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 전문 영역 역시 날로 확대되고 그 깊이 역시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모든 영역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다다랐다. 바야흐로 전문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영웅적이며 카리스마적인 인물 한 명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유능한 리더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잘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모든 일에 본인의 생각과 의지를 관철하려 한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각 분야에는 거기에 걸맞은 인재가 있게 마련이다. 여기에 운용의 묘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좋은 리더란 인재를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편견과 차별도 내다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리더는 조직에 명확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로 발전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단순한 상명하복 지시를 위한 톱다운(Top-down)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리더와 하부 조직 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버텀업(Bottom-up) 방식의 능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아래로부터의 비전을 전달받아 재가공해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대통령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1948년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에 과연 용인술과 소통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 대통령이 있었던가.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과거 정부 총책임자의 모습은 보통 제왕적인 대통령이었다. 정부 각 부문에 책임과 자율성이 부여되지 못했다. 많은 부분, 때로는 모든 부분이 대통령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결정됐다. 한 사람의 독재가 불러온 정책적 오류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재 발탁 역시 제한적이었다. 많은 기관과 기업도 비슷한 비판을 받겠지만, 그간 정부 요직은 대부분 대통령의 인맥과 학맥으로 이뤄진 측근에 의해 채워졌다. 그것도 모자라 전문성과는 상관없이 측근이 특정 요직을 돌아가면서 차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대통령의 ‘입맛 인사’가 주를 이뤘기 때문인지 대통령과 실무진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뤄진 경우가 드물었다. 대부분 대통령의 일방적인 지시가 내려갔으며 실무진은 대통령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사안을 정확히 판단해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것이 참모진의 임무인데, 이러한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비판 없는 정부, 반성 없는 정부였다. 정부와 청와대 인사들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닌 대통령의 복심(腹心)이 되고자 노력했다.
앞으로 대통령이 될 인물은 사심이나 편견 없이 훌륭한 인재를 뽑았으면 좋겠다. 뛰어난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국민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에 매몰돼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는 후진적 사회를 벗어나 사회 각 분야의 우수한 인재가 핵심 포스트에서 리더로서 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
권오성<br>1985년생 대기업 사원
칭기즈 칸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점령지 출신의 참모 야율초재가 있었기 때문이고, 링컨이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비난하고 다니던 스탠턴을 측근으로 삼은 덕분이었다. 훌륭한 리더는 거의 예외 없이 훌륭한 파트너를 갖고 있었다.
다음 대통령은 국정의 파트너를 찾는 데 열심이고, 그들과 활발히 커뮤니케이션 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