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마에스트로의 전설’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03-21 1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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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두 사람은 폭군에 가까운 괴팍한 성격 외에 닮은꼴을 찾기 어렵다. 말러가 작곡자의 의도를 격정적으로 과장하면서 음악의 이상적 표현을 이끌어냈다면, 토스카니니는 작곡자가 창조한 원래의 리듬과 셈여림을 그대로 살려 어떤 주관적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말러는 토스카니니에 대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지휘하지만 대단한 지휘자”라고 칭찬한 반면, 토스카니니는 “병든 가련한 신사는 절대 극적이지 않았다”고 말러를 혹평했다. 하지만 후세들은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두 지휘자에게 ‘전설적인 마에스트로’라는 같은 평가를 내렸다.
    ‘마에스트로의 전설’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구스타프 말러(왼쪽)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오른쪽)

    지난해 말 서울시가 정명훈 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연봉을 7억 원 삭감해 3년간 재계약하면서 정 지휘자의 고액연봉이 세간의 관심이 됐다. 이전에 그가 받던 20억여 원의 연봉에 대해서도 과다하다 아니다 논쟁이 일었다.

    필자에게 “교향악단에 지휘자가 꼭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더러 있다. 연주할 음악에 대해 모든 분량의 리듬과 셈여림을 그대로 컴퓨터에 입력해 그때그때 연주자에게 신호를 주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는 사람도 있다. 컴퓨터가 홀 안의 음향을 흡수해 셈여림을 인지하게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설명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휘자가 없으면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이루어질 수 없고, 지휘자에 따라 음악은 당연하게 바뀌는 것”이라고 대충 얼버무린다.

    이렇듯 지휘자가 음악에서 하는 역할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그게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음악의 역사에서 직업 지휘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박자와 템포를 주는 누군가는 항상 있었다. 그 역할은 일반적으로 작곡가가 맡았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활약한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1632~1687)는 지팡이 형태의 지휘봉을 땅에 두드리면서 곡에 박자와 리듬을 부여했었다. 그런데 루이 14세의 쾌유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데 테움(Te Deum)’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다가 지나치게 흥분해 자신의 발가락을 찍는 대형사고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농양이 생겼고 발가락을 잘라내야 했지만 그는 끝내 수술을 거부해 결국 사고 74일 만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글룩, 모차르트, 베버, 스폰티니, 멘델스존,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곡가가 지휘자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지휘자들은 처음에는 종이를 말아서 악보대를 치며 지휘했다. 거기에서 나오는 소리로 막을 알려주는 청각 방식을 이용하다가, 이후 시각적으로 비트를 주는 지휘 방식으로 변화했다. 초창기 지휘는 맨손으로 했지만, 독일의 베버와 멘델스존은 확실하고 정확한 템포를 주기 위해 지휘봉을 처음 사용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가난한 베버는 나무 지휘봉을 사용했는데, 지휘봉에 익숙하지 않았던 단원들은 지휘봉을 회초리로 생각했다고 한다. 반면 부유했던 멘델스존은 상아에 도금이 된 지휘봉을 우아하게 휘둘렀다.



    최초의 직업 지휘자, 한스 폰 뷜로

    산업혁명 이후 중부 유럽에서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신흥 부르주아를 위해 웅장한 연주회장이 만들어졌다. 또 오케스트라의 구성원이 늘면서 음향도 한결 풍부해졌다. 그 결과 웅장한 연주회장에 울려퍼지는 풍성한 소리를 누군가가 때로는 맑고 아름답게, 때로는 극적으로 휘몰아치는 음색으로 재창조할 필요성이 생겼다. 각 악기의 음악적 성격과 소리를 잘 이해하면서 연주곡에 적합한 소리를 설계하고 질감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지휘자에게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음악사가들은 이런 필요에 의해 나타난 최초의 직업 지휘자로 한스 폰 뷜로(1830~1894)를 꼽는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최초의 직업 지휘자여서가 아니라 아내 코즈마가 그의 스승인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폰 뷜로 이후 지휘자는 단원을 통솔하고 템포와 셈여림을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음악을 하나의 이념으로, 창조적인 예술로 당당하게 승화시키는 예술가로 자리 잡는다. 지난 150년 동안 뛰어난 지휘자, 전설적인 마에스트로는 여러 사람 있었지만, 그중 타협을 거부하고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지휘자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음악과는 상관없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혈연 지연 등 외부적 도움 없이 오로지 강한 의지와 자신의 능력으로 최정상의 지휘자 자리에 올랐다.

    구스타프 말러는 지휘자인 동시에 작곡가였다. 그는 50년이란 짧은 생애에 가곡 45곡과 교향곡 11곡(‘대지의 노래’와 미완성인 ‘10번’ 포함)을 작곡했다.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작은 마을 칼리슈트에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가 어린 시절 접할 수 있었던 음악은 군대음악과 가톨릭 종교음악,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민속음악이 전부였다.

    말러의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보면 영락없이 깐깐한 사상가, 혹은 고뇌하는 철학자의 모습이다. 거의 병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에 갇혀 살았고 주위 사람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데 인색했다. 사람들은 그의 괴팍한 성격이 어릴 적 우울한 가정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자애롭고 우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유년기에 주로 어머니에 기대어 성장했다.

    평상시 연습시간을 절대 바꾸지 않던 말러는 어느 날 연습시간을 4시간 미루었다. 의아해하는 단원들에게 “결혼을 하고 왔다”고 해명한 뒤, 평상시와 다름없이 벼락같이 화를 내고 연습을 시작해 단원 모두를 경악시켰다는 일화만 봐도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말러는 음악에 대한 타고난 열정과 관심으로 15세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나 20세에 할레가 극장 여름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프라하,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함부르크에 이르는 수많은 도시를 전전하며 자신의 명성을 이어갔다. 때로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자신의 음악만을 고집하는 괴팍한 성격 때문에 지휘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의 뛰어난 음악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러는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에서 6년을 보내면서 그의 이름을 전 유럽에 각인시켰으며, 그 결과 37세에 꿈의 무대로 동경했던 빈 왕립오페라극장 예술 감독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독종’ 구스타프 말러

    말러의 나이 42세 때 화가 에밀 쉰들러의 딸로 19세 연하인 작곡가 알마 쉰들러(1879~1964)와 결혼했다. 그녀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키스’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클림트를 비롯한 많은 남성으로부터 구애를 받은 만인의 연인이었지만 말러의 음악성에 매료당해 그와 결혼한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1871~1942)는 알마에 대한 쓰라린 실연의 상처와 고뇌를 교향악적 환상곡 ‘인어공주’로 승화해 발표했다.

    알마 쉰들러는 당시 최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말러가 자신의 음악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말러는 젊은 아내에게 작곡을 그만둘 것을 강하게 권하면서 내조자 역할에 만족하라고 요구했다. 그래도 결혼 초기에는 예술적 신뢰가 바탕이 된 사랑 속에 비교적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그의 5번 교향곡을 비롯한 몇 작품에 이러한 안정된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큰딸 마리가 성홍열(급성 감염성 질환)로 기관지 절개 수술까지 했지만 5세 때 세상을 뜨면서 두 사람 사이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말러가 결혼 전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연가곡으로 만든 것도 형제 13명 중 8명을 어린 시절에 떠나보낸 기억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딸 마리의 죽음은 자신의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음표로 절실하게 표현했던, 자식을 잃은 고통과 분열을 딸의 죽음을 통해 직접 겪으면서 그의 인생에서 처음 찾아온 안정된 생활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후 설상가상으로 심장병 진단을 받은 말러는 10년 동안 일하던 빈 왕립오페라극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너를 위해 살고 죽는다, 알므시”

    말러는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덕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 자리를 얻어 미국으로 갈 수 있었고, 3년이 조금 넘는 기간 미국을 돌며 정열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랬지만 미국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열광적 지지와 다수의 반발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음악에만 집착했고, 가정에는 오직 냉기와 침묵만이 맴돌 뿐이었다.

    그런데 부인 알마는 이 같은 분위기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젊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사랑을 젊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에게서 찾았다. 알마의 연인은 실험적 건축학교 바우하우스를 창설하고,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한 사람으로 말러보다 23세 어렸다. 어느 날 말러는 그로피우스가 아내에게 쓴 편지를 읽고 이 사실을 알게 되지만, 후에 조각가가 된 둘째 딸 안나(1904~1988)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이 든 남편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는지 알마는 불꽃 같은 그로피우스와의 사랑을 버리고 말러 옆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초창기와 같은 행복한 생활은 아니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음반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연주했던 총보(모음 악보)에 남긴 세밀한 악상기호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꼼꼼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면서 완벽한 음악세계를 건설한 사람인지 잘 알 수 있다. 그의 음악에는 섬광처럼 강타하는 불꽃과 거대한 고요와 황량한 고독으로 이루어진 체념이 들어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말러가 음악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의지를 가진 변방 출신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지휘할 때 말러는 섬뜩할 만큼 냉정한 자제력을 보여주는 한편 격렬한 움직임으로 광기 어린 고통의 절규를 표현해 주위를 압도했다.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일하던 말러는 아내의 두 번째 부정을 알게 되고는 자신이 작곡하던 미완성 교향곡 10번의 악보에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는다, 알므시(알마의 애칭)’라고 적었다.

    연주 때마다 필생필사의 심정으로 임하던 그는 1911년 2월 폐렴으로 극심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뉴욕 카네기홀에서 생애 마지막 연주를 하고 쓰러졌다.

    결국 말러는 51세로 생을 마감하고 빈 교외의 작은 공동묘지에 쓸쓸하게 묻혔다. 일부 사람들이 그의 묘지를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브람스 등이 안장되고 모차르트(가묘)의 기념비가 있는 빈의 음악가묘지에 안장시킬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의 묘지가 빈의 관광코스인 음악가묘지에 없는 이유다.

    말러의 사후 알마는 그녀는 첫 외도 상대였던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재혼했다. 그런데 이 결혼도 알마가 극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다시 사랑에 빠짐으로써 파탄이 난다. 베르펠과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 알마는 이후에도 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리다가 말러가 세상을 뜬 지 53년이 지난 1964년에 심장마비로 85세의 생을 마감했다.

    앙코르 외치는 관객에게 욕설 퍼부은 토스카니니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사람이 말러뿐은 아니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1867년 이탈리아 중북부 파르마에서 가난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리발디를 추종하는 ‘붉은 셔츠단’ 일원으로 애국운동에 빠져 전국을 떠돌아 다녔고, 어머니 혼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기 때문에 어린 토스카니니는 어머니의 사랑조차 마음껏 받지 못했다. 그는 일찍부터 파르마음악원에 다니면서 첼로와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음악의 객관적 정확성과 투명성을 고집했고, 그 어떤 주관적 해석도 가미되지 않은 청아한 음색을 오케스트라에 요구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종종 매섭고 차갑다는 평을 받는다. 눈이 좋지 않아 다섯 줄에 걸쳐져 있는 음표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던 토스카니니는 아예 통째로 암보(暗譜)해버려 ‘전설적인 암기력’이라 칭송받았다.

    사실 지휘자로서의 토스카니니는 엉겁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세에 첼로 연주자로 간 남미 해외연주에서 ‘아이다’의 지휘자가 병석에 눕는 일이 벌어지자 전곡을 암기하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지휘봉을 쥐면서 지휘인생이 시작됐다. 이후 1898년 32세의 나이로 그는 오페라의 자존심인 밀라노 스칼라 극장 예술 감독으로 부임해 10년 동안 일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능력과 성실성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단원들에게는 절대 복종을 요구하면서 그가 이상으로 삼는 최고 음악을 고집했다. 한편으론 도처에 깔려 있는 관습과 인습에 맞섰다. 그는 무대 위에서 앙코르를 외치는 관객을 향해서도 무자비하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였으니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한 욕설과 모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최고의 ‘디바’였던 소프라노 제랄딘 파라(1882~1967)는 토스카니니의 독설을 참다못해 정중하게 자신은 미국 오페라계의 스타라고 조심스럽게 항의했지만 토스카니니는 자신을 하늘의 해에 비유하면서 해는 별(스타)도 가린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충돌을 거치며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지만 유부남인 토스카니니는 이내 매정하게 인연을 끊어버렸다.

    여성편력이 대단했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이름에는 바람둥이라는 별칭이 지금도 따라다닌다. 하지만 토스카니니의 여성편력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음에도 후세에는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 토스카니니의 연애 행각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것이었다. 30세에 열 살 어린, 은행가의 딸 카를라(1877~1951)와 결혼해 2남2녀를 낳은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내 카를라는 겉으로는 대지휘자의 현모양처로 행동해 백년해로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토스카니니의 셀 수 없는 연인 중 비련의 주인공은 오페라 ‘나비부인’의 초연을 맡은 소프라노 로지나 스토르키오(1872~1945)이다. 토스카니니가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1900년에 처음 무대에 선 스토르키오는 28세의 촉망받는 차세대 소프라노였다. 1902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나비부인’을 초연할 때, 스토르키오는 토스카니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이 후 토스카니니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았지만 무슨 미련이 남아서인지 오랫동안 그의 곁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1915년 홀로서기를 하고 1923년에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릴 때부터 전신마비 증세를 보이다가 처참하게 죽었고, 스토르키오 역시 은퇴 후 마비 증세로 고통받았다. 반면 토스카니니는 노년이 되어서도 계단을 2,3계단씩 뛰어오를 정도의 건강과 열정을 자랑했다.

    토스카니니는 작품의 극적인 연속성을 위해서 성악가의 앙코르를 금지했고, 공연시간 직전에는 객석의 불을 꺼버림으로써 늦게 도착한 관객은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자를 쓴 귀부인의 입장도 금지해, 뒤편에 앉은 사람들이 공연에 집중하게 했다.

    파시스트 黨歌 연주 거부

    이렇듯 그는 청중이 작품에만 집중하도록 혁신적으로 공연문화를 개혁했다. 그러나 타협을 용납지 않은 개혁으로 적을 양산한 토스카니니는 극장 관계자, 예술가에 이어 시민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게 되면서 1908년 미국으로 떠났다가 1920년에 이탈리아 무대로 돌아왔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53세의 토스카니니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 지휘자 반열에 올라 누구로부터도 비난을 받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당시 이탈리아 정권을 잡고 있던 파시스트 정권과 대립했다. 독재에 대한 항거로 그들의 국가(國歌, 파시스트 당가) ‘조비네차’ 연주를 거부한 것이다. 그는 바그너의 숭배자임에도 바그너의 유족들이 나치 정권과 유대를 맺자 과감하게 등을 돌렸다. 또 소련 독재공산 정권으로부터 핍박받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음악적 대변인을 자처하며 그의 음악을 유럽과 미국에 소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곡자 쇼스타코비치는 토스카니니가 보내온 자신의 음반을 듣고는 경악하면서 “지휘자가 마음대로 해석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토스카니니는 음악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세상만을 용납하는 환상적인 독재자였지만, 무자비한 독재자들에게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항거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약자를 대변하는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아니었다. 단지 정치적 독재를 강하게 증오한 한 예술가일 따름이었다.

    조국 이탈리아에서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와의 갈등으로 1926년 토스카니니는 다시 미국 무대로 떠났다가 무솔리니 정권이 물러난 1946년 스칼라 극장 재건을 위한 음악회를 지휘하기 위해 귀국했다. 대대적인 국민적 환영을 받은 그의 위상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다.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 이어 1937년부터는 NBC방송국에서 창설한 NBC오케스트라의 예술 감독까지 맡았던 그는 나이 87세인 1954년까지 활동했다.

    말러와 토스카니니. 두 사람은 폭군에 가까운 성격이었지만 추구하는 음악은 달랐다. 말러가 작곡자의 의도를 격정적으로 과장하면서까지 음악의 이상적 표현을 이끌어냈다면, 토스카니니는 작곡자가 창조한 원래의 리듬과 셈여림을 그대로 살려 어떤 주관적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다. 또 말러는 바그너의 반유대적인 언행에도 바그너를 음악적 영감의 스승으로 경배하고 그의 작품을 종종 연주했다.

    말러는 토스카니니에 대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지휘하지만 대단한 지휘자”라는 칭찬을 한 반면, 토스카니니는 “병든 가련한 신사는 절대 극적이지 않았다”고 인색한 평을 했다. 또 작곡자로서의 말러에 대해서도 “천재성은커녕 어떠한 개성도 보이지 않는 여러 작곡가의 모자이크”라고 혹평했다.

    일생 동안 토스카니니는 117곡 이상의 오페라와 480곡 이상의 관현악곡을 지휘했지만, 말러의 곡은 한 곡도 없었다.

    어쩌면 토스카니니는 영원히 사랑할 여인을 만나지 못해 평생 방황했고, 말러는 영원한 여인을 만났으나 그로 인해 정신적 파멸의 길로 들어서 일찍 세상을 등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두 지휘자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뀌고 있다. 토스카니니는 살아생전 무대를 호령하며 최고 지휘자로 인정받았고, 수많은 음반을 내는 행운을 누렸다. 그렇지만 모노 방식으로 녹음된 그의 음악은 후대의 스테레오 방식이나 최첨단 녹음 시스템을 이용한 후배들에 의해 밀리고 지워지는 반면, 살아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온갖 악평에 시달린 말러의 음악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자신이 지휘한 음악의 음반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말러였지만, 후세 음악가들이 그의 곡을 재평가하면서 최첨단 녹음 시스템을 이용해 그를 선명하게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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