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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16

‘술꾼’ 룰라가 사랑한 브라질 국민주 ‘카샤사’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술꾼’ 룰라가 사랑한 브라질 국민주 ‘카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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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룰라 다 실바 전 브라질 대통령의 인기는 여전하다. 연임을 하고 퇴임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대선후보로 꼽힌다. 이런 룰라 전 대통령도 술과 관련한 구설에 자주 올랐다. ‘룰라는 폭음을 일삼는 술꾼’이라는 ‘뉴욕타임스’ 보도로 브라질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고, 전 브라질 국가대표 축구선수 호나우두는 애주가 룰라를 비꼬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룰라가 사랑한 술은 브라질 국민주 ‘캬샤사’였다.
‘술꾼’ 룰라가 사랑한 브라질 국민주 ‘카샤사’
동아일보 4월 15일자 국제 면에 오래간만에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에 관한 기사가 게재됐다. ‘룰라 前대통령, 암 치료 후 첫 대중연설’이란 제목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66) 전 대통령이 5개월간의 후두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첫 대중연설에 나섰다. 룰라 전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자신이 거주하는 상파울루 시 인근 상 베르나르두 두 캄푸 시의 공공교육센터 준공식에 참석해 6분간 연설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높이 평가하고 오는 10월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집권노동자당(PT)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행사에 참가한 주민과 지지자들은 룰라 전 대통령을 연호하며 그의 정치활동 복귀를 환영했다. 그러나 룰라 전 대통령은 연설 도중 여러 차례 기침하는 등 아직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이 때문에 연설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27일 66번째 생일을 지내고 나서 후두암 판정을 받았다. 그동안 3번의 항암 화학요법과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거쳤다. 룰라 전 대통령은 3월 28일 후두암 치료를 끝내고 나서 곧바로 정치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기사 내용대로, 룰라 전 대통령은 2010년 성공적인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끝 마치고 나서 그 이듬해인 2011년 10월 후두암 판정을 받았다. 발병 원인은 그의 흡연 습관 때문으로 추정됐다. 치료 후 현재 검사로 관찰되는 암은 없어졌으나 병의 특성상 한동안 규칙적인 검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브라질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룰라의 공식적인 후계자로도 인정받고 있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현재 지지율이 70%를 넘는 현실에서, 전임 대통령인 룰라의 근황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이는 브라질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그의 인기가 현역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하다는 방증이다.

그의 후두암 발병 소식 이후 다소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브라질 정치권에서 룰라의 2014년 대선 출마설이 화제가 됐다. 브라질 선거법에서는 대통령의 3선(選)을 금지하고 있으나, 대선을 한 차례 이상 건너뛰고 출마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룰라의 폭발적인 인기를 감안하면 지금도 자신이 결심한다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2014년 대선 승리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브라질 국민은 예상한다.

그러면 국제정치사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있는 룰라 전 대통령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본명이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Luiz In?acio Lula da Silva)인 그는 1945년 10월 27일 브라질 동북부에 있는 페르남부쿠 주의 작은 농촌 마을 카에테스에서 빈농의 8명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룰라의 여전한 인기

그리고 1952년 7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대도시인 상파울루로 갔다. 룰라의 어머니가 앞서 고향을 떠난 남편을 찾아 자녀들을 데리고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이미 어머니의 사촌과 딴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가난 속에서 두 가족 간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고,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4년 후 다른 빈민가로 이사를 갔다. 그 후 룰라는 아버지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 중독 상태에서 1978년 세상을 떠났다.

이런 집안 배경 때문에 그는 어릴 적부터 거리에서 땅콩과 오렌지 등을 팔아 가족 생계를 도와야 했다. 조금 커서는 구두닦이, 세탁소 점원 등을 하며 생계를 돌봤다. 남보다 늦은 10세 때 입학한 학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4학년 때 그만뒀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이 전부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구리 공장 선반공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19세 때에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왼쪽 새끼손가락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 치료를 받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만 했던 아픈 경험이 그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되자 1969년 같은 공장에 근무하던 마리아(Maria de Louedes)와 첫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 중인 1971년 간염에 걸려 아이와 함께 그만 사망하고 만다. 룰라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1974년 노조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된 여사무원이자 한 아이를 둔 과부인 마리자(Marisa·1950~)와 재혼했다. 이 여성이 바로 룰라의 현재 부인으로, 그들 사이에는 세 아이가 있다.

룰라는 활발한 노조 활동을 통해 점점 그 위상을 높여나갔다. 그 결과 1975년에는 브라질의 자동차 산업의 중심 도시인 상 베르나르두 두 캄푸와 디아데마 두 도시의 철강 노조 위원장으로 뽑혔고, 1978년에 재선됐다. 1970년대 말 룰라는 불법 파업을 주동한 죄로 당시 브라질의 정권을 잡고 있던 군사정부에 의해 한 달간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룰라는 1980년 2월 10일 군사독재 반대 인사들과 함께 좌익 성향의 노동자당(PT) 창당을 주도한다. 그 후 노동자당은 1984년부터 대통령 직접선거를 위한 개헌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쳐나갔다. 당시 브라질은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만들어진 1967년 헌법에 의해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문제는 국회 선거는 일종의 형식에 지나지 않아 실제 군부회의에서 밀실회담을 거쳐 유망한 퇴역장성들 가운데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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