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그룹회장(오른쪽) 77세 생일 및 회고록 ‘호암자전`’출판기념회에서 이 회장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축배를 들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최근 한국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영학자들은 현대의 정주영을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 1위로 선정했다. 그런가 하면 오피니언 리더와 전문경영인(CEO)을 대상으로 한국에 필요한 ‘21세기형 CEO상이 누구인가?’를 설문한 조사에선 삼성의 이병철이 1위로 뽑혔다. 이러한 조사 결과만 놓고 보더라도 이들이 우리 경제계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정주영은 숱한 역경을 긍정적 자세와 도전정신으로 극복해 지금의 현대그룹을 키워냈을 뿐 아니라 광복 이후 최빈국 수준이던 한국 경제를 일으킨 일등공신이다. 또 그런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명확한 비전과 불굴의 용기는 곧 한국 경제의 신화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불같은 열정 vs 간결하고 냉철함
정주영이 뚝심과 저력으로 현대를 키워나가는 동안, 다른 한편엔 그의 영원한 맞수 삼성의 이병철이 있었다. 변화와 위기에 대한 탁월한 판단과 대처 능력, 미래를 내다보는 예리한 혜안과 확고부동한 경영 능력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지지 않았던 이병철의 리더십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기업이 안고 있는 고민 해결과 해법에 여전히 유효하다. 빈틈없는 태도와 날카로운 시선, 경쟁관계를 즐겼던 그는 수많은 난국을 헤쳐나가야 하는 기업가의 이상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기업의 부침이 유난히 심했던 한국 경제계에서 반세기 넘도록 정상의 자리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전자기술 분야의 첨단산업에 나서 지금의 삼성전자 신화를 이룩해냈다.
이렇듯 같은 시기 경제계에 홀연히 등장한 두 사람은 상반된 경영 문법과 스타일로 한국 기업 성장사(史)의 쌍두마차를 이끌었다. 정주영이 한사코 ‘이기는 기업가’였다면 이병철은 ‘결코 지지 않는 기업가’였다. 자신들의 신념을 기업 경영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혈투마저 벼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두 사람은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숙명적 라이벌이기도 했다.
사람을 보았을 때 마음에 새겨지는 느낌, 곧 인상은 그 사람의 생애를 밝히는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가 관상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그 사람의 외모만으로도 곧잘 ‘저 사람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더욱이 이런 상론이 대부분 맞아떨어지는 것에 대해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말지, 놀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인상이란 그만큼 사람의 진면목을 밝혀주는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주영과 이병철은 이 대목에서부터 서로 판이했다. 기업가의 길을 평생 같이 걸었음에도 도무지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먼저 정주영의 인상을 보면, 우선 그의 이름과 함께 나타나는 이미지가 언제나 동일하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체격에 빗어 넘긴 듯 만 듯 짧은 머리, 희미한 눈썹, 약간 부은 것 같은 두툼한 눈꺼풀, 커다란 뿔테 안경이 일종의 소품이라면, 오른쪽 안면에 살짝 힘을 준 채 수줍게 웃는 특유의 미소는 그의 총체적인 이미지를 대변하는 트레이드마크다. 정주영의 이런 순박한 웃음은 상대를 편안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그가 이렇게 웃을 때면 그룹 회장의 이미지보다는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가 떠오른다.
정주영은 이런 순박한 외모에 걸맞은 수수한 옷을 즐겨 입었다. 아니 평소 옷차림엔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는 편이었다. 검소함이 몸에 밴 그는 트렌치코트 한 벌을 사도 보통 10년 넘게 입었다. 구두에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유난히 발이 커서 구두를 맞춰 신어야 했던 그는 가죽이 닳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신었다. 그가 남긴 사진첩을 보면 정주영은 대개 점퍼 차림을 하고 있다. 양복보다는 점퍼가 훨씬 더 편해 보일 정도다. 그래서인지 그의 옷차림과 인상은 언제나 조금 헐렁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반면에 이병철은 크지 않은 체격에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군살이 없고 윤곽이 갸름한 데다, 얼굴 곳곳엔 젊은 시절부터 주름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주름살은 결코 밉살스럽지 않을뿐더러, 아무에게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눈언저리에 있는 잔주름은 그의 지성과 품위를 드러내는 ‘황금 주름살’같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의 이목구비는 조금도 하자가 없었다. 영화배우처럼 조각 같은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뜯어봐도 좀처럼 흠잡을 데가 없는 그런 얼굴이라는 뜻이다.
우선 그의 눈매는 크거나 가늘지 않고, 늘 예리하고 깊숙한 시선을 담고 있다. 오뚝한 코는 갸름한 얼굴과 조화를 이뤄 사뭇 지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입은 얼굴 윤곽에 비해 다소 큰 편이지만 입술이 얇으면서도 가지런하다. 헤어스타일은 흰머리가 제법 희끗희끗 섞여 있긴 하지만 한 올도 흐트러짐이라곤 없이 말끔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그가 늘 단정한 사람이었다는 걸 말해준다.
옷차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언제나 정장 차림을 한 이병철의 단정함은 무엇보다 바지 길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알맞은 바지 길이는 구두 위를 다 덮지도, 발목이 보일 만큼 짧지도 않았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정장 차림에서 바지 길이는 매우 중요한 몫을 한다. 바지 길이에 따라 정장의 맵시 전체가 크게 달라져 보이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바지 주름을 항상 날이 선 일자 모양으로 유지하고, 품 또한 꼭 들어맞게 입었다. 매우 절제된 식단으로 소식을 한 결과 중년의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데다, 이같이 항상 단정한 옷차림으로 빈틈없고 깐깐한 인상을 풍겼다.
두 사람의 말씨 또한 그런 인상만큼이나 큰 차이점을 나타냈다. 이병철의 화법은 대단히 신중했다. 예컨대 돌다리를 두들겨본 뒤 건너가는 사람을 확인한 다음에 다시금 자신이 두들겨보고 나서야 비로소 건너가는 식이었다. 따라서 어눌하다고 할 만큼이나 말수가 적었으며, 충분히 숙고한 뒤에라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눌한 말씨와는 달리 상대의 말을 매우 정확하게 들을 줄 알았다. 화자의 발언을 분석해 요지를 정리하거나, 논점을 제시해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장단 회의를 주재할 때나 업무상 직원들과 대화를 나눌 적에도 단번에 좌중의 흐름을 이끌어가곤 했다. 최고의 웅변은 말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던 노자의 말처럼 이병철의 말씨는 이처럼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정주영은 돌다리를 건너가면서 비로소 생각하고 입을 여는 쪽이었다. 할 수 있다는 일말의 확신만 들면 그는 곧장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왜 돌다리를 건너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일단 건너가면서 확신이 어떻게 들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자연스레 말이 장황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성격 또한 극명하게 엇갈렸다. 정주영은 자신이 그린 청사진을 속에 담아두지 않고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또한 그 방향으로 직원들을 끝까지 이끌고 갈 정도로 열정과 배짱이 두둑했다. 반면 이병철은 매사에 신중하고 치밀했으며, 무엇보다 빈틈없이 엄격했다. 또 멈춰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명확히 구분하려 애썼고, 놀라울 만큼 감정 조절을 잘했다. 언뜻 섬세해 보이면서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담함이 공존했다.
요컨대 정주영과 이병철은 직선과 곡선, 단순과 복잡, 목적과 방법, 끈기와 재치, 우직함과 예민함, 저돌성과 신중성, 대범함과 섬세함, 행동 우선과 생각 우선, 경험 중시와 직관 중시로 대별해볼 수 있다. 또 이같이 크게 엇갈리는 두 인물의 성향은 경영철학과 기업문화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시끌벅적 vs 고독한 외톨이
두 사람은 성장 배경도 확연히 달랐다. 정주영은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 고향은 반드시 떠나야 할 곳이었다. 결국 그는 초등학교를 마친 뒤, 네 번의 가출을 시도한 끝에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인천 부둣가의 하역 일꾼, 고려대 신축 공사장의 막노동꾼, 풍전 엿공장 직공 등을 거친 뒤에야 왕십리에 자리한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고 2년여 뒤에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주인에게서 쌀가게를 물려받는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쌀가게를 접을 수밖에 없었고, 손에 쥔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밑천 삼아 지인과 함께 자동차 수리공장을 열었다.
8남매 중 장남이던 정주영은 이때부터 부모님과 동생들을 고향에서 불러올렸다. 식구가 늘자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의 비좁은 셋방에서는 더는 살 수 없었다. 돈암동에 20여 평 남짓한 집을 새로 얻었으나 20명의 대가족이 살기엔 돌아눕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정주영은 아침밥상에 김치 한 가지와 국 한 대접을 고수했다. 공장 직원들 또한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기에 절약하는 모습을 솔선해서 보여준 것이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공장 직원들의 식사를 돈암동 집에서 만들어 매일같이 신설동 공장까지 머리에 이어 날랐다. 돈암동 집은 언제나 장터처럼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와 가족들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우며 저마다 꿈을 키워나갔다.
이와 달리 이병철은 부유한 집안의 4남매 가운데 막내아들로 자랐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는 친구가 없는 외톨이로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더 나은 교육을 받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13세에 경남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16세에 서울 수송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했고 이듬해 아버지를 졸라 서울 중동중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공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나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그는 중동중학교를 마치기도 전인 20세 때 새로운 세계를 찾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에는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지독한 감기 때문에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2세에 학업을 중단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혼 풍습에 따라 19세에 결혼한 그에게는 당시 이미 처자가 있었다. 가족을 어떻게 건사할까 고심하던 끝에 그가 결심한 것이 사업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1만 원(지금 돈 약 12억 원)으론 턱없이 모자라 지인 둘과 합자해 3만 원 규모의 정미소를 창원에 열었다.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으로, 이병철은 정미소 사장으로 각기 세상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보리 잔디 vs 年17배 성장
8·15 광복 이후 정주영은 미군정으로부터 적산(敵産) 토지 일부를 불하받아, 자동차 수리공장을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현대자동차공업사에 이어 현대건설사를 세웠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져 모든 것을 잃고 부산 피난길에 오른다. 각지에서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전쟁 특수로 건설 물량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보다 미군 숙소와 군수물자 집하장 건설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려고 그랬는지 아우 정인영이 때마침 미군사령부 맥칼리스터 중위의 통역으로 배치되었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인영에게 건설업자를 찾아오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주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갔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주영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어느 분야인가?”
“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소.”
“그럼 미군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한 달 안에 만들 수 있겠는가?”
“물론 만들 수 있고 말고요.”
휴교 중인 학교 교실을 소독한 뒤 페인트칠을 하고, 바닥에 널빤지를 깔아 천막을 쳐서 숙소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정주영은 잠을 하루 3시간으로 줄여가며 눈코 뜰 새 없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결국 약속한 한 달 안에 미군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뚝딱 만들어냈다.
정주영의 뚝심에 감명 받은 미군 측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와 유엔(UN) 사절단이 참배할 부산 유엔군 묘지 보수 작업을 위해 그를 다시 불렀다. 한겨울이던 그때 미군은 유엔군 묘지 언덕을 푸른 잔디로 깔아달라고 주문했다.
참배일이 겨우 닷새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정주영은 고심했다.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긴 했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어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던 중 문득 어린 시절 고향에서 봤던 청보리밭이 떠올랐다.
정주영은 곧바로 트럭 30대를 동원해 부산 인근의 농촌으로 달려가 파랗게 싹을 틔운 청보리 포기들을 떠다 유엔군 묘지에 옮겨 심었다. 한겨울 황량하던 묘지 언덕이 청 보리가 싹트면서 푸른 잔디로 변해가자 미군 관계자들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감탄했다. 이들은 앞으로 미군의 건설 공사를 정주영의 현대건설에 맡기겠다고 약조하기도 했다. 한겨울의 청보리 잔디는 오직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병철은 창원 정미소를 정리한 뒤 대구에서 삼성상회와 함께 조선양조를 경영하다, 광복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종로구 종로 2가에 사무실을 얻어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한 그는 오징어와 한천(寒天) 따위를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는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로 상경한 지 3년여 만에 제법 자리를 잡아가던 이병철에게도 6·25전쟁은 피할 수없는 시련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대구로 피신한다. 대구에 도착한 이병철은 뜻밖의 얘기를 듣는다. 그동안 조선양조의 이익금이 3억 원(당시 1달러는 2원)가량 비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거액을 손에 쥔 이병철은 부산에서 옛 임직원들과 함께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새로이 설립하고 재기에 나선다. 그리고 1년 만에 무려 17배로 키워내는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이뤄낸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우선 서울에서 무역을 하던 경험을 살려 공급이 가장 달리는 생필품을 하나하나 조사했는데 달리지 않는 물자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전쟁과 함께 국내 물자가 잿더미가 되고 생산 능력이 마비된 데다 전시 인플레로 물가가 엄청나게 치솟기 시작하자 정부로서도 관·민수 할 것 없이 당장 수입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 당시 부산에서의 사업 경쟁이란 자금 동원 능력과 기동력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자금 동원력은 우리를 능가하는 상사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동력만큼은 삼성물산이 타사의 추종을 불허했었다고 자부한다. 경황없이 1년을 보내고 결산해 보니 3억 원의 밑천이 장부상으로나마 무려 17배 넘게 불어나 있었다.”
이쯤 되자 이병철은 생각이 깊어졌다. 무역업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그는 제조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1953년 제일제당에 이어 이듬해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두 회사는 단숨에 국내 기업 순위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전까지 작은 연못에 사는 송사리에 불과하던 그가 고래만한 경성방직의 김연수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벼룩의 교훈 vs 이발사의 장인정신
젊은 날 정주영이 쌀가게에 취직하기 전의 얘기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그는 친구 오인보에게 50전을 빌려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에서 정주영은 한동안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정박한 선박에서 무거운 짐을 등으로 지어 나르는 하역 일을 하며 함바(飯場·현장 합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함바에서는 들끓는 빈대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견디다 못한 몇몇이 빈대를 피해 테이블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는데, 이번에는 빈대가 테이블 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가 사람들을 물어뜯었다. 함바 노동자들은 머리를 짜내어 테이블의 네 다리 끝에 물을 담은 양재기를 하나씩 고여놓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편안한 잠은 겨우 이틀 만에 끝나고 말았다. 테이블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려다 양재기 물에 몽땅 빠져 죽었어야 할 빈대들이 다시금 극성을 부렸다. 사람들은 빈대들이 도대체 테이블 위에서 자는 노동자를 무슨 수로 괴롭힌 것인지 불을 켜고 지켜보다 아연실색했다. 테이블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게 불가능해진 빈대들이 일제히 벽을 타고 천장으로 까맣게 몰려가 천장에서 테이블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몸으로 ‘낙하’했던 것이다. 정주영은 생전에 이를 일컬어 ‘빈대의 교훈’이라고 표현했다.
“하물며 보잘것없는 빈대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머리를 쓰고, 죽을힘을 다해 원하는 바를 끝내 얻어내지 않는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빈대한테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자. 무슨 일이든 중도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걸 말이다.”
1950년 2월 이병철은 천우사의 전택보, 대한전선의 설경동 등 재계 주요 인사 15명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일본 도쿄로 향했다. 방문 목적은 일본 경제계 시찰로 일본 점령군 사령부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으나, 실은 한국과의 교역을 통해 경제 부흥을 도모하려는 일본 경제계 인사들의 제안으로 이뤄진 방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때까지만 해도 패전국 일본의 경제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 중심부에 이르는 길에는 판잣집이 즐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의 중무기를 생산하던 가와사키중공업은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공장 건물의 골격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이병철은 가로등조차 켜지지 않은 도쿄의 아카사카 골목길을 걷다 한 이발소 안으로 들어섰다. 가위질을 하던 중년의 주인에게 이병철은 별다른 생각 없이 말을 건넸다.
“이발 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제가 3대쨉니다. 가업이 된 지 60년쯤 되나봅니다. 자식 놈도 이어줬으면 합니다.”
이발소 안에서 흔히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였지만 이병철은 예사로 듣지 않았다. 패전으로 좌절해 있을 법도 하련만, 그렇듯 담담하게 외길을 걷는 이발사의 투철한 장인정신에 적잖이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정주영과 이병철은 타계하기 전에 각기 자서전을 펴낸다. 자신이 구술하고 아무개 작가와 아무개 언론인이 기술하는 방식으로 정주영은 1997년에 ‘이 땅에 태어나서’를, 이병철은 1986년에 ‘호암자전’을 세상에 남겼다. 이들이 굳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고자 했던 건, 자신의 기록이 널리 알려져 뜻있게 읽히길 바랐기 때문이다.
한데 두 사람의 자서전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차례씩 교훈이 담긴 짤막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앞서 얘기한 ‘빈대의 교훈’과 ‘이발사의 장인정신’이 그것이다. 그리고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교훈을 통해 가장 중요한 방점, 곧 성공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밝히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정주영은 어린 시절부터 체험을 통해 깨달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다는 ‘농경사고적 얼리버드(early bird)’를 신념으로 삼았다. 또 어린 시절부터 외톨이로 늘 고독하게 자라 내적 성장을 지향한 이병철은 성공에 대한 해답은 평생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 심사숙고’를 견지했다.
정벌 경영 vs 황제 경영
오늘날 SAMSUNG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계열사가 삼성전자라고 한다면, HYUNDAI를 이룩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계열사는 현대건설이라고 볼 수 있다. 1973년 지구촌의 경제는 중동의 오일쇼크로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정주영의 현대그룹에도 암운이 드리워졌다. 외채 상환 결제마저 매일 쫓기는 가운데 한시 바삐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타개책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와중에 현대건설은 1975년 바레인의 수리 조선소를 착공하며 중동 진출의 서막을 연다. 이듬해엔 몇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사상 최대 규모의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한다. 9억3000만 달러의 공사 금액은 당시 환율로 4600억 원이었다. 이는 같은 해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고난도 작업인 데다 무경험으로 미지의 공사를 감행하면서 치러야 하는 난제가 수두룩했다. 무엇보다 미국 건설사 브라운·루트로부터 장비를 빌려 쓰는 처지여서 감내해야 할 서러움이 컸다.
그러자 정주영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자신만의 뚝심, 곧 1만2000km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대양 수송 계획을 내놓는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에 필요한 초대형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만들어 가져오자는 기상천외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자켓이라는 철 구조물 하나만도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 무게 550t으로 웬만한 10층 빌딩의 크기였다. 이런 자켓이 모두 89개였다. 거기에다 자켓 기둥의 굵기가 직경 2m였으며, 기둥을 지탱하는 파일 하나가 비슷한 직경 크기에 길이만 65m가 넘었다. 그걸 바지선에 싣고 세계 최대의 태풍권역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동남아 해상, 몬순의 인도양을 건너 걸프만까지 운반한다고 하자, 현대의 임직원은 물론 세계 유수의 건설사 역시 일제히 비웃었다.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지선을 출항시켰다. 편도 1회 항해에 35일이 소요되는 대양 수송 작전은 모두 19회에 걸쳐 중단 없이 실시되었다. 모두가 만류하던 정주영의 기상천외한 대양 수송 계획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그런 성공을 발판 삼아 이후에도 현대건설은 수많은 건설 공사를 수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1975년 중동 진출 이래 ’1979년까지 현대건설은 자그마치 51억64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기간 현대그룹의 총매출 이익 누계 가운데 무려 60%가 중동의 건설 공사에서 거둬들인 것이었다.
이병철이 삼성전자 설립을 결정한 것은 불과 반세기 전인 1960년대 초였다. 하지만 전자 산업을 준비하는 단계가 아직 구체화되기도 전에 그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한국비료를 세우는 데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른바 ‘한비 밀수사건’에 휘말려 사업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 그가 전자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본격적으로 나선 건 1968년이었다. 그해 삼성은 전자사업 부서를 구성하고 발전 가능성이 큰 산업으로 여겨 투자 결정을 내렸다. 오래전부터 전자 산업에 관심을 보여온 이병철이 마침내 결심을 굳힌 것이다.
문제는 기술력이었다. 당시 국내 기술로는 자체적인 산업 체계를 만들기 어려워 미국과 일본 등으로 눈을 돌려 합자 투자하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공동 투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한국의 불안한 정세도 문제 삼았다. 결국 삼성은 우여곡절 끝에 기술을 나누어 합자하기로 하고 삼성산요와 삼성NEC로 분리해 전자회사를 차렸다.
삼성전자가 출범하던 1969년 당시 국내 전자 산업의 연간 전체 수출액은 4200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중에서도 값싼 인건비를 노린 미국계 회사들의 조립 수출액이 전체 수출액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산업 기반이 취약한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전자 산업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자 기존 업체의 반발이 심했다.
당국은 삼성전자 설립을 놓고 업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설립 허가를 미루다 조건부 허가를 내줬다. 생산 제품 전량을 해외로 수출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삼성전자로선 후발 주자의 족쇄를 차고서 출발 선상에 선 셈이었다.
삼성전자의 시작은 이렇듯 어려웠다. 생산 시설 또한 취약하기만 했다. 허허벌판에 퀸셋 가건물 4동과 식당, 그리고 500여 평 남짓한 단층짜리 공장이 전부였다. 공장 주변은 황무지인 데다 비포장도로였다.
정주영(맨 왼쪽)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오른쪽) 삼성그룹 회장이 재계 모임에서 화합을 다지며 경제발전에 앞장서자고 다짐하고 있다.
1983년 2월 이병철의 ‘동경 선언’으로 처음 시작된 반도체 산업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도체는 그가 무려 8년여 동안이나 분석하고 들여다보는, 치밀한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삼성의 미래 성장 동력이었다. 이처럼 황무지에서 시작한 전자 산업과 반도체도, 주베일 산업항과 1만2000km의 대양 수송도 오로지 이들이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명령은 내가 한다’는 황제 경영과 ‘나를 따르라’는 정벌 경영 또한 이병철과 정주영이었기에 가능한 경영 문법이었다는 얘기다.
정치권력과 ‘마이 시크리트’
돈과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한다. 기업가는 정치권력을 너무 가까이해서도, 너무 멀리해 밉보여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구분(九分)은 모자라고 십분(十分)은 넘친다는 알쏭달쏭한 이웃사촌이랄 수 있다. 이병철은 이 알쏭달쏭한 이웃사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혜를 받기 위해서,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와 같은 갖가지 이유로 정치권력에 줄을 대지 못해 안달하는 다른 기업가들과 달리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병철의 직계가족인 아들, 딸, 사위 중에서 국회의원 한 명쯤은 나올 법도 하련만 전연 찾아볼 수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금과 조직, 탄탄한 지역 기반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언제든 정치를 할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사실 이병철은 일찍이 정치권력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다. 선친과의 인연으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고향 의령에서 출마를 권유받았다. 그러나 이병철은 이 공천을 정중히 사양했다. 정계에 뜻이 없었던 그는 이승만의 요청에 못 이겨 당에 이름을 올려두는 선에 그쳤다. 하지만 이 한 번의 실수로 그는 훗날 엄청난 곤욕을 치르게 된다. 자신은 물론 삼성그룹의 운명마저 바꿔놓은 것이다.
이른바 ‘은행 민영화’가 그것이었다. 이승만 정부 때 부실 은행이었던 한일·상업·조흥은행을 떠안다시피 인수한 것이 화근이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연이어 발생하자 정부는 국민의 기대심리에 부응하기 위한 부정축재자 척결 과정에서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병철은 억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시 그는 바람 앞에 선 등불이었다. 그가‘기업가는 정치와 직접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철벽의 금기’로 삼은 것도 이때부터다. 이 철벽의 금기가 굳어져가는 배경을 따라가다보면 그와 삼성이 왜 그토록 기술을 강조하게 되었는지 더욱 명료해진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벽의 금기를 맹세한 이상 이제 남은 길은 오로지 제힘으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다시 말해 끊임없이 기술 연마에 집중하는 길밖엔 없었다.
숲 속의 여우와 고슴도치
따라서 삼성은 기술의 가치에 일찍 눈뜰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첨단 기술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걸 본능처럼 육화해왔다. 그리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소단박(輕小短薄)의 첨단 기술로 무장코자 한 것이었다. 삼성전자의 탄생 또한 그 뿌리가 바로 여기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정주영은 정치권력에 대해 정벌의 칼을 빼들기도 했다. 불패의 정벌 경영자답게 그는 한때 정치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한 적이 있다. 촌놈은 그저 땅이 최고라는 농경사고로 현대를 누구도 넘어뜨릴 수 없는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왕국으로 키워냈음에도, 똑똑하다는 6남 정몽준을 한사코 국회로 진출시켰음에도 끝내 억울함이 가시지 않자, 마침내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그 자신이 대통령에 출마했다. “(전두환)5공화국 아래서 힘들지 않았던 기업이 없었겠지만,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1전 한 푼 건지지 못한 채 창원중공업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지워지지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DJ와 YS에 밀려 대권의 꿈을 이루진 못했으나, 정치권력에 대한 그의 이율배반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한국 경제사가 비로소 처음으로 열리기 시작한 1945년 8·15 광복을 전후로, 반세기에 걸친 오랜 일본 식민 지배 끝에 폐허와 공허만이 남은 경제계에 홀연히 등장해, 허상의 빵이 아닌 실질의 양식을 준 기업가 정주영과 이병철. 같은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은 서로 확연히 다른 자기만의 문법을 들고서 다투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정주영이 ‘용감한 자가 숲 속의 진정한 사냥꾼이다’라고 말하는 고슴도치와 같은 인물이었다면, 이병철은 ‘겁쟁이야말로 숲 속의 명승부사다’라고 말하는 여우와 같은 인물이었다. 정주영이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확신하고 나아가 자신의 작은 경험을 극대화해 큰 현실로 만들어나간 기업가였다면, 이병철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장단점을 예리하게 꿰뚫어볼 줄 알았다. 확실한 목표와 책임을 주면 지구촌에서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한국인의 역량을 간파한 것이 그의 용인술이었다. 그는 거기서 한발 나아가 그중에서도 정예만을 모아 조직화하고 시스템화해 기업이라는 창구를 통해 한국인의 숨은 역량을 폭발시킨 기업가였다.
두 사람의 삶은 일찍이 자신들이 스스로 지어 붙인 당호와 닮았다. 정주영이 ‘아산(峨山)’ 곧 높이 솟은 우람한 산의 생을 살았다면, 이병철은 ‘호암(湖巖)’ 곧 호숫가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서 있는 바위와도 같은 삶을 살았다. 또 이런 일련의 문법과 문화는 결과적으로 오늘날 건설, 중공업, 자동차 산업에 주력하는 현대와 금융, 서비스, 전자 산업에 주력하는 삼성이 각기 중후장대한 기업 풍경과 경소단박한 기업 풍경의 토대가 됐다.
경제 영토를 두고 서로 다투어 다른 방향으로 나간 덕인지 현대와 삼성이 사업을 두고 크게 부닥친 일은 별로 없었다. 자동차와 반도체 분야에서 한때 경쟁관계가 되기도 했으나 한쪽이 사업을 접으면서 마무리됐다. 한국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두 걸출한 경제 리더가 다른 경제 영토를 개척하고 글로벌 기업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