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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부자유친 군신유의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부자유친 군신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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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으로부터의 기별

저것이 우도궁 사령관이 준 시계인가, 아니면 3년 전 1915년 이맘 때 세밑에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새해 선물이라고 주었던 그 시계인가.

희미하다. 모든 것이 꿈결처럼 아득하다. 내 나이 만 44세. 어머니가 하루아침 실오라기 한 점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을미년 8월 20일, 그때의 나이다. 오늘은 음력 12월 20일. 열흘이 지나면 기미년으로 접어든다. 해가 한 번 더 바뀌어 경신년이 되면 어머니 칠순 탄신일이 된다. 그날이 오면 육순 때와 마찬가지로 홍릉(洪陵)에 나아가 배알(拜謁)하게 될 것이다. 이 몸은 얼마를 더 살아 이승 아닌 곳에서 어머니와 해후하게 될 것인가. 67세에도 건강체이신 아버지가 나보다 더 오래 살 거라는 얘기가 돌고 있음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섣달 긴긴 밤의 동창이 밝으려면 한 시간도 더 남았다. 왜 나를 깨우는가.

전화를 받으시라고 근시 여관(近侍 女官)은 입에 얼음을 품은 양 떨며 아뢴다. 덕수궁으로부터의 기별이라 한다. 아버님이 직접 전화를 하는 일은 낮에도 잘 없다. 동경에 가 있는 막내아들 영친왕이 매일같이 보내오는 문안편지 읽고 고이 접어 보관하고, 환갑에 본 막내딸 덕혜옹주 재롱 보기만으로도 섣달 겨울 해는 짧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왕은 아버지 이태왕에게 전화로 문안 인사를 드려왔다. 나흘 전 금요일에는 왕비와 함께 덕수궁으로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세모를 맞아 막바지 추위에 평안하신지 문후(問候)를 여쭈었다. 매일처럼 안위를 점검하는 시종이 어제 아침에도 덕수궁을 다녀와 태왕의 건재함을 고했다. 그저께 일요일에는 여러 신께 한 해를 총결산해 아뢰는 납향제(臘享祭)도 잘 올렸다는 전갈을 받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설이 열흘 앞으로 다가와 있다.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그는 설이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전하께옵서 환후(患候) 침중(沈重)하옵니다.

맴돌던 잠이 찰나에 달아났다. 뇌리는 창덕궁의 백열등 전부를 몰아넣은 듯 환하게 작열했다가 이내 엄동의 허공 속 어둠이 한꺼번에 쏟아드는 것처럼 칠흑에 휩싸였다.

아관파천

부자유친 군신유의

1880년대 서울 정동의 러시아공사관.

이왕과 왕비 윤씨(尹氏)를 태운 마차는 창덕궁의 돈화문을 나서 미명을 뚫고 덕수궁을 향해 질주했다. 양력 1919년 1월 21일. 대한(大寒)의 아침이었다. 북한산과 삼각산에서 불어내리는 칼바람은 체감 온도를 영하 20도까지 끌고 내려갔다. 낙원동 측후소의 온도계는 새벽 최저 기온을 영하 17도8분으로 기록했다. 평년보다 10도는 더 떨어진 날씨다. 연사흘 내리 몰아치는 혹한으로 여염집 방마다 떠다놓은 자리끼 물은 다 얼어붙었고 요강 단지들이 터져나갔다.

얼음길을 달려 삐걱대는 바퀴를 재촉해 덕수궁에 이른 어용마차는 대한문(大漢門)을 전속력으로 통과했다. 덕수궁 뜰의 나무들은 밤사이 쇠락한 집 주인의 육신 모양 아침 바람 찬바람에 이울고 있었다. 창덕궁이나 경복궁에 대면 궁궐이라 할 것도 없이 초라한 행색에 배치도 정연치 못한 전각들이 잿빛 어스름 속에 희뿌옇게 웅크리고 있다. 단걸음에 주인의 처소인 함녕전(咸寧殿)에 다다른다.

15년 전 봄, 덕수궁이 경운궁이던 1904년 사월에 일어난 큰불로 왕의 처소인 함녕전을 비롯한 전각 대부분이 재로 변했다. 그래도 당시 고종황제는 7년을 살아온 경운궁을 벗어나지 않았다. 크고 번듯한 경복궁과 창덕궁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려 했다. 불길을 면한 처소를 골라 임시 거처를 삼아, 폐허 속 공사판이 된 궁궐 터 일각에서 버텼다. 그리고 함녕전을 다시 지어 재입주해 지금껏 지내왔다.

처소가 복구되자마자 여기서 을사조약을 치르고 2년 뒤 여기서 왕위를 찬탈당했다. 그래도 그는 여기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아왔다. 아관파천을 단행해 러시아공사관에 1년간 피신해 있다가 여기 경운궁으로 들어온 것이 벌써 22년 전이다.

의주파천

그 말고 여기서 산 왕은 선조와 광해군뿐이다. 고종의 11대조 할아버지 선조(宣祖)는 임진(壬辰)년의 봄, 서울을 떠나 서북 국경 의주(義州)로 피신했다. 거기서 1년 반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었다. 경복궁과 창덕궁과 창경궁 세 정궁은 죄다 불타버렸다. 그래서 임시 거처로 들어왔던 곳이 이곳 경운궁 자리였다.

선조는 이 남별궁과 마주 보는 자리에 있던 큰 증조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그리고 주변 대신들의 집 몇 채를 편입해 트고 개조해 정동행궁(貞洞行宮)이라 이름 붙였다. 여기서 선조는 죽을 때까지 살았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다시 지어진 뒤 이곳은 아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慶運宮)이라 명명됐다.

3세기 전의 두 부자(父子) 왕이 어쩔 수 없이 여기 머무른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그 전란의 임시 거처였던 이곳에 고종 부자가 심신을 의탁하게 된 것은 무슨 연유에서였던가. 이제 폐위된 고종은 여기서 여생을 마감하려 하고, 왕위를 이어받으며 창덕궁으로 독립해나간 순종 역시 폐위된 채 왕조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선왕의 마지막을 대하려 극한의 새벽 냉기 속에 말과 함께 입김을 내뿜으며 이렇게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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