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사요나라 원전”으로 시작한 재후(災後) 시대

제4장 그래도 원자력이다

  •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12-03-02 16:0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요나라 원전”으로 시작한 재후(災後) 시대

    2011년 11월 12일 J빌리지에서 방호복을 입고 후쿠시마 제1발전소로 들어가는 버스에 탑승한 기자들.

    사고를 당한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도쿄전력은 쓰나미 참사 8개월 만인 2011년 11월 12일 호소노 고시(細野豪志) 원전사고 담당 장관의 현장 시찰에 기자들을 불렀다. 사고 후 최초로 언론에 후쿠시마 제1발전소 내부 현장을 공개한 것이다. 현장 관람 후 기자들이 쓴 글을 정리하면 이렇다.

    오전 10시쯤 기자들은 ‘J빌리지’라고 하는 건물에서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피폭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선량계 2개를 방호복에 부착한 채 버스를 탔다. 기자들은 ‘마스크를 착용하니 매우 더웠다. 11월이었지만 땀이 흘렀다. 한여름에 이 마스크를 쓰고 작업하던 현장 요원 40여 명이 열사병 증세를 호소했다는 사실이 이해됐다’라고 적었다. J빌리지에서는 시간당 1.5마이크로시버트를 가리키던 방사선 선량계가 버스가 후쿠시마 제1발전소로 접근해감에 따라 금방 10마이크로시버트를 가리켰다.

    수치가 급격히 높아지는 방사선 선량계

    1밀리시버트는 1000마이크로시버트다. 일반인이 1년간 쬐는 자연 방사선이 2.4밀리시버트, 즉 2400마이크로시버트이니, 기자들이 쬔 시간당 10마이크로시버트는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다. 그러나 2.4밀리시버트(2400마이크로시버트)는 1년간 쬔 총 방사선량이니, 시간당 10마이크로시버트를 1년간 쬐고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다.

    1~4호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도착한 취재진은 ‘3호기는 누군가가 건물을 밟고 지나간 것처럼 건물 윗부분이 날아간 상태였다’고 적었다. 4호기도 외벽이 날아가 뻥 뚫렸는데, 그 틈으로 격납용기의 윗부분인 노란색 뚜껑이 보였다고 한다.



    1호기는 10월 14일 외부에 덮개를 덧씌운 상태라 내부를 볼 수 없었다. 1호기 덮개에는 외부로 내보는 공기에서 방사성물질을 걸러내는 필터가 설치돼 있다. 1호기는 격납용기와 원자로 안에 물을 채운 데다 덮개까지 씌웠기에 방사성물질의 대기 방출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호기 건물 1층의 바닥에 깔린 관에서는 시간당 4000밀리시버트의 방사선이 검출되고 있었다. 이는 관이 설치된 지하에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고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자들은 3호기 원자로 건물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방사선량이 시간당 200마이크로시버트로 높아졌다. 기자단을 안내하던 도쿄전력 직원은 “부지 안은 대체로 10마이크로시버트로 기록되는데 3호기 근처에서 특히 방사선량이 높게 검출된다”고 말했다. 동행한 도쿄전력 직원들은 선량계를 보고 있다가 높은 수치가 나오면 “800마이크로시버트” “1000마이크로시버트, 즉 1밀리시버트입니다”라고 외쳤다.

    이는 J빌리지에 있을 때보나 600배 이상 방사선량이 높아진 것이라 기자단 사이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 수치는 기자단이 지나가면서 잠시 쬔 것이라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원자로 건물을 둘러본 기자단은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그에 따라 방사선량도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해안에는 15m까지 치솟았던 쓰나미가 할퀸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흰색의 원통형 탱크 밑 부분은 뭔가에 강하게 치인 듯 움푹 패어 있었다. 해변에는 방사성물질이 바다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처에 방사성물질 방지제를 덮어놓았는데, 이 방지제는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전 11시쯤 기자단은 긴급대책본부가 차려진 면진동(免震棟)에 도착했다. 면진동은 지진에도 견딜 수 있게 만든 건물이다. 사고 당시 요시다 마사오 소장이 화상으로 본사와 대화하며 현장 지휘를 한 곳이기도 하다. 마스크와 방호복을 벗고 선량계를 살피니 기자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한 개 선량계는 77마이크로시버트, 또 다른 선량계는 52마이크로시버트(교도통신 기자의 것)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수치는 X레이를 한 번 촬영했을 때 받는 방사선량과 비슷하다. 도쿄전력 직원은 “전혀 염려스러운 수치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기자들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보험도 가입하지 않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원전도 사고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한다. 원전사고는 피해가 크기 때문에 보험료가 매우 비싸다. 따라서 한 개 보험회사가 단독으로 하지 않고 여러 회사가 공동으로 보험을 받는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가 있기 전 도쿄전력은 세계적인 보험회사들과 후쿠시마 제1발전소 원전 보험 가입 문제에 대해 협상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가격 차이가 있어 계약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대재앙의 사고를 당했다. 보험을 들지 않았으니 도쿄전력은 모든 것을 자체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로 도쿄전력은 도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조 원이 넘는 원전 4기가 사라졌으니 도쿄전력의 매출액이 급감할 수밖에 없다.

    도쿄전력은 막대한 사고 처리 비용도 지불해야 한다. 후쿠시마 사고 후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 지역을 경계구역으로 설정해 모든 주민을 소개했다. 이 지역에서 재배되던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게 했고, 가축은 모두 도살했다.

    20㎞ 경계구역 설정조치는 방사선 수치가 안정치 이하로 내려가야 해제된다. 도쿄전력은 그때까지 생업을 하지 못하게 된 소개 주민들에게 배상을 해줘야 한다. 지나간 일이지만 도쿄전력이 과감히 후쿠시마 제1발전소 원전 보험계약을 했더라면 지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IMF 외환위기 후 한국이 부실기업을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일본 정부가 출자해 도쿄전력을 인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담 하나를 더 하고 지나가자.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후 한국수력원자력도 유수의 보험회사와 새로 가동하게 된 원전의 보험 가입을 논의했다. 앞에서 설명했듯 한국 원전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원전보다 안전성이 높다. 한국수력원자력은 모든 원전에 수소제거기를 설치한다.

    보험회사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놀라 보험료를 올리려 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우리 원전은 안전성을 강화한 것이라 사고 위험이 줄었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한국수력원자력은 과거와 같은 기준으로 새로 가동한 원전의 보험 가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발전소 폐쇄 로드맵 발표

    2011년 12월 21일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폐쇄 로드맵을 발표했다. 도쿄전력과 경제산업성 에너지자원청, 산업안전청이 공동으로 작성한 이 로드맵에 따르면 사고를 낸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4개 호기는 2011년 12월 16일부로 상온정지 상태에 도달했다고 보고, 이후로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안정화에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안전상태 유지관리에 노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피해가 가장 작은 4호기에서는 2년 안에 4호기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에 있는 사용후핵연료를 전량 인출하고, 이어 3호기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에서도 모든 사용후핵연료를 꺼내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 1호기와 2호기에서는 3·4호기에서 사용후핵연료를 인출한 경험을 토대로 다시 계획을 짜 그 후에 사용후핵연료를 꺼내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사고가 난 4개 원전에서 사용후핵연료를 꺼내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이 끝나면 용융사고가 발생한 1~3호기의 원자로에서 녹은 핵연료를 꺼낸다. 그리고 3개 원자로를 해체하기로 했다.

    핵연료를 꺼내고 원자로를 해체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1979년에 노심 용융사고를 일으킨 스리마일 섬-2호기가 아직도 ‘물통’상태로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사고 원전들은 앞으로 30년 이상 그대로 서 있어야 한다. 그 사이 다시 대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당하면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사회를 ‘전후(戰後) 시대’라고 한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했으니 원폭은 일본을 전전(戰前) 시대와 전후시대로 나누는 기준이 된다. 히로시마에는 세계 최초로 투하된 원자폭탄을 맞고 희생된 사람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한 ‘히로시마 돔’이 세워져 있다.

    패전 이후 일본은 눈부시게 성장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이 과정에서 이를 악물고 노력한 것이 원자력계였다. 그 결과 세계 3위의 원자력발전 대국이 되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P-5)이 아니면서도 재처리 공장을 가진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롯카쇼무라에 재처리 공장을 짓기 전 일본은 실험용 재처리 시설을 지었다. 이 시설을 도입하기 위해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상당한 노력을 했다. 미일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재처리를 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것이다.

    1977년 일본은 도카이 2발전소가 있는 이바라키현의 도카이무라(東海村)에 프랑스 기술을 토대로 한 최초의 실험용 재처리 시설을 지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지낸 장인순 박사는 1990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1977년 도카이무라의 연구용 재처리 시설을 완공했을 때를 찍은 기념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장 박사의 기억이다.

    “플루토늄 추출에 성공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화면에 나오는 일본 연구진은 펑펑 눈물을 흘렸다. 군인도 아닌 순수 과학자들인 그들이 왜 울겠는가. 플루토늄 추출이 확인되었을 때 그들의 뇌리에는 1945년 원폭 투하로 죽어간 친지와 동료들과 힘들었던 그들의 젊은 시절, 그리고 패전한 조국의 고통 등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다테마에(建前·진심을 감춘 얼굴)’ 속에 있는 일본인들의 ‘혼네(本音·속마음)’를 보는 것 같아 전율이 느껴졌다.”

    이렇게 건설해온 일본 원자력 신화가 쓰나미 피해에 잘못 대처함으로써 한순간에 무너졌다. 2만 명 이상이 희생된 쓰나미 피해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원전 사고까지 겹쳤으니 일본인들의 어깨는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사요나라! 원전”

    “사요나라 원전”으로 시작한 재후(災後) 시대

    2011년 4월 11일 도쿄에서 일어난 반핵시위. 후쿠시마 사고로 일본에서는 반핵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에 이어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가 겹친 지금을 작가이자 도쿄도 부지사로 활동하던 이노세 나오키(猪瀨直樹) 씨는 일본인들이 전후 시기와 다를 바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며, ‘재후(災後) 시대’로 명명했다.

    재후 시대는 고통으로 시작한다. 고통은 분규를 일으킨다.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했기에 핵무기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그런데도 원전을 건설할 때 반핵 목소리가 한국에서보다 높게 나오지 않았다. 일본에도 히로세 다카시 씨 등 유명한 반핵운동가가 있지만 이들은 한국에서만큼 많은 국민을 동원하지 못했다. 반핵 시위는 북핵 위기에 당면한 한국이 오히려 드셌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는 일본에서 반핵시위가 재점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2011년 11월 13일 후쿠오카(福岡)시 주오(中央)구 마이즈루(舞鶴)공원에서는 일본 전역에서 1만5000여 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모든 원전 폐쇄와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를 주도한 아오야기 유키노부(靑柳行信) 씨는 “대지가 방사능에 오염되는 일이 없도록 같이 열심히 하자”고 이야기했다.

    이 집회에 한국 대표가 참여했다. 한국에서 날아온 한일 100년 평화시민 네트워크의 이대수 운영위원장은 “일본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나면 한국도 영향을 받는다. 더 이상 원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집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반(反)원전’ 구호를 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을 했다. 일본에서 “사요나라(안녕) 원전”이 나온 것이다.

    재후 시대 가장 큰 고통을 당할 대상은 도쿄전력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처리 로드맵을 발표한 도쿄전력은 이와는 별도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피해자 배상비용 마련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인은 피폭국가이기에 방사능에 대해서 실질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도쿄전력은 두려움을 배가시킨 데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

    원정 출산에 나선 임신부들, 방사선 측정에 활용된 원숭이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는 일본인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사고로 후쿠시마 지역의 출생자 수가 급감했다는 사실이다. 후쿠시마 사고 후 일본 산부인과의사협의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다음인 2011년 4~6월 후쿠시마현의 신생아 수가 급감했다.

    일본산부인과의사협의회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다음인 2011년 4~6월 신생아 수가 예년에 비해 후쿠시마현에서 1000여 명, 도쿄도와 지바(千葉), 가나가와(神奈川) 현을 합친 곳에서 1000여 명 등 4개 지역에서 도합 2000여 명이 줄었다고 밝혔다. 일본산부인과의사협의회는 분만을 담당하는 750개 병원에 질문지를 보내(회답률 67%) 이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 기간 후쿠시마현 신생아 수는 전년도(2010)에 비해 25% 정도 감소한 수치다. 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당국이 후쿠시마 제1발전소 주변을 경계구역, 피난구역으로 지정해 주민들을 소개한 것이 첫째 원인으로 꼽힌다. 또 이 구역 밖에 있던 후쿠시마 임신부들도 방사선 피폭을 우려해 다른 지역으로 가 아이를 낳은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된다.

    간토(關東) 지방으로 불리는 도쿄와 지바, 가나가와 지역의 출산율 감소는 이 지역에서 후쿠시마 원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세슘이 검출됐다는 보도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반면 후쿠시마 사람들이 대거 피난한 사이타마(琦玉)현은 오히려 출산율이 증가했다. 후쿠시마 사람이 많이 이주한 미야기(宮城)현의 출생률도 전년보다 6% 정도 높아진 것으로 조사됐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는 피난 출산을 야기한 것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인근에 언제 주민이 되돌아와 살 수 있을지도 문제가 된다. 소개 기간이 길어질수록 도쿄전력의 배상금은 늘어난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인근 지역의 방사선 피폭량은 어느 정도일까.

    정지 비행이 가능한 소형 헬기나 무인 헬기를 띄워 측정할 수 있지만, 이 방법으로는 사람이 살 지표면의 방사선량을 측정하기 어렵다. 지표에서 꽤 높이 올라간 허공 중의 방사선량만 측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로봇 공학을 전공한 후쿠시마(福島)대학의 다카하시 다카유키(高橋隆行) 교수팀이 후쿠시마 지역의 산에 살고 있는 야생 원숭이를 활용하기로 했다.

    원숭이는 무리 생활을 하는데, 무리가 사는 곳은 대개 정해져 있다. 수컷은 다른 무리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이동할 수도 있으나 암컷들은 철저히 자기 무리에서만 생활한다. 다카하시 교수팀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인근 산속에 야생 원숭이 무리가 14개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각 무리의 암컷들을 포획해 방사선검출기와 GPS(위치정보시스템)를 탑재한 목줄을 장착했다.

    목줄을 단 암컷 원숭이들은 무리로 되돌아가 나무를 오르며 생활하는데, 연구진은 이들을 다시 포획해 이들이 거쳐간 곳의 방사선량을 측정하기로 한 것이다. 다카하시 교수는 “산속을 높낮이가 다른 위치로 옮겨 다니면서 방사선을 측정해줄 로봇은 없다. 원숭이가 최고다”라고 말했다. 이 조사를 통해 자연 생태계 깊숙한 곳으로 확산된 방사선의 세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官을 우선하는 일본

    “사요나라 원전”으로 시작한 재후(災後) 시대

    무리 생활을 하는 일본원숭이. 후쿠시마 대학의 한 교수는 후쿠시마에 사는 야생원숭이를 이용해 지표면의 방사선량을 조사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수소폭발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방사성물질을 제거하는 것은 후쿠시마 지역을 삶터로 되돌린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방사성물질은 여러 곳에 부착된다. 건물에 붙을 수도 있고 나무를 비롯한 숲에 붙을 수도 있다. 방사성물질이 붙은 곳에서는 자연방사선보다 강한 방사선이 나온다.

    일본은 이러한 방사능 오염을 없애기 위해 방사성물질 오염 대처 특별조치법을 만들었다. 이 법 발효 한 달 전인 2011년 12월 7일, 일본 육상자위대는 후쿠시마와 고리야마(郡山)에 주둔하고 있는 화학방호대원 900여 명을 경계구역인 후쿠시마현의 나라하(樽葉)·도미오카(富岡)·미에(浪江) 3개 정(町)과 계획적 피난지역인 이타테무라(飯館村)에 파견해 2주일 동안 관공서 주변 건물 주변의 오염물질 제거 작업을 하게 했다.

    이들은 고압세척기나 금속으로 만든 솔로 관공서 건물을 세척하고 오염된 표면 흙은 파내고, 오염된 나무를 베어내 관공서 내에 일시적으로 보관하게 하는 일을 했다. 일본은 철저하게 관(官) 우위의 사회다. 국민은 관에 굴종한다.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관의 말을 듣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고가 나면 먼저 관공서부터 복구한다. 민가 복원은 개인이 알아서 할 영역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과 한국은 완전 반대다.

    도쿄전력은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건설 중인 것을 제외한 모든 신규 발전소 건설을 포기하고, 가동 중인 화력발전소는 매각하며, 고령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아 7400여 명을 감축하기로 했다. 도쿄전력은 자사 홈페이지에 방사선 피해자 상담 창구를 만들어 피해자 측과 배상에 대한 협의에 들어갔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는 원자력발전을 하는 여러 나라와 기관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원자력발전에 관한 세계 최고 권위기관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다. 미 NRC의 결정은 세계 모든 원전에 영향을 끼친다. 2011년 12월 20일 미국 NRC는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각 원전에서 취해야 할 권고사항을 발표했다.

    원자력 안전 강화한 일본

    후쿠시마 사고가 있을 때까지 일본에서 원전 안전 문제는 경제산업성 산하 원자력안전보안원(安全保安院)에서 담당했다. 이러한 구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경제산업성은 한국의 지식경제부와 비슷한 부처로 산업 진흥을 주 임무로 한다. 즉 원자력 산업 육성과 수출을 관장하는 것이다. 원자력을 진흥하는 부처의 외청으로 안전을 담당하는 원자력안전보안원을 뒀으니 제대로 하겠느냐는 지적이 많았던 것이다.

    경영과 행정의 요체 중의 하나는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이다. 원자력을 발전시키면서 안전하게 유지하려면 발전을 담당하는 부서와 안전을 담당하는 부서의 직급을 균일하게 놓아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진흥을 담당하는 경제산업성 밑에 안전을 담당하는 원자력안전보안원을 두었다. 일본에는 내각 직속으로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있는데,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안전을 담당하지만 실질적인 집행력이 없었다.

    원자력은 각 대학의 원자력공학과에서도 다루므로 문부과학성도 원자력 업무를 한다. 문부과학성은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을 합친 조직인데, 과학기술청이 원자력 안전을 담당했다. 따라서 문부과학성에도 원자력 안전을 다루는 부서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원자력 안전을 내각의 원자력안전위원회, 경제산업성의 원자력안전보안원, 그리고 문부과학성이 균점하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구조로는 제대로 된 안전 규제를 할 수 없다고 본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경제산업성 산하의 원자력안전보안원과 내각 산하의 원자력안전위원회, 그리고 문부과학성에 원자력 안전을 담당하는 부서를 묶어 환경성 산하에 원자력안전청을 두기로 했다.원자력 안전을 환경 문제로 보고 환경성에 외청을 두기로 한 것이다. 경제산업성은 원자력 진흥을 맡고 환경성은 원자력 규제와 안전을 맡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원자력은 환경성 입장에서는 낯선 주제이기에, 환경성에 원자력안전심의회를 둬 환경성 장관에게 원자력 안전에 대해 조언하도록 했다.

    후쿠시마 사고는 한국의 원자력 안전체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2011년 10월 한국도 원자력 안전을 다루는 장관급 기구인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후쿠시마 사고가 있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원자력국이 원전 문제를 총괄했다. 원자력국에는 원자력 연구를 하는 과와 원자력 안전을 다루는 과가 병존한다. 원자력 연구를 하는 과는 원자력을 진흥시키는 부서이고 원자력 안전을 다루는 과는 규제하는 부서다. 한쪽이 가속기라면 다른 쪽은 제동기인 것.

    그렇다면 두 부서는 완전히 분리돼 있어야 하는데, 같은 국 안에서 인사 교류에 따라진흥 업무를 하던 이가 규제 업무를 하게 되니 견제와 균형이 일어날 수 없었다. 후쿠시마 사고가 나자 교육과학기술부는 원전 안전 업무를 강화할 생각으로 원자력국을 원자력안전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름만 바꿨을 뿐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진흥을 하던 공무원이 규제를 하고, 규제를 하던 직원이 진흥 부서로 가는 일이 반복된다.

    한국도 원자력 안전 강화

    이 고리를 끊기 위해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원자력 안전을 담당하던 부서를 떼어내 대통령 직속 기구로 원자력안전위원회(초대 위원장 강창순)를 만들었다. 정부에는 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원자력위원회가 있었는데, 이 위원회는 원자력 진흥을 담당하기에 원자력진흥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게 했다. 서열로 따지면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자력진흥위원회 앞에 놓인 원자력 진흥보다는 원자력 안전에 비중을 두기로 한 것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연구기관으로 원자력안전기술원과 원자력통제기술원을 두게 했다.

    지식경제부는 원전 업무를 하는 곳이니 안전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후쿠시마 사고 후 지식경제부는 2차관 밑에 에너지자원실을 두고 그 아래 원자력산업정책관을 만들었다. 원자력산업정책관실에는 원전산업정책과, 원전수출진흥과 등이 있어 원자력 산업과 수출 등을 추진한다. 원자력산업을 담당하는 지식경제부는 원자력 안전을 다루는 부서를 두지 않았다.

    한국의 지식경제부와 흡사한 것이 일본의 경제산업성인데, 일본은 경제산업성의 외청으로 원자력 안전 문제를 다루는 원자력안전보안원을 뒀으니, 한국보다 안전을 더 등한히 했다고 하겠다. 한국의 문제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원자력국에서 원자력 진흥과 원자력 안전을 다 담당하게 한 것이었다. 한국은 이 문제를 원자력위원회를 만들어 해결했다. 원자력 안전 업무를 기존 부서인 환경부에 맡기지 않고 별도 기구를 만들어 담당하게 한 것이다.

    원자력 진흥은 지금처럼 교육과학기술부가 담당한다. 제2차관실 산하의 연구정책개발실-전략기술개발관 밑에 원자력기술과와 원자력우주협력과를 둬 원자력 진흥 업무를 맡게 한다. 원자력기술과에서는 새로운 원자로 개발 등을 담당한다. 그리고 원자력 안전은 원자력안전위원회로 넘겨 이 위원회 안전정책국의 원자력안전과 등에서 담당하게 했다. 진흥과 안전을 완전히 분리한 것이다. 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도 안전을 다루는 안전기술본부를 만들고 이 본부 안에 위기관리실을 설치했다.

    재후 시대 일본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인접 국가들도 일본을 보며 안전체제를 강화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