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부자유친 군신유의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입력2012-03-20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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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1919년은 고종의 죽음과 장례로 시작되었다. 죽은 고종은 한때 그의 백성이었던 국민을 궐기시켰다. 3월과 4월을 뒤덮은 전국적 저항으로 총독이 교체됐다. 새 총독이 상경하는 경부선 연도는 일본제국에 의해 도입된 10년간의 서구적 근대 풍경의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기미년은 각자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강우규의 길, 안희제의 길, 한림의 길. 각각은 저마다 천만 개의 길 중 하나였다. 그 초입에서 전 임금 고종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웅변했다.
    (제8장)

    부자유친 군신유의

    고종(오른쪽)과 고종 국장(國葬) 당시의 순종.

    1920년 4월. 한림은 신문의 창간 특집 이틀째 기사를 보고 있다. 거기에 고종(高宗)과 순종(純宗) 부자의 이야기가 크게 실렸다.

    기미년 3월의 장례와 소요는 벌써 1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죽은 왕이 불러일으킨 만백성의 봉기는 사상자와 수형자를 남기고 가라앉았다. 연기되었던 왕세자의 혼인도 다시 날을 잡아 곧 치러지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세계대전은 마무리되었다. 전쟁은 끝났는데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시베리아로 밀고 들어가며 새로운 러일전쟁을 벌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일이 매일같이 생겨나고 있어서 사람들은 1년 전의 일을 기억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슬퍼했던 왕의 죽음도 어느새 잊혀간다. 왕이 사라진 것뿐 아니라 왕조시대 자체가 사라졌다. 독립을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왕조의 복원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중화민국이나 소련처럼 스스로 자기 왕조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건만 조선인들은 무너진 왕조를 기억에서 없애고 있다. 이 점에서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이나 서대문감옥에 갇힌 운동가들이나 상해와 만주의 운동가들이나 마찬가지다.

    한림은 작년 초 봄의 국상과 그 앞 겨울, 왕의 죽음을 회상한다.



    치욕의 시간

    이왕(李王·순종)은 소스라쳐 눈을 떴다.

    주위는 아직 어둠이었다. 누군가 그를 불러 깨우고 있다. 혼몽 중에 오락가락하는 음색은 귀에 익다. 눈은 스르르 다시 감기고 의식은 쉬 깨어나지 않는데 몸이 저 혼자 경련을 일으킨다.

    어머니의 음성은 아니었다. 점점 다가오며 다급해지는 그 소리는 상궁의 것인 듯하다. 꿈은 아니다. 여기는 그의 처소이며 그는 지금 안전하다. 그런데 어둠 속 이 소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얼음장처럼 에워싸는 이 식은땀은 어인 일인가. 한겨울 밤의 냉기가 침전을 에워싸고 있다.

    그의 잠을 깨우는 사람은 25년 내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죽은 듯이 자고 죽은 듯이 살았다. 저 을미년 가을의 새벽에도 그는 지금처럼 어둠을 찢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쫓기듯 깨어났다. 그리고 어두운 경복궁 이곳저곳을 헤매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눈앞의 처소에서 참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밤사이 안녕하셨는지 문안 인사 올리는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사지에 혼몽한 시선으로 바라본 북편 건청궁(乾淸宮)의 담장 밖 밤나무 숲 언덕 너머 가을의 소슬한 새벽 공기를 타고 때 아닌 연기가 피어올랐다. 추석을 지낸 지 닷새째였다. 그 중추가절에 역대 군왕의 초상을 모신 진전(眞殿)에 나아가 아버지와 함께 올렸던 다례(茶禮)의 향이 아직 생생했다.

    진동하는 석유냄새와 함께 동트기 전의 경복궁을 뒤덮어가는 그 기괴한 연기의 주인이 어머니 왕비임을 알았을 때, 기절초풍하는 궁녀 신하들 사이에서 그는 기절도 하지 못하고 생지옥의 시간을 천형(天刑)인 양 감수했다. 원래 편치 못한 심신이었던 그는 1895년의 그날 이후 병세가 한층 악화되었다. 그의 배필인 세자빈 민씨(閔氏)는 그날부터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10년을 못 넘기고 1904년 요절했다.

    그날 이후 그는 아버지 고종(高宗)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치욕의 시간을 겪어냈다. 하지만 그 숱한 고비의 어느 굽이에서도 그의 잠을 깨우는 일은 다시 없었다. 고뇌의 시간은 아버지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그도 형식적인 왕좌를 3년 잇고 물러남으로써 마침내 끝났다고 믿었다. 망국과 더불어 그는 순종(純宗) 황제라는 칭호를 거두고 이왕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받았다. 아버지 역시 태황제 대신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명칭이 바뀌었고 황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宮內府)를 대신하여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가 신설되었다. 그들의 생활비는 일본 궁내성(宮內省) 직속인 이왕직에서 수리되고 집행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새삼 무슨 일인가.

    등을 타고 선뜩한 전율이 흘렀다. 홀로 누운 그를 벽시계가 바라보고 있다. 6시 35분.

    부자유친 군신유의

    순종이 기거했던 창덕궁 전경.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가 한 달 전에 창덕궁으로 찾아와서 연말이라며 선물로 벽시계를 헌정한 일이 있다. 동경에서 직송된 160엔(円)짜리 신상품이라 했다. 덕수궁에 계신 아버지에게는 108엔짜리를 전달했다고 들었다. 해가 바뀌기 전인 1918년 12월 23일이었다. 저 시계가 그 시계던가.

    밤사이 기온이 영하 10도로 급강하했던 그날은 우도궁 사령관의 58회 생일이라 했다. 용산의 사령관저에서 아침 7시 반에 목욕을 하는데 실내 온도가 영하 2.5도였다 한다. 창문 유리에 얼음 얼어붙은 것이 마치 아사히가와(旭川) 같았다고 했다. 북해도(北海道)의 중심지 아사히가와는 육군 제7사단 주둔지다. 그가 1914년부터 2년 넘게 사단장을 하던 곳이다. 거기서 오사카(大阪) 주둔 4사단장으로 옮겨 2년 더 복무하고 나니 4년간에 걸친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어 1918년 올 여름 조선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로서는 처음 맞는 서울의 겨울이다.

    생일 이틀 전, 우도궁 사령관은 이왕이 보내온 포도주 12병들이 두 박스, 이태왕이 보낸 브랜디 12병들이 두 상자를 받았다. 관저의 뿌연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서쪽 1㎞, 철길 너머 용산역 북쪽으로 길게 뻗은 욱천(旭川)도 얼어붙은 것 같았다.

    덕수궁으로부터의 기별

    저것이 우도궁 사령관이 준 시계인가, 아니면 3년 전 1915년 이맘 때 세밑에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새해 선물이라고 주었던 그 시계인가.

    희미하다. 모든 것이 꿈결처럼 아득하다. 내 나이 만 44세. 어머니가 하루아침 실오라기 한 점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을미년 8월 20일, 그때의 나이다. 오늘은 음력 12월 20일. 열흘이 지나면 기미년으로 접어든다. 해가 한 번 더 바뀌어 경신년이 되면 어머니 칠순 탄신일이 된다. 그날이 오면 육순 때와 마찬가지로 홍릉(洪陵)에 나아가 배알(拜謁)하게 될 것이다. 이 몸은 얼마를 더 살아 이승 아닌 곳에서 어머니와 해후하게 될 것인가. 67세에도 건강체이신 아버지가 나보다 더 오래 살 거라는 얘기가 돌고 있음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섣달 긴긴 밤의 동창이 밝으려면 한 시간도 더 남았다. 왜 나를 깨우는가.

    전화를 받으시라고 근시 여관(近侍 女官)은 입에 얼음을 품은 양 떨며 아뢴다. 덕수궁으로부터의 기별이라 한다. 아버님이 직접 전화를 하는 일은 낮에도 잘 없다. 동경에 가 있는 막내아들 영친왕이 매일같이 보내오는 문안편지 읽고 고이 접어 보관하고, 환갑에 본 막내딸 덕혜옹주 재롱 보기만으로도 섣달 겨울 해는 짧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왕은 아버지 이태왕에게 전화로 문안 인사를 드려왔다. 나흘 전 금요일에는 왕비와 함께 덕수궁으로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세모를 맞아 막바지 추위에 평안하신지 문후(問候)를 여쭈었다. 매일처럼 안위를 점검하는 시종이 어제 아침에도 덕수궁을 다녀와 태왕의 건재함을 고했다. 그저께 일요일에는 여러 신께 한 해를 총결산해 아뢰는 납향제(臘享祭)도 잘 올렸다는 전갈을 받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설이 열흘 앞으로 다가와 있다.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그는 설이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전하께옵서 환후(患候) 침중(沈重)하옵니다.

    맴돌던 잠이 찰나에 달아났다. 뇌리는 창덕궁의 백열등 전부를 몰아넣은 듯 환하게 작열했다가 이내 엄동의 허공 속 어둠이 한꺼번에 쏟아드는 것처럼 칠흑에 휩싸였다.

    아관파천

    부자유친 군신유의

    1880년대 서울 정동의 러시아공사관.

    이왕과 왕비 윤씨(尹氏)를 태운 마차는 창덕궁의 돈화문을 나서 미명을 뚫고 덕수궁을 향해 질주했다. 양력 1919년 1월 21일. 대한(大寒)의 아침이었다. 북한산과 삼각산에서 불어내리는 칼바람은 체감 온도를 영하 20도까지 끌고 내려갔다. 낙원동 측후소의 온도계는 새벽 최저 기온을 영하 17도8분으로 기록했다. 평년보다 10도는 더 떨어진 날씨다. 연사흘 내리 몰아치는 혹한으로 여염집 방마다 떠다놓은 자리끼 물은 다 얼어붙었고 요강 단지들이 터져나갔다.

    얼음길을 달려 삐걱대는 바퀴를 재촉해 덕수궁에 이른 어용마차는 대한문(大漢門)을 전속력으로 통과했다. 덕수궁 뜰의 나무들은 밤사이 쇠락한 집 주인의 육신 모양 아침 바람 찬바람에 이울고 있었다. 창덕궁이나 경복궁에 대면 궁궐이라 할 것도 없이 초라한 행색에 배치도 정연치 못한 전각들이 잿빛 어스름 속에 희뿌옇게 웅크리고 있다. 단걸음에 주인의 처소인 함녕전(咸寧殿)에 다다른다.

    15년 전 봄, 덕수궁이 경운궁이던 1904년 사월에 일어난 큰불로 왕의 처소인 함녕전을 비롯한 전각 대부분이 재로 변했다. 그래도 당시 고종황제는 7년을 살아온 경운궁을 벗어나지 않았다. 크고 번듯한 경복궁과 창덕궁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려 했다. 불길을 면한 처소를 골라 임시 거처를 삼아, 폐허 속 공사판이 된 궁궐 터 일각에서 버텼다. 그리고 함녕전을 다시 지어 재입주해 지금껏 지내왔다.

    처소가 복구되자마자 여기서 을사조약을 치르고 2년 뒤 여기서 왕위를 찬탈당했다. 그래도 그는 여기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아왔다. 아관파천을 단행해 러시아공사관에 1년간 피신해 있다가 여기 경운궁으로 들어온 것이 벌써 22년 전이다.

    의주파천

    그 말고 여기서 산 왕은 선조와 광해군뿐이다. 고종의 11대조 할아버지 선조(宣祖)는 임진(壬辰)년의 봄, 서울을 떠나 서북 국경 의주(義州)로 피신했다. 거기서 1년 반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었다. 경복궁과 창덕궁과 창경궁 세 정궁은 죄다 불타버렸다. 그래서 임시 거처로 들어왔던 곳이 이곳 경운궁 자리였다.

    선조는 이 남별궁과 마주 보는 자리에 있던 큰 증조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그리고 주변 대신들의 집 몇 채를 편입해 트고 개조해 정동행궁(貞洞行宮)이라 이름 붙였다. 여기서 선조는 죽을 때까지 살았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다시 지어진 뒤 이곳은 아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慶運宮)이라 명명됐다.

    3세기 전의 두 부자(父子) 왕이 어쩔 수 없이 여기 머무른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그 전란의 임시 거처였던 이곳에 고종 부자가 심신을 의탁하게 된 것은 무슨 연유에서였던가. 이제 폐위된 고종은 여기서 여생을 마감하려 하고, 왕위를 이어받으며 창덕궁으로 독립해나간 순종 역시 폐위된 채 왕조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선왕의 마지막을 대하려 극한의 새벽 냉기 속에 말과 함께 입김을 내뿜으며 이렇게 달려왔다.

    선조의 6대손 영조는 선조가 서울에 돌아와 정동에 거처를 정한 때로부터 세 번째 환갑, 즉 180년을 맞는 1773년에 경운궁을 찾았다.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卽?堂)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임진왜란의 고초를 회상했다. 그로부터 다시 120년 뒤인 1893년 10월, 고종은 선조 환도 5주갑 즉 300주년에 즈음해 즉조당에 나아가 참배하고 선왕의 고생을 추모했다.

    “묵은 때를 깨끗이 씻어내고 모두 함께 새로워지도록 국운을 크게 열어야 할 것이다.”

    고종은 배석한 신하들에게 교시했다. 중전 민비(中殿 閔妃)와 왕세자 및 세자빈도 경복궁에서부터 따라나서 다시없을 그 고난의 시기를 새겼다.

    참배 예식이 끝나고 고종은 대신들과 담소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이 임금에게 여쭈었다. “벽에 걸린 현판은 영조대왕께서 쓰신 겁니까?”

    왕은 대답했다. “그렇다. 숙종께서는 여기 네 번 왔고, 영조께서는 여덟 번 왔다. 1773년에는 두 번 들렀다.”

    다음해 청일전쟁으로 나라는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300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명나라 대신 청나라가 참전했다는 것, 그리고 일본이 물러나는 대신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에 주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민비가 참살되었다. 유해는 불태워져 마치 없었던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해 고종은 왕비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새벽의 미명을 틈타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가 정동행궁이었던 경운궁 뒤 러시아공사관으로 잠입했다. 그 궁녀용 가마 속에 왕세자도 함께 몸을 숨겨 피신했다. 이완용을 위시한 친러파 관리들의 도움으로 피난처를 찾게 된 고종은 그날까지 조정을 움직여온 다섯 대신을 친일 역적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체포해 죽이라고 명령했다.

    왕이 떠난 사실을 몇 시간 지나서야 알고 경복궁에서 대책을 논의하고 나서던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는 순검(巡檢)에 붙들려 광화문 앞 경무청(警務廳)으로 끌려가다가 군중에게 맞아죽었다. 좌우 포도청을 통합해 근대적 경찰기구로 창설된 경무청은 김홍집이 주도한 1차 갑오개혁의 산물이었다. “경무사는 중대한 경찰 사무에 직면하면 총리대신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받아 조사 처리하며 그 밖의 일은 각 해당 대신에게 보고하여 조사 처리한다.”― 1894년 7월 공포된 경무청 관제 및 직무 규정은 경무청의 수장인 경무사(警務使)의 임무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내부대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일본 망명 제의를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피살되었다. 문중 산소 다툼으로 원한을 품고 있던 그 고을 양반들이 머슴들을 동원해 벌인 일이었다. 지방 향촌(鄕村)에서 향반(鄕班)들이 고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향전(鄕戰)은 서울 중앙무대의 당파싸움 못지않았다. 그 싸움의 3대 요소는 노비, 전답, 묘지였는데 그 압권이 묘지 소송이었다.

    분묘를 조성하고 수호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은 법적 소송으로 치달았고 고을 수령이나 도 관찰사가 중재에 나서고 급기야 왕이 직접 당사자를 불러 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교식 화장문화가 유교식 매장문화로 전환한 조선에서 성리학의 이념과 조상에 대한 효 의식으로 무장한 양반 사대부들은 산소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직접 패싸움과 테러에 나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병신년의 오적(丙申 五賊)은 일거에 처단되고 일본은 지배력을 잃었다. 조선의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러시아 수군 120명이 인천 앞바다 군함에서 상륙해 서울로 이동했다. 독립국가의 체면을 고려해 국왕은 조속히 환궁하라―일본공사관은 요청했다. 불안 공포가 도사린 궁궐보다는 러시아공관의 방 한 칸이 안전하다―고종은 못 나간다고 했다. 청나라를 몰아내고 민비를 제거해서 일본이 가져갔던 조정의 주도권은 한순간에 러시아로 옮겨갔다.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미처 삼키기도 전에 토해내도록 만든 것도 러시아였다. 그 땅을 러시아는 자기 조계지로 만들려고 한다. 러일전쟁은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러일전쟁

    8년 뒤 러일전쟁이 터졌다. 2월에 일본 육군 선발대가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오고 러시아공사는 서울을 빠져나갔다. 대한제국은 일본에 군사 경제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의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1904년 4월 일본군 주력 제1군이 상륙해 북상하고 5월 압록강을 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고,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한 것이다. 한국의 외교권을 거의 박탈하는 외국인 고문정치 협정이 체결되기 3개월 전이었다.

    함경도 방면 전투에 동원된 평양의 조선군 500명은 선두에 배치되어 러시아군과 대치했다. 러시아군이 조선군 대장을 불러 말했다. “당신 나라가 이제 우리와 절교를 하였으나 청일전쟁 때 청국과 단절한 양상과 같으니 모두 일본인 뜻일 것이다. 우리는 적이 아니니 우의를 해치지 말고 흩어져 돌아가라.” 그 말을 듣고 조선 군사들은 전선을 이탈해 흩어졌다 한다. 임금은 여전히 러시아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공방이 이어진 두만강 일대는 민가에 밥 짓는 연기가 그쳤다. 고을마다 군수의 자리에 있던 자는 도망하여 없고 새로 임명된 자는 오지 않아 아전과 백성 모두가 의지할 데가 없이 도주하고 숨기 바빴다. 일찍이 몽고와 거란이 침입한 이래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황현은 매천야록에 기록했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때에 조정과 민간이 모두 생각하기를 “일본인은 그래도 사람이라 할 수 있으나 러시아인은 짐승과 같다. 러시아가 만약 일본을 이겨서 휩쓸고 내려올 것 같으면 우리 인종은 장차 멸족할 것이다. 하여 모두들 일본이 이기고 러시아가 패하기를 빌었다. 그래서 가서 해줄 일이 있으면 물자 수송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이 선전포고하던 그날부터 우리를 해칠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아관파천 1년간 조정은 러시아의 영향력하에 러시아인들에 의해 러시아식으로 운영되었다. 청국과 일본의 역할을 이제 러시아가 대신했다. 러시아에서 벗어나라는 압력이 내외에 높아지자 고종은 마지못해 러시아공관을 나섰다. 그리고 경복궁으로 되돌아가지는 않고 제3의 길을 택했다. 바로 옆 미국공사관을 지나 담장 너머 경운궁으로 들어갔다.

    경운궁은 비록 옹색하였으나 고종은 그나마 마음 편한 여기에 정을 붙이고 살았다. 등 뒤로 멀어진 경복궁은 이제 안 보아도 되고, 왠지 차고 가파른 듯 누르는 느낌이 들었던 북악의 그늘에서도 좀 떨어져 나왔다.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이 지척이라 몸은 비록 야비한 저잣거리 민가에 가까웠어도 남산의 부드럽고 포근한 흙 기운을 가까이에 느끼니 고적한 수심은 한결 줄어드는 듯도 했다.

    구미의 공사관 주변으로 구미인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 여관이 그들의 거주지와 어우러져 이곳 정동을 조선 속의 외국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구미인과 어울려 구미개화파 인사들이 담장 밖 돌담길을 소리 내어 오르내리는 이곳 양인촌(洋人村)이 그는 좋았다. 중국과 일본의 냄새가 미처 배어들지 못한 정동은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라 불린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들어가고 두 달 뒤에 독립신문이 나왔다. 갑신년에 정변이 실패하고 도주했던 서재필이 12년이 지나 병신년에 서울에 돌아와 최초의 민간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정동을 오가는 구미개화파 인사와 고위관리들이 고종의 뜻을 받들어 서재필의 신문작업을 후원했다.

    서재필이 역적이 되어 나라를 떠난 그날 뒤로 부모와 형은 음독자살하였고 동생은 참수당했으며 아내는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져 음독자살했다. 돌 지난 아들은 죽은 어미 곁에서 젖을 빨다 얼마 못 가 죽었다고 한다. 임금의 한마디면 시행되는 삼족멸문지화다.

    서재필이 김옥균 등과 일본의 지원을 받아 벌인 궁중쿠데타는 청국의 무력진압으로 3일 만에 실패했다. 청국은 2년 전 임오년의 군사반란 때 대규모 군사를 파병해 서울을 접수한 이래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해왔다. 10년 세도 뒤 물러났던 대원군은 10년 만에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했다. 그런 지 33일째 되던 날, 용산 둔지미(屯地尾)의 청국군 주둔 본부를 예방한 62세의 대원군에게 주둔군 대장 오장경(吳長慶)의 참모인 37세 마건충(馬建忠)은 필담으로 물었다.

    ―조선의 국왕은 청국의 황제가 책봉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대원군이 답했다. “알고 있다.”

    ―6월 9일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아 반대자를 살해하고 황제가 책봉한 국왕을 밀어내고 도당을 이끌고 궁성에 침입하였으니 이는 국왕을 기만한 것이고 황제를 무시한 것이므로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속히 천진에 당도한 뒤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라.

    그리고 대원군의 몸을 묶고 입을 막아 가마에 태워 동작나루를 건너 경기도 남양만으로 가 정박한 군함에 실어 천진(天津)으로 보냈다.

    대원군을 압송한 날로부터 청군은 서울의 성내로 들어가 주둔하며 반군 토벌을 벌였다. 조선군 토벌대는 군란에 참가한 병사들의 근거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풀어달라는 고종의 서한도 무시한 청나라는 이전의 사대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그리고 갑신정변 이후부터는 사실상의 식민통치에 버금가는 명실상부한 속방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로부터 만 3년 이상 억류 끝에 갑신정변 8개월 뒤, 천진에서 풀려난 65세의 대원군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온 26세의 원세개(袁世凱)는 석달 뒤인 1885년 11월 21일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이란 직책으로 서울에 공식 주재하게 된다. 그가 청 조정으로부터 받은 실제 임무는 감국(監國)―즉, 조선왕을 감독하는 총독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조선 주재 외교관들 앞에서 스스로를 인도 주재 영국 총독에 견주었다. 그로부터 10년간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조정하고 간섭한 그의 권세는 다시 10년 뒤 을사조약 이후 조선 통감으로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보이게 되는 위세와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군대를 주둔하고 정치 외교를 주무르며 10년간 이어진 청국의 조선 점령은 일본과의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청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군의 서울 점령 작전이 벌어지기 나흘 전에 원세개는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모화에서 독립으로

    원세개가 떠나고 1년 5개월 뒤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자 필립 제이슨으로 돌아왔다. 1895년 연말이었다. 해가 바뀌어 미국 나이로 만 31세를 맞은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매달 300달러의 월급을 10년 동안 받기로 계약을 맺었다. 대신의 급여였다. 나랏돈 4400원을 지급받아 1400원으로 서소문 안 넓은 터에 한옥과 양옥이 덧붙은 저택을 마련하고 3000원으로 경운궁 담장 밖 왕실 소유 기와집에 신문사를 창설했다. 그리고 4월 7일 미국 인쇄기로 독립신문 창간호를 찍어냈다.

    1년 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체결된 청일전쟁 강화조약의 1조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조선에서 청나라에 대한 조공 등은 영원히 폐지함을 공식화했다. 100일 앞서 1월 7일 반포된 새 헌법 홍범 14조는 제1조에서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 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세운다”고 명시했다.

    부자유친 군신유의

    독립문.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 3개월 뒤에 이완용 윤치호 등과 어울려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독립문 건립 준비 위원회였다. 11월에 모화(慕華)관을 고쳐 독립(獨立)관이라 간판을 달아 집회장으로 사용하고 그 앞 영은(迎恩)문 자리에 독립문을 착공했다. 영은문은 이미 그 전해 1895년 초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갈 때 김홍집 내각에 의해 주춧돌만 남기고 파괴되었다. 모화관에 칙사 맞으러 임금이 나가는 일은 1881년 여름날 고종의 행차로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해부터는 칙사보다 더한 원세개가 왔기 때문이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주춧돌 놓는 행사가 독립관 앞 넓은 잔디밭에서 열렸다. 토요일 오후 2시. 정부의 각부 대신, 외국공관원을 비롯한 외국인, 각 학교의 학생 및 일반인 수천 명이 몰려 서대문 밖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독립협회 초대회장 안경수(安·#53566;壽)가 개회를 선포하자 배재학당 학도들이 조선가를 불렀다. 안 회장이 백색 화강암 주춧돌을 놓고 배재학당 교사 아펜젤러가 조선말로 기도했다.

    “조선 대군주폐하와 황태자전하께서 성체가 안강하시고, 조선독립이 몇 만 년을 지내도 무너지지 않게 되며 조선 전국 인민이 점점 학문이 늘고 재산이 늘어 새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안경수가 개회사를 했다.

    “시골구석에 사는 인민 중에서 독립문 세우는 데 돈을 보조하는 사람들도 있고 외국 사람 중에서도 돈 낸 사람이 많다. 이것을 보면 조선사람들도 일을 하려고 들면 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부터 조선서 만사를 독립협회 하듯이 시작하여 모두 합심하여 하기를 바란다.”

    그는 김홍집 내각에서 우포도대장과 경무사를 하다가 아관파천 후 친러 내각에서 다시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총리대신 김홍집이 순검에 붙들려 경무청으로 끌려가던 길가에서 군중에 맞아죽던 그날이었다. 지난 7월 독립협회 창립총회 때 그는 독립문 기금으로 40원을 냈다. 발기인 대부분이 10~30원을 내놓았다. 황태자는 거금 1000원을 하사했다.

    한성판윤 이채연(李采淵)이 찬조연설을 했다. 조선독립이 어찌해야 영구히 보존될까, 전국인민이 합심하여야 한다는 말이 그 특유의 맑고 높은 목소리를 타고 청명한 늦가을 하늘로 울려 퍼졌다. 그는 10년 전 초대 주미공사관 번역관이었다. 그때 참찬관 이완용과 전권공사 박정양 밑에서 이하영 이상재 두 서기관과 같이 근무했다. 영어로 소통이 되는 이는 그와 이완용과 이하영뿐이었다. 지금 이채연과 이상재는 9명으로 구성된 독립협회 위원이다. 위원장은 이완용이었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가를 노래했다. 이어 외부대신 이완용이 기념 연설을 했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국가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것이다. 두 본보기가 있으니,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란다.”

    독립협회 위원장 이완용은 기금으로 그의 형 이윤용과 나란히 각각 100원씩을 냈다. 왕태자 다음가는 최고 납부액이었다. 다음으로 서재필이 연단에 섰다. 먼저 영어로 외국인들을 향해 연설했다. 조선에 있는 외국 사람을 주제로 한 것이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이어서 조선말로 한 연설은 대략 이랬다.

    “나라가 독립을 하려면 사람이 혼자 서는 것과 같이 다리가 튼튼하여야 몸무게를 싣고 능히 걸어 다니는 것이다. 나라의 다리는 곧 백성이요 머리는 곧 정부다. 머리와 다리가 서로 도와주어야 그 몸이 튼튼하듯, 정부와 백성이 서로 위해주어야 나라가 튼튼히 되어 독립이 될 것이다. 지금 새로 세우는 독립문으로 비유한다면 돌멩이 여러 백 개가 서로 모래와 회반죽과 합하여 서로 튼튼히 붙어 제 직무를 다하여야 천년이 되어도 무너지지 않고 혼자 서듯, 나라도 대소 인민이 사람마다 제 직무를 하여야 나라가 영구히 독립되리라.”

    박수가 끝나고 배재학당 학생들이 진보가를 제창했다. 이어 육영공원 학도들이 서양식 체조 시범을 선보여 환호 갈채를 받았다. 일동 ‘대군주폐하 만세, 독립협회 천세’를 불렀다. 그리고 네 번째 축가로 애국가를 불렀다.

    일본을 능가하는 제정러시아의 침략간섭 정책을 독립신문이 비판하고, 사라진 청국과 사라진 영은문이 남겨놓은 주초석(柱礎石·주추) 앞에 독립문이 올라가는 사이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을 나왔다. 그리고 그해 1897년 가을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왕이 아닌 황제로 등극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써온 중국의 연호(年號)는 이미 1895년 광서(光緖)년간을 끝으로 버렸고 이제 1897년 제국에 걸맞은 광무(光武)연호를 만들어 쓰기로 했다. 황제의 나라 외에는 금지된 하늘 제사를 드릴 환구단(?丘壇)도 지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한 달 뒤 독립문이 완공되었다. 독립문 머리에 새겨진 글자는 이완용이 썼다고 했다. 서대문 쪽 도성 방향으로는 한글로, 반대편 중국 방향으로는 한문으로 썼다. 조정에서 명필로 정평이 나 있는 이완용은 이미 몇몇 현판에 작품을 남겼다.

    전쟁이 조선을 원하다

    부자유친 군신유의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양력을 쓴 지도 5년, 이제 1900년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분명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면서 대한제국과 제정러시아의 갈등은 더욱 뚜렷해졌다.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은 극점으로 치달았다. 10년 만에 또 전쟁이 찾아왔다. 조선은 전쟁을 원치 않지만 전쟁이 조선을 원했다.

    요동반도의 여순항에서 러일전쟁의 첫 불길이 오른 지 두 달 뒤 서울의 경운궁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1904년 4월 14일 밤이었다. 함녕전 구들을 수리하고 말리느라 지핀 불길이 광풍을 타고 순식간에 옮겨 붙어 함녕전을 모두 태운 것으로 조사되었다. 불은 사납게 부는 밤의 봄바람을 타고 궁궐 전역으로 삽시간에 번졌다. 졸지에 침전(寢殿)을 잃은 고종 황제는 밤 11시쯤 궐 밖에 위치해 불길을 피한 수옥헌(漱玉軒)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1년간의 피신 생활을 끝내고 아들과 함께 경운궁에 들어오면서 새로 지어 묵어온 처소다. 황제의 정전(正殿)으로 재작년에 완공을 본 중화전(中和殿)이 전소해 주저앉았다. 중화전 건립 전까지 5년간 정전으로 사용했던 유서 깊은 즉조당(卽?堂)도 전소했다. 7년 전 담 넘어 동쪽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돌아와 처음 축하의 예를 받은 곳이다.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처음 거처로 썼던 곳이다. 그가 승하할 때까지 12년간 거주한 이층 전각 석어당(昔御堂)도 불타 쓰러졌다.

    왕의 초상화 어진(御眞)과 왕세자의 초상화 예진(睿眞)을 모셔둔 흠문각(欽文閣), 명성황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혼전(魂殿)인 경효전(景孝殿)도 불타 사라졌다. 그나마 임금과 왕세자의 초상화, 그리고 명성황후의 신위를 빼낸 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의 참혹한 재난이었다.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된 이래 7년간 벌여온 대대적인 수리와 신축 공사의 결실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대대로 전승되어온 왕실의 문서와 보물도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이 북상해 러시아를 압록강 너머로 밀어내고 의주(義州)에서 대치 중이었다.

    전에 없던 변고여서 천만 번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하늘이 낸 불을 재변이라 하고 사람이 낸 불을 화재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화재이지만 하늘의 재변이기도 합니다. 재변을 만났으니 조심하고 반성하는 동시에 깊이 새겨두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대궐의 화재로 말하면 전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번처럼 혹심한 적은 없었으니 정말로 보통 재변이 아닙니다.

    졸지에 옹색한 곳으로 거처를 옮긴 황제를 문안하며 대신들은 송구해했다. 고종황제는 말했다.

    즉조당은 몇 백년 동안 전해오는 것이기 때문에 서까래 하나 바꾸거나 고치지 않았는데 몽땅 타버렸으니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 이처럼 하늘이 재변을 내려 경고를 보였으니 참으로 두려워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 아무리 거듭 반성한다 해도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5일 동안 음식 가짓수를 줄여 스스로를 반성하고 경고하겠다.

    함녕전의 서온돌(西溫突)에 눕혀진 이태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1919년 1월의 새벽.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아들 이왕에게 전화 연락이 가던 때는 그의 숨이 이미 끊어진 뒤였다. 새벽 1시 이후 경련을 동반한 뇌일혈 증상이 찾아든 이래 조선인 일본인 의료진이 번갈아 드나들며 응급조치를 취하는 동안 전 황제―고종 이태왕의 용태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2.5㎞, 10분이면 닿을 거리에서 아버지가 쓰러지고 아득히 의식을 잃어가는 동안 5시간 이상을 아들은 혼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지근거리에도 임종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무너지는 억장과 몰려드는 만감에 휩싸인 채, 이왕은 이미 굳어버린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소신(小臣) 왔습니다.

    그렇게 한 마디 아뢰고 천지 아득하여 기절하였다.

    가미온감탕

    겨울 해는 금세 중천으로 다가가는데 한때의 황제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전 내내 깨어날 줄 모른다. 어제도 이태왕은 여느 때처럼 11시가 되어서야 침소에서 나왔다. 그가 밤에 일찍 잠드는 일은 25년 동안 없다시피 했다. 그는 밤에는 불을 밝히고 깨어 있으려 했고 먼동이 어둠을 물리칠 때에야 겨우 숙면에 드는 것 같았다. 저 을미년 가을의 새벽 이후 생긴 습관이 분명했다.

    일어나서는 우선 일일 건강진찰을 전의(典醫)로부터 받는다. 작년 8월부터 매일 검진은 일과가 되었다. 그 즈음 치루가 생겨 방하(芳賀) 조선총독부 의원장의 감독아래 식촌(植村) 의학박사가 진찰한 뒤 10분 동안 치료를 받고 나았다.

    창덕궁에 있는 아들 이왕이 매일 보내는 시종의 문안을 받고 아침 수라를 들었다. 보통 사람들의 점심때다. 오후 건강진단을 맡은 일본인 의사에게 이태왕은 물었다.

    “치질은 고약만 가지고서는 완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던데 과연 그런가.”

    3시에는 약방(藥房)에서 달여 바친 가미온감탕(加味溫膽湯)을 복용했다. 위장이 허약한 사람의 불면증, 신경과민에 흔히 처방하는 약이다. 불면의 밤은 벗이 된 지 오래지만 요 며칠 유독 그의 증세는 심해져 있었다.

    저녁 수라를 들고 또 밤이 찾아왔다. 9시쯤 소화제로 가미양위탕(加味養胃湯)을 약방에서 지어 올렸다. 그걸 먹고 서온돌 내전에서 여섯 살 옹주와 함께 여관(女官)들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냈다. 11시가 되어 옹주는 자러 가고 당직 의사가 최종 검진을 마치고 나갔다.

    상궁 나인들에게 시킨 윷놀이도 신경을 안정시켜주지 못하였는지 둔중한 노구를 이끌고 서온돌 문을 나서 지팡이에 의지해 차가운 대청마루를 건너 동온돌까지 걸음을 옮겼다. 원래 동온돌이 왕의 처소이고 서온돌은 왕비의 처소로 되어 있으나 그는 서온돌을 쓴다. 지금 그는 왕비가 없다. 12세에 왕위에 올라 벌써 만 67세다. 얼마 전 각기(脚氣)를 앓은 뒤 추위를 피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엄동의 한밤에 노인은 눈을 붙이지 못하고 서성인다.

    “조금 잘 터이니 곁에 누구 좀 있으라.”

    눕지는 않고 의자에 앉아 겨우 눈을 붙인다. 자정 무렵이었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상궁이 화들짝 몸을 일으켜 이태왕에게 엎어지듯 다가갔다. 한쪽 발이 바닥에 다 내려올 정도로 몸이 의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의료진이 들고나는 가운데 경련은 여러 차례 이어졌다. 매일 보다시피 하는 일본 의사를 쳐다보며 그는 물었다. “네가 누구냐.” 의사가 대답하자 그는 더 묻지 않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그는 다시 입을 뗐다.

    “조금 자볼까.”

    그러면서 눈을 감았다. 마지막 말이었다.

    셋째 아들 혼례식

    부자유친 군신유의

    1909년 1월 순종이 서북지역을 방문했다.

    바다 건너 도쿄의 셋째 아들 혼례식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강화회의가 멀리 파리에서 개막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독립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파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호기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며 이곳에서 밤을 새웠던 1907년 고종황제 때의 고뇌를 유폐된 이태왕은 12년 만에 다시 하고 있다. 장소는 여전히 함녕전이고 궁의 이름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황제자리에서 물러나고 큰아들이 순종으로 즉위하고 작은 아들이 황태자에 봉해지고 이등박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1907년은 그 자체로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의 국제회의가 주변 정세를 흔들고 있다. 거기에 겹쳐 찾아든 아들의 혼혈 결혼은 그의 마음을 이중으로 압박해 오고 있다.

    결혼을 하면 왕세자 부부는 동경에서 파리로 신혼여행을 간다고 한다. 파리 강화회의에 모인 세계 선두 국가의 대표들과 악수하며 병합된 일본과 조선의 구체적인 화합의 상징물이 될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에게 형벌이었다. 쓰러진 국권을 복구할 수 없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는 바로 그 국제 외교장에 아들이 정략혼인에 이어 정략사절로 파견된다는 것이다. 조여드는 압박감, 분노와 불안이 한꺼번에 몰려든 며칠간이었다. 12년 전 막다른 길목에서 감행한 외교전의 실패로 왕위를 잃었는데 이번에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체중은 보통사람보다 비만. 여름에는 두세 근 감량. 신장은 보통 중키. 목은 매우 가느나 시력은 아주 좋음. 보통 42~43세부터 으레 시작되는 노안의 기미도 없고 근시 기미도 없음―건강 진단은 언제나 신체 건강으로 나왔다.

    이태왕(李太王)이 승하했는데 왕실을 보좌하는 이왕직(李王職)은 텅 비어 있었다. 임박한 왕세자 가례를 맞아 모조리 동경에 출장 중이었다. 총독과 주요 고관들도 동경에 가 있던 때였다. 홀로 버려진 이태왕이 졸지에 주인공이 되었다. 대사를 당한 1월 21일의 덕수궁 대한문 앞은 수레 소리로 분주했다. 덕홍전(德弘殿) 현관 앞에는 자동차 마차 인력거가 수십 대씩 밀려 대혼잡을 이루었다. 외빈 접대처인 덕홍전은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이 불타 사라진 터에 새로 지어졌다.

    동경 체류자들은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영친왕도 혼례가 연기된 채 귀국길에 올랐다. 세계의 이목은 파리에 쏠려 있었다. 이태왕의 승하 날짜를 하루 뒤로 허위 발표한 총독부의 지침에 따라 ‘22일 오전 6시 붕어’라고 보도한 매일신보 23일자는 넘치는 기사 속에서도 파리의 강화회의가 18일에 개막한 소식을 비중 있게 전했다.

    신문기자, 활동사진 기사, 기타 대군중은 아침 일찍부터 프랑스 외무성 앞에 집합했다. 윌슨 미국 대통령, 포엥카레 프랑스 대통령 등 각국 수반이 주악 속에 환영을 받고 입장했다. 포엥카레는 의장석에 착석해 명석한 음성으로 개회사를 읽었는데 전원이 기립했다. 72명의 위원은 말발굽 모양의 테이블 주위에 착석해 포엥카레 씨가 수석 테이블에 앉고 미국 위원은 우측에, 영국 위원은 좌측에 자리 잡았다. 회의장인 베르사유 궁의 대 회의실은 센강을 내려다보는 굉장(宏壯)한 건물인데, 금색 찬란한 장식을 하여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다. 방은 이분하여 그 절반은 일본기자를 비롯해 신문기자가 가득 찼다.[파리 전송]

    강화회의 본부는 5개국 대표가 협의한 결과 의장 클레망소(프랑스 총리), 부의장 랜싱(미 국무장관), 위원 로이드 조지(영국 총리), 위원 오르란드 (이탈리아 총리), 위원 시온지(西園寺公望·일본정계 원로)로 구성되었다. 그 아래 15명의 서기는 프랑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 각국에서 3명씩 균등 할당되었다.

    50일 전에 재미 한인회는 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이승만 등 3인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비자 발급을 불허해 파리행은 좌절되었다. 파리에 있던 미국 강화사절단은 본국 정부의 질의에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한국의 병합은 세계대전으로부터 발생한 문제가 아니며,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은 없다.”

    부자 생이별

    영친왕이 24일 귀국했다. 기차와 관부연락선 고려환(高麗丸)을 갈아타고 몇 날 몇 밤을 달려 부산발 11시 30분 야간급행열차로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그 역시 부모를 모두 임종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 엄귀비가 세상을 떴다. 아들을 빼앗긴 가슴앓이가 죽음의 원인이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꼭 1년 전에도 서울에 와 아버지를 만났다. 이후 다시 한번 더 방문하고 떠나던 작년 9월 3일은 부자 생전의 결별이 되었다. 아들은 하직을 여쭙고도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여 함녕전 앞뜰에서 머뭇머뭇하고, 태왕은 마루 끝에 서서 망연히 바라보며 거듭 부탁했다.

    “잘 가거라. 가서 잘 있거라. 공부를 아모쪼록 잘 하여라. 학교를 마치었더라도 공부할 것은 많을 터인즉 학교를 마치었다고 게을리 말고 몸성히 공부를 잘 하여라.”

    앞서 그해 1월 24일 밤 9시차로 남대문역에 도착한 왕세자는 그길로 덕수궁에 들어 함녕전 서온돌에서 태왕전하와 대면하였다. 태왕전하는 반가운 마음을 진정치 못하여 친히 손길을 잡으시고 등을 어루만지시며 신체 건강하여졌음을 못내 기뻐하시는 중에 “군대생활은 어떠하냐. 이것이 소위의 군복이냐. 좀 일어서보아라” 하시었다.

    경성 시가에 일장기를 반쯤 내린 조기가 내걸렸다. 하루 늦은 초혼제(招魂祭)를 시작으로 기나긴 장의 절차가 개시되었다. 모든 절차의 맨 앞에 이왕이 섰다. 잊힌 존재였던 그가 갑자기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죽은 아버지가 시킨 일이었다.

    이왕은 일생 중 제일 바쁜 시기를 만났다. 염과 입관을 일일이 참관하고 제반 절차를 손수 지휘했다. 곡을 하고 종친과 친척 귀족, 관리들의 조문을 받았다. 간혹 프록코트 차림으로 문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주로서 이왕은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고 근엄하게 지적하여 말했다.

    ―양복이 비록 서양예법에는 맞을지라도 동방의 상례(喪禮)에는 맞지 않다.

    어떤 귀족이 조문을 거부당한 후 일본인 관리들까지 조선상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왕은 30차례 이상 관에 칠을 거듭할 때 다 살펴보았다. 밤에도 빈소에 나와 주변을 맴돌았다.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 생시 때처럼 차마 슬하를 못 떠나는 모습을 떠올렸다.

    군밤을 좋아한 고종

    을미년 명성황후께서 승하하시니 전하의 보령이 21세이시라 태왕 전하께오서 전하를 항상 젖먹이와 같이 아시어 비록 귀비(貴妃)를 총애하시되 귀비와 별처(別處)하시고 침식거처를 항상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수면과 식사를 직접 감독하사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심이 없으시며(…) 전하께서도 매우 효성스러워 태왕께서 편찮을 때면 의약을 친히 바치고 부자간에 은정(恩情)과 효성(孝誠)으로 서로 의지하시었다. 임금이 된 후 궁을 나누어 거처하게 되자 태왕께서는 유아를 품에서 내어놓으시는 것과 같이 아시고 전하께서는 젖먹이가 슬하를 떠나는 것처럼 항상 헤어지기 서운해 하였다.

    이왕은 생전 태왕이 세끼 수라 드는 것을 매일 전화로 확인했다. 평상시와 같으면 그도 식사를 하고, 좀 적게 드셨다 하면 몹시 걱정하며 자기 식사도 줄였다. 잠자리에 들 때도 전화하여 아버지가 침소에 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취침했으며, 아침 기상 때에도 전화로 거동을 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동이 좀 못하다 하면 초조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 시종을 매일 덕수궁에 보내 문안을 드렸는데 그가 직접 덕수궁을 방문하는 날은 전날부터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대면하면 다가가 눈물을 흘리고 목소리는 울먹거리고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묵묵히 있다가 어언 돌아갈 시간이 되면 안절부절못하였다. 떠날 시간임을 알리면 눈물을 머금고 대궐 밖을 나섰다. 태왕은 창문을 열고 마중을 하는데, 어떤 때는 태왕도 마음이 좋지 않아 창문을 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정미년에 유폐되었던 왕은 기미년에 장례를 치렀다. 국장은 일본식으로 치러졌다. 이왕은 건강상 이유로 장지까지 따라오지 말라는 권유에도 인산(因山)에 수행했다. 그는 창덕궁으로 귀환하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석 달 뒤 졸곡(卒哭) 때까지 덕수궁에 머물렀다. 창덕궁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혼전(魂殿)과 산릉(山陵)에 매일 세 차례 제수(祭需)를 전화로 점검하였다. 그럴 때에는 상복을 갖추고 덕수궁 쪽을 향하여 공경히 무릎 꿇고 앉아 전화를 듣고 난 후에 식사를 하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 명절, 생신에 반드시 덕수궁에 행차하여 참배하고 묘소에는 봄가을로 행차했다. 이왕직에서 홍릉(洪陵) 입구 버드나무를 베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수라를 들지 않기도 했다. 어떤 날은 제수 중 과일 하나가 색이 바랜 것을 보고는 노하여 또 수라를 들지 않았다. 관헌이 아무리 조심해도 그는 제물을 직접 점검했다.

    봄가을이 되면 꽃이 만발하던지 비원에 숲이 시드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슬퍼지시면 모시고 따르는 시종이나 여관이 위로하여 드리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셨다. 번개가 심할 때에는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향료를 태우는 것이 전례인데 하루는 뇌성이 심하여 향료를 태우자 말씀하시기를 “혼전에 먼저 태운 뒤 여기 태워라” 하셨다. 시종이 아뢰기를 혼전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므로 감히 그런 목적의 분향을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전하께서는 벌벌 떨면서도 “혼전에 못하면 여기도 향료를 태우지 마라” 하셨다.

    고종일 때나 이태왕일 때나 아버지는 언제나 군밤을 좋아했다. 순종일 때나 이왕일 때나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을날이면 창덕궁 비원에서 밤을 땄다. 직접 구워 품속에 품고 가서 드리면 맛있게 드시곤 했다. 이제 드릴 수가 없게 되자 이왕도 군밤을 먹지 않았다. 아버지는 송이버섯도 좋아했는데 아들은 이제 그도 차마 먹지 못한다. 철마다 새 과일 새 채소가 나면 혼전에 올린 뒤에나 들곤 했다. 아들은 매일 고인을 참배하고자 하나 혼전이 덕수궁에 있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내 아버지의 혼전을 창덕궁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고인이 22세에 처음 아들을 보고 왕비와 함께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그곳이었다.

    덕수궁은 마침내 주인을 잃었다. 8년 뒤 아들은 아버지를 뒤따라 갔다.



    선조수정실록/ 고종실록/ 순종실록 부록/ 유성룡, 징비록, 역사의 아침, 2011/ 황현, 매천야록, 명문당, 2008/ 이광린, 한국사강좌 5, 일조각, 2002/ 송우혜, 마지막 황태자 3, 푸른역사/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김경숙, 조선의 묘지 소송, 문학동네, 2012/ 서울육백년사 4권,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5/ 독립신문/ 매일신보/ 동아일보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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