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두려워 아이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실제 아이를 낳자마자 입양기관에 보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다시 아이를 데려왔다. 나는 미혼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 8년. 매일 매일이 전쟁이었다. 내 입으로 미혼모라는 단어를 뱉기도 어려웠고, 스스로 인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앞만 보고 살자 다짐했지만 인생은 쉽지 않았다.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비정규직 신세에서 벗어나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된 직장. 하지만 나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고 결국 5일 만에 그만뒀다. 세상이 두려웠다.
이제 내 아들 준서는 여덟 살이 됐다. 때로는 아이에게 화내고 가끔은 회초리도 들지만 언제나 아이에게 진실된 사랑을 주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홀로 아이를 기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난번 엄마 생신날, 고향집에 내려가면서 아이에게는 “출장 다녀올게”라고 거짓말했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나서야 부모님께 출산 소식을 전했고, 부모님이 손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내가 인사하자 아이는 의젓하게 “응, 엄마, 출장 잘 다녀와” 하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이를 돌봐준 친구에게 들어보니 아이는 엄마가 포항 할머니집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엄마 따라간다고 떼쓰지 않은 거였다.
준서는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나에게 “엄마, 엄마 하기 힘들지?” 하고 묻는 의젓한 아이지만, 가끔 가슴이 무너지게 하는 날도 있다. 어느 날 우리는 함께 목욕탕에 갔다. “우리 아들은 다섯 살이에요”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목욕탕 아주머니는 우리 아들의 여탕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는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아빠랑 안 살아서 그런 거야”라며 길거리에서 펑펑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때 나는 내 아이를 위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엄마로 살아가기가 워낙 힘들다지만, 미혼엄마는 그보다 한 열 배 더 힘들다. 미혼모 대부분이 임신과 동시에 회사나 학교에서 퇴출당한다. 출산 후는 더욱 어렵다. 미혼엄마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학생이라면 학업을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대부분 검정고시를 준비하지만 육아와 공부를 동시에 하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는 평생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다문화가정, 조손가정, 한부모가정…세상에는 참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있는데 왜 사회는 유독 미혼모가정에만 더욱 냉혹한 걸까?
나는 우리나라가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기에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지난해 여성가족부의 미혼모 정책을 살펴보면 나이 어린 미혼모에게 지원이 집중돼 있다. 하지만 성인 미혼모라고 경제, 심리적인 부분에서 나을까?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여성은 나이가 많거나 아이가 있으면 취업하기 더 어렵다. 성인 미혼모들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미혼모라는 이유로 출산·육아휴직은 꿈도 꿀 수 없다.
혼자 아이를 길러보니, 국가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부분이 주택 문제다. 특히 미혼모는 혼자가 아니라 어린 자녀를 데리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주택 정책에서 우선순위가 됐으면 좋겠다. 또한 미혼모 문제는 여성 혼자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이 임신을 했다면 남성은 결혼 관계와 상관없이 아이에 대한 책임이 있고 양육비를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혼부의 양육비 지급을 법적으로 강제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의 복지 문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미혼모에게 아이 양육을 포기하게 만든다.
최향숙<br>1970년생 미혼모
올 연말이면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다. 내가 바라는 대통령은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봐주는 대통령이다. 새 대통령은 내가 여성이자 엄마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내 몫을 다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다. 이 사회의 도움으로 내 아들이 잘 자라, ‘차이는 있지만 차별이 없는 사회’에서 귀한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