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인회, 비난한 박지원에 역공
- “박지원은 아주 나쁜 사람. 김정일에게 돈 바치고 아부하고”<김용갑>
-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현경대>
- “유치하기 짝이 없어”<최병렬>
3월 21일 국회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김용환 당 선대위고문에게 먼저 내려가시라고 권하고 있다.
대세론을 구가한 대선 주자 주변에는 항상 이너서클이 있었다. 이들이 호가호위하면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 반면 대세론을 경계하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참모를 둔 대선 주자는 성공했다. 다만 이들이 정권에 참여한 뒤 권력을 남용해 말로가 좋지 않았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1997년과 2002년에 대세론을 탔지만 결국 권좌에는 오르지 못했다. 가장 큰 패인은 이인제 탈당, 아들 병역비리의혹 등 리스크 관리의 실패였다. 이 전 총재는 당시 방어에만 급급했다. 1997년에는 대세론에 안주한 참모들이 냉철한 판단을 막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른바 ‘원내 7인방’으로 하순봉·황우여·김영일·서상목·변정일·백남치·박성범 의원이 그들이었다.
‘대세론과 7인방’ 오랜 전통
2002년 대선에선 ‘신(新)8인방’이 떴다고 한다. 하순봉 의원만 그대로였고 나머지는 바뀌었다. 양정규·맹형규·신경식 의원, 윤여준 여의도연구소장, 고흥길 특보, 정태윤 기획위부위원장, 금종래 비서실장이다. 이들이 잘한 일도 많았지만 악재가 쏟아지는 데도 ‘제왕적 총재’를 안심시키는 데 주력한 측면도 있었다. 참모 관리를 잘못한 것이 결국 리스크 관리 실패로 이어진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6인회’가 선거 전략을 진두지휘했다. 이명박 후보 본인과 친형인 이상득 의원, 박희태·이재오·김덕룡 의원, 최시중 한국갤럽 회장이 멤버였다. 이명박 후보가 정권을 잡자 논공행상이 이뤄졌다.
이상득 의원은 별다른 직함을 갖지 않았지만 ‘영일대군’으로 지칭되며 최대 실세가 됐다. 박희태 의원은 국회의장 자리에 올랐고, 이재오 의원은 내부 파워게임에서 밀려났다가 실세 특임장관을 맡았다. 김덕룡 의원은 민화협 상임의장직을 현재도 수행하고 있다. 최시중 회장은 초대와 2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6인회의 처지는 그리 좋지 못하다. 이 대통령은 사저 신축 논란과 측근 비리로 지지율이 크게 빠졌다. 최 전 위원장은 파이시티 인허가 로비사건으로 구속됐고, 박 전 국회의장은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이상득 전 의원도 여러 가지 권력형 비리 의혹을 사고 있다.
최근 대세론을 타고 있는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원로자문그룹인 ‘7인회’가 구설에 올랐다. ‘박정희 시대 사람들이 막후에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그동안 정가에 파다했다. 이를 확인(?)해 준 사람이 유신정권 때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 장관을 지낸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다.
김 고문은 5월 24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친박 7인회’의 실체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 사람들이 ‘7인회’라고 부르는데 가끔 만나 식사하고 환담한다”고 밝혔다. 또 “나를 포함해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김용갑 전 의원,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현경대 전 의원, 강창희 의원(현 국회의장)”이라고 멤버도 공개했다.
야권의 저격수인 박지원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를 놓치지 않았다. 박 위원장은 “박근혜 전 위원장에게 7인회가 있다고 하는데 그 면면을 보면 수구꼴통이어서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6인회가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여섯 사람이 결국 반은 감옥에 갔고, 나라를 망쳤다”며 현 정부까지 걸었다.
그러자 박근혜 전 위원장은 이틀 후 측근인 이정현 전 의원을 통해 “7인회라는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정면 반박했다. 이 전 의원은 “박 전 위원장은 ‘당의 몇몇 원로 되시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친목모임을 갖고 가끔 만나 서로 점심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분들이 초청을 해 한두 번 오찬에 가 뵌 적이 있다’고 했다. 소위 멘토 그룹 운운하는 것은 잘못 알려진 내용”이라고 말했다.
이후 친박 진영에선 이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한 친박계 인사는 “‘7인회’라는 네이밍(이름 붙이기) 자체가 잘못됐다. 정계를 은퇴한 원로들이 환담을 나누는 친목모임이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친박계인 서병수 새누리당 사무총장도 “7인회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제가 실언을 했다”
7인회 멤버로 거론된 인사들은 비슷한 반응을 나타냈다. “나는 (정치에서) 졸업한 사람이다. (7인회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최병렬), “7인회는 나도 처음 듣는 용어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이후부터 가끔 만나서 밥을 먹고는 한다. 그런 모임은 많은 것 아니냐. 박지원 위원장이 모셨던 DJ(김대중) 때 역할을 했던 분들도 그렇고, 이런저런 모임이 있는 것이지….”(현경대).
이들은 특히 박지원 위원장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김용갑 전 의원은 기자에게 “우리가 대응을 하면 박지원 의도에 말려드는 것인데, 박지원이는 아주 나쁜 사람 아니냐. 북한 김정일에게 돈 갖다 바치고 아부하고, 눈물 흘리고…”라고 했다. 최병렬 전 대표는 “그 사람이야 항상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 아니냐.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현경대 전 의원은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정치판이지만 정치공세 대상을 잘 가려야지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7인회’ 보도가 나간 이후 친박 진영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박정희 시대 사람이 주축인 7인회 멤버가 부각되면 가뜩이나 ‘수구’ 이미지가 강한 박 전 위원장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박 전 위원장은 비대위를 꾸리면서 27세의 이준석 위원을 영입했고, 4·11 총선 때는 27세의 손수조 후보를 부산 사상 선거구에 공천한 바 있다. 그만큼 취약 세대인 젊은 층에 공을 들이는 마당에 평균연령 74세의 멘토단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최시중 전 위원장이 최근 구속되는 등 ‘MB 6인회’가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와중에 나온 ‘박근혜 7인회’ 논란은 박 전 위원장 본인에게도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 전 위원장은 박지원 위원장의 ‘수구꼴통’ 발언이 있은 직후 김용환 고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전 위원장은 통화에서 “도대체 7인회라는 말이 왜 나왔느냐, 언론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6인회와 자꾸 비교하는데, 조심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에 김 고문은 “제가 실언을 했다”며 인터뷰 과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도둑질한 건 아니지 않나”
김용환 고문의 말을 들어보기 위해 서울 마포에 있는 그의 개인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 입구에는 ‘아시아·태평양 경제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둥근 탁자 한가운데에 한자로 ‘民族中興 朴正熙’(민족중흥 박정희)라는 글귀가 새겨진 도자기가 눈에 띄었다. 그는 기자를 보자 “할 말이 없다”며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를 애써 붙잡고 물었다.
▼ 박근혜 전 위원장의 자문그룹인 ‘7인회’가 있고 김 고문께서 좌장이라면서요?
“모여서 무슨 건의를 하고 조언하는 그런 모임이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만나서 밥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사이죠.”
▼ 박지원 위원장이 ‘MB 6인회’에 빗댔는데요?
“우리가 뭐 도둑질을 한 건 아니잖아요? 6인회와는 달라요. 우리는 다 나이도 많고, 현역에서 떠난 사람들이죠. 박지원 위원장이 ‘수구꼴통’들이 만나는 것으로 얘기를 했던데 나 참… . 정치판에서 모함도 있고, 오해도 있을 수 있지만 이건 아니죠. 처음에는 대응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런 행동이 박근혜 전 위원장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그만뒀어요.”
▼ 박근혜 전 위원장도 모임에 가끔 참석을 했다는데요?
“가끔 선약이 없으면 나오셨죠. (박근혜 전 위원장을) 편하게 해드리고 고생하신다고 위로도 해드리려고 했는데 거꾸로 누를 끼쳐버렸습니다.”
이 정도 대화만 나누고 김 고문은 “볼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그를 보좌하고 있는 이태용 전 국회의장 정무수석은 “박지원 위원장의 말이 보도된 이후 김 고문이 마음고생이 심했다”며 “그동안 사무실에도 나오지 않다가 오늘 정리할 일이 있어 잠깐 들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은 “김 고문께서는 항상 ‘눈을 감기 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오히려 박 전 위원장에게 누를 끼쳐 매우 상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김 고문의 별명이 입이 무겁다고 해서 ‘이중 자크(지퍼)’다. 그런데 이번 보도가 나가고 나서 ‘내가 자크가 풀렸나보다’고 한탄하시더라”고 귀띔했다.
그렇다면 7인회는 정말 원로들의 친목 모임일 뿐일까? 박근혜 전 위원장에게 대권 플랜을 제시하고 조언을 하며 힘을 쌓아가는 실제 이너서클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취재 결과, 7인회의 시초는 ‘4인 모임’이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한 뒤 경선캠프에 참여했던 김용환·최병렬·김용갑·안병훈 네 사람이 모임을 시작했다. 김용환 고문, 최병렬 전 대표, 김용갑 전 의원은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고문을 지냈다. 안병훈 전 부사장은 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이었다.
이들은 함께 고생한 인연으로 비정기적으로 만나 정국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친박계 거물인 서청원 전 의원은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미래희망연대’를 만들어 대표로 활동하느라 4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7인회는 실제 이너서클”
4인 모임에 캠프 고문을 맡았던 강창희 의원과 현경대 전 의원, 그리고 선대위 부위원장이었던 김기춘 전 장관이 합류해 7인회가 됐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자연발생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강 의원은 ‘모임에 충청 출신이 없다’는 이유로 김용환 고문이 끌어들였다고 한다. 현경대 전 의원과 김기춘 전 장관은 김용갑 전 의원이 참여시켰다고 한다.
이들은 순수 친목모임이라고 강조하지만 정가에선 4·11 총선 공천과정에서 7인회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나돈다. 또 7인회 멤버로 4·11 총선에서 당선된 강창희 의원이 국회의장 경선에서 정의화 의원을 꺾는 과정에서도 7인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관측도 있다.
7인회 멤버들은 박지원 위원장의 ‘수구꼴통’ 발언으로 파문이 일어난 뒤에도 강창희 의원의 당선 축하와 현경대 전 의원의 총선 낙선을 위로하기 위한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7인회의 한 핵심 멤버는 기자에게 “우리는 ‘박근혜 시대’가 열려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당분간 모임을 자제하겠지만 앞으로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의논하는 그런 자리가 필요하면 계속 만나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