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한국 원자력, 일본을 지원하다

제3장 전원 복구로 사고 수습에 성공하다

  •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12-03-02 1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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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원자력, 일본을 지원하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나자 일본은 미국에 WC-135 기상관측기(사진)를 띄워, 방사성물질이 어떻게 퍼지고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이 처한 위기는 가히 전시 상황이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뒤처리는 만만찮았다. 구소련의 체르노빌에서는 1기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났으나, 후쿠시마에서는 4기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인 것은 체르노빌에는 격납용기가 없는 상태에서 원자로가 터져나갔지만 후쿠시마에서는 원자로와 격납용기가 손상만 입고 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전 강국 일본, 안전 일본의 신화는 깨졌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따지기엔 사태가 너무 심각했다. 일본은 대지진으로 크게 흔들린 다음이라 대지진의 피해와 방사능 피해를 함께 수습하기 어려웠다. 일본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나섰다. 가장 큰 부담을 느낀 것은 마크-1 격납용기를 비롯해 후쿠시마 제1발전소 원전의 기본형을 설계한 GE사였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GE사는 가스터빈 발전기 10대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가스터빈 발전기는 후쿠시마 원전에 설치돼 있던 비상발전기와 비슷한 수준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나중에 GE사가 제공하겠다고 한 것은 디젤발전기로 수정 보도됐다. 디젤발전기를 공급한다는 것은 비상발전기를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은 한국과 같이 60사이클(60Hz)의 전기를 생산한다. 도쿄전력은 50사이클의 전기를 생산한다. 따라서 GE가 디젤발전기를 보내려면 먼저 60사이클이 아닌 50사이클의 전기를 생산하도록 설계 변환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린다. GE가 디젤발전기를 보내겠다고 한 것이 한국을 움직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서술한다.

    도쿄전력으로서는 폭발이 일어난 원전 내부 상황을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강한 방사선이 나오고 있어 사람을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사람이 입는 방호복으로는 사고가 난 원전에서 나오는 강한 방사선을 막을 수 없다. 방사선을 쬐도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움직이며 상황을 촬영해 보낼 수 있는 로봇이 필요했다.



    일본은 세계적인 로봇 강국이다. 그러나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 현장에 로봇을 투입하지 못했다. 이유는 평면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닮은’ 휴먼 로봇(인간형 로봇)만 주로 연구 개발해왔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원전 내부는 대지진과 쓰나미, 수소폭발로 뒤죽박죽이 됐기에 도처에서 설비와 내용물이 쏟아지고 넘어져, 평면을 다니는 휴먼 로봇은 활동할 수가 없다.

    뒤죽박죽인 곳에서 활동할 로봇은 모든 장애물을 넘어가거나 돌파할 수 있는 전투용이나 건설용으로 개발된 것이어야 한다. 미국 방산업체들이 개발한 전투용 로봇은 장애물이 있으면 밟고 넘어간다. 움푹 파인 곳도 알아서 건너간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프랑스의 로봇 제작사인 알드바랑 로보틱스 사의 로돌프 쥘랭 대표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 원전 업계에서는 로봇 활용의 필요성이 제기돼왔다”며 “일본은 인간형 로봇 부문에는 많은 투자를 해왔지만 실용 로봇 부문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일본은 전투용 로봇을 제작하는 미국 방산업체인 ‘키네틱 노스아메리카(QinetiQ North America, Inc)’에 원격조종할 수 있는 복구장비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키네틱 노스아메리카 사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상황에는 전투용보다는 건설용 로봇이 낫겠다며 밥캣(Bob Cat) 사의 장비를 지원받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밥캣은 한국의 두산인프라코어 사의 자회사다. 이런 이유로 한국은 일본에 원격조종이 가능한 건설장비도 제공하는데 이것도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미국의 기상관측기 출격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태도 수습해야 했지만 격납용기 훼손으로 대기 중으로 빠져나간 방사선 피해를 줄이는 것도 시급했다. 그러나 대기 중으로 흩어진 방사능물질을 포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사능물질의 반감기가 줄 때까지, 그리고 희석될 때까지 방사선이 센 곳에는 사람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강한 방사선일수록 반감기가 짧으니까.

    대기 중으로 나간 방사능물질의 양을 효과적으로 측정하는 장비가 일본에는 없었다. 지상 장비는 그 지역만 측정하지 대기를 따라 오가는 방사능물질의 세기는 측정하지 못한다. 일본은 미 공군에 WC-135 기상관측기의 출격을 요청했다. WC-135는 군사 전문가들도 잘 알지 못하는 특수 목적기다. WC-135는 미국과 소련이 벌인 핵 대결 과정에 탄생했다.

    주지하다시피 1945년 7월 미국은 인류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고 8월 원폭을 투하해 일본을 항복시켜 제2차 세계대전을 끝냈다. 종전 후 승리한 연합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냉전에 들어갔다. 이때 소련은 KGB의 전신인 비밀경찰에 원폭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베리야가 이끌던 비밀경찰은 핵 정보 전문기구인 S국을 만들고 미국을 상대로 한 핵 정보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소련의 핵 개발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 공군은 미 육군의 항공대로 있다가 1947년 독립했다. 미 공군이 육군 항공대에서 독립하지 못했던 1947년 9월 16일, 소련의 움직임을 알고 있던 미 육군참모총장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는 미 육군 항공대에 대기권 핵실험 사실 포착을 전문으로 하는 ‘불멸의 불사조(Constant Phoenix)’ 사업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WB-29라는 기상관측기가 만들어져 작전에 들어갔다.

    WB-29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맹활약한 B-29 폭격기에서 폭격에 필요한 시설을 떼어내고 대기관측에 필요한 장비를 첨가해서 만든 것이다. 핵실험을 하면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논 등 특수 원소가 만들어지는데, WB-29에는 이러한 원소를 채집하는 장비가 탑재돼 있다. 미국은 1950년대 중반이 돼야 소련도 핵실험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1949년 9월 알래스카에서 일본으로 비행한 WB-29기가 핵실험에서만 나오는 방사성 원소를 채집했다. 미국은 소련이 비밀리에 대기권 핵실험을 했음을 알아낸 것이다.

    1965년 미 공군은 이러한 WB-29기를 WC-135로 교체했다. WC-135는 C-135 수송기에 각종 대기관측 장비를 탑재해서 만든 비행기다. 공군 작전은 날씨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태풍에 영향을 받으므로 태풍의 움직임을 정밀 추적해야 한다. 태풍은 이륙과 착륙하는 항공기에는 큰 위협을 주지만, 고도를 높여 순항 비행하는 항공기에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태풍이 발생하면 WC-135는 ‘태풍의 눈’으로 날아가 태풍과 함께 움직이며 태풍의 모든 것을 추적해 기상 정보를 제공한다.

    기상 관측이 평시 업무라면 누군가가 몰래 핵실험을 하는 것을 추적하는 것은 비상시 업무다. 1962년 10월 쿠바 핵 위기를 겪은 미국과 소련은 1963년 모스크바에서 대기권과 우주공간, 수중에서 핵무기 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Treaty of Banning Nuclear Weapon Test in the Atmosphere, in Outer Space and Under Water)’을 맺었다.

    조약을 맺었으면 조약 내용을 이행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미국은 WC-135를 소련 영공 밖으로 띄워 소련이 이 조약을 어기고 대기 중이나 우주에서 핵실험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게 했다. 이러한 WC-135가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일어난 사실을 포착하고 방사능물질이 어떻게 확산되고 있는지 정밀 추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소련은 체르노빌 사고를 공개하지 않고 단독으로 대응했기에 서방국가들은 이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WC-135의 활약으로 구소련에서 핵 관련 사고나 실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여기에서 나온 방사성물질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추적할 수 있었다.

    북한 핵실험도 추적하는 WC-135

    WC-135기는 네브래스카 주의 오풋(Offutt) 공군기지에 있는 45정찰비행단 소속이다. WC-135 대기관측기는 잘 공개되지 않는데, 한반도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은 가끔 이 정찰기 이름을 접할 수 있다. 2009년 초 북한의 대포동 2호 발사 가능성이 높아지자 미 공군은 일본 오키나와의 가네다(嘉手納) 공군기지에 WC-135의 사촌쯤 되는 RC-135 정찰기를 배치해 북한 전역을 정찰했다. RC-135 정찰기에 부착된 센서는 발사된 탄도미사일에서 나오는 적외선을 포착해 발사 지점은 물론이고 탄도와 탄착 위치도 계산해낸다.

    2009년 10월 북한은 2차 핵실험을 시도하는데, 이때 언론은 WC-135가 가네다 기지에 배치된 사실을 확인했다. 미군은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하기 1년 전인 2005년부터 WC-135와 RC-135를 가네다 기지에 배치해놓고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여부를 추적해왔다. 또 WC-135를 오키나와에 배치해놓고 북태평양에서 발생하는 태풍 추적과 함께 북한의 핵실험을 상시적으로 추적하고 있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에 WC-135기를 후쿠시마 상공으로 출격시켜 방사능물질이 어떻게 퍼지고 있는지, 방사선의 세기는 얼마인지를 측정해달라고 했다. 일본은 그만큼 급했던 것이다.

    한국 원자력, 일본을 지원하다

    일본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수습에 필요한 붕소(왼쪽)와 마스크 등의 지원을 한국에 요청했다. 일본의 사정이 워낙 급했기에 WANO 아시아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수원 사장은 국내 재고를 모두 제공하고 이어 국내 비축품을 구입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일본은 한국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아시아 최대의 원전 회사

    일본은 한국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이 있기 전 한국은 제일 먼저 119 중앙 구조대를 파견해 쓰나미 피해 구조 작전을 벌였다. 쓰나미 희생자 구조 작전이 끝나갈 무렵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본은 이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것.

    한국은 미국,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과 견줄 수 있는 원전 강국이다. 2009년 한국은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 수출을 확정지음으로써 미국, 영국(지금은 수출 중단), 러시아, 프랑스, 캐나다, 일본에 이어 원전을 수출한 국가 반열에 올라섰기에 일본의 요청에 대응할 수 있었다.

    일본의 전력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원전을 운영하는 것은 17기를 운영해온 도쿄전력이다. 도쿄전력은 오랫동안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원전을 운영하는 지위도 누렸다. 그러나 한국의 원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의 원전 능력은 도쿄전력을 앞서 있었다.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겪은 후 세계의 모든 원전업체는 원전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1989년 원전 사업자 모임인 ‘세계원전사업자협회(WANO· World Association of Nuclear Operators)를 만들었다. WANO는 미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 지역센터를 두고 원전업체들은 이 중 한 센터에 가입하도록 했다. 아시아센터는 도쿄에 두었기에 도쿄센터로 불리는데, 이 센터에는 일본, 한국, 중국, 파키스탄, 인도, 대만, 아랍에미리트(UAE)의 원전업체가 가입해 있다.

    WANO 설립 후 아시아센터 이사장은 항상 도쿄전력 사장이 맡았다. 2003년 한국은 영광 6호기를 가동함으로써 상업원전 18기를 보유하게 돼 도쿄전력을 앞서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울진 5호기, 2006년엔 울진 6호기, 2011년에는 신고리 1호기를 준공해 21기를 갖춰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대의 원전 사업자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2010년 4월 14일 한국수력원자력㈜의 김종신 사장이 임기 2년의 WANO 아시아센터 이사장에 선출됐다.

    김종신 사장이 WANO 아시아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을 때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경천동지할 사고를 당한 것이다. 4월 8일 김종신 한수원 사장은 한국의 원전 중대사고 및 원전 방재(防災) 대책 분야의 전문가 2명을 대동하고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그는 WANO 아시아센터 이사장 자격으로 도쿄전력 주요 간부와 일본원자력기술협회(JANTI) 회장, WANO 도쿄센터 사무국장 등을 만나 후쿠시마 지원 방안을 협의했다.

    김 사장의 방일은 일본의 도움 요청이 한 역할을 했다. 동일본 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는 중성자를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붕소 52.6t의 지원을 요청했다. 녹아내리는 원자로의 핵분열을 멈추게 하려면 붕소를 섞은 붕산수를 원자로에 넣어야 하는데, 붕소 재고가 달렸던 것이다. 3월 16일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최대한 신속히 지원하겠다는 말로 붕소 52.6t의 지원을 약속했다.

    도쿄전력은 사고 현장에서 작업하는 요원들이 써야 하는 마스크와 필터가 부족했기에 한국수력원자력에 도움을 요청했다. 3월 20일 한국수력원자력은 방사선 작업용 전면 마스크와 필터 각 200개(4000만 원 상당)를 항공편으로 도쿄전력에 전달했다.

    한국 업체와 스와핑하는 일본 업체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원전 4기가 사라졌으니 일본은 여타 원전과 화전(火電)도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려고 가동을 정지했다. 그러다 보니 전력이 심각하게 부족해졌다. 전기 소비는 계절에 따라 큰 차이가 나기에 원전과 화전으로는 평상시 전력인 기저(基底)부하를 생산케 하고,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피크 타임 때는 가스발전소를 돌려 늘어난 수요에 대응케 한다.

    가스발전소는 전력 수요가 적을 때는 돌리지 않고 여름처럼 전기 수요가 급증할 때만 돌려서 전기를 생산한다. 발전회사들은 액화천연가스(LNG)를 생산하는 업체와 연간 계약을 맺어 가스를 도입한다. 가스는 여름보다는 겨울에 많이 소비한다(한국의 경우 여름철과 겨울철의 가스 소비 비율은 약 45대 55다). 이유는 난방용으로 소비되는 가스가 더 많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절기가 바뀌고 있었기에 가스 소비에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대지진으로 많은 원전과 화전이 안전검사를 위해 가동을 중지한 상태여서 가스발전소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연간 계약으로 가스를 도입하다 보니 양이 적었다.

    이 때문에 도쿄전력은 3월 16일 한국가스공사에 화력발전용 액화천연가스(LNG) 지원을 요청했다. 이는 스와프(SWAP) 요청이었다. 연간 계약 때문에 도쿄전력은 당장 필요한 가스를 확보할 수 없지만 한국가스공사는 계절적 요인으로 가스 소비에 여유가 있으니, 선박에 실려 한국으로 오는 LNG를 도쿄전력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본으로 향하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대신 위기가 풀리면 도쿄전력은 같은 양의 가스를 한국도시가스공사에 돌려준다. 한국가스공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4월 초까지 LNG 50만t을 도쿄전력으로 보내주었다.

    한국 원자력, 일본을 지원하다

    도쿄전력이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발전소 현장에 제일 먼저 투입하기 위해 지원받은 두산인프라코어의 자회사인 밥캣 사의 건설용 로봇 T-300 컴팩트 트랙 로더. 일본은 평면에서 움직이는 휴먼로봇 강국이지, 전투용 로봇이나 건설용 로봇의 강국이 아니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전체 정유시설 가운데 20%가량이 가동을 중지했다. 일본 최대 정유회사인 JX NOE(옛 일본석유)는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등 국내 정유업체에 원유 구매와 석유제품 공급을 요청했다. 정유업체들은 원유의 안전한 확보가 중요하기에 산유국과 6개월에서 1년 정도 앞선 시기에 필요한 원유를 미리 계약해놓는다. JX NOE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지진이 일어나 정유시설이 파괴되거나 가동할 수 없게 되자 JX NOE는 계약에 따라 산유국에서 자사로 오는 원유 중 일부를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국의 정유회사에 그들이 장기 계약해 도입하고 있는 원유를 받아서 대신 처리해달라고 한 것이다. 한국의 정유업체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도 휘발유, 등유, 경유, 항공유 등 원유를 정제한 제품이 필요하다. 대지진을 당했으니 기름은 더욱 긴요해진다. JX NOE는 한국 정유업체들에 이러한 유류를 우선 공급해달라고 했다. 한국 정유업체들은 다른 나라에 수출하기 위해 정제해놓은 기름을 그 나라의 양해를 얻어 JX NOE 측에 우선 공급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한국 정유업체들은 JX NOE가 해야 할 정유를 대신해주고 거기서 나온 결과물을 일본에 공급해준 것이다.

    건설용 로봇 제공한 두산

    앞에서 미국 방산업체인 키네틱 노스아메리카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자회사인 밥캣에 건설용 로봇을 부탁하라고 했는데, 두산인프라코어와 밥캣은 이를 받아들였다. 2011년 4월 24일 두산인프라코어는 “원격조종이 가능한 밥캣의 건설장비 2대가 지난주부터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원전 내부에 들어가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투입된 장비는 그래플(grapple·집게 역할 하는 장비)을 단 ‘밥캣 T-300 컴팩트 트랙 로더’였다. 이 장비는 13㎞ 떨어진 곳에서도 원격조종을 할 수 있다. 이 장비에는 7대의 카메라, 온도 감지기, 송·수신용 무선 장비, 방사선 센서가 부착돼 있어 사고를 당한 원전 구석구석을 다니며 현장 모습을 찍어 송신하고 방사선 등을 측정할 수 있다. 밥캣을 통한 지원과는 별도로 두산인프라코어는 지진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해 스키드 스티어 로더 10대, 굴삭기 1대와 인력을 일본으로 보냈다.

    미국 GE사가 일본에 이동식 발전기를 제공한다고 한 3월 19일,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김황식 국무총리에게 “미국의 발전 설비는 제작과 수송 등에 오랜 시간이 걸리니 현대중공업이 일본에 긴급 지원하는 게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에 따라 정부는 김 총리 주재로 긴급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은 현대중공업의 이동식 발전설비에 바로 관심을 표명했다.

    한국 원자력, 일본을 지원하다

    현대중공업은 비상발전기로 쓰이는 이동식 발전기를 만드는 유력 업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현대중공업은 도쿄전력에 이동식 발전기 4대를 지원했다. 도쿄전력 측이 한글로 쓴 플래카드를 내건 것이 이채롭다.

    PPS(Packaged Power Station)으로 불리는 현대중공업이 개발한 이동식 발전 설비는 40피트 컨테이너에 담겨 있다. 공장형이 아니라 컨테이너형이라 배에 실어 운반하는 데 좋고 설치하는 데도 편리하다. 보통의 이동식 발전설비는 경유를 주로 사용하나 현대중공업의 이동식 발전설비는 저렴한 중유를 사용하기에 경제적이다. 현대중공업은 엔진과 발전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자재를 국산화해 PPS를 만들었다. PPS는 내구성이 좋기에 비상시의 보조전원 역할뿐만 아니라 상용(常用) 발전기로도 쓸 수 있다. 송·배전이 어려운 낙도와 오지, 지진 피해를 자주 보는 곳에 특히 유용하다.

    이 PPS는 2010년 규모7.9의 강진이 발생한 아이티 대지진 때 해를 입지 않고 정상 가동해 긴급한 전력 수요를 충당했다. 2009년 9월 쿠바는 강력한 허리케인 구스타프(Gustav)를 만났지만 현대중공업이 설치한 PPS는 정상 가동됐다. 칠레에 수출한 PPS도 2010년 2월 발생한 규모8.8의 강진을 견뎌내며 전기를 생산했다. 현대중공업은 2010년 2억7000만 달러어치의 PPS를 수출했다. 대상 국가는 쿠바, 브라질, 칠레, 이라크 등 22개국이고, 누적 수출 대수는 1000여 기다.

    쿠바의 지도자 카스트로는 현대중공업의 PPS에 매료된 이로 꼽힌다. 현대중공업은 2005년부터 2007년 사이 네 차례에 걸쳐 644기(총 발전용량은 125만 kW)의 PPS를 쿠바에 수출해 8억5000만 달러를 벌었다. 카스트로는 현대중공업에 선수금까지 지급하며 PPS 도입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쿠바의 10페소 지폐에 PPS를 그려 넣게 했다. 쿠바중앙은행은 2007년 1월 1일부터 발행한 10페소권 지폐에 ‘에너지 혁명(Revoucion Energetica)’이란 글귀와 함께 PPS 도안을 넣었다.

    현대중 이동식 발전기 제공

    정부는 도쿄전력에 4대의 PPS를 제공하기로 했다. 4대의 PPS는 1만 가구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5600kW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4대의 PPS 가격은 50억 원이다. 이 비용은 현대중공업이 3분의 2를 부담하고, 정부가 3분의 1을 맡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애초 정몽준 의원은 비상전원 확보가 절실한 후쿠시마 제1발전소를 염두에 두고 PPS 제공을 발의했는데, 3월 19일부터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외부전원이 확보되자 도쿄전력은 전기가 부족한 도쿄 지역을 위해 PPS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 60사이클(60Hz)의 전기를 사용하나 도쿄전력은 50사이클(50Hz)의 전기를 생산 공급한다. 60사이클 전기를 생산하는 장비를 50사이클 생산 장비로 바꾸는 데는 한 달이 걸리는데 현대중공업은 철야작업으로 1주일 만에 끝냈다. 그리고 바로 배에 실어 도쿄 인근인 지바(千葉)현에서 도쿄전력이 운용하는 아네가사키(姉崎) 발전소로 보냈다. 현지에 PPS를 설치하는 데는 3개월가량 걸리는데 현대중공업 기술진은 4주 만에 작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4월 27일 준공식을 열고 도쿄로 전력을 공급했다.

    그 외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3월 18일 도쿄 KBC(코리아비즈니스센터)를 통해 후쿠시마 현 재난본부가 필요로 하는 유아용·성인용 기저귀 5640장과 목장갑 1만5000켤레를 전달했다.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원전사고를 당한 일본에 한국이 지원한 것은 사상 최대 규모였다. 한국이 재난을 당한 나라에 지원한 것은 2010년 대지진을 당한 아이티에 1250만 달러어치를 제공한 것이 최대였는데 그것을 넘어섰다.

    역사는 돌고 돈다. 과거 역사에서 오랫동안 한반도는 일본에 문화를 전해주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개화에 뒤져 역전이 됐다. 이후 한국은 일본을 모방하며 추적했다. 원자력에 대해 공부하던 시절, 기자는 일본의 원자력 관련 법률과 한국의 원자력 관련 법률을 읽어보고 실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다. 한국 법률은 일본 법률을 번역한 것으로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의 원자력이 갑작스러운 재해로 큰 사고를 당한 일본을 지원하게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은 조선과 제철, 전자, 자동차에 이어 원자력에서도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올라섰다. 이제는 원자력에서도 일본을 앞질러야 할 때다. 그 시작은 보다 안전한 원전을 짓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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