않는다.

    발전회사 처지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수익이다. 급전지령실의 지시에 따라 발전소를 돌리면 이익 면에서 손해일 수 있으니 발전회사들은 정비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신속히 대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력이 모든 발전소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러한 발전소 소장을 인사조치할 수 있으니 수익을 따져서 대응하는 행태는 있기 어렵다.

    배전 분할 막은 김태유 교수

    김대중 정부는 배전 부문도 쪼개려고 했으나 늦어졌다. 배전 부문 분할은 노무현 정부 시절 추진됐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지낸 서울대의 김태유 교수(산업공학)가 강력히 반대해 무산됐다. 전력인들은 배전 부문까지 분할했다면 9·15대정전 때 특정 지역은 완전 정전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을 것이라 진단한다. 발전과 배전 부문을 쪼개는 것은 일본처럼 10개 전력회사가 난립하는 체제를 만들자는 것과 같다. 면적이 작은 나라에 여러 개의 전력회사가 분산해 있으면 위기 시 대응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후 대응 과정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연속으로 수소폭발을 당함으로써 도쿄전력은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9·11테러를 당한 미국, 3·26 천안함 격침을 당한 한국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9·11테러 직후 미국은 또 다른 테러가 발생할까봐 긴장했다. 3·26 천안함 격침 사건을 당한 후 한국도 또 다른 어뢰 공격이 있을까 염려하며 대응하다 2대의 링스 헬기가 떨어지는 추가 사고를 당했다.

    핵연료에서는 수소가 계속 발생하고 있으니 더 큰 수소폭발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또다시 수소폭발이 일어나면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의 벽과 지붕이 날아갈 때 충격을 받아 약해져 있는 격납용기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제2의 체르노빌 사고가 된다. 이러한 사고를 막으려면 격납용기 안으로 물을 넣어야 하는데, 물을 넣기 위해 가까이 가면 방사선에 피폭된다. 도쿄전력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일본 전체가 전시(戰時) 체제에 직면했다.

    고층빌딩의 윗부분에서 불이 나면 고압소방차가 달려와 아주 센 물줄기를 쏘아 올린다. 방사선 피해를 줄이려면 멀리서 쏘아야 하니 고압 소방차가 필요했다. 도쿄전력은 12기압 정도의 소화용 살수차로 물대포를 쏴 격납용기 안으로 물이 스며들도록 시도했다. 수소폭발로 날아간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 쪽으로 물을 쏘면 저장수조와 격납용기 사이에 있는 구멍으로 물이 들어갈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고압 살수차를 이용한 물 퍼붓기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원전은 거대한 구조물이어서 소방차가 퍼붓는 물로 격납용기 안을 단기간에 잠기게 할 수는 없었다. 여러 대의 소방차가 왔으면 좋으련만 후쿠시마 제1발전소 주변은 물론이고 도후쿠 지방의 상당 부분이 대지진으로 도로가 무너져, 소방차가 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는 대지진과 쓰나미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여일(如一)했다.

    미 7함대에 도움을 요청하다

    배가 다니는 바다는 가장 큰 수송로다. 그렇다면 바지선으로 비상발전기와 해수펌프를 가져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갑자기 비상발전기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구한다 해도 비상발전기와 해수펌프를 바지선에 실어 끌고 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바다를 통한 방호를 모색할 때 떠오른 대안이 군함이었다. 군함에는 전투 중 적 미사일을 맞아 화재가 일어나는 것에 대비해 소화펌프 등이 준비돼 있다. 화생방전을 위한 장비도 갖고 있다. 적지에 상륙하는 능력도 있으니 발전소 앞바다로 물자를 수송해줄 수도 있다. 도쿄에서 가까운 요코스카(橫須賀)는 조지 워싱턴 항모를 중심으로 한 미 7함대의 모항이다.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는 미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 7함대는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지원은 하지 않았다. 동상이몽(同床異夢). 3월 12일 후쿠시마 제1발전소 1호기가 수소폭발했을 때 미 7함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외에 파병된 미군 부대가 해야 할 중요 임무 중의 하나가 자국민 보호다. 미국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원전이 심각하게 폭발해 막대한 방사능을 내뿜으면 일본에 있는 미국인을 조지 워싱턴 항모 등에 태워 미국이나 안전한 이웃 나라로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일본의 요청이 있자 미국은 일본 인근에 있던 로널드 레이건 항모를 근처로 파견했다(3월 13일). 그러나 일본이 기대한 것처럼 후쿠시마 제1발전소 가까이까지 와서 해수를 퍼 올려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일본 동북부에 있는 혼슈 항 앞바다에서 바닥에 납을 깐 상태에서 해수를 담고 폭발한 후쿠시마 원전 상공으로 날아가는 일본 육상 자위대 헬기의 해상 플랫폼 역할을 했다. 자위대 헬기가 비행갑판에 내리면 간단한 정비를 해주고 연료를 채워주는 일을 주로 한 것이다.

    일본은 3월 19일 외부전원을 복구해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 그러자 21일 미국은 일본에 있는 미국인을 철수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보고 요코스카에 대기하고 있던 조지 워싱턴 항모 등 11척의 군함을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태에 투입했다. 이 군함들은 탑재한 헬기를 이용해 원거리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지원을 주로 했다. 헬기에 물을 실어 폭발한 원전 상공에서 투하하는 작전은 하지 않았다.

    소련 사례에 따라 군 헬기 동원

    소방차를 사용한 살수에 한계가 있고, 미군이 원거리에서만 물자를 지원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방향을 바꿨다. 자국의 사태는 자국의 힘으로 막아야 한다. 일본은 육상 자위대 헬기를 사용해 물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1986년 체르노빌-4호기 사고 때 소련이 한 것과 같은 방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었다. 체르노빌-4호기는 격납용기가 없었던 데다 원자로 뚜껑도 터져나갔기에 러시아 헬기는 원자로 직상공에서 처음에는 물을, 나중에는 모래와 시멘트를 투하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 30여 대의 군용 헬기를 동원했다. 방사능을 잘 막는 물질의 대표는 납이다. 붕소도 중성자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모래와 진흙, 콘크리트도 방사능을 차폐한다. 체르노빌-4호기 사고에서 위협을 준 것은 과열된 핵연료로 인해 일어난 불이었다. 체르노빌-4호기는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는 흑연감속 원자로였다.

    감속재는 중성자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물질인데, 한국 원전에서는 붕소와 물을 사용한다. 한국은 붕소를 섞은 물을 원자로 안에 넣어 중성자의 속도를 떨어뜨린다. 붕소를 섞은 물을 붕산수라고 하는데, 붕산수는 물이라 과열된 핵연료에 졸아서 증발할 수는 있어도 불이 붙진 않는다. 그러나 흑연은 핵연료가 과열되면 불이 붙는다. 흑연 때문에 체르노빌-4호기는 계속 불꽃을 뿜어 올렸고, 이 불길 때문에 방사능물질이 비산돼 소련군은 불부터 꺼야 했다.

    소련군 헬기들은 40여t의 붕소를 섞은 물과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켜 불을 끄는 기능을 하는 돌로마이트 600여 t을 돌아가며 투하해 화재를 진압했다. 그래도 화재가 진압되지 않아 액체 질소를 주입했다. 질소를 넣으면 수소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져 수소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방사능을 잘 막는 납을 녹인 액체 납 2400여 t과 1800여 t의 모래와 진흙을 떨어뜨렸다. 마지막으로 콘크리트를 퍼부어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을 만들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는 훼손되긴 했지만 격납용기가 서 있으니 물을 투하해도 훼손이 일어난 틈으로 물이 들어갈지가 의문이었다. 더욱이 자위대 헬기가 격납용기 상공으로 날아가면 헬기 조종사의 방사능 피폭이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헬기 바닥에 방사선을 막는 납을 깔았다. 그러나 헬기의 벽에는 납을 깔 수가 없었다.

    조종사는 헬기 바닥이 폭발한 원전을 향하도록 조종해, 원전 상공까지 가야 했다. 이는 쉬운 조종이 아니다. 그렇게 비행해도 조종사는 방사선에 피폭된다. 산지사방에서 방사선이 오기 때문이었다. 폭발한 원전은 가장 강한 방사선이 나오는 곳이다. 도쿄전력과 자위대는 조종사들이 쬔 방사선 수치를 측정해 연간 허용치에 근접하면 바로 교체했다.

    헬기를 이용한 물 투하도 큰 효과가 없었다. 첫째 이유는 헬기 바닥에 무거운 납을 깔다 보니 헬기에 실을 수 있는 물의 양이 적었다. 둘째는 헬기에서 투하한 물이 공기 저항 때문에 비산(飛散)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많은 양의 물이 폭발한 원전에 떨어졌지만 격납용기 안으로 이어진 구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상당한 양은 공기 저항으로 비산되고 폭발한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로 떨어진 물은 도로 튀어나왔다.

    거의 모든 자위대 동원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일본은 전 경찰관과 소방대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워낙 일손이 달려 자위대원 2만 명을 함께 동원했다. 그런데 대지진과 쓰나미가 덮친 다음 날 후쿠시마 제1발전소 1호기가 수소폭발을 해 방사능이 누출되자 3만 명을 증원해 5만 명을 투입했다. 이어 3호기가 터지자 자위대원 수를 10만 명으로 늘렸다.

    일본의 육해공 자위대 총 병력은 24만 명이다.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피해 복구에는 육상 자위대가 주로 투입됐는데 육상 자위대의 총병력은 15만 명 남짓이다. 일본은 육상 자위대의 거의 모든 병력을 투입한 것이다.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는 화생방 방호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의 국군화생방사령방호사령부와 비슷한 중앙 특수무기 방호대 요원 1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육상자위대의 사단과 여단에 있는 화생방전 대원 50여 명도 동원했다.

    이들은 원자로 사고를 다루는 훈련은 받은 적이 없다. 핵폭탄이 터지거나 핵 테러가 일어났을 때 달려가 방사성물질을 중화시켜 제거하는 제염(除染)훈련을 주로 했다. 그럼에도 이들을 투입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기타자와 도시미(北澤俊美) 일본 방위성 장관은 “아주 위험하지만 해야 할 임무는 하겠다”는 말로 이들에게 위험한 임무 수행을 지시했다.

    일본 자위대는 후쿠시마 사태를 처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외부전원이 복구된 다음인 21일 일본 정부는 일본에서 제작한 74식 전차 2대에 불도저에서 흙을 미는 데 쓰는 배토판(排土板)을 붙여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 투입했다. 전차는 불도저와 달리 장갑이 매우 두껍기에 방사선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차에 단 배토판으로 폭발로 어지러워진 후쿠시마 제1발전소를 우선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태가 한창 악화될 때 미군은 미국 본토를 지키는 북부사령부(North Command)가 미국 본토에서 일어난 핵 테러에 대처하기 위해 운영하는 화생방 부대를 파견하려고 했다. 미군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전면적으로 폭발할 경우에 대비해 이 부대 요원 450명에게 출동 준비를 내리고 선발대로 9명을 후쿠시마로 보냈다. 수소폭발을 일으킨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방사능 피해를 막는 노력은 가히 전쟁이었다.

    4기의 원전이 폭발한 뒤 군 병력까지 동원해 격전을 치른 도쿄전력은 간신히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외부전원을 복구해 위기를 넘겼다. 일본의 복잡한 전기체계, 도쿄전력의 지독한 관료주의가 비상발전기를 지하에 설치한 ‘불운(不運)’과 겹쳐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격납용기에서 새는 물

    후쿠시마 사고 현장을 방영한 TV를 자세히 본 독자라면 수소폭발로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 건물이 날아간 다음에도 사고가 난 원전 건물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 “탕 탕!” 소리가 나며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흰 연기와 폭발은 전원을 회복해 격납용기 안으로 물을 넣은 다음에 많이 일어났다. 이때의 폭발은 인위적으로 촉매를 넣어 수소를 태움으로써 일어난 것이다.

    격납용기에 물을 넣는 문제는 전원이 회복되면서 쉽게 풀렸다. 펌프를 사용해 물을 격납용기 안에 넣음으로써 원자로와 격납용기를 동시에 침수시길 수 있었다. 전원을 복구한 다음부터는 자위대 헬기가 위험하게 격납용기 상공으로 날아가 물을 투하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외부전원을 복구해 원자로 안으로 물을 주입하자 파손된 구멍으로 물이 새나왔다. 이 물은 후쿠시마 앞바다로 흘러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발표하자 그 지역 어민들이 바다가 방사능에 오염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때까지 도쿄전력은 수소폭발이 상부에서 일어났으니 격납용기 상부만 훼손됐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물을 주입한 결과 하부도 훼손됐음이 밝혀진 것이다. 하부가 가장 심하게 훼손된 것은 2호기였다. 하부 훼손이 일어난 원인으로는 동일본 대지진이 꼽혔다.

    격납용기에서 새어 나와 바다로 흘러가는 물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가 문제가 됐다. 구멍이 어디에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이 구멍을 막기 위해 도쿄전력은 수지(樹脂)를 섞은 물을 주입해 임시로라도 막아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각 격납용기에서 새어 나온 물을 따로 수용해 방사성물질을 걸러내는 필터링 작업을 한 후 방류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수소폭발 후 오히려 대처 잘한 도쿄전력

    도쿄전력은 깨진 격납용기 틈 사이로 방사성물질이 누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7월부터 9월 사이 원자로 건물 외부를 벽으로 둘러싸는 공사를 했다. 이로써 후쿠시마 사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다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다면 이 시설과 이미 부실해진 격납용기와 임시방편으로 설치한 시설들이 깨져나가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는 원자로가 훼손돼 핵연료가 밖으로 나왔고 격납용기까지 훼손됐기에 국제원자력기구가 규정한 사고 등급에 따르면 가장 위험한 7등급에 해당했다. 그러나 격납용기는 훼손됐을 뿐 계속 서 있었기에 체르노빌-4호기처럼 큰 피해를 일으키진 않았다.

    도쿄전력은 수소폭발이 일어난 후 오히려 잘 대처했다. 7등급 사고가 났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매뉴얼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단 한 명도 희생되지 않았다. 도쿄전력은 직원을 투입할 때도 나름의 기준으로 방사선에 피폭되지 않도록 방호를 철저히 했다.

    사람은 원전에 가까이 가지 않아도 방사선을 맞는다. 우주나 자연, 음식물로부터 오는 자연방사선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일상생활에서 쪼이게 되는 방사선량은 연간 2.4밀리시버트 정도다. 2.4밀리시버트는 자연방사선량으로 친다. 지역에 따라서는 자연방사선이 센 곳이 있다. 이란의 람사르 지역과 브라질 가리바리 지역의 거주자는 연간 10밀리시버트의 자연방사선을 맞는다. 그러나 이들의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가슴에 X선 촬영을 한 번 하면 0.03~0.05밀리시버트(30~50마이크로시버트)의 방사선을 쬐게 된다. 건강 검진을 하다보면 X선 촬영을 여러 번 하는 경우가 있다. 입원 환자라면 1년에 수십 번 찍기도 한다. 1년에 100번을 찍었다면 그는 3~5밀리시버트의 방사선을 쬔 것이 된다. 자연방사선이 2.4밀리시버트 정도이니 1년에 100번 X선 촬영을 했다면 연간 5.4~7.4밀리시버트의 방사선을 쬔 게 된다. 그러나 환자임에도 그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

    방사선은 500밀리시버트까지 맞아도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방사선에 견디는 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1000밀리시버트를 맞았다면 구토를 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한다. 7000밀리시버트를 맞으면 사망자가 나온다. 원전 종사자들은 일반인보다 많은 방사선을 쬘 수밖에 없다.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해도 방사선을 자꾸 쬐는 것은 좋지 않기에 각국은 원전 종사자들의 방사선 피폭량을 규제한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원전 작업자는 연간 100밀리시버트 이하의 방사선만 쬘 수 있다고 규정해놓았다. 이는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대다수 나라에서 채택한 규정이다. 수소폭발을 한 후쿠시마 제1발전소를 수습하는 직원들은 더 많은 방사선을 쬘 수밖에 없었다. 일본 후생성은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일시적으로 원전 종사자는 연간 250밀리시버트 이하까지 방사선에 노출돼도 좋다고 규정을 완화했다.

    쿨한 일본 언론

    도쿄전력 직원들은 250밀리시버트 이하로 방사선을 쬐며 작업을 했다. 방사선 피폭 문제와 관련해 요시다 마사오 소장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를 수습하면서 요시다 마사오 소장은 70밀리시버트의 방사선을 쪼인 것으로 조사됐다. 그런데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된 2011년 11월 받은 건강검진에서 그의 몸에 식도암이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요시다 소장이 식도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를 수습하다 쬔 방사선 피폭 때문이 아닌가란 의문이 제기됐다. 70밀리시버트의 방사선을 쬐고 식도암에 걸린 경우는 없다. 도쿄전력 측은 즉각 “식도암은 잠복기간이 5년이기에 요시다 소장이 방사선을 많이 쬐 식도암에 걸렸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며 상황을 냉정히 정리해버렸다.

    과학적인 설명이었던 만큼 일본 언론들은 요시다 소장의 식도암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한국 언론이었다면 어땠을까. 한국 언론들은 0.001%의 가능성을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문제의식이 강해서 종종 중대한 비밀을 터뜨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지만, 필요이상으로 집요해 사태를 꼬이게 하는 경우도 많다.

    매뉴얼 사회 일본은 수소폭발이 일어난 다음에는 비교적 잘 대응했다. 일본은 공포에 휘둘리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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