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연기 인생 30주년 맞은 배우 황신혜

“바보스러울 만큼 순한 역할 해보고 싶어요 저 원래 착해요”

  • 김지영 기자│kjy@donga.com

    입력2012-03-20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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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릭터가 매력적이면 조연, 악역도 좋아
    • “두 번의 이혼, 후회하지 않아요”
    • 사랑에 목숨 거는 순정파, “딸이 날 닮을까 걱정이에요”
    • 컴퓨터 미인? 젊을 땐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감사할 뿐
    • “나이 드니 표정 의식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연기가 나와요”
    • 존경하는 배우는 윤여정·김혜자, 연기열정 부러워
    연기 인생 30주년 맞은 배우 황신혜
    혹자는 말한다. 황신혜(49·본명 황정만)의 전성시대는 갔다고.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단언하긴 이르다. 자고 일어나면 스타가 되고 다 죽어가던 인기도 히트작 만나면 치솟는 곳이 연예계가 아니던가. 더구나 황신혜처럼 데뷔 후 30년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킨 스타는 흔치 않을뿐더러 작품 속 그의 존재감은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신동아’ 4월호의 ‘핫 스타’로 그를 선정한 이유다.

    황신혜를 만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가 출연하던 채널A 드라마 ‘총각네 야채가게’ 촬영이 끝나지 않아 인터뷰 일정을 잡기가 애매한 탓이었다. 그는 결국 모든 촬영을 마치고 3월 8일에야 시간을 냈다.

    우리는 그가 평소 자주 찾는다는 서울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서 오후 5시가 조금 넘어 만났다. 석 달 넘게 드라마를 찍어 피로가 쌓였을 텐데도 그에게선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좋은 배우가 되려면 연기력 못지않게 체력이 중요하다더니 그가 30년을 오롯이 연기에 바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강철 체력 덕분이리라.

    ▼ 1983년에 데뷔하셨죠? 올해로 연기한 지 꼭 30년 됐더라고요.

    “실감이 안 나네요. 세월이 언제 갔나 싶어요. 놀랍네요. 그러고 보니 내가 연기 안 하고 산 기간보다 연기하며 산 기간이 더 기네요. 난 그런 걸 의식하지 않아서 몰랐어요.”



    지독한 악녀 캐릭터에 도전하다

    ▼ 드라마 촬영은 잘 끝났나요?

    “촬영은 어제 다 끝냈고, 오늘밤에 마지막 회가 방송돼요. 처음 대본을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종영이라니 아쉬워요.”

    지난해 12월부터 방영된 ‘총각네 야채가게’는 한류드라마로 인기를 끈 ‘아름다운 날들’ ‘별을 쏘다’ 등을 집필한 윤성희 작가의 작품으로 빛나는 아이디어와 패기 넘치는 청년들의 멋진 성공기를 그렸다. 이 드라마에서 황신혜는 주인공 한태양(지창욱 분)과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소꿉친구 진진심(왕지혜 분)의 엄마 최강선을 연기했다. 최강선은 스무 살에 사랑한 재벌2세 목인범(전노민 분)의 곁으로 가려고 친딸의 죽음을 숨기고 진진심을 친딸로 둔갑시켰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더없이 좋은 엄마지만 진진심과 단둘이 있을 때는 싸늘하게 돌변하는 악녀 캐릭터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친딸에 대한 죄책감과 아픈 상처를 안고 사는 그의 이면이 드러나 시청자들 사이에서 동정 여론이 일기도 했다.

    ▼ 주연이 아니어서 출연이 망설여지진 않았나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어요. 시놉시스를 보고 역할이 강력하게 다가왔어요. ‘최강선’이라는 역할이 중요한 열쇠를 쥔 인물이어서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캐릭터도 매력이 있었고요. 예전부터 주인공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매력이 느껴지지 않으면 안 했어요. 뭔가 끌리는 게 있어야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뭔가요?

    “전반적인 분위기랑 캐릭터를 많이 봐요. 배우가 아닌 시청자로서 작품을 고르는데 내용이 흥미롭다든지 캐릭터가 신선하면 출연하고 싶어지죠. 느낌이 중요한 것 같아요.”

    ▼ 최강선이란 인물은 악녀에 가까워서 기존에 했던 역할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완전히 다르진 않아요. 강한 캐릭터를 많이 했지만 이렇게 악하고 무서운 역할은 처음이긴 하죠.”

    하기야 2010년 드라마 ‘즐거운 나의 집’에서 그가 맡았던 모윤희라는 인물도 악녀 캐릭터에 가까웠지만 최강선에 비하면 순둥이였다. 최강선은 자신의 욕심이 주변 사람을 모두 불행하게 만드는데도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너무 깊어서 끝까지 피해자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연기가 너무 리얼해서 실제로도 저런 표독스러운 구석이 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감정이입이 잘 되던가요.

    “저도 연기하면서 최강선이 정말 무서운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순간 들었어요. 하지만 최강선이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면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을 텐데 대본이 설득력이 있더라고요. 한 남자를 너무도 사랑해 해서는 안 되는 짓인 줄 알면서도 진심이를 친딸로 위장하고, 거짓이 들통날까봐 안절부절못하면서 친딸에 대한 미안함으로 괴로워하거든요. 같은 여자로서 연민이 생기더라고요.”

    ▼ 작품을 끝내고 나니 기분이 어떤가요?

    “강선과 헤어지려니 아쉽기도 하고 가슴이 아려요. 저도 모르게 마음을 많이 줬나봐요.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시원한 캐릭터도 있지만 헤어지기가 아쉬운 배역도 있거든요. 더 보여주고 싶은데 끝나서 아쉬움이 남아요.”

    ▼ 강선이 때문에 나쁜 이미지로 굳어질까 걱정되지는 않았나요?

    “마땅한 이유와 개연성이 부여되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밑도 끝도 없는 악역에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요(웃음).”

    엄마라는 이름으로

    극중에서도 엄마 역을 했지만 실제 그에게도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다. 공교롭게 기자와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은 서지영(14) 양이다. 지영 양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다. 대부분의 과목에서 에이플러스(A+)를 받을 정도로 공부 잘하고 반듯한 우등생이라고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와 지영 양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누리꾼들은 ‘엄마 못지않은 미모’라고 감탄했다. 엄마를 많이 닮았느냐고 묻자 그는 “나보다 키가 2㎝ 넘게 크고 날씬하다”며 “자랄수록 외모가 날 닮아간다”고 전했다.

    ▼ 실제로도 딸을 둔 엄마여서 작품에 몰입하기가 더 수월하던가요?

    “그런 면이 없지 않았죠. 이야기가 과거부터 시작해 드라마 초반에는 아역배우들이 작품을 끌고 가거든요. 그 아이들이 제 딸과 비슷한 나이예요. 그래서인지 연기할 때 더 애틋한 감정이 들었어요. 특히 최강선이 사고로 죽은 친딸을 화장하는 장면을 찍을 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어요. 지영이가 그걸 보고 전화로 묻더군요. ‘엄마, 내 생각하면서 연기했어? 내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어?’ 하고요. 그렇다고 했더니 죽는단 느낌이 싫은지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지난주에도 ‘내 아이 죽인 사람한테 못할 짓이 뭐 있느냐’는 대사가 있었는데 딸이 함께 보다가 ‘누가 날 죽이면 어떡할 거냐’고 묻기에 ‘가서 죽이고 나도 죽어야지. 너 없이 어차피 못 사니까’ 했어요. 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더니 엄마랑 똑같이 하겠다고 하더군요. 대신 자기는 고통을 주면서 죽일 거래요. 그래야 복수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요.”

    ▼ 딸과 사이가 좋은가 봐요.

    “같은 여자로서 교감할 때가 많아요. 나이는 어리지만 친구 같아요.”

    ▼ 평소에 대화를 많이 하나요?

    “떨어져 있지만 대화를 자주 하려고 노력해요. 방학 때 나와 있으면 함께 지내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실컷 나누죠. 마침 지금 방학이라 나와 있어요. 미국 학교는 봄 방학 기간이 길더라고요.”

    엄마가 되면 솔로 시절보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마련이다. 내 아이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의 어긋난 삶까지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여기며 따뜻한 시선으로 이해하게 된다. 황신혜 역시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출산이라는 인생의 전환기를 겪으며 어떤 인물의 삶도 담아낼 수 있을 만큼 연기 폭이 넓어졌다. 데뷔 후 줄곧 톱스타로 살아온 그가 악역이나 조연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 결혼, 출산, 이혼 경험이 연기에 자양분이 됐나요?

    “분명히 그렇죠.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아픈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전 나쁜 일이 있어도 이게 나한테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거니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 오래전 김청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났을 때 굉장한 허탈감에 빠져 방황했다고 하더군요. 그처럼 언젠가 조연이 될 거라는 불안감이 들지 않나요?

    “언젠가는 저도 조연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때문에 불안하진 않아요. 이번에 한 엄마 역할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없었어요. 이왕이면 잘생긴 아들을 둔 엄마를 해야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다 보니 괜찮더라고요. 예전에는 엄마 캐릭터가 다채롭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색깔로 그려지잖아요. 최강선 캐릭터도 굉장히 특별했죠. 쉬운 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연기를 하면서도 계속 강선이 어떻게 변해갈지 기대되고 궁금하고 긴장됐죠.”

    ▼ 시청률이 기대에 못 미쳐 속상했을 것 같아요.

    “대본이 별로였다면 촬영장 가는 게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테죠. 근데 대본이 너무 재미있어서 신나게 즐기면서 찍었어요. 그래서 시청률이 더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어요. 춥고 힘든 적도 많았지만 팀워크는 최고였죠.”

    나이 듦에 대하여

    동안 미모에 몸매도 20대가 부럽지 않을 정도지만 그의 나이는 어느덧 하늘의 이치를 헤아린다는 지천명에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그는 전보다 한결 편하고 여유 있어 보였다.

    ▼ 살아오면서 지난날의 아픈 과거를 후회한 적이 있나요?

    “후회는 없어요. ‘후회하지 말자’가 제 좌우명이에요. 엄마가 결혼을 못하게 말리셔도 제가 좋으면 강행했어요. 그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으니까요. 오히려 엄마 말 듣고 포기했더라면 지금 후회할지도 모르죠. 대신 제가 한 선택이니만큼 잘되지 않았어도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싶진 않아요.”

    ▼ 사랑할 땐 어떤 스타일인가요?

    “완전 순정파예요. 그 사람밖에 모르거든요. 연애와 결혼을 구분해서 생각한다는 건 있을 수 없죠. 사랑하면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딸이 절 닮을까봐 걱정이에요. 딸은 저처럼 사랑에 목숨 걸지 말고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현명한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 첫사랑은 언제 했나요?

    “18세에 교회 다니면서 만나던 사람이 있었어요. 동갑이었죠. 방송에 데뷔하고 나서 20대 초반에 잠깐 본 적이 있어요. 친구가 만날 일이 있다기에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 따라갔죠. 정말 후회했어요. 열여덟 살에 본 그 느낌이 아니더라고요. 아련하고 예쁜 추억으로 남겨둘 걸 괜히 나갔어요.”

    ▼ 어떤 타입을 좋아하나요?

    “과묵하고 진중한 스타일을 좋아해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너무 나대지 않는 사람이 좋아요.”

    ▼ 외모는 안 따지나봐요?

    “왜 아니겠어요. 전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의 소유자보다는 배가 좀 나오고 풍채가 좋은, 인심이 넉넉해 보이는 사람이 좋더라고요.”

    연기 인생 30주년 맞은 배우 황신혜

    채널A 드라마 ‘총각네 야채가게’의 한 장면.

    ▼ 지금도 아름다우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그런 기대감은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마음을 자연히 비우게 되더라고요. 지영이가 ‘엄마, 너무 예쁜데 데이트도 하고 그래. 엄마 인생은 엄마 거니까 결혼해도 난 상관없어’ 그러더군요. 굳이 연애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딸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고 대견했어요. 아직 어려도 내 생각을 많이 해요.”

    ▼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이 아니라면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일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대시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마음 가는 사람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쓸 만한 남자가 없네요. 괜찮은 여자는 많은데 왜 이렇게 괜찮은 남자는 없을까요. 아니면 이미 결혼했거나. 오죽하면 제가 지인한테 혹시 이혼 예정인 사람 중에 괜찮은 사람 없냐고 물어봤다니까요. 하하하.”

    ▼ 50대에도 20대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이 뭔가요?

    “운동이죠. 매일은 못하지만 유산소운동과 웨이트트레이닝을 꾸준히 병행하고 있어요. 나이 들면 살이 처지고 탄력을 잃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근력운동이 정말 중요하죠. 하지만 건강한 젊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예요. 마음이 편해야 스트레스로 건강을 상하는 일도 없고 운동할 마음도 생기죠.”

    ▼ 나이 듦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29세에는 서른이 된다는 게 싫었어요. 20대가 가고 나이가 3자로 시작되는 게 끔찍이 싫었어요. 근데 막상 30대가 되니 너무 편안하고 좋더군요. 20대 때는 늘 일에 쫓기고 불안했는데 30대엔 한결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누리고 즐기고 느낄 줄 아는 여유요. 그러다 30대 중반이 되니 다시 불안해지더군요. 무엇보다 아이를 갖고 싶었는데 출산할 수 있는 나이가 얼마 안 남았더라고요. 이러다 평생 못 낳을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포기할 때쯤 지영이를 가졌죠. 40대엔 30대일 때보다 더 의연했어요. 50대를 앞에 두니 이제 곧 60대가 되겠구나 하고 인생의 자연스러운 순리로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이젠 뭘 하더라도 제대로 정말 열심히 해야겠구나,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더 강해져요. 연기에 욕심이 생겨요.”

    ▼ 그전엔 욕심이 없었던 건가요?

    “있었지만 차원이 달라요.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예전보다 지금이 더 간절하고 절박하죠. 이런 절박함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엄마가 늘 그러세요. 나이 먹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그리고 나이 먹는 만큼 딸이 점점 커가는 걸 보면 오히려 시간이 더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딸이 미래엔 어떤 모습일지 얼른 보고 싶거든요. 딸과 같이 있으면 무척 든든하고 뿌듯해요. 딸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어떨지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해요. 할머니 소리를 듣는 건 달갑지 않지만 딸의 2세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요(웃음).”

    배우로 산다는 것

    1964년 인천에서 나고 자란 황신혜는 어릴 적부터 여행을 좋아해 스튜어디스를 꿈꿨다. 인하공업전문대학 항공운항과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1983년 MBC 공채탤런트 시험에 합격하면서 대학을 중퇴하고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연예인을 선망했지만 진짜 연예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탤런트 시험도 연예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으로 본 게 아니었어요. 친구가 공채 원서를 몇 장 가져왔기에 함께 써냈는데 둘 다 붙었죠. 그 친구는 금세 그만두고 전 계속하게 돼 여기까지 온 거고요. 대학시절 화장품 광고도 우연한 기회에 찍었어요. 친구 오빠가 모델 에이전시를 했는데 모델을 뽑는다고 해서 갔다가 태평양화학 관계자에게서 ‘자사 신제품 모델 테스를 받으러 오라’는 제의를 받았어요. 부모님과 가족들은 화장품 모델을 아무나 하느냐며 걱정했지만 운 좋게도 그 회사와 전속 계약을 했죠.”

    당시 모델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서구적 미인의 등장은 광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에 힘입어 그는 연기 데뷔작인 MBC 드라마 ‘아버지와 아들’과 ‘내 마음의 풍차’에 연달아 출연하며 주연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그는 한동안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첫사랑’ ‘방 각하’ ‘야망의 세월’ ‘모래 위의 욕망’ 등의 TV 드라마와 ‘기쁜 우리 젊은 날’ ‘개그맨’ ‘꿈’ ‘물 위를 걷는 여자’ 등의 영화를 찍었다.

    그 사이 그에겐 ‘컴퓨터 미인’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데뷔 초반 한 방송에서 성형외과 전문의들이 그의 미모를 “이목구비의 조화가 컴퓨터로 치수를 잰 듯이 완벽하다”고 평가한 것이 계기였다. 이 때문에 그는 연기보다 외모로 주목받을 때가 많았지만 1996년 드라마 ‘애인’을 시작으로 ‘신데렐라’(1997) ‘위기의 남자’(2002) 등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는다. 이들 작품으로 아름다운 중년을 꿈꾸는 미시족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는 배우로서의 명성과 평단의 호평 속에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려왔다.

    ▼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두렵지 않았나요?

    “두려웠죠. 첫 작품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해서 어떻게 찍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첫 영화인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촬영할 땐 배창호 감독님과 이견이 있어서 거기에 맞추며 찍느라고 힘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이 없어서 엄마가 매니저 노릇에 의상 준비까지 다 해주셨어요. 작품이 결정되면 엄마와 이태원으로 독특한 소품이나 의상을 사러 다녔어요.”

    ▼ 컴퓨터 미인이라는 애칭이 마음에 드나요?

    “내 얼굴이 정말 완벽한가요? 처음엔 그 말을 듣고 웃었어요. 저 나름대로는 아쉬운 부분도 있거든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예뻐 보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요. 젊은 시절에는 그렇게 불리는 게 불편하고 부담스러웠어요.”

    ▼ 외모가 연기를 가려 억울할 때도 있었을 것 같아요.

    “모든 관심이 외모에 쏠리니까 연기를 업으로 하는 저로선 속상하기도 했죠. 배우는 너무 예쁘거나 잘생기면 안 될 것 같다고 지인한테도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근데 어쩔 수 없더라고요. 저도 할리우드의 완벽한 미남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는 연기보다 외모에 더 시선이 가더라고요(웃음).”

    ▼ 연기할 때 외모에 신경이 쓰이나요?

    “젊을 때는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우는 장면을 찍을 땐 못생겨 보일까봐 신경이 쓰였는데 나이를 먹으니 편해지더군요. 울거나 인상을 써야 할 때도 표정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연기가 나온다고 할까요.”

    ▼ ‘총각네 야채가게’에선 성질부리며 인상 쓰는 장면이 많던데 연기가 흡족하던가요?

    “예전 같으면 싫었겠지만 표정 연기가 자연스러워 보여 좋던데요. 화난 사람이 예쁘게 웃는 것처럼 보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죠. 하하하.”

    털털, 호탕, 솔직…숨은 매력을 찾다

    30년을 톱스타로 살아왔으니 도도하고 까칠할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본 그는 무척 소탈했다. 어떤 질문을 해도 피하지 않고 기자의 눈을 쳐다보며 성실하게 답하는 말본새에서 그의 진솔한 성격을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말하는 속도가 느린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4분의 4박자보다는 느리고 8분의 6박자보다는 약간 빨랐다. 목소리 톤도 높낮이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말만 느린 게 아니라 말수도 적었어요. 지금은 많이 수다스러워진 거예요. 하하하.”

    ▼ 연기하면서 성격이 변한 건가요?

    “그런 셈이죠. 20대엔 진짜 조용했어요. 기자들이 절 인터뷰할 때마다 무척 힘들어했어요. ‘예’ 아니면 ‘아니오’로 짧게 답하니 상대방은 답답할 수밖에요.”

    ▼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 중 실제 성격과 가장 닮은 인물은 누군가요.

    “가족들은 안재욱 씨와 부부로 출연한 드라마 ‘천생연분’의 황종희 역이 저랑 가장 비슷하다고 해요.”(황종희는 홈쇼핑 케이블 채널의 중역으로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순정파다. 밖에서는 남자 못지않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커리어우먼이지만 남편을 섬기며 순종적으로 사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고 믿는 그런 여자다.)

    ▼ 결혼하면 남편에게 순종적인 타입인가요?

    “그런 편이죠. 잘할 때는 정말 잘했어요.”

    ▼ 그동안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삶을 살아봤는데 아직도 욕심나는 역할이 있나요?

    “지고지순하고 한없이 착한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바보스러울 만큼 순한 역할이요. 잘할 자신 있어요. 저 원래 착해요.”

    ▼ 연기생활은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요?

    “할머니가 되더라도 건강이 허락한다면 계속 하려고요. 앞으로 실버세대가 더 늘어날 테고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도 점점 더 다양해지는 추세니까요.”

    그는 가장 친한 동료로 최명길을,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2010년 ‘즐거운 나의집’을 함께 한 윤여정과 영화 ‘마더’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김혜자를 꼽았다.

    “윤여정 선생님과 김혜자 선배님은 보고만 있어도 연기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분들이에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미숙 선배의 자기관리 능력도 높이 평가해요. 지금까지 그런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대단한 일이죠.”

    ▼ 최명길 씨와는 어쩌다 친해졌나요?

    “1994년 ‘사랑은 없다’라는 드라마를 같이 하면서 친해졌죠. 처음에는 지적인 이미지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알면 알수록 엉뚱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런 매력에 반했죠. 언니와 평소에 통화를 자주 해요. 일로 만났지만 제겐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스케줄을 내기가 쉽지 않은 그와의 인터뷰를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만큼 오래전부터 꼭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한때 연예기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떠돌던 소문에 관한 것이었다. 내용인 즉 이렇다. 여배우 A씨가 여배우 B씨의 이혼에 원인을 제공해 B씨와 친한 황신혜씨가 미용실에서 A씨의 뺨을 때렸다는 것. 화통한 그이기에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 소문이 사실인가요?

    “저도 그런 소문을 들었는데 말도 안 되죠. 내 남자가 바람피운 여자를 찾아가도 못 그럴 것 같은데 어떻게 후배 뺨을 때리겠어요. 그런 소문 때문에 절 드센 여자로 보는 분들이 있나봐요.”

    ▼ 후배들에게 무서운 선배인가요?

    “아니에요. 군기 잡으려고 해도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 1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예전에 어떤 사람이 10년 후의 내 모습이 궁금하다고 하기에 기대하라고 했어요. 그때는 10년이 정말 까마득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굉장히 짧게 느껴져요. 앞으로 10년도 금방 지나갈 것 같아요. 젊을 때는 컴퓨터 미인이라는 칭찬을 들어도 감사한 줄 몰랐어요. 하도 들으니까 인사치레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요. 근데 얼마 전 제가 출연한 장면들을 모아서 본 적이 있는데 ‘예쁘다’는 자막을 정말 많이 넣어주셨더라고요. 정말 행복하고 감사했어요. 10년 뒤에도 예쁘고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러려면 열심히 노력해야겠죠.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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