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권분립’ 벗어나 있는 인권위는 위헌적 기관?
- 이명박 정부 출범과 조직 축소 시도
- 세계인권선언 60년, 초라한 환갑 잔치
- 대통령 상대 권한쟁의 심판 준비한 이유
2007년 12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현판식에 참석해 이경숙 인수위원장 등과 함께 현판을 걸고 있다.
인구와 선진도가 비슷한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공무원 숫자가 많다, 적다 논쟁이 분분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나라 직업공무원의 신분은 견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한때 공무원이 부패와 무능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특별한 자격이나 재능이 요구되지 않고 봉급도 매우 낮았다. 그래서 시쳇말로 ‘말단공무원이나 해볼까’라는 속어가 생기기도 했다. 물론 행정고시를 통해 입신영달하는 소수의 엘리트집단이 있었다. 이들만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이른바 ‘성골’신분이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직급을 막론하고 모든 공무원이 선호 직업이다. 봉급도 부정을 변명할 수 있을 만큼 적지 않고, 무엇보다도 안정된 신분이 매력이다. 그만큼 나라가 발전했다는 징표일 것이다.
강력한 신분제의 부작용인 관료행정의 경직성을 탈피하기 위해 별정직, 계약직 등 다양한 신분의 공무원제도를 도입했다. 제도적인 장점이 많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신분 사이에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대우, 승진, 보직, 이 모든 면에 있어 특수신분의 공무원은 주류의 일반직 공무원에 비해 열악한 상황에 놓이기 십상이다.
정권이 바뀔 때면 공무원은 긴장한다. 상위 직급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조직 개편에 따라 자신의 자리가 직접 영향받을 수도 있다. 모든 부처가 기관 이기주의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전방위 로비작업이 벌어진다. 가히 복마전이다. 부서장의 능력과도 관련된 일이다. 조정대상으로 떠오른 기관은 비상이다. 무조건 버텨내야 한다. 잠시 몰아치는 폭풍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 이내 다시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그게 공무원 사회다.
정부조직 개편 작업에는 예외 없이 ‘전문가’인 행정학자가 대거 기용된다. 그러나 이들 행정 전문가가 어떤 기여를 하는지는 냉정하게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1992년 김영삼 후보가 승리한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생겼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당선자로 인수위 전통이 이어졌다. 이제 누가 인수위에 들어가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이들 중 다수가 새 정부의 요직에 진출한다. 치열한 줄 대기가 벌어진다. 선거캠프에 참여한 공신 사이에 격렬한 논공행상의 전투가 벌어진다. 인수위 실무진은 정부 각 부처에서 차출된다. 대체로 자신의 부처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다. 그래서 향후 5년간 이들의 전도는 더욱 밝다.
2007년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낙승할 것이 예상되고 있었기에 그의 캠프에는 정치지망생 인재가 넘쳐흘렀다. 이 후보의 ‘정치특보’만 수천 명이 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명박 당선자의 인수위 위원장은 이경숙 당시 숙명여대 총장이, 부위원장은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인 김형오 의원이 맡게 됐다. 대학교수도 여럿 포함됐다. 거의 대부분 내가 알 만한 사람이었다.
검사와 행정학자의 합작품
인수위는 곧 정부 조직정비작업에 들어갔다. 무분별하게 난립한 각종 ‘위원회’를 통폐합하는 것이 중요한 의제의 하나였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탄생한 ‘과거사’ 관련 위원회 14개가 집중 표적이 됐다. 새삼스럽게 친일, 독재 등의 과거 행적을 들춰내는 일이 부담스러운 세력이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는 정서가 있었다. 업무와 의제는 다르지만 사회 통합보다는 분열을 책동하는 좌파세력의 집결지라는 정서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행정학자도 미국에서 수학한 사람이 절대다수다. 대부분 단기적인 실적과 효용을 중시하는 기능주의자다. 인수위에는 전직 검사도 중용되었다. 모두가 인권위에 대해 적대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거나 실체를 잘 모르고 있었다.
새 정부의 인권위에 대한 기본방침은 검사와 행정학자의 합작품이라는 세평이 있다. 이들이 이해하는 전형적인 국가조직의 원리는 몽테스키외 식 삼권분립이다. 즉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이외에는 국가기관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기관이든 전통적 3부의 하나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3개 부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른바 ‘독립기관’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몽테스키외의 이론이 탄생한 후 200년에 걸친 발전을 모르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각종 행정위원회가 헌법의 직접적인 규정 없이 독립된 지위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머리 없는 국가의 제4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심지어 우리나라 인권위가 위헌적 기관이라는 주장을 하는 한심한 헌법학자도 있었다. 한때 배심제도가 위헌이라는 주장도 법실무가 사이에 광범하게 퍼져있었다. 헌법에 규정된 법관의 사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민주헌법의 정신과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경직된 법 논리다. 국민주권국가의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 국가권력의 배분은 오로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수단이 목적을 능가할 수 없다. 배심이나 인권위가 존재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도움이 된다면 헌법에 위반될 수 없다. 속말로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헌법은 국민의 편인가, 아니면 국가기관의 편인가?
일부는 “인권위는 선진국인 미국·일본에도 없다. 그런 기관을 왜 우리가 가져야 하는가? 이만하면 우리나라 인권도 크게 신장된 것 아닌가? 인권위를 두는 것 자체가 인권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증거가 된다”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생떼도 썼다. 이런 것이 어느 정도 수용되는 분위기였다. 모든 국가기관이, 거침없이 쓴소리를 쏟아내는 인권위를 몹시 불편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좌파정부’의 말잔치에 식상한 대중의 정서에 편승해 인권위는 손쉬운 공격의 표적이 됐다.
인수위는 정부조직 조정안을 입안하기에 앞서 각 기관에 대고 현황 보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인권위에 대해서는 요청해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자발적으로 전달하러 직원을 보냈다. 한 젊은 검사가 서류의 접수를 거부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실로 안하무인이었다. 승강이 끝에 박형준 당시 인수위원이 “그냥 두고 가라”는 말을 남겼다.
2008년 초,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인수위는 새 정부조직의 윤곽을 발표했다. ‘과도한 위상’의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전환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당초에는 ‘고충처리위원회’ ‘국가청렴위원회’ ‘행정심판위원회’ 등과 통합해 하나의 위원회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밀실작업이라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인권위가 독립기관이라는 주장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않았다. 스위스 제네바의 인권고등판무관의 서신이 인수위 위원장 앞으로 도착했다. 판무관실 고위직이 밀사 자격으로 날아와서 인수위 담당 간사를 은밀하게 만났다.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변경하면 국제사회에 독립성 침해로 비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시민사회가 크게 분노했다. 야당도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손학규 당시 민주당 대표와도 만났다. 이회창 당시 선진당 대표도 조용하게 뜻을 전해왔다. 결국 일종의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고 인권위는 원래대로 존속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여성부와 통일부를 폐지하려던 당초의 안도 수정했다. 문제의 3개 위원회는 국민권익위원회로 통합해 국무총리 직속으로 두도록 했다. 일단 한숨을 돌렸다. 당시 박재완 인수위 팀장은 인권위가 독립기관인 점을 고려해, 일반 행정기관과는 다른 별도의 업무 기준을 적용할 여지를 남겨주었다. 비교적 유연하게 국제사회의 동향을 반영하려고 애쓴 것이다. 내심 고맙게 생각한다.
2008년 5월 2일 시작된 촛불집회가 날로 세를 얻어가고 있는 때였다. 느닷없이 감사원이 인권위에 대한 직무감사를 실시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인권위 사상 최초의 직무감사였다. 2007년 12월 행정안전부(행안부)의 결산감사가 있은 직후라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5월 21일, 감사관 7명이 예비조사를 실시했고 6월 2일부터 10일간 17명이 투입돼 세밀한 감사를 했다.
감사원 특별감사
인권위도 직무의 독립성을 침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당연히 수용해야 한다. 실무진 사이에 독립성의 범위를 두고 약간의 승강이가 있었다. 김칠준 당시 인권위 사무총장의 정교한 법리에 감사관이 대체로 설득당했다. 감사원도 인권위가 통상의 행정기관이 아닌, 독립된 기관이라는 대전제는 인식하고 있었다. 열흘에 걸친 세밀한 감사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가 없자 감사를 4일 더 연장했다. 그들 사이에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후일 전해 들은 뒷이야기다. 정말로 인권위가 맑은 곳이라는 게 감사관들의 평가였다는 것이다. 감사를 마치고 떠나면서 인사차 들른 책임자의 언행에서도 이런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한 신문은 감사원의 이례적인 직무감사 결정을 5월 16일 부산대에서 열린 나의 강연에 대한 반응으로 평가했다. 그때 나는 “대학생도 인권과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다. 일반 국민이 누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받는다”고 했다. 청중의 질문에 헌법학자의 상식으로 답했던 것이다. 물론 시사적인 함의가 있었다.
불편한 진실은 오래도록 변치 않았다. 정부의 모든 기관은 인권위를 경원시했다. 이명박 당선자의 인수위 부위원장이던 김형오 의원이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법에 의해 인권위는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정기적으로 업무보고를 하도록 돼 있다. 김 의장은 국회 운영에 대해 나름대로 청사진과 소신을 갖고 있었다. 2년 재임 기간에 개헌과 국회의 상시개설 제도를 추진하겠다는 야심을 밝혔다. 2012년을 기점으로 대통령의 임기 4년, 중임제를 도입해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를 같은 해에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헌 논의는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 말기에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모든 정당이 합의한 사항이기도 했다. 헌법학회 회장의 경력을 가진 나도 김 의장의 열의에 찬사를 보냈다. 나는 국회에서 인권위의 소속 상임위가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로 돼 있는 것이 마뜩잖았다. 법사위는 전통적으로 검사 출신 의원이 주도하고 있다. 또 법원행정처, 법무부와 함께 배속돼 있어 인권문제를 법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래서 운영위원회로 옮기고 싶었다. 그곳은 여야 원내대표가 당연직으로 참여하기에 국정 전반의 차원에서 정치적인 타협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외국에서는 인권위가 의회에 소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업무의 독립성이 침해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의회는 여야가 공존하는 민의의 대변기관이기 때문이다. 김 의장은 일리 있는 이야기라며 즉시 수용해주었다. 검사 출신의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유연하게 받아주었다. 홍 대표는 인권위의 업무에 대해서도 당파적 차원을 떠나 중립적 원칙을 지키려 애써 주었다.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인권위 무력화 작전
2008년 10월 27일, 인권위는 촛불집회 의견서를 발표했다. 언론이 난리를 쳤다. 누차 설명했지만 인권위는 경찰이 본 피해에 대해서는 구제할 권한이 없다. 그것은 경찰과 검찰의 몫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권위는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다룰 수 있을 뿐, 공권력에 ‘대한’ 침해는 관할권 밖이다. 그때 이상득 의원의 발언이 보도됐다. “시위대에 맞아가면서 촛불난동을 진압한 경찰의 행위를 인권침해라고 말하다니. 그런 인권위가 어떻게 이 정부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라며 그는 분노했다고 한다. 그해 국정감사와 업무보고는 시종일관 인권위에 대한 융단폭격으로 일관했다. 몇몇 여당 초선의원이 청와대와 사전 교감했던 정황이 감지됐다. 야당의원은 인권위를 옹호함으로써 더욱 정쟁의 양상을 띠게 됐다.
12월 10일, 인권위 주관으로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인권위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인권선언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각종 캠페인을 벌었다. 인권위 건물에 대형 휘장도 내걸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스위스 제네바의 인권최고대표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2008년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지 60돌을 맞는 해이기도 했다. 인권위는 세계인권선언과 대한민국 헌법, 두 문서의 의미를 결합하는 지적활동도 지원했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감안해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할지 여부를 타진했으나 즉시 거부됐다. 국무총리도 11월에 국제회의에서 축사를 했다며 참석을 거부했다. 다행스럽게 김형오 국회의장이 참석했다. 사전에 다른 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마지막 단계에 조정한 것이다. 그는 축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한 잡지는 ‘초라한 환갑잔치’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정황을 보도했다.
10월 30일, 감사원으로부터 조직 관리, 인사관리에 관한 처분요구서를 받았다. ‘대국대과(大局大科·행정관청의 국과 과를 통폐합해 규모가 큰 하나의 국과 과로 만드는 체제)’로 전환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직을 축소하라는 내용은 없었다. 요구에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인권위 스스로 외부 전문기관에 의뢰해 조직진단을 실시한 상태였다.
원세훈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통상의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전형적인 갑과 을의 관계로 대했다. 인권위원장을 무슨 업자 대하듯 하는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의 홀대를 오래 기억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좋을 리 없다. 그러나 아직도 그때 받았던 모멸감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그로부터 며칠 후, 행안부의 조직개편안이 도착했다. 인권위의 규모를 절반(49%)으로 줄이는 내용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김황식 당시 감사원장은 이듬해 3월 20일 국회 법사위에서 감사원이 인권위의 인원 감축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행안부가 2008년 7월 감사원에 보낸 의견서에는 “각 지역에 걸친 업무 수행과 신규 업무 증가를 고려할 때 인권위의 조직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담은 사실이 후일 드러났다.
직원 21% 축소
전면전이 불가피했다. 내부결속을 강화했다. 각종 시민단체의 반대 성명이 잇따랐다. 여러 차례 문서가 오가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이듬해 2월 12일 박선영 당시 자유선진당 대변인도 “인권위가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나 인권향상에 기여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력 축소는 공론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당의 입장을 발표했다. 한나라당에서는 유일하게 나경원 의원이 비슷한 취지로 인권위 축소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신문에 보도됐다.
행안부가 통보한 최종안은 정원을 30% 축소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원세훈 장관은 국가정보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월 19일, 후임자로 지명된 이달곤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그는 인권위 직원 30% 감축안을 원안대로 집행하겠다고 답했다. 박희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이회창 당시 자유선진당 대표를 어렵사리 만났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상황 설명으로 그쳤다. 이상득 의원과 최시중 당시 방송통신위원장에게 ‘매달리라’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절박한 심경은 이해가 되지만 일소에 부쳤다.
정정길 당시 대통령실장도 조정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가 부임한 시점에는 이미 인권위에 대한 청와대의 방침이 확고하게 결정돼 있었다. 힘들게 연결된 전화에 대고 그는 이달곤 장관과 둘이서 잘 이야기해보라는 식의 추상적인 덕담밖에 건네지 못했다. 주말에 이 장관을 만났다. 그도 속사정을 털어놓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 결정된 일이라는 말밖에는. 3월 20일, 행안부의 최종안이 통보됐다. 5본부, 22팀의 조직을 1관 2국 11과로 개편하고 정원 208명을 164명으로 축소하는 것이었다. 당초 폐지하기로 한 3개 지역사무소는 존치하는 것으로 물러섰다. 이 장관은 강행처리 의사를 통보했다. 그는 자신의 책임 아래 축소규모를 21%로 하향조정한 뒤 청와대의 강한 질책을 받았노라고 했다. 자신이 지방행정 전문가인 점이 간신히 양해사유가 됐다는 것이다. 은근히 대학의 선배 교수인 나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국제적 망신
나는 이 장관에게 바로 그 시기에 제네바에서 ICC(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의 연례총회가 예정돼 있으니 내가 귀국한 뒤로 일정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당초 나는 3월 22일 출국 예정이었다. 당시 부의장이던 내가 회의에 불참하면 나라의 망신스러운 일이 국제사회 의제로 부각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니퍼 린치 당시 의장과 부의장인 나 사이에 업무분장이 이뤄져 있어, 나는 집행이사회와 몇몇 회의의 사회를 보도록 일정이 잡혀 있었다. 차기 ICC 회장으로 내정되다시피 한 나에 대한 린치 의장의 예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장관은 3월 31일 대통령의 해외 출장이 예정돼 있어 그전에 이 일을 매듭지어야 한다며 강행의사를 꺾지 않았다. 부득이 출장을 취소했다. 3월 23일, 긴급 전원위원회를 소집해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법제처장에게 공문을 발송했다. 직제령의 절차상의 하자를 다투는 내용이었다. 국무총리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3월 26일, 차관회의에 안건이 상정됐다. 문경란 당시 인권위 상임위원이 참석했다. 마녀사냥의 분위기를 전해왔다. 서면으로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역시 답이 없었다. 외교부 장관과 행안부 장관 앞으로 유엔인권최고대표, ICC의장, APF의장의 서한이 속속 도착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47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유엔인권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인권단체연합회와 국가인권기구가 설립된 국가들이 합동성명을 발표했다. 어떻게 손써볼 겨를도 없이 이명박 정부는 ‘국제인권의 적’으로 낙인찍혀버렸다. 일부 호사가는 어쩌면 남북한이 그렇게 비슷하냐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모멸감에 낯이 화끈거렸다.
‘작은 정부’라는 거창한 구호와 명분과 달리 이명박 정부 들어 정원이 2%라도 감축된 기관은 하나도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인권위가 표적 제물이 된 것이다. 내가 정부와 ‘타협’해 축소에 동의하고 몇 사람이라도 더 구제하는 편이 옳지 않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내 판단은 달랐다. 여기서 ‘타협’이 무엇인가? 인권위의 잘못을 인정하고 탄압 처분을 수용하는 것이다.
인원감축의 사유로 내세운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조직 경영’은 핑계일 뿐이다. 독립성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였다. 절대로 꿇어앉을 일이 아니다. 촛불집회 의견서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타협’이 있겠는가? 인원감축 직제령이 통과될 경우를 대비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 신청을 준비했다. 법치국가에서 법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사무총장의 지휘 아래 사내 변호사들이 선례와 법리 검토 작업에 나섰다. 승산이 높지 않아도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충분하다. 적어도 국제사회에서 모범적인 사례(best practice)로 거론되는 우리나라 인권위의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최후까지 노력한 기록이 남을 것이다. 권한쟁의 심판은 인권위 위원장이 신청인, 그리고 대통령이 피신청인이 된다. 정치권과 공무원 사회에서는 “감히 대통령을 상대로 ‘맞짱’을 뜨다니”라는 정서가 팽배했다. 그래서 나를 용기 있는 투사로 찬양하는가 하면, 현실을 모르는 백면서생이 만용을 부린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반정부인사도, 정의의 투사도 아니다. 독립기관의 장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인식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나처럼 처신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권이 희망이다”
당초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진 3월 30일 오후 5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나는 출석, 발언을 신청했다. 인권위 역사상 위원장이 국무회의에 출석해 발언한 선례가 없었다. 대기실에서 많은 국무위원을 만났다. 모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 대신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가 회의를 주재했다. 대통령을 상대로 발언기록을 남기고 싶었는데 유감이었다. 한 총리는 지극히 기계적으로 안건을 처리했다. 나는 준비한 소견서를 읽으면서도 틈틈이 국무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모두 행여 나와 눈길이라도 마주칠까봐 저어하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절차를 끝내는 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발언에 대한 이달곤 장관의 반론에 이어, 그에 대한 지원발언이 있었다. 이때 이석연 당시 법제처장이 발언을 신청했다. 그는 강한 어조로 반대했다. “문제의 직제령은 법리적 하자도 있다. 무엇보다 대규모 인원감축은 타 기관과의 형평에도 어긋난다”고 했다. 무리한 감축에는 심한 후폭풍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소신발언에 당황한 총리는 서둘러 안건을 종결시켰다. 그리고 나에게 즉시 퇴장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이 처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인권위의 투쟁은 역사적인 기록이 될 것이라며 격려했다. 시민사회에서 법률가로서 활동하면서 나와는 많은 사안에서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던 그이기에 더욱 고마웠다. 얼마 전에 그에게서 들었다. 그 일로 인해 당시 정부 실세들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노라고. 그 실세들은 이미 영어의 몸이 되어 있다. 한 총리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처장이 국무회의에서 반대 발언한 사실을 인권위원장이 퍼뜨리지 않도록 단속해 달라고.
나는 이미 사직서를 써두고 있었다. 사무실에 돌아와 사무총장에게 뜻을 전했다. 그는 나의 결심을 존중했다. 대국민 사임의 변도 준비하고 있었다.
“저는 취임의 변에서 말씀드렸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되풀이하여 강조했듯 인권은 좌도 우도 아니고,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야말로 인류보편의 가치라는 믿음에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정권의 연장이나 교체와 무관하게 인권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국정 전반과 국민의 일상에 확산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열과 성을 쏟아왔습니다. 또한 국제사회에도 우리나라가 이룬 경제적 성과에 상응하는 인권선진국의 면모를 함께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노력은 일부 국민과 새 정부의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시한 의견 중에는 정부의 귀에 거슬리는 의견도, 당장 수용하기 힘든 정책 건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정부권력에 대한 견제와 미래를 향한 꿈의 제시야말로 국제적 기준에 따라 설립된 독립기구로서의 국가인권위원회의 고유한 역할일 것입니다. 업무의 ‘독립성’이야말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대통령께서 서명하신 국가인권위원회의 직제령은 그 절차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독립기관으로서의 국가인권위원회의 업무에 대한 본질적인 침해라고 판단되어 헌법재판소의 권위 있는 해석을 요청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최종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시행되어야 하는 개정 직제령을 집행하는 것은 독립기관의 장으로서의 저의 믿음과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오늘 저의 사임은 오로지 목숨과도 같은 인권수호기관의 독립성을 충분히 지키지 못한 수장으로서의 책임감에 기인한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든지 정치적 논쟁의 소재로 확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밤중에 집으로 상임위원들과 사무총장이 찾아왔다. “모양 좋게 떠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비겁한 일이다. 치욕을 무릅쓰고서라도 남아서 조직을 추슬러주어야 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정원의 21%를 줄이는 세부작업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말이 옳았다. 이미 지친 심신이다. 그러나 남아서 함께 치욕을 감내해야 한다. 행여나 마지막 반전의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국제사회에서 실추된 나라의 이미지를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인권은 희망이다. 애써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